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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말썽쟁이 조지]

[마티어스 신부님]

[프로 야구 입단]

[덩치 큰 아기]

[메이저 리그 입단]

[홈런왕 베이브]

[밤비노의 저주]

[뉴욕 양키스의 전설]

[어린이 사랑]

[예고 홈런]

[영원한 야구의 전설]

<라봉봉>

 

베이브 루스

 

[말썽쟁이 조지]

베이브 루스는

1895년 2월 6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독일계 이민자 가정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00년대 미국 볼티모어에서

루스의 부모님은 허름한 선술집을 운영하며

부둣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술을 팔고 있었고

루스는 훗날 전설적인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 가 되는데

어릴적 이름은 '조지 허먼 루스' 였습니다

 

조지는 7살의 어린 나이부터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다니며

씹는 담배를 피거나

남의집 창문을 깨는 등 말썽을 피웠고

조지는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습니다

 

<조지의 부모님>조지 ! 어떻게 말썽만부리니

 

사실 조지의 부모님도 거친 뱃사람과 부둣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매일같이 장사를 해서 조지를 돌볼 시간이 없었고

이런 거친 환경에서 자란 조지가 자연히 영향을 받은 것도 있습니다

 

조지는 7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또래보다 덩치가 훨씬 컷고

동네 골목대장이었습니다

 

조지가 계속 큰 동치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동네에서 말썽을 피우자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지의 장래를 걱정하며

상의 끝에 조지를 '세인트 메리 학교(성 마리아 직업학교)' 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세인트 메리 학교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며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를 시키며 기술들도 가르치며

사회에 나가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고

마티어스 신부(머사이어스 보틀리어 신부)님이라는

훌륭한 신부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마티어스 신부님]

결국 조지는 1902년 6월 13일

부모님 손에 잡혀

마티어스 신부님이 계신

세인트 메리 학교로 보내졌습니다

 

마티어스 신부님은 체격이 큰 조지가

운동을 하면 좋겠다 싶아서

즐거운 공놀이인 야구를 소개시켜 주었고

얼마후 곧 조지가 야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파악했습니다

 

<베이브 루스 야구 명언>야구는 나에게 있어 세계 최고의 게임이었다

Baseball was, is and always will be to me the best game in the world

 

조지는 매일같이 넓은 학교 운동장에서 마티어스 신부님과

야구연습을 했고

점점 온순해졌습니다

마티어스 신부님은 조지에게 야구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침착하게 가르쳐 주었고 이런 모습들에

조지는 야구가 더욱 즐거워졌습니다

 

<훗날 베이브 루스>나는 일생동안

마티어스 선생님같은 훌륭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조지는 야구를 통해 사회성 , 분별력 등을 배웠고

나쁜 성격들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또 학교에서 조지는 옷만드는 재단 기술도 배웠습니다

 

[프로 야구 입단]

처음엔 조지는 학교 야구부에서

왼손잡이임에도 포수를 했는데

팀원들이 지고 있는것을 비웃다가

이에 얼떨결에 투수를 했는데

매우 공을 잘던졌습니다

학교 내에서도 조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1914년 조지가 19살이 되자

마티어스 신부님의 소개로 조지는

인터내셔널리그(오늘날 마이너리그) 의

볼티모어 오리올즈 관계자와 만나게 됬고

조지가 멋진 폼으로 공을 던지자

구단관계자는 조지의 뛰어난 재능에 놀랐습니다

 

처음엔 학교에서 배운 기술로 재단사가 될려 했던 조지였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마티어스 신부님의 격려로

야구선수가 되기로 했고

관계자가 1년에 600달러를 주면 어떻겠냐 하자

조지는 좋아하는 일이었던 야구를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머리를 배트로 얻어맞은 듯이 놀랐습니다

 

결국 조지는 12년동안 정들었던 마티어스 신부님 , 친구들과

이별 인사를 하고 세인트 메리 학교를 떠났고

볼티모어 오리올즈 구단에 도착했습니다

 

[덩치 큰 아기]

