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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불우한 어린시절]

[훌륭한 선생님들]

[모차르트와의 만남]

[빈으로 가다]

[귀가 멀다]

[영웅을 추억하며]

[테플리츠 사건]

[운명을 이겨내다]

[슈베르트와의 만남]

[음악의 성인]

<라봉봉>

 

베토벤

 

[불우한 어린시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

독일 라인강가에 있는 작은 도시 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루트비히(베토벤)는 오늘도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잠이깼습니다

 

<루트비히의 아버지>루트비히 !

어서 일어나서 피아노 연습을 하거라 !!!!!

 

루트비히의 아버지는

술냄새를 풍기며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

루트비히에게 호통을 치거나

루트비히를 때렸고

루트비히는 그럴때마다

얼른 피아노에 가서 건반을 두드렸습니다

 

루트비히가 피아노를 치자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럴때마다 루트비히의 아버지는 흡족해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매일 매일 반복됬고

루트비히의 할아버지는 궁정 악단의 악장이었고

루트비히의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실패한 음악가인 음악가 집안이었는데

루트비히의 아버지는

루트비히가 당대 유럽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같이 되게 하려고

어릴적부터 친구들과도 못놀게하고 집안에서만

피아노 연습을 혹독하게 연습시켰습니다

 

당대의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는 어릴적부터

타고난 재능으로 '신동(신의 아이)' 이라고 불리며

어린 나이부터 '연주여행' 을 다니며 유럽 방방곡곡을 누비며

연주공연을 하며 많은 돈을 벌며 인정받았고

루트비히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가 음악에

큰 재능이 있자 모차르트처럼 어릴적부터 음악을 교육시켜

연주여행을 시키며 공연비로 한몫 챙길 심산이었기에

술을 퍼마시고는 매일같이

루트비히에게 혹독한 피아노 연습을 시킨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시절을 어둡게 보낸 소년 루트비히가

바로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음악의 성인' , '악성' 이라 불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입니다

 

[훌륭한 선생님들]

베토벤은 5살때부터 아버지 친구이자

궁정악단에서 일하는 파이퍼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파이퍼 선생님은 아버지같이 호통치거나

때리지 않았기에

베토벤은 파이퍼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으로 지천 베토벤에게

다시 음악의 즐거움을 선사해 준 인물이었지만

파이퍼 선생님은 얼마후 떠났고

이후에도 네페 선생님 등

궁정악단의 좋은 선생님들에게

베토벤은 여러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히 네페 선생님은 베토벤의 스승이자 은인으로서

베토벤에게 바흐나 모차르트의 작품도 소개해주었고

이러한 네페 선생님의 교육은 베토벤 인생 평생의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 베토벤은 궁중악단에서 교육받다가

점차 천재소년으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왕의 눈에도 띄어

13살때부터

궁중 제 2오르간 연주자에 임명되

급료를 받고 일을 했고

급료를 받으면 어머니에게 갖다주었고

덕분에 가난한 베토벤 집안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1783년 13살의 베토벤 ,  화가 미상

 

[모차르트와의 만남]

1787년 봄

17살의 베토벤에게는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본 영주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음악공부를 받으러

모차르트가 살고있는

음악의 도시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갈수 있게 되었고

베토벤은 기뻣지만 병든 어머니가 걱정됬습니다

모차르트에게 받는 배움과 어머니의 병에 갈등하다

어머니의 권유로 결국 빈으로 향하는 마차에 타게 되었고

모차르트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반갑게 맞아주며

피아노로 아무 곡이나 쳐보라 했고

베토벤은 대음악가 앞에서 긴장하다가

바흐의 곡을 간신히 쳐냈는데

모차르트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있었고

이에 베토벤이 다시 즉흥곡(떠오르는 대로 하는 자유로운 곡) 을 치자

모차르트의 표정이 심각해졌고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를 끝내자

모차르트는 같이 베토벤의 연주를 본 자신의 친구들에게

 

<모차르트>여러분 잘 지켜봐 주십시오 베토벤의 장래를 ,

이 아이는 이제 곧 세상을 놀라게 할 음악가가 될 것입니다 !

