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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

[신궁이라 불리는 소년]

[이지란과의 만남]

[서까래를 진 꿈]

[고려의 신하가 되다]

[요동 정벌]

[황산대첩]

[위화도 회군]

[선지교의 피]

[조선을 건국하다]

[함흥차사]

[이성계 일화들]

<라봉봉>

 

[신궁이라 불리는 소년]

원나라의 침략으로 혼란해진

고려 말기는 고려 국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는

'부마국' 으로 겨우 나라의 명맥을 유지했고

그렇게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고

고려 백성중 원나라와 친한 부역배들은 원의 앞잡이가 되어

고려 백성들을 괴롭히고 권력을 가진 '권문세족' 이 되어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고 농장을 넓혔던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기

1335년 10월 27일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성계의 조상은 원래 전라도 전주출신이었지만

일찍이 동북방으로 이주했고 당시는 원나라가 고려 동북방을 뺏었던 시기라

이성계의 집안은 동북방의 고려인을 관리하는 몽골 관직 '다루가치' 에 임명됬고

많은 고려 사람들이 이성계의 가문을 따랐습니다

 

(동북면은 사실상 고려도 , 원의 지배력도 약한 국경지대이자

이성계 집안의 자치지역이었음)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담했고

성격은 과묵하고 책임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이성계는 특히 활을 매우 잘쏘아서

20세가 되기전부터 명궁으로 이름날리게 됬고

마치 고구려 동명성왕 고주몽처럼 활을 매우 잘쏘았기에

당대 사람들은 그를

 

'신궁 神弓 (신의 활)'

 

이라 부르며 천하의 명궁으로 여겼습니다

 

이성계가 쓰던 전설의 활과 화살 '어궁구' , 한국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

 

이성계가 젊었을때

이성계의 서모(아버지의 첩이자 여종) 정빈 김씨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이성계에게 활로 쏘아달라 부탁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힘껏 활을 당겨 하나의 화살로

까마귀 5마리를 동시에 꿰뚫었습니다

 

(고주몽이 한번의 화살로 비둘기 한쌍을 잡은것과 비슷)

 

깜짝놀란 정빈 김씨는 이성계에게

 

<정빈 김씨>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데에도 말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직접 낳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이성계를 키워냈다고도 하는 정빈 김씨는

혹여 이성계의 남다른 궁술솜씨를 보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 이성계가 화를 입을까

이성계에게 주의를 준 것이었습니다 (역시 주몽과 비슷)

 

이성계도 이러한 서모 김씨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라

평생동안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동갑잡기' 에 나온 이성계에 대한 조선초기 문신의 평가>

(이성계는)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해서 아무도 욕하는 자가 없었으며 ,

서로 이성계 부대에 소속되고 싶어했다

 

, 태조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남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

활을 쏠 때도 상대편의 실력을 봐서 비슷하게 맞히다가

권하는 이가 있으면 한 번쯤 더 맞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지란과의 만남]

북방지역에서 살던 이성계는 여진족과의 교류도 잦았는데

17살이 된 소년 신궁 이성계는

뒷산에 나가 사냥을 했는데

사슴을 발견해 화살을 쏘아맞췄고

죽은 사슴을 거두려 갔는데

분명 사슴에 화살은 한개만 쐈는데 두발이 맞아있었고

잠시 후 '퉁두란' 이라는 여진족 청년이 이성계에게 다가와

 

<퉁두란>이 사슴은 내가 먼저 쏘아 맞췄으니 내 것이오

 

하자

궁술에 대한 자존심 강한 이성계 역시

자신이 먼저 쏘았다며 퉁두란과 한참 다투었고

결국 퉁두란 역시 이성계의 활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알아보고는

활쏘기 대결을 하자 했고 이성계는 퉁두란에게

 

<이성계>먼저 노형(형) 이 나를 쏘아 맞춰보시오

 

라고 말했고

퉁두란은 100걸음 걸어간 후 주저함도 없이 이성계의 얼굴에 힘차게 활을 쏘았습니다

이성계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있다

팔을 쭉 펴서 날아오는 화살을 냉큼 잡았고

퉁두란은 속으로는 몹시 놀랐지만 다시 한대의 화살을 쐈는데

이성계 이성계는 잽싸게 땅에 엎드려 화살을 피했고

퉁두란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큰 숨을 내쉬고 활을 쐈고

세번째 화살은 이성계의 이마로 날아갔지만

이성계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다리를 벌려 가랑이 사이로 화살을 피했습니다

 

이에 퉁두란은 얼른 활을 집어던지고 이성계 앞으로 뛰어와 무릎을 꿇고는

 

<퉁두란>용서하십시오 .