오리올즈 선수들은 새로 들어온 선수 조지의

185cm나 되는 큰 체격을 보고 놀랐는데

얼굴만은 아기같이 순수해 보이고

철도 없어서 그를 장난식으로

'베이브(영어로 아기)' 라고 불러주게 됬고

조지 역시 그별명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체격이 컸던 베이브 루스

 

그렇게 '조지 허먼 루스' 그의 이름은

'베이브 루스' 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처음 해보는 구단 생활들이 하나하나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서자

어린애 같던 베이브 루스는 한없이 진지해졌고

매우 열심히였습니다

 

투수 베이브는 왼팔로 위력적이게 공을 던졌고

상대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타석에서는 홈런도쳤고

얼마후에는 선발투수도 됬습니다

얼마후부터 베이브 루스의 뛰어난 실력이 널리 알려지고

여러 야구팀에서 그를 탐냈습니다

 

[메이저 리그 입단]

그렇게 베이브 루스가 속한 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즈는 거침없이 리그에서 승리를 가져갔지만

재정적 압박으로 팀의 주력 선수들을 팔아 치울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베이브 루스 역시

1914년 7월 동경하던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베이브 루스의 급여도 어느새 2천 500달러가 되었고

너무 기뼈 마티어스 신부님을 만나러 가자

언제나 그랬듯이 마티어스 신부님은 루스를 칭찬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메이저 리그팀인

보스턴 레드삭스 팀원들은 촌티를 벗지 못한

애송이 같아 보이는 베이브 루스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았고

그럴수록 베이브 루스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전자리에는 리그 정상급 선발투수진들이 있었기에

베이브 루스에게는 좀처럼 출전 기회가 나지 않았교

결구 벤치만을 지키다

마이너리그인 인터내셔널리그의

'프로비던스 그레이스' 로 내려보내졌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마이너리그에 뛰는 것이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쩔수 없다 생각하며

프로비던스에서 열심히 뛰었고

프로비던스를 우승시켰습니다

 

그러자 다시 레드삭스 구단에서는

베이브 루스를 인정하며 돌아오게 했고

나날히 베이브 루스의 연봉은 올라갔습니다

베이브 루스의 뛰어난 실력에

결국 1915년 월드시리즈에서

레드삭스는 우승했고

레드삭스 팬들의 베이브 루스에 대한 기대는

점점 현실이 됬습니다

베이브루스 승승장구했고

성공한 와중에서도 옛날을 생각하며

자신을 응원해주는 마티어스 신부님과

세이트 메리학교에 급여의 일부를 보냈습니다

또 자신을 응원해주는 어린이 팬들을 보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였지만

항상 어린이들을 위해 더 좋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한

베이브였습니다

 

그러나 베이브 루스는 옛날 성격이 남아있어

워싱턴 세네터스와 시합때

베이브 루스가 던진 공에 심판이 계속해서

볼을 선언하자 항의하다가

심판이 받아들이지 않자

화가 매우난 베이브루스가 심판을 때려 눕히는 등

사고를 쳤고 결국 퇴장을 당했는데

이후 자책하며 다시는 폭력을 쓰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다시 베이브는 열심히 노력하며

레드삭스의 우승을 이끌었고

투수로서 월드시리즈 29이닝 동안

연속으로 무실점(상대 팀에게 1점도 안줌) 하는

대기록을 세우자

상대 팀은 망연자실했고

이 기록은 훗날에 가서야 겨우 깨졌습니다

 

[홈런왕 베이브]

그러다 점차 타자로도 홈런을 자주 친

베이브 루스의 공격력을 알아본

레드삭스 구단은 베이브에게 타격 연습을 권했고

베이브 역시 2년 연속 홈런왕이 됬는데

당시 야구공은 오늘날 야구공보다 더 무거웠고

홈런을 치는것 자체가 쉽지가 않았는데

베이브가 계속 홈런행진을 하자

사람들에겐 그것이 거의마술같이 여겨졌습니다

 

