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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명필 태어나다]

[떡 장수 어머니]

[어둠속에서 쓴 글씨]

[도산서원 현판을 쓰다]

[동양의 명필]

[나라를 대표하는 글자]

<라봉봉>

 

한석봉 (석봉 한호 , 출처 : 작화 미상 석봉 박물관 소장)

 

[명필 태어나다]

한석봉은 1543년(중종 38년)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렁찼고

점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점쟁이>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중국의 오랜 수도 , =서울을 비유한 말)의 종이값이 높아지리라 !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것이다

 

한석봉의 원래 이름은 한호였고

석봉은 그의 호(별명) 이지만 어감이 좋아

한석봉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석봉이는 어렸을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습니다

 

[떡 장수 어머니]

한석봉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집이 가난했기에

석봉의 어머니는 떡장사를 해서 살림을 꾸려나갔습니다

 

석봉이는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성공하겠다 다짐했고

열심히 글공부와 글쓰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석봉이는 중국의 명필(글씨를 잘 쓰는 사람) 이었던

'왕희지' 같은 명필이 되겠다 다짐했고

글쓰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석봉이는 가난해서 종이와 먹을 사기 벅찼지만

어머니가 떡을 판 돈으로 종이와 먹을 샀고

종이가 부족할때면

땅바닥에 글자를 쓰거나

먹을 갈아 인근 계곡의

바위에다가 글씨를 연습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어려운 형편에도

종이와 먹을 사는 돈을 아까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석봉이는 동네의 명필소년으로 유명해졌지만

점차 자만심(우쭐함)에 사로잡혀

글공부를 게을리했고

석봉이의 어머니는 처음으로 석봉이를 호되게 야단쳤습니다

결국 석봉이는 다시 글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다짐했습니다

 

[어둠속에서 쓴 글씨]

이후 석봉이의 어머니는

석봉이 글공부를 시키려 떡을 판 돈으로

석봉이를 절로 10년동안 보내 글씨 공부를 시켰습니다

 

<석봉이의 어머니>항상 글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10년후에 보자꾸나

 

절에 들어간 석봉이는 열심히 공부 했지만

어머니를 그리워했습니다

 

3년째되던해

주지스님은 석봉의 글씨에 감탄했고

이에 석봉이는 몰래

밤중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석봉이의 어머니는 의연하게 석봉에게

호롱불 앞에서 마주앉아

말했습니다

 

<석봉의 어머니>10년을 공부하라 했것만

3년만에 돌아오다니

글씨공부에 자신이 있나보구나

 

<한석봉>네 어머니 !

 

<석봉의 어머니>나는 너가 절에서 공부하는 동안

계속해서 떡을 썰어 팔았다

그렇다면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써서

누가 더 잘했는지 확인해보자꾸나

 

석봉 역시 글자에 자신이 있어

어머니의 시험을 받아들였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호롱불을 끄는것이 아니겠습니까 ?

 

<석봉의 어머니>너가 글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어두운 밤중에도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석봉과 어머니는 어두운 방안에서

글씨 쓰기와 떡을 썰었고

조용한 밤중의 방안에는

붓소리와 서걱서걱 떡써는 소리가 났습니다

 

석봉이가 한참 글쓰기를 끝내고

어머니도 떡을 다썰자

다시 호롱불을 켜보니

어머니의 떡은 가지런히 썰어져 있었지만

석봉의 글씨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어둠속에서 떡을 썬 어머니와 글씨를 쓴 석봉

 

이에 석봉은 어머니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고

석봉은 다시 절에 올라가 10년 공부를 마쳤습니다

 

[도산서원 현판을 쓰다]

이후 석봉은 진사시에 합격해서

나라 문서의 글씨를 깨끗히 정리하는

'사자관' 직책을 맡았고

석봉의 글씨는 뛰어난 명필로 유명해져

특히 시와 서예를 좋아했던 조선 선조 임금은

석봉을 크게 아꼈습니다

 

이무렵 한석봉은 아들도 낳고 석봉은 자신이

석봉산 아래에 살아서

석봉을 자신의 호로 정했습니다

 

선조 임금은 도산 서원에 사액(임금이 서원에 현판 글자를 내리는 일) 을 내렸는데

1575년 32세의 젊은 한석봉에게

조선 성리학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의 현판 글씨를 쓰게했고

선조임금은 젊은 선비 한석봉이

대학자 이황 선생의 현판을 쓰는것에 부담을 느껴

 

'천하의 명필이라도 

도산서원 현판이란 사실을 알면 붓이 떨려 현판을 망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해서

한석봉에게 종이에 어떤 글자를 쓰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불러주는 데로만 쓰도록 하게 했습니다

 

<선조>그대는 다음과 같이 따라 적으시오

원 院

서 書

산 山

 

한석봉은 침착하게 원 , 서 , 산 글자를 적었고

이에 선조가

 

<선조>이제 마지막 글자를 적으시오

도 陶 !