감히 장군님을 몰라뵙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천하의 명궁이 저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오늘에야 제가 우물 안 개구리임을

알았습니다

 

이성계는 퉁두란을 위로하며 일으켜세웠고

서로의 뛰어난 활솜씨가 마음에 든 이성계와 퉁두란은

그 자리에 화살을 꺾어 신에게 맹세하며

의형제가 되었고

비록 이성계가 퉁두란보다 4살 어렸지만 이성계가 형이 되었고

퉁두란은 이성계의 성을 따라 이름을 퉁두란에서 이지란으로 바꾸게 됬습니다

 

이지란 초상화

 

그렇게 이성계와 의형제가 된 여진족 출신 이지란은

평생 이성계를 분신처럼 따라다닌 전설적인 조선 개국 1등공신 장군이며

위기때마다 이성계를 구한 인물이었습니다

 

[서까래를 진 꿈]

무술연마에 힘쓰고 있던 이성계는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꾸었고

당시 무학대사가 예언을 잘하고 영험하다 해

당시 무학대사가 기거하는 토굴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이성계 역시 이상한 꿈풀이(해몽) 을 하려 무학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이성계>스님 !

제가 무너져 가는 낡은 집 안에 있었는데

몇발자국 걸으니 마루가 삐걱이고 대들보가 흔들려 나왔습니다 ,

그런데 무심코 나왔는데 등에 서까래(지붕을 받추는 갈비뼈모양 나무) 세 개를

제 등 뒤에 걸치고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꿈인가요 ?

 

<무학대사>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 지는 것은 한자로 임금 왕 王 자를 뜻하며

무너져가는 낡은 집은 고려를 뜻합니다 ,

그러니 장군께서는 반드시 임금이 되실 것입니다

만약 저의 해몽이 맞아서 후에 임금이 되시면 바로 이곳에 절을 하나 지어주십시오 ,

또한 이 꿈 이야기를 어딜가서 절대로 하셔는 안됩니다

 

서까래를 짊어진 꿈을 꾼 이성계

 

무학대사

 

이로 인해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이 시작됬고

무학대사는 이때부터 이성계의 큰 스승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신하가 되다]

당시 고려의 공민왕은 다시금 원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원에 대한 치욕을 씻으려 원에게 뺏긴 북방 영토를 수복하려 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오른쪽) 과 노국대장공주 그림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지금 원나라의 국력은 점차 쇠약해지고 있다.

현재 고려임금은 반원정책을 펼치고 있기에

나는 고려에 투항하고자 한다.

성계 너의 생각은 어떠냐

 

<이성계>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원이 통치하는 고려의 북방지역을 관리하고 있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는 그 소식을 듣고

성문을 열어주어 고려에 투항했고

고려가 원의 고려 북방 지배지역인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자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을 따라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려 북방지역을 수복했고 공을 세워

고려 수도 개경에 와서 고려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축출

 

뛰어난 능력과 매우 뛰어난 활솜씨로 주변 무장들의 존경을 받은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이 사망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게 되었고

전주이씨 가문의 수장으로서 '가별초' 라 불리는

가문 직속 정예사병들을 이끌고

요동(만주)부터 한반도 남쪽까지 종횡무진하며

목숨을 걸고 고려의 장수로 맹활약합니다

 

청년무장 이성계는

1361년 중국의 붉은 수건을 두른 도적인

'홍건적' 이 압록강이 언 것을 이용해

고려를 침공해 수도 개경을 순식간에 함락시키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과 여진족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 가별초를 이끌고

개경탈환을 시도했고 이성계의 가별초는 대부분 기병이었고

위협적인 이성계의 기병부대는 개경탈환에 성공해

가장 먼저 개경에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을 활로 쏴 죽였습니다

 

