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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뛰어난 아이 프란츠]

[빈소년 합창단]

[초등학교 교사가 되다]

[젊은 방랑 음악가]

[슈베르티아데 친구들]

[베토벤과의 만남]

[가곡의 왕]

<라봉봉>

 

슈베르트

 

[뛰어난 아이 프란츠]

슈베르트는 1791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 빈 근처의 리히텐탈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가 훗날 '가곡의 왕' 이라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 입니다

 

슈베르트가 태어난 집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리히텐탈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었고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음악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덕분에 슈베르트도 어린시절 음악을 가까이 하며 자랐습니다

 

슈베르트는 8세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슈베르트는 큰 재능이 있었고

슈베르트의 아버지가 슈베르트를 더이상 가르칠수 없을 만큼

슈베르트가 바이올린을 잘해서

결국 슈베르트에게 음악교육을 시켰습니다

 

 

이에 슈베르트를 가르친

리히텐탈 마을 교회 합창대 대장

미하일 훌처 선생님은

슈베르트가 바이올린을 켜보자

슈베르트의 뛰어난 재능에 놀랐고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 , 피아노 , 노래 , 쉬운 작곡 등

기본적인 음악수업을 가르쳤습니다

나날히 슈베르트의 재능은 늘어갔고

결국 훌처 선생님은 슈베르트는 천재라며

지금까지 이렇게 훌륭한 제자를 맡은 적이 없다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슈베르트가 음악가보다는 학교 교사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빈소년 합창단]

슈베르트는 1808년 10월 1일

빈 시립 콘빅트(오늘날 빈소년합창단) 에 입학했는데

입학 시험당시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왔고

아이들은 무언가 어설퍼 보이고

파란색 헐렁한 옷을 입은 초라한 모습의 슈베르트를

비웃었지만 막상 음악시험을 보자

슈베르트의 노래가 뛰어났고 음악 이론에도 뛰어나

슈베르트 혼자서 합격했습니다

 

슈베르트는 그렇게 빈 시립 콘빅트에 입학해

합창 대원의 제복을 입게 됬습니다

 

오늘날 빈 소년 합창단 , 음악가 슈베르트와 하이든은 소년시절 빈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콘빅트에서는 음악 이외에 여러가지 과목들을 가르쳤는데

처음에 슈베르트는 여러 과목들에 열심히어서 우등생이 됬지만

얼마 후부터는 음악에 열중하느라 다른 성적들이 떨어져서

아예 학교공부 하는게 싫어졌습니다

 

슈베르트는 이 학교의 학생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서

제2 바이올린을 맡아 연주했는데

처음 연주한 곡은 그가 몹시 좋아하던 오스트리아 작곡가

모차르트의 교향곡이었고

재능을 인정받아 제 1바이올린으로 자리를 옮겼고

가끔씩 단원들의 지휘를 맡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만 열중하는 슈베르트를

고지식한 선생님들이나

슈베르트가 학교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슈베르트가 학창시절 내내

공책이나 종이란 종이를 악보로 사용하며

작곡 , 창작 활동을 하자

어느날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의 아버지>한 번만 더 작곡하거나

오선지 운운하면 이제 용돈은 없는 줄 알아라 !

 

하고 슈베르트에게 작곡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슈베르트의 친필 악보

 

이에 슈베르트는 학교 기숙사에서 남몰래 노트에다가

오선지를 그어 음표를 넣어가며 작곡을 했는데

그것을 본 그의 기숙사 친구 슈파운은

 

<슈파운>친구야 걱정하지마 내가 도와줄게

 

하고는 슈파운 자신도 역시 넉넉하지 못한 형편임에도

주머니를 털어 슈베르트에게 오선지를 기꺼히 사주며

슈베르트를 격려해주었습니다

 

소년시절의 슈베르트

 

학교의 식사는 양이 부족했고

집안 형편이 좋은 아이들은 집에서 보내온 용돈으로

부족한 음식을 사먹으며 버텼지만

가난한 학생이었던 슈베르트는

형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보낸다거나

하며 굶주리며 작곡활동을 했고

 

슈베르트가 쓴 악보를 본 살리에리 선생은

슈베르트의 뛰어난 재능에 놀라며 그를 가르쳤습니다

 

학교에서 음악에 몰두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

슈베르트였지만 음악에만 몰두해

수학 , 지리 등 다른 과목을 못한

그런 그의 모습을 아버지는 싫어했고

그나마 슈베르트를 격려해주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베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슬픔을 잊으려 더욱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개월이 지난

1813년 가을

슈베르트는 변성기(남자 아이가 15살쯤 되면

목소리가 중저음으로 변하는 현상) 에 접어들어

더이상 높은 소프라노를 노래할 수 없어

소년 합창단을 떠야 했고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다]