점차 베이브는 투수보다 타자로 나서는 일이 많아졌고

거대한 거구로 다른 선수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홈런들을 쳐냈습니다

그는 프로 야구의 '홈런 시대' 를 열었고

관중들은 야구 선수들의 홈런에 열광했습니다

 

타격하는 베이브 루스

 

[밤비노의 저주]

그러다 1920년 1월 4일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 크게 놀랐습니다

재정적 압박을 받고있던 해리 프레지 구단주는

사업에 실패해 돈문제로 곤란을 겪다가

한창 잘나가던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12만 5천달러를 받고 팔아넘겼고

베이브 역시 레드삭스가 좋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뉴욕 양키스로

연봉 2만달러에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뉴욕양키스로 이적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자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은 분노했습니다

 

<레드삭스 팬들>우리의 스타를 팔다니 !!!!

 

베이브의 이적 이후부터 보스턴 레드삭스는

관중수가 줄고 망해버렸고

이후에도 레드삭스 성적 안좋아져서

오랫 동안 우승을 못했는데

베이브를 뉴욕 양키스에 팔아생긴

밤비노의 저주라 불렸습니다

밤비노는 이탈리아 어로 '어린애' 즉 베이브를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말로

베이브루스의 또다른 애칭입니다

베이브가 떠난 후 레드삭스는 86년간 우승을 못했고

2004년에야 겨우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서

86년만에 밤비노의 저주가 겨우 깨지게 되었습니다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은 베이브 루스 , 밤비노의 저주

 

[뉴욕 양키스의 전설]

한편 뉴욕 양키스에 간 베이브는

타자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는 어느새 미국 야구의 슈퍼스타이자

미국인들의 꿈 (아메리칸 드림) 이 되었고

큰 돈을 벌자 수입을 모두 탕진하고

매일같이 술에 빠져 놀러다니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졌고

어느새 늙으신 마티어스 신부님이 다시 그를 찾아오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야구에 열중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감사하는 마음에 마티어스 신부님에게

당시 고급 승용차 캐딜락을 선물해드렸습니다

 

<오늘날 메이저 리그 야구 명언>

홈런왕(=베이브 루스) 은 캐딜락을 몰고, 

안타왕은 쉐비(포드)를 운전한다

(The home run hitter drives a Cadillac, 

and the single hitter drives a Chevy or Ford)

 

(야구의 꽃은 홈런이라는 말)

 

[어린이 사랑]

베이브 루스는 뉴욕 양키스에서 엄청나게 많은 홈런 쳤고

1920년 54개의 홈런을친 그의 홈런은

2위인 조지 시슬러가 19개를 친것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뉴욕 양키스팬들은 베이브가 타석에 들어설때마다 열광했고

베이브 루스는 여러 슬럼프(운동 경기 따위에서,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길게 계속되는 일) 도 겪었지만 수많은 팬들과

자신을 크게 존경하고 있는 어린이, 소년 소녀들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며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미국 야구의 영웅이 되었고

베이브 루스는 특히나 어린이만큼은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였지만

선수 생활 내내에도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수많은 병원과 고아원들을 찾아다니며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했고 이런 그의 모습은

미국 메이저 리그의 전통이 됬습니다

 

1924년 11월 , 어린이들과 이야기 하는 베이브 루스

 

[예고 홈런]

어느날은 베이브 루스가 시즌이 끝나고 휴식하고 있었는데

그가 머물던 호텔에 갑작스러운 전화가 걸려왔고

11살의 조니 실베스터라는 소년의 부모님의 전화였습니다

 

<조니의 부모님>베이브 루스씨 ,,

저의 아들이 베이브 루스씨의 팬인데

베이브 루스씨를 보고 싶다고 합니다,,

 

조니는 허리를 다쳐 누워 지냈는데

의사 선생님도 조니의 가망이 없다 했고

이에 베이브 루스는 직접 조니를 보기 위해

흔쾌히 조니가 있는 병원에 찾았습니다

조니는 베이브 루스가 찾아오자 매우 기뻐했고

베이브 루스에게 말했습니다

 

<조니>아저씨 부탁이 있어요 !