 

석봉은 그제서야 자신이 쓰는 글자가

도산서원의 현판 글자였음을 알고

더욱 침착하게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대신 이로 인해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글자가 

오른쪽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듯 보이다고 합니다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현판

 

[동양의 명필]

한석봉의 글자는 중국 명나라에도 명필로 널리 알려졌는데

선조는 조선에 방문한 중국관리들 앞에

한석봉의 글씨를 자주 자랑했으며

 

명나라에 사신을 따라 몇차례 다녀오기도 했는데

명나라에도 명필로 이름이 크게 알려져

명나라 고위 관료들은 너도나도 한석봉의 글씨를

받으려  몰려들었습니다

 

<명나라 학자 왕세정>석봉의 글씨는 마치 성내는 고래, 

떨어지는 돌, 달리는 폭포 같구나

 

한석봉의 글씨

 

한석봉의 글씨 , 출처 : 한석봉증유여장서첩

 

하루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시를 써보라 했고

이에 조선 관료들은 엄두가 나지 않다가

어떤 신하의 추천으로

한석봉이 나서

병풍 위에 글을 썼는데

시가 뛰어나고 글자가 뛰어나 그 광경이 장관이었고

주지번은 감탄하며 손에 쥐고있던 부채를 부러뜨렸습니다

 

<주지번>조선에 명필이 났구나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 제독 역시 한석봉의 친필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동양의 명필' 로 이야기 될 정도로

글자를 너무 잘쓴 한석봉이었고

선조 임금 역시 석봉을 너무 아껴

41세의 한석봉에게 벽돌 만드는 '와서별제' 벼슬에 앉히고

늘 가까히 두어 나라 중요 문서를 작성하게 했고

석봉의 글자를 보고 감탄하며

 

<선조>하늘과 땅과 그대의 글씨가 조화를 이루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홍길동전을 집필한 한석봉의 절친한 친구 허균 역시

 

<허균>안평의 글씨는 아홉가지 색을 가진 봉황의 새끼같아 

하늘의 구름 같은 품격을 지녔고 

석봉의 글씨는 천년된 여우같아 조화의 자취를 지녔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글씨에 대한

극찬은 끊이지 않았고

그는 신필 神筆 (아주 뛰어나게 잘 쓴 글씨 ,

또는 신령스럽고 기묘한 필적) 이라 불렸습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글자]

선조 임금은 한석봉의 글자를 나라를 대표하는 글자로 여겨서

그의 글자를 '국서체(나라를 대표하는 글자)' 로 했고

한석봉에게

글씨 교재로 쓰기 위한

천자문을 집필하라 했고

석봉은 '석봉천자문' 을 집필해

그의 글자로 쓰여진 천자문은 동네 서당에 퍼졌고

반듯하게 잘 쓰여진 그의 글자는

아이들의 좋은 한자 학습교재가 되었습니다

 

석봉 천자문

 

뛰어난 명필로 여러 글자를 남겨 글씨체의 모범이 된 한석봉은

이 공으로 경기도 가평군수(사또)에 임명됬지만

뛰어나 글자실력과 달리 행정에는 약해

여러 비판을 받아 결국 강원도 통천 현감으로 좌천됬지만

여기서도 정치를 잘 못해서

결국 1604년 파직당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는

이후 조선시대 대화가 김홍도 역시 그림을 너무 잘그려

그 공으로 사또가 되었지만

역시 그림 실력과 정치 행정은 다른 분야여서

사또일은 여간 잘 하지 못했고

이런 점에서는 한석봉과 닮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파직 이후 1605년 한석봉은

63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그의 글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글자로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라봉봉>한석봉의 글자체는 한국에서 가장 표준적이고 대중적인

한자체라 할 수 있으며

한국인들에게는 어릴적 한석봉 어머니의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쓰라' 는 이야기는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맹모삼천지교(맹자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3번 이사를 간 맹자의 어머니)'로

유명한 맹자의 어머니가 생각나지만

한편으로는 매정한 모습도 보여진다 생각되고

대신 한석봉은 자신을 위해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뜻을 알고

열심히 공부해 세상에 명필로 이름알리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났던 그의 글은 보물이 되었으며

한국의 자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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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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