홍건적을 격퇴하는 고려군

 

또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수만 군사의 침입을 물리쳤고

다음해에는 원나라의 공격을 최영장군과 함께 막아냈습니다

이런 일들로 고려 백성들은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을 크게 존경하게 됬습니다

 

고려에 충성한 마지막 고려 장군 최영 장군

 

[요동 정벌]

1370년 11월 이성계는 고려 개혁군주 공민왕에게

고구려 고토인 만주를 탈환(빼앗긴 것을 다시 찾음) 하라는 명을 받았고

이성계는 고려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이날 저녁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찼고

그 빛줄기가 모두 남쪽으로 뻗어있었습니다

 

1차 요동정벌

 

고려의 기상청인 서운관에서는 공민왕에게

맹장(용맹한 장수) 의 기운이라 보고했는데

흐믓한 공민왕은

 

<공민왕>내가 이성계를 보내니 하늘에서 응답한 것이 틀림없다

 

며 기뻐했습니다

 

이성계는 요동(만주)으로 진격해 옛 고구려 수도 졸본지역의

오녀산성을 공격했고 적들이 성안에 들어가 농성한채 저항하자

마침 이성계는 활이 없어 종의 활로 70여발을 쏴

모두 적들의 면상(얼굴)을 명중시켰고 이에 성안에 있던 병사들이 기세가 꺾여

1만여 백성들이 항복해왔고

이성계는 항복한 백성들의 물자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이에 수많은 북방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물결같이 고려로 귀순해왔습니다

 

옛 고구려 산성 '오녀산성'

 

오녀산성 수복 이후

이성계는 다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으로 향했고

요동지역 백성들을 설득하기 위해

요동은 원래 우리땅이며 요동백성은 원래 우리백성이니

이제 되찾으러 왔고 투항하면 봐준다는 방을 각지에 붙입니다

 

이성계는 요동성에 항복권유를 했고

병력을 끌고나온 처명이라는 장수가 단칼에 거절하자

이성계는 활을 들어 처명의 투구를 날려버렸고

다시 항복을 권유했는데 처명은 또다시 거절합니다

이에 이성계는 활로 처명의 허벅다리를 맞췄고

처명은 상처를 치료하러 말을 돌렸는데

이성계는 그냥 놔주었습니다

 

치료 후 돌아온 처명이 다시 이성계에 싸움을 걸자

이성계는 세번째 설득을 했고

 

<이성계>이번에도 말에서 안내려오면

네 얼굴을 맞추겠다

 

라고 말하자 결국 처명은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이성계를 따르게 되었고

훗날 이성계가 전장에서 죽을뻔하자 이성계를 구해냈습니다

 

처명이 항복하자 어떤 자가 요동성위에 올라와

 

<어떤 자>우리는 항복하려고 했는데 

성주가 강제로 싸우라고 우릴 몰아붙이고 있다. 

(나를 비롯한 일반 백성들은 싸울 의도가 없으니) 

공격하면 거저 먹을 수 있을 것

 

이라 소리쳤고

고려군의 사기가 드높아져 결국 매우 높고 험준한 요새 요동성은 함락되

고구려와 발해 멸망 후 수백년만에 고려의 영토로 수복되었습니다

 

요동성 복원도

 

하지만 실수로 고려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킬 때

실수로 성안의 군량창고에 불을 붙여버렸고

고려군은 가져온 식량들이 떨어져갔고 고려 본국에서도 보급이 제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결국 굶주린 고려군은 아쉬움에도 결국 요동성에서 후퇴하게 되었고

훗날을 기약하게 됩니다

 

[황산대첩]

요동정벌 이후 원나라나 북방지역에서의 소란이 줄어들자

이번엔 남방에서 왜구(일본해적) 들이 고려를 습격해

고려 민가를 약탈하고 큰 피해를 주고 있었고

1373년 무렵부터 왜구들은 한양(오늘날 서울) 까지 쳐들어와

고려 백성들을 마구 죽였고 강화도근처는 왜구들의 뱃놀이터가 되었고

고려는 왜구들이 계속 쳐들어와 약탈 , 강간 , 방화등을 저질렀고

이후에는 왜구들이 대놓고 개경까지 공격하려 해

고려 왕실에는 피난준비까지 했고

고려 백성들은 매일같이 덜덜 떨게됩니다

 