 

베토벤의 음악을 지인들에게 권하는 모차르트

 

라고 말했습니다

두 위대한 천재 음악가의 만남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베토벤은 빈에 온지 1달만에

편지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인 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겨우 집에 돌아온 베토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쇠약해진 어머니는 얼마후 세상을 떠나셨고

베토벤은 한동한 아무것도 못하다가

맏형으로서 남겨진 두 남동생들을 생각하며 소년 가장이 되어

다시 음악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빈으로 가다]

1792년

22세의 베토벤은 두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당대의 대음악가 모차르트가 35세의 나이에

요절(일찍 죽음) 했다는 소식이었고

하나는 당대의 대음악가 하이든이 본에 왔다는 소식입니다

 

하이든

 

베토벤은 음악 대선배였던

하이든 선생님을 만나

다시 한번 재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이든 선생님은 베토벤을 인정하며

자신을 따라 빈에 와서 가르침을 받겠냐며 권유했고

결국 이 일을 계기로 베토벤은 하이든 선생님을 따라

22세의 나이로 다시 빈으로 유학을 가게되었습니다

 

수많은 천재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 도시 빈 !

베토벤은 이곳에서 하이든 외에도 베르거, 살리엘리 등

여러 유명 음악가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무렵 아버지 세상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베토벤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학대에 대한 괴로운 기억과

음악 공부에 열중하느라 아버지가 있는 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빈에서 베토벤은 뛰어난 음악실력으로

점차 귀족들에게 소문이 나서

당대 유행하던 '음악시합(피아노 배틀)' 을 하며 유명해졌습니다

 

점차 베토벤은 음악가로 유명해지며

스승이었던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에서 나와

'베토벤의 음악' 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귀가 멀다]

그러던 어느날 베토벤은

작곡에 열중하다 귀가 이상해짐을 느꼈습니다

 

어쩐지부터 귀가 잘 안들리기 시작했고

점점 심해져서 큰소리도 가까히에서 들어야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음악가로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무섭고 치명적인 일입니다

베토벤은 이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생각했고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남겼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 나를 지켜준 것은 오직 나의 예술이었다

아 , 난 내 안에 느끼는 것을 모두 꺼내놓을 때까지는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난 이 비참한 삶을 견디어 왔다 ,,,

 

유서를 쓰고난 베토벤은 유서를 쓰다가

다시 살아온 삶과 예술을 생각하며

다시 살기로 결정했고

그는 예술과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힘으로

마음속의 악마를 이겨냈습니다

이후부터 베토벤은 더이상 주변에 귓병도 숨기지 않았고

더욱 떳떳하고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1803년의 베토벤 , 크리스티안 호른먼

 

[영웅을 추억하며]

이전에 '프랑스 혁명' 이라는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시민들이 일어나는 유럽의 대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의 국왕, 귀족들도

자신들도 프랑스 혁명같이

죽임을 당할까봐 프랑스 혁명을 몹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외젠 들라크루아'

 

평소 아버지의 학대에서 불우하고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낸 베토벤은

계급의식 , 비자유와 불평등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의식이 있었고

베토벤은 자신을 후원해주는 사람들이 귀족이었음에도

귀족들을 싫어했기에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며 이때 나타난

프랑스의 '나폴레옹' 이 프랑스 혁명의 3대 가치인

'자유 , 평등 , 박애' 를 구현할 인물로 여기며

나폴레옹을 흠모(공경)하며

자신이 음악으로 자유와 평등 ,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면

나폴레옹은 정치로 자유와 평등 ,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라 믿었고

이에 나폴레옹을 위해 '3번 교향곡' 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

 

1804년 교향곡을 완성한 베토벤은

표지에다가 '보나파르트' 라는 이름을 적었는데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의 이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베토벤은 깜짝 놀라며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리고는

 

<베토벤>그 녀석도 결국 속물이었군

그 녀석도 역시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폭군이 되겠지 !