슈베르트가 집에 돌아오자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기다렸다는듯이 말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역시 너는 교사가 되야 한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징병제를 시행해서

15살 이상 남자는 반드시 군인이 되야했는데

사범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군대를 면제해주었고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는 것은 싫었지만

군인이 되는 것은 교사가 되는 것보다 더 싫었기 때문에

결국 1년동안 사범학교(학교 선생님이 되는 학교) 에 들어가 공부하고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성적이며 음악만 하고싶었던

슈베르트는 교사생활이 싫고 힘들었고

아버지 앞에만서면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1814년

아버지 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일하고 있던

슈베르트가 16살이 될때

그에게 첫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슈베르트가 활동하던 교회 성가대 소프라노

테레제 그로프였는데

 

교사생활을 하며 읽었던

이당시 독일인 괴테의 시 '마왕' 과

괴테의 시 '들장미' 를 읽고

그녀를 생각하며 작곡을 열심히 해서

이시기 1815년 한해에만

가곡 마왕 , 들장미등 114곡이나 되는 가곡을 남겼고

그가 남긴 가곡들 대부분은 테레제와의 사랑이야기라고 합니다

 

괴테

 

그러나 이 수많은 명곡들은 안타깝게도

슈베르트에게 단 한푼도 돈이 되어 돌아오지 못했고

테레제 그로프 역시 예쁘거나 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슈베르트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홀로 그녀를 위해 만든

음악만으로 사랑을 그려냈고

테레제 역시 슈베르트를 좋아하긴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임시교사 슈베르트의 가정생활이 불안하다 판단해

결혼을 반대했고

결국 테레제는 1820년 슈베르트가 22살때

빵만드는 부자와 결혼해

가난한 천재 음악가 슈베르트를 떠났고

슈베르트는 테레제와 이별후 실연의 상처로 평생을 헤메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고

또 돈이 없어 팔다 오래되 떨이로 파는 것들을 사먹다가

몸이 부어 젊은나이로 뚱뚱한 아저씨 몸매가 되었습니다

 

청년 슈베르트 (살찌기 전)

 

그나마 슈베르트의 위안이 되어 준 유일한 것은

사실상 음악이었습니다

초등교사시절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종합 무대 예술) '피델리오' 를 보고

큰 감동을 받고 베토벤을 존경했고

베토벤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 싶었지만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는 이후에도 아버지의 초등학교를 뜨려

음악학교 선생으로도 지원해봤지만

떨어졌고

 

이후에도 음악가의 길을 가고 싶었던 슈베르트는

결국 교사생활 그만 두었고

아버지는 반드시 교사생활을 하라했지만

작곡에 전념하고 싶던

슈베르트는 아버지와 인연도 끊고 집을 나와서

친구들 집에 옮겨다니며 방랑생활을 했습니다

 

[젊은 방랑 음악가]

슈베르트는 빈의 바텔로트 선생집에 하숙했고

이해에 슈베르트는 131곡 , 가곡은 111곡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슈베르트는 자신의 방랑생활이

시인 슈미트가 쓴 '방랑자' 시와 비슷하다 여기며

방랑자 시에 붙인 곡은 유명한 곡이 되었고

또 이해에 작곡한 '슈베르트의 자장가' 는

모차르트 자장가나 브람스 자장가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래식 자장가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송어 , 죽음과 소녀 등 여러 명곡을 썼지만

슈베르트가 쓴 많은 곡들은 거의 돈이 되지 않았고

평생동안 수많은 음악을 남겼지만 사실상 단 한편도

성공하지 못한 슈베르트였고 죽은 뒤에서야 이름이

크게 알려졌기에

슈베르트는 음악가로서는 생애동안 불우한 삶을 살았고

그나마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난한 작곡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슈베르트였습니다

 

송어

 

1817년

20세의 슈베르트는 친구의 소개로

당대의 유명 오페라가수 포글을 소개받았습니다

포글은 슈베르트 가곡이 너무 뛰어남을 발견하고

무대에서 슈베르트가 쓴 가곡을 부르며

무명 작곡가 슈베르트의 음악을 알렸습니다

슈베르트 역시 포글의 목소리에 맞춰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 '겨울 나그네' 라는

유명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포글은 오페라 무대 은퇴이후에도 계속 슈베르트 가곡을

부를 정도로 슈베르트 가곡을 사랑했습니다

 

[슈베르티아데 친구들]

점차 포글등 좋은 친구들로 인해 유명해진 슈베르트였고

이에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슈베르트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슈베르트 후원모임 '슈베르티아데 Schubertiade'