고려말 왜구들의 침입상황 (해안가나 내륙할 것없이 전 국토)

 

고려를 약탈하는 왜구들

 

백전백승의 고려장군 이성계는

북방 원나라 , 홍건적과 싸우던 군사들을 다시

남쪽으로 돌려 왜구들을 격퇴했고

 

1377년 이성계는 왜구를 지리산에서 격퇴했습니다

1378년에는 고려 수도 개경을 위협하는 왜구의 대군에 맞서

고려 최영장군이 위기에 빠지자 이성계는 기병을 이끌고 구원해

왜구를 격퇴했고

1380년에는 왜구들은 최대 병력을 끌어모아

총집결을 해 고려군과 대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당시 고려군도 엄청난 왜구의 기세에 싸움을 어려워하고 있었고

대집결한 왜구들의 기세는 의기양양했습니다

 

당시 왜구를 이끌던 대장은 아기발도(아지발도) 라는 소년장수였고

나이가 많지가 않음에도 굉장히 용맹해

여타 왜구들도 그를 두목으로 모셔온 것이었고

아기발도는 이성계군의 포진을 보고

 

아기발도

 

<아기발도>저 작자가 보통 놈이 아니니 주의해야 하겠다

 

라고 말합니다

 

이성계와 고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왜구들 역시 죽기살기로 버티며 고려군에 공격을 퍼부어댔고

결국 이성계 역시 여타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성계>말 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이성계는 다시금 공격을 시도하고 적진과 부딪혔고

고려군은 어렵게 어렵게 왜구들에 공격을 시작하고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때 한 왜구 장수가 창을 들고 이성계의 뒤로 다가가자

이성계의 부하장수 이지란은 깜짝놀라

 

<이지란>영공(令公 높여 부르는 말) , 뒤를 보시오 ! 영공 , 뒤를 보시오 !

 

소리쳤고

이성계는 전장의 소음으로 이지란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고

결국 이지란은 직접 활을 쏴 그 왜구 장수를 죽였습니다

 

당시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성계 역시 죽을 위기에 몰릴 정도로

어려운 전투였고 이성계는 계속해서 포위됬지만

그럴때마다 주변 기병들과 힘을 합쳐 돌격을 해 충격력으로 포위에서 돌파했고

계속 이성계가 왜구들을 썰어대자

왜구들도 그를 향해 잘 달려들지를 못했고

여유가 조금 생긴 이성계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

다음과 같이 소리칩니다

 

<이성계>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 !

 

이에 고려군은 용기백배해 싸웠고

왜구 역시 왜구대장 아기발도가 흰 말을 타고 돌격하며 고려군을 죽이고 있었고

이에 고려군은 아기발도가 보이기만 해도 물러서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아기발도의 무용을 본 이성계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며 이지란에게

아기발도를 생포하라 명했는데

이에 이지란은

 

<이지란>생포하자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이입니다.

그 사람은 면상에까지 갑옷을 둘러서 활을 쏠 만한 틈도 없습니다

 

라고 반대했고

결국 이성계는 이지란에게

 

<이성계>내가 그의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

 

고 하고는 말을 달려나가며 쏘아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췄고

투구 꾼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아기발도는 투구를 급히 바로 썼지만

이성계가 다시 쏜 화살에 투구가 떨어졌고

뒤이어 이지란이 쏜 화살에 죽었습니다

 

아기발도를 잃은 왜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아비규환이 되어 흩어져 달아났고

강물이 피로 물들어 6,7일동안 붉은 빛이 빠지지 않았고

고려군은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는 대승을 거두었고

왜구들은 궤멸됬습니다 (이성계의 황산대첩)

 

고려를 구한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 사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나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에 비견해도 전혀 밀릴게 없지만 이후 왕이 되어버려서 장군적 모습은 가린 모습도 있습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대첩들

 

[위화도 회군]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후

침착한 성격의 이성계 역시 너무 기뻐 자화자찬하기도 했고

당시 30여년간의 왜구의 농락에 고려는 멸망위기에 몰릴 지경이었기에

황산대첩의 대승은 고려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고려군은 대승을 거둔 후 모두 군악을 울리며 승리의 즐거움을 즐겼으나

그런 와중에도 민가에는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고

이성계는 위풍당당하게 군단을 이끌고 개경에 귀환했고

고령의 장군 최영은 직접 고려 대신들을 이끌고 나와서

이성계를 맞았고 이성계 역시 재빨리 말에서 내려 최영 장군에게 절을 했고

최영 장군 역시 나라를 구한 이성계 장군에게 맞절을 하고 감격에 겨워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영>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했겠소이까 ?