 

하고는

나폴레옹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인물인줄 알았는데

결국 귀족들과 똑같은 인물이었다 여기며

얼마후 마음을 진정시켰고 다시 교향곡은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 라는 부제목을 달고

출판 되었는데

오늘날 '영웅(에로이카)' 이라 불리는 교향곡입니다

곡이 2악장부터는 '장송곡' 이라 불리는데

점차 곡이 긴장감있게 되며 영웅의 시련을 다루다가

다시 3악장부터 활기를 되찾고

4악장부터 비극은 소멸되는 것으로

처음엔 나폴레옹을 위해 쓰여진 곡이었지만

점차 베토벤 자신의 일생이 드러난 곡이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교향곡 제3번 베토벤 자필 악보의 거칠게 긁혀 지워진 나폴레옹의 이름

 

이후에도 베토벤은 귓병에 계속 시달렸고

귀는 음악회에서도 맨앞자리에 앉아야 겨우 음악을

들을 수준까지 나빠졌습니다

 

[테플리츠 사건]

1805년

요양(몸을 돌봄)하러 헝가리의 시골에서 지낸 베토벤은

귀족의 딸 테레제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

사랑에 빠졌지만

귓병과 신분의 차이 등에 괴로워하며 테레제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시기 베토벤은 운명 교향곡과 전원 교향곡을 썼습니다

 

이후 42세의 베토벤은 귓병에 좋은 온천이 있다해서

왕족과 귀족들이 놀러온다는

테플리츠 온천을 찾았는데

이곳에서 당대 대시인 괴테를 만났습니다

괴테는 훌륭한 인물이었고

베토벤과 괴테는 서로 이전부터 유명인이었기에

서로를 알고 있었고

두 인물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 대해 높게 평가했습니다

 

괴테

 

당시 베토벤과 괴테는 음악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빈의 황후가 시녀들을 거느리며 오자

괴테는 모자를 벗고 머리숙여 인사했고

베토벤은 옆에서 모자를 쓴채 고개를 뻣뻣히 들고

괴테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황후가 지나가자 베토벤은 괴테에게,,

 

<베토벤>저 들은 한세대(혹은 30년) 만 가도 

잊혀질 자들입니다

그런데 선생과 나는 영원히(혹은 300년이 넘어서도)

회자될 사람들인데 

어째서 저자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입니까 !

 

이에 괴테는 베토벤이 무례한 사람이라 여기며

 

<괴테>당신과 나는 안 맞나 보군요 ...

 

하고는 서로의 의견이 엇갈려

결국은 헤어지게 됬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양미를 중시했던 문학가 괴테 ,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과 불평등을 싫어했던 베토벤은

이런 성향의 차이로 결국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테플리츠 사건 , 칼 롤링 작품

 

<베토벤의 명언>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후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대음악가 베토벤은 빈에서 다시 사람들의 큰 환영을 받았고

이곳에서 고집쟁이였던 그가 어렵게

수정과 수정을 거듭하다 써낸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운명을 이겨내다]

그러나 베토벤의 귀는 점점 더 나빠져갔고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까지가

사람들이랑 이야기 할때는 종이쪽지에 글을 써서 이야기하는

'필담' 을 해야했고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다시 작곡에 몰두했고

베토벤은 유서를 쓰고나서 다시 살아야 겠다 생각한 이후부터는

그런 운명과 싸워내며 계속해서 음악가의 길을 가려했고

들리지 않는 귀로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로 쓴

그의 최후의 교향곡인

교향곡 9번 라단조 '합창' 의 교향악단 지휘를 맡기로 했습니다

교향곡 9번의 가사는 유명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 에서 가져왔습니다

 

1824년 5월 7일 빈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연주회가 열렸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을 보기위해

몰려들어 연주회장은 꽉차서 밖에서는 연주회장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많았고

연주가 시작되자 베토벤은 무대 위에서

청중들의 등을 돌리고 앉아

악단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교향곡 제9번 중에서,,>

포옹하라! 만민들이여 ! 

온 세상에게 이 입맞춤을 주리

형제들이여 ! 

푸른 하늘 위에는 사랑하는 주가 꼭 계시리

땅에 엎드려 비나니 만물들이여 

조물주를 믿는가? 

