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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자로 태어난 아이]

[참스승 유의태]

[내의원에 들어가다]

[임진왜란 선조를 모신 충신]

[백성을 위한 의학책]

[동의보감 , 한국의 보배로운 거울]

[백성을 사랑한 의원 허준]

<라봉봉>

 

구암 허준

 

[서자로 태어난 아이]

허준은 1539년 3월 5일(추정) 에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요천부사를 지낸 허론의 서자(첩의 자식) 으로 태어났습니다

가양동에 있는 거북바위를 뜻하는 '구암 龜巖 ' 은

구암 허준 그의 호가 되었습니다

 

가양동의 구암 허준 동상 , 출처 : 양천허씨대종회

 

허준이 서당에서 글을 배울 무렵

서당 아이들은 허준을 서자라며 괴롭히거나 따돌림을 했고

허준은 이해가 가지 않아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허준>어머니 !

서자로 태어난 것이 잘못입니까 ?

 

<허준의 어머니 김씨>서자라면

입신양명(출세) 를 할 수가 없단다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허준은 어머니의 말씀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허준이 20세가 될 무렵

허준은 꿈을 펼치고 싶었고

서자신분이기에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기에

허준은 당시 중인(양반과 양민 사이의 신분 ,

서얼[서자] 계층도 포함되며

주로 역관[통역사] 이나 의관[의사] 일을 함) 들이

주로 일하던 기술직인 의관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허준의 다짐 명언>

나라를 다스리는 어진 재상이 되지 못할 바에는

사람과 병을 다스리는 명의가 되겠다

 

허준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당대

경상도 산청의 이름높은 전설의 의원

'유의태' 를 찾아갔습니다

 

[참스승 유의태]

유의태 의원의 집에는

밤 늦은시간에도 환자가 붐비고 있었고

유의태는 환자 한명한명을 정성껏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허준은 그런 유의태의 모습에 감동했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유의태는 의젓한 허준의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허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의태>환자를 돌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의술(의학 기술) 보다 앞서야 한다 !

 

허준은 몇년동안 스승 유의태의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 너머로 틈틈히 의술 익혔고

낮에는 일을하고 밤에는 의학 책들을 읽으며

의학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유의태 역시 그런 허준의 모습을 보고

결국 허준에게 환자를 맡겼습니다

 

허준은 그동안 배운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환자들의 병을 잘 고쳐냈고

이 무렵 허준은 결혼을 했습니다

 

결국 유의태는 뛰어난 의술 전수해준 허준에게

내의원을 뽑는 의과시험 보라 추천했습니다

 

내의원은 임금과 왕실의 병을 고치고 치료하는

조선 최고의 의료 기관으로

당시 의원들은 내의원 의원되는걸

소망으로 여겼습니다

 

이듬해(다음해) 허준은

내의원 시험에 1등으로 장원급제했습니다

혹은 서울의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을 치료해서

유희춘 부인의 병을 고쳐 유희춘의 천거(추천)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내의원에 들어가다]

내의원에 들어간 허준은 그곳에서도

의학책을 부지런히 읽으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궁궐 안에서 최고 수준의 의학 학식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조선 국왕이었던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허준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허준에게 왕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맡겼고

허준은 스승이자 어의(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의원) 양예수와

함께 선조의 병을 치료해냈고

매우 뛰어난 의술로 열심히 활동하며

왕실의 크고 작은 병들을 치료해내자

선조의 사랑과 신임을 얻었습니다

 

또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을 살려내자

선조는 허준에게 정 3품의 당상관이라는

높은 벼슬을 제수해줬고

이에 언론기관인 삼사 (사헌부, 사간원 , 홍문관) 에서 들고 일어나는 등

많은 신하들이 반발했습니다

 

<신하들>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정 3품)의 

가자(품계를 올려주는 일)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

 

서얼(서자) 출신의 허준을 당상관에 제수한 다는 것을

말도 안됩니다 !!!!!

 

그러나 선조는

 

<선조>(허준 및 의관들은 그만큼)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

 

하고 삼사의 말을 듣지 않았고

또 당대 허준만큼 뛰어난 의사가 없었기에

허준은 그대로 당상관 직을 받게 되었습니다

 

허준은 병치료만 잘한게 아니라

어려운 의학서를 알기쉽게 풀이하고

자신의 경험을 보충해 의학 서적들을 펴냈고

또 나라에 퍼져있는 전염병들을 연구해서

그 치료법 알아낸기도 했기에

실제 그의 주된 분야는

역병의 예방 및 치료였습니다

 

[임진왜란 선조를 모신 충신]

그러나 당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는 '임진왜란' 을 일으켰고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부산을 점령하고

수도였던 한양(서울) 까지 밀려올라왔습니다

 

결국 선조 임금도 북쪽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됬고

허준은 핑계들을 대며 도망친 다른 신하들과 달리

자진해서 무거운 약과 의학책들을 들고

선조를 따라가 모셨습니다

당시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한산도 대첩) ,

지상에서는 권율(행주대첩) , 김시민(진주대첩) , 의병들의

활약 , 명의 지원 등으로 일본군은 다시 조선 땅에서 물러갔고

다시 한양의 조정에 돌아온 선조는 임진왜란때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모신 신하들을

공신에 임명했고

허준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고

의관으로서 유례가 없는 종 1품 숭록대부가 되었습니다

 

[백성을 위한 의학책]

1596년 임진왜란이 끝난줄 알았던 선조는

허준과 의관들에게 공동으로

의학을 집대성하는 '동의보감' 을 편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선조>요즘 조선이나 중국의 의학책들은 모두 변변치 않고 