라는 예술 사교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슈베르트와 친구들

 

모임 구성원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졌지만

슈베르트 작품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슈베르트는 모차르트나 베토벤같이

귀족이나 왕의 후원을 받지는 않았지만

좋은 친구들이었던 슈베르티아데 모임 지원을 받았기에

가난해도 작곡에 전념이 가능했습니다

 

슈베르티아데 친구들은

무명작곡가 슈베르트가 만든 '마왕' 을 유명 악보 출판사에

찾아가 출판을 부탁했지만 거절되자

자신들의 돈을 모아 인쇄를 하고 그 악보를 팔아

슈베르트의 밀린 방세와 외상값 등을 해결해주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슈베르티아데 모임의 한 친구는

훗날 슈베르트에 대해 말하기를,,

 

<슈베르티아데 모임의 한 친구>우리는 모두 슈베르트가 

참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위대한 천재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구스타프 클림트

 

슈베르트는 한번 악상이 떠오르면 신들린 사람처럼

오선지를 채웠고

괴테 시 마왕을 읽고

가곡을 반주까지 모두 작곡하는데도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의 가곡 '들어라 종달새' 는

술집에서 친구가 읽고있던 시집을 빼앗다 읽다가

식당 메뉴판 뒤에 오선을 그리고

음표를 적어 만든 곡이었습니다

 

슈베르트는 평생 1천여 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서 600여 개의 가곡을 작곡했고

이로 인해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 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베토벤과의 만남]

평소 베토벤을 존경한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불과 2km 밖에서 살았지만

수줍음이 많아 베토벤을 쉽게 만나지 못했는데

결국 지인들의 권유로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죽기 7일 전

용기를 내서 베토벤이 병으로 누워있던

베토벤의 집에 찾아가서

베토벤에게 자신이 쓴 가곡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에 베토벤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베토벤>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하고 슈베르트를 격려해 주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너무 괴로워서 방을 뛰쳐나갔고

이것이 두 음악 위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7일 뒤 3월 26일 베토벤은 세상을 떠났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례식에 참여해

자청해서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곡의 왕]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 1828년 11월 19일

슈베르트는 장티푸스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슈베르트>묻혀지는건 싫어,,

홀로 있는 건 싫어,,

 

그 말을 남긴 뒤 얼마 후

슈베르트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친구들이 참석했고

그의 유언대로

베토벤 무덤 곁에 묻혔습니다

 

왼쪽 베토벤의 묘 , 중앙 모차르트 기념비 , 오른쪽 슈베르트의 묘

 

1829년 11월 30일 슈베르트 친구들은 그의 작품들로

연주회를 열어 연주회 이익금과 기부금으로

슈베르트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기념비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슈베르트의 기념비>음악은 이곳에 풍성한 보물과

그보다 훨씬 귀한 '희망' 을 묻었노라.

프란츠 슈베르트 , 이곳에 잠들다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 대표작들은

그의 사후부터 친근성과 아름다운 멜로디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됬고

피아노 5중주인 송어 ,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겨울나그네,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

자장가 등이 있습니다

 

베토벤에 의해 가곡이 만들어 졌지만

뭔가 부족해서 다음세대에 가곡을 유행하게 하고

가곡을 발전 시킬 작곡가가 필요했는데

결국 슈베르트대부터

음악에 가사를 붙인 '가곡' 이 유럽에 성행하게 됬고

오늘날 우리가 듣는 가사가 있는 음악, 가요들 역시

슈베르트가 창시한 예술가곡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모차르트 - 베토벤 - 슈베르트 로 이어지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천재음악가 3명중 마지막 인물이었으며

이에 사람들은 프란트 슈베르트 ,

그를 '가곡의 왕' 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슈베르트 기념 우표 -오스트리아 정부

 

슈베르트 동상 -비엔나공원

 

<라봉봉>모차르트 - 베토벤 - 슈베르트는

3대 음악가로

어린이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모차르트 , 베토벤은 그나마 어느정도 결혼도 하거나

부유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는데

 

슈베르트는 평생 결혼도 못하고,,

모차르트, 베토벤이 개척한 길로 인해

전업 작곡가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또한 모차르트 , 베토벤라는 거인들의 그림자에 가려

생전에 쉽게 인정받지 못했던 인물이라

너무나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할 수 있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천재 음악가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그의 음악들은 역시 익숙히 들어본 멜로디 등이

있는 클래식 음악이 되었다 할 수 있고

그의 음악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느낌이 들며

위인들의 삶을 읽을때 느끼는

그 어떤 '초인(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상당히 아름답고 또 슬픈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음악가 슈베르트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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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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