푸른 하늘 위에서 주를 찾으라

많은 별 위에 그는 꼭 계실 것이다

 

악장이 끝날때마다 폭풍같은 박수가 터졌고

모든 악장이 끝나기 전인데도 이례적으로

청중들의 박수가 울려퍼졌습니다

 

청중들에 뒤돌아 앉았기에 귀가 들리지 않은

베토벤은 그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며 뜨거운 박수를 쳐서

어떤 이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법적으로 황제부부 입장때에도

기립박수(일어서서 박수)는 3번으로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례적으로 사람들이 베토벤을 향해

5번의 기립박수를 하자 놀라는 사람도 있었고

이때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어가

베토벤에게 다가와서 베토벤의 등을 돌려주자

그제서야 베토벤은 웃는 얼굴로 일어나 감격에 젖었습니다

그는 끝내 청력을 상실한 '운명' 을 이겨낸 것입니다

 

[슈베르트와의 만남]

제 9번 교향곡을 발표한 이후부터 베토벤의 건강은 나빠졌고

점차 야위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병을 왔고

그를 신처럼 존경하고 있었던 슈베르트가 찾아오기도 했는데

슈베르트는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어서

함부로 그를 찾지 못하다가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용기를 내서 겨우 문병을 온 것이었습니다

 

슈베르트

 

슈베르트의 악보를 본 베토벤은 슈베르트에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토벤>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슈베르트는 이 음악의 거장 앞에서

부끄러워  한마디도 못했고

베토벤의 손에 얼굴을 대고 울다가

야위어진 베토벤의 모습에

견디다 못해 베토벤의 방을 뛰쳐나갔습니다

 

[음악의 성인]

슈베르트가 문병온 뒤 일주일 후

결국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29일 오후 3시에 장례식이 거행되자

2만명의 시민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베토벤을 운구할때 여러 음악가가 선발되어 참여했는데

이중 슈베르트도 있었고 슈베르트는 이날 너무 슬퍼

하루종일 말도 못할 정도로 울었다고 합니다

베토벤을 사랑한 위대한 음악가이자

'가곡의 왕' 이라 불리는 슈베르트 역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에 있던 베토벤의 음악을 계승해

낭만주의 , 가곡음악 시대를 열었으며

베토벤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왼쪽 베토벤의 묘 , 중앙 모차르트 기념비 , 오른쪽 슈베르트의 묘

 

청력을 잃은 고통속에서도

자신의 운명과 끊임없이 싸워 이겨낸

위대한 대음악가 베토벤이었고

그는 '음악의 성인' , '악성' 이라 불리게 되었고

모차르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 로

고단한 삶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운명과 싸운

베토벤은 '하늘로 올라간 천재' 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음악을 향한 그의 불굴의 의지와 신념 !

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명언>왜 나는 작곡하는가 ? 

내가 마음 속에 지닌 것은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작곡하는 것이다. 

음악은 사람의 정신으로부터 

불꽃을 뿜어 올리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 본 뮌스터 광장에 있는 베토벤 동상

 

베토벤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 '루드비히 B. , 데즈카 오사무'

 

베토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카핑 베토벤(2007)'

 

<라봉봉>그의 사랑 이야기도 있고

유명한 '월광 소나타' 나 '엘리제를 위하여(혹은 테레제를 위하여)'

의 창작 배경에는 그의 사랑이 관련되있으나

여자관계가 복잡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베토벤이었고,,

특히 엘리제를 위하여는 1990년대 한국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니나니나니고릴라다' 의 원곡으로 당시 자동차나 아파트 초인종으로 애용되

그의 음악은 우리 생활 곳곳에도 있는 익숙한 클래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모차르트가 밝고 순수한 느낌을 , 슈베르트가 밝고 어두운 느낌을 준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그의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비슷하게

어두운 느낌을 주나 그의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지 등과 맞물려

어두운 느낌속에는 거룩한 희망같은게 있는 느낌이고

음악의 성인 , 악성이라는 그의 별명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의 음악은 힘과 거친 야성이 있다 이야기 되고있고

실제 그런 삶을 살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노력끝에

자수성가한 인물이며

항상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비인간성 , 계급주의 , 불평등 , 비자유 등을 미워한

참음악인이라 할 수 있고

이런 그의 평소의 사상과 생활태도로 인해

그의 아름답고 멋진 전설적인 음악들이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도 멀쩡하면서 대마초나 약들을 하고 음악을 만드는 오늘날 음악가들은

청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고통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진정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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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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