 

이성계는 운이 좋았다며 겸손한 대답을 했지만

감정에 북받힌 최영 장군은 오열하며 다시금 소리쳤습니다

 

<최영>공이여 ! 공이여 !

삼한(三韓 한국 , 고려)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

 

황산대첩의 승리로 이성계는 완전한 고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많은 문인들도 그의 무용을 칭송하는 시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이성계는 노략질하는 북방 여진족을 궤멸시켰고

최영장군과 함께 권력의 정점에 서서

전국 토지를 불법적으로 수탈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악명이 높았던

권문세족이자 간신인 이인임을

유배시켜

이성계는 최영장군과 함께 많은 고려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특히 뛰어난 무예실력과 통솔력등에

고려군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받았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홍건적 출신의 한족(중국인) 들이 세운 명나라가 일어나

몽골족 출신의 유목 정복왕조 원나라를 밀어내고 있었던 시기이고

명나라는 고려에게 원나라와 관계를 끊으라 압박했습니다

점차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틈이 벌어졌고

이전 명나라 사신이 살해당하거나 공민왕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고려와 명나라와의 관계는 매우 악화됬고

이로 인해 명나라는 고려에 강경정책을 펼쳤고

고려에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고 외교적 압박을 가했고

이러한 상황들에서 명나라는 군사적 행정기구인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을 지배하려 했고

또 명나라는 고려에게 옛날 원이 지배한 영토들은 명에 귀속되야된다며

철령 이북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고 나섰고

고려는 이것들을 자국영토에 대한 침해로 여겨

고려 내부에서도 최영장군 중심으로 반명분위기가 강해져

명나라를 쳐야한다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결국 고려 우왕과 최영장군은 요동정벌을 하기로 결정했고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성계는 사불가론(요동정벌이 안되는 네가지 이유)을 내세우며

우왕에게 명백한 반대의사를 표시합니다

 

아니되옵니다 !!

 

<이성계의 사불가론>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둘째 ,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넷째 ,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왕은 요동정벌 의지를 전혀 꺾지 않았고

그러면 여름말고 차라리 가을에 가자는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은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완고한 우왕의 명령에

이성계는 물러나며 울음을 터트리며

 

<이성계>이제 참화(비참한 일)가 시작되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우왕과 최영장군은 고려 수도 개경에 남아

5만 고려군을 이성계 장군에 맡기고 요동 공격을 명했고

억지출정에 압록강에 있는 섬인 위화도에 다다른 이성계와 5만 고려군은

침울한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더이상 진격할 수 없다 생각해

군사를 돌리기로 결정했고 (위화도 회군)

위화도에서 요동이 아닌 고려 수도 개경으로 군대를 회군하게 됬고

이는 곧 반역 , 쿠데타를 의미했습니다

 

위화도 회군

 

이성계와 5만고려대군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남하해

소수의 병력으로 최영 장군이 지키던 고려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고

이성계는 최영을 잡아 죽였습니다

 

<이성계가 잡힌 최영에게 눈물을 터뜨리며 한 말>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 잘 가십시오

 

이에 최영 장군은 탄식하며 이전 그에게 이성계가 나라의 주인이 되려한다

경고했던 이인임을 떠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최영>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 !

 

[선지교의 피]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장군을 죽이고 권력을 잡아

권문세족(귀족들) 땅을 빼앗아 새로운 관료들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많은 고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성계는 바로 왕이 되지는 않고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이라는 허수아비 왕을 앉히고

권력을 장악하며 다음 나라를 건국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렇게 이성계의 세력은 날로 커졌지만

고려의 정몽주같은 신하는

고려와 고려왕실을 섬기며 이성계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고려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

 

결국 고려충신 정몽주는 이성계를 죽이려했고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한밤중 술자리로 불러서

시조를 읊으며 은근히 그를 떠보았습니다

 

<이방원의 시조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고려에만 고집하지 말고

같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장께 ?)