저를 위해 내일 홈런을 쳐주실 수 있나요 ?

 

<베이브 루스>그럼 ! 약속하겠다

 

1926년 조니 실베스터를 병문안 중인 베이브 루스

 

베이브 루스는 쳐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라운드에 서자

베이브 루스는 저 멀리 담장을 가르쳤습니다

 

예고 홈런을 알리는 베이브 루스

 

<베이브 루스>저 곳에 치겠다

 

이후 베이브루스는 정말로 홈런을 쳐내 조니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후 조니는 기뻐하다가 병세가 급격히 회복되서

기적적으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조니를 위해 친 베이브 루스의 예고 홈런볼

 

[일본 방문]

이후에도 베이브 루스는 계속해서 홈런을 쳤고

그의 명성에 일본에서도

베이브 루스의 홈런을 보고싶어 베이브 루스를 초청하자

베이브 루스는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과 올스타팀을 꾸며

1934년 11월 2일 일본에 갔고

시원한 홈런포를 날렸고

일본 팬들도 루스의 홈런에 열광했습니다

 

일본 어린이팬들과 함께한 베이브 루스

 

[영원한 야구의 전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베이브 루스는 나이도 들고 쇠약해져 야구하는게 버거웠지만

그를 위해 경기장을 찾은 팬들을 위해 열심히 뛰다

결국 은퇴를 요청했고

1935년 6월 2일 22년에 걸친 선수생활을 끝내겠다 발표했습니다

이후 베이브는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뇌에 종기가 생겨 몸에 이상이 왔고

그가 입원한 병원에는 수많은 미국 소년 , 어린이들의

편지가 날라왔습니다

어느덧 자신이 문병을 갔던 소년 조니도

훌륭한 청년 신사가 되어 베이브 루스의 문병을 왔고

베이브 루스도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후 미국인들은 베이브 루스를 기리기 위해

4월 27일을 '베이브 루스의 날' 로 지정했고

4월 27일 베이브 루스는 뉴욕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고

오랫만에 그라운드에 나타나 그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거구의 전설적인 홈런왕은 눈물흘리며 옛날을 추억하며

연설했습니다

 

<1947년 4월 27일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베이브 루스의 고별사>정말 감사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여러분 들으시기에 제 목소리가 영 좋지 않지요

뭐 저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니랍니다

우리네들의 야구경기는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되지요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말이에요

그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야구경기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고 , 

또 이렇게 선수가 되어 팀들을 대표해서 뛰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관람하러 경기장을 찾기도 하지요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진정한 운동경기란 

'야구' 가 아닐까 합니다

 

,,,

 

베이브 루스 타계 2개월 전 양키 스타디움 개장 25주년 초청행사때 찍힌 사진 , 퓰리처 상 수상작

 

1년후인 1948년 8월 다시 목이 아파 후두암으로 병석에 누웠고

갈수록 쇠약해지다가

8월 16일 밤 8시 53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7만명이 되는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몰려왔고

이중의 절반이 어린이였습니다

 

평생동안 714개의 홈런을 친

베이브 루스는 미국인들의 꿈이었고

야구계와 메이저리그의 영원한 전설입니다

 

<베이브 루스의 명언>배트를 단단히 잡을수록 공을 잘 맞힐 수 있으며 멀리 날아가게 합니다

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세게 휘둘렀습니다

전 세게 치거나 크게 놓쳤습니다

전 가능한 한 크게 사는 걸 좋아합니다

 

베이브 루스 동상

 

명예의 전당 베이브 루스

 

<라봉봉>많은 위인들의 어린시절은 부유한 집안에서 순탄한 어린시절을 보낸 위인도 있고

베이브 루스같은 불우한 환경속에서 지낸 위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성실히 노력하고 재능에 힘쓰며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는 여러 드라마틱한 상황들을 만들어내기도하고

오랫동안 인류의 도전정신 , 열정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분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멋진 홈런들을 날리며 미국인들에 용기를 준

야구의 전설 베이브 루스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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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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