보잘 것이 없는 초록 抄錄 (요약기록) 들이므로 

그대는 여러 가지 의학책을 모아서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몸조리, 병을 다스림)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몸과 마음을 갈고닦음) 하는 방법을 먼저 쓰고 

약과 침, 뜸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처방이 번잡하므로 

되도록 그 요긴한 것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이에 허준은 어의 양예수 등 뛰어난 의관들과 함께

'동의보감' 집필을 시작했고

얼마후 어의이자 허준의 스승이었던 양예수가 사망해

허준이 어의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이 다시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략하자

허준은 잠시 동의보감 편찬을 중지했고

임진왜란(+정유재란) 이 드디어 완전히 끝나자

선조는 허준에게

당분간은 동의보감보다는 전후 복구를 위해

백성들을 위한 간단한 응급예방서적을 편찬하라 지시했고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들어 선조 34년인 1601년

백성들을 위해 한글로 간단하게 요약해서 쓴

응급조치용 의학서 '언해구급방' 을 써냈습니다

 

언해구급방 필사본

 

또 결국 다시 1601년부터

동의보감 편찬을 재개했는데

안타깝게도 1608년

허준을 믿어주고 아껴주었던 선조 임금이 사망했고

허준은 선조의 죽음에 크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동의보감 , 한국의 보배로운 거울]

그러나 당대의 관례에 따라 어의는

임금이 죽으면 형식적으로 귀양을 잠시 가게 되었고

어의였던 허준은 선조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게되었고

그곳에서도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돌보며

혼자서 동의보감을 편찬에 몰두했습니다

 

동의보감을 저술하는 허준 , 박득순-허준과 동의보감 (1978년)

 

1609년 다시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광해군의 어의가 되어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고

드디어 1610년 (광해군 2년) 에

선조의 어명(왕의 명령) 을 받아

동의보감을 집필한 지 14년만에

25권으로 정리한 동의보감을 완성해 광해군에게 바쳤고

광해군 역시 돌아가신 아버지 선조 임금을 생각하며

허준의 손을 잡고 눈물흘렸습니다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조선 의학과 당시 허준이 참고 할 수 있었던

수많은 세계적 , 동양 의학 지식의 결정체로서

당시 허준이 볼 수 있었던 세계와 동양 의학계의

백과사전 격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동의보감은 출간되자마자 크게 알려졌고

동의보감 내용은 17세기의 의학서임에도 벌써부터

'국민의 보건의료에 대한 책무가 국가에 있다' 는 개념이나

쉽게 구할수 있는 약물 재료를 바탕으로

병이 생기기전부터 치료 한다는 '양생(예방 의학)' ,

'질병이 아닌 사람 중심의 의학'

의 개념을

포함한 뛰어나고 선진적인 허준의 사상이 담겨있는 책이었고

당대

동의보감은 동쪽의 의학(한국 의학) 의 보배로운 거울 이라는

뜻으로서 근대 서양 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

한국과 중국 , 일본의 의원, 백성들에게 널리 읽혀졌고

옛날 서적임에도

오늘날에도 현대의학에서도 검증된 내용도 들어있다고 합니다

 

<동의보감 서문>이 책은 옛날이나 지금의 의학책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였고

여러 사람의 이론을 절충하여 

기본을 찾아서 근원을 해명하였으며

강령을 세우고 요점을 따서 

자세하면서도 간결하며 간결하면서도 빠진 것이 없다 ,,,

구태여 옛날 고전이나 근래의 여러 학설을 

광범히 참고하지 않아도 

병증 분류에 따라 (동의보감의) 처방을 찾으면 

여러 가지를 다 알 수 있다

그리고 증상에 따라서 약을 쓰면 꼭 들어맞는다

진실로 의사들에게는 보배로운 거울이며 

백성을 구원하는 좋은 법이다

 

[백성을 사랑한 의원 허준]

평생을 의학 기술보다 환자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지닌 조선의 전설적인 명의 허준 !

임진왜란을 겪으며 동의보감 편찬 참가자들이 모두 흩어졌을때

혼자서 끝까지 동의보감 편찬을 완수해

세계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긴 허준은

한의학계의 큰 업적을 남기고

1615년 10월 9일 향년 76세로 사망하셨고

그의 사후 허준은 서자이자 중인으로서는 유례가 없이

정 1품 양평부원군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고

그는 심의 心醫 (환자의 마음을 안정시켜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

또는 그러한 방법을 쓰는 의원 , 환자를 생각하는 의원)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허준의 명언>지금의 의사는 

오직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마음은 고칠 줄 모르니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 쫓는 격이며

그 근원은 캐지 않고 말류(번접스럽고 보잘것 없는 것)만 손질하는 것이다

 

허준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이자 한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은 드라마 허준 , 출처 : MBC 창사기념 특별기획 드라마 허준(許浚) (1999~2000)

 

<라봉봉>한국의 위인 허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정말로 뛰어난 지식을 지닌 뛰어난 의사이자

의술보다 더 백성들을 생각한 진정한 참의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쓴 동의보감은 중국, 일본인들도 극찬하며

'천하의 보물' 이라 극찬받았고 서구 근대 의학이 들어오기전까지

동양의 권위있는 의학서적이 되었으며

오늘날 전통 한방 한의학에서도의 핵심 서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기술만 뛰어난 명의가 아닌

환자와 사람을 생각하고 의학 발전에 기여한

진정한 의사 구암 허준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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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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