 

이에 이방원과 이성계의 속내를 안 정몽주는

다음과 같이 답가했습니다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된다)

 

결국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정몽주가 술자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정몽주가 선지교를 건널때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살해합니다

 

오늘날 개성에 있는 선지교 (정몽주가 죽은곳에서 대나무가 솟았다해서 선죽교라고도 불림)

 

고려 신하이자 충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정몽주 사후 고려 조정은

완전히 이성계 일파에게 장악됬고

결국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은 이성계에 고려 옥새를 넘기고

고려 왕조 500년을 끝마치게 되었고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조선을 건국하다]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의 건의대로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 조선의 도읍을 한양으로 했습니다

 

무학대사의 풍수지리 사상 영향을 받은 조선수도 한양의 모습을 그린 '도성도'

 

조선 정궁 경복궁의 모습

 

이성계는 고려 멸망후 고려 왕족들(왕씨)을

좋은 섬에 데려가 살게해주겠다며 배에 태웠고

그러다 배에 구멍을 뚫어 모두 왕씨들을 바다에 수장시켜버리고

또 왕씨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해 모두 목베었습니다

 

이에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왕 王 씨와 비슷한

전(全), 전(田), 옥(玉), 차(車), 신(申) 등으로 바꾸어 살아남기도 했고

이성계의 탄압에 고려 500년 수도였던 개경사람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은 고려의 국가적 종교였던 불교가 아닌

유교와 성리학을 국가의 새로운 이념으로 채택하고

정도전 및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학적 질서가 있는 나라로 바꾸어가기

시작했고

한편 이성계는 아들이 8명인데

이중 가장 유능하며 조선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가장 공이 많음에도 가장 홀대받았고

결국 이방원은 왕위계승 서열등에 밀린 것에 분노해

'왕자의 난' 을 일으켜 형제 및 정도전 등을 죽이고

이성계를 뒷방 늙은이로 전락시켰고

이후 이방원의 형 정종이 임시적으로 왕위에 올랐다가

결국 이방원이 조선 3대왕 태종이 되었습니다

 

조선 건국사 핵심인물인 태종 이방원의 상상화

 

[함흥차사]

분노한 태조 이성계는 옥새를 아무에게도 안주고

옥새를 가지고 한양을 떠나 고향 함흥에 갔습니다

 

함흥에 있는 조선왕실 별궁 '함흥본궁'

 

태종은 차사들을 보내서 아버지 이성계를 서울로 오게 설득했지만

분노한 이성계는 태종이 보낸 차사들을 활로 쏘아 죽였고

함흥에 간 차사들은 이성계에 죽어 감감 무소식의 상태가 되어

어디갔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뜻하는

'함흥차사' 라는 말이 생겨나게 됬습니다

 

계속해서 차사들이 죽자 결국 태종은 무학대사를 보냈고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결국 이성계는 서울로 돌아옵니다

 

(함흥차사 이야기는 야사지만 당시 이성계와 태종의 관계가

매우 험악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한양에 돌아온 이성계는 결국 아들과 화해했고

태상왕이 되어 절이나 온천을 유람하며 여생을 보내다

1408년 음력 5월 24일 새벽 4시쯤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선 제 2 궁궐 창덕궁

 

평소 이성계는 함흥에 묻어달라했지만

임금이 제사지내러 함흥까지 가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오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성계의 유언>그럼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로

내 봉분(무덤) 을 덮어달라

 

(유언이 특이함)

 

이성계 무덤 건원릉에서 자라는 억새들 (거친 무인의 멋이 느껴집니다)

 

[이성계 일화들]

 

<이성계와 호랑이>

하루는 이성계가 동생과 고양땅의 숯고개(탄현) 지방을 넘어가고 있었는데

화창한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 소나기가 쏟아졌고

이성계는 굴 속에서 잠시 비를 피했지만 비는 계속 거세졌습니다

그런데 굴 밖에서 어흥 ! 호랑이 소리가 들렸고

이성계와 동생은 그곳이 호랑이 굴임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이에 두 형제는 한명이라도 살기 위해 한명이 호랑이 밥이 되기로 했고

각자 옷을 밖으로 던져 호랑이가 깔고 앚은 옷의 임자가

굴밖으로 나가서 호랑이 밥이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형제가 옷을 밖으로 던지자 호랑이는 이성계 옷을 깔고앚았고

이성계는 호랑이의 밥이 되려 호랑이 앞에 성큼성큼 걸어나갔는데

호랑이는 이성계를 잡아먹기는 커녕 바로 굴안 동생에 달려들어

동생을 잡아먹었고

호랑이 역시 이성계가 훗날 나라를 세울 큰 인물임을 알아서 그랬다는

전설이 있고 이 이야기는 고양시 전설이 되었습니다

 

고양시의 이성계와 호랑이 설화

 

<왕이 될 팔자>

하루는 이성계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봤는데 글자를 뽑으라해서 물을 문 問 자를 뽑았더니

점쟁이는 이성계에게

 

<점쟁이>이것은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 군 君 이니

왕이 될 팔자로군요

 

라고 말했고

이에 이성계는 다음날 근처에 있던 거지 한명을 좋은 옷을 입히고 변장시켜

물을 문자를 뽑게 했는데

거지가 물을 문자를 뽑자 점쟁이는 거지에게

 

<점쟁이>문 門 앞에 입입  입 口 이 있으니

당신 거지팔자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돼지와 부처님>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옛날 꿈해몽을 받은 이후부터

깊은 인연을 이어왔는데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되고나서도

자리를 같이하며 농담을 즐기고 있었고

하루는 이성계가

 

<이성계>당신은 어찌 그리 돼지같이 생겼오

 

하니 무학대사는

 

<무학대사>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부처님같이 생기셨오

 

라고 대답했고

 

이성계는 이에

 

<이성계>허허허 , 대사 ! 나는 대사더러 돼지라고 욕을 했는데

아니 나더러는 부처라 하니 도대체 나의 어디가 부처같이 생겼오

 

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웃으며

 

<무학대사>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돼지같이 보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다 부처로 보이는 것입니다

 

말했고

부끄러워진 이성계는 이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농담

 

이외에도 한국에 이성계 일화 , 민간전설 , 미담은 되게 많은데

일단 조선에서는 좋은 미담과 전설들이 솔직히 다 뻥인거 알면서도

장군님 솔방울폭탄이나 장군님 축지법쓰신다처럼

여러 미화된 건국자의 훈훈한 이야기로 여기며 퍼졌고

 

그럼에도 민담이나 야사등이 아닌

역사서에 실제 기록된 이성계의 기록은

말도 안된다 싶을 정도로 전설적인 기록이 많아

미담이나 여러 건국왕들을 미화시키는 이야기를 거르고 봐도

전쟁에서 단 한번도 진적없는 한국의 전설적인 무장이었으며

고구려 동명성왕 고주몽과 비견되는 신궁이라 불린 사나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단 고주몽같이 부여를 탈출해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된 것과 달리

500년 왕조이자 정통성이 컸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린 인물이라 오늘날에도

이성계의 이미지는 좋은 면만 있지는 않고

그럼에도 또 조선을 건국하고 여러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겼기에

태조 왕건과 더불어 태조 이성계는 한국의 위인이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라봉봉>어린이 위인전에도 일단 예수님 , 부처님 , 아인슈타인 , 세종대왕 이런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뛰어난 위인이며 믿고 존경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성계나 나폴레옹 등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인물들도 있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전까지는 고려사회의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만약 그시기쯤 사망해버렸으면 마치 강감찬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한국인들이 전설적으로 존경하고 인정하는 장군으로 남았겠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최영장군을 죽이고

고려 멸망 과정에서 정몽주같은 뛰어난 인물을 죽이거나

왕씨들을 몰살하고 개경사람들을 차별했기에 이후에도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한국사 마지막 왕조국가인 조선 멸망 이후 이미지가 나빠진 조선시대에 대한 적개심의 화살이

건국자 이성계에게 박히는 면도 있어

여러 면에서 여러 이야기가 있는 인물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뛰어난 무예실력을 가졌던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고

고려를 건국하고 나름 평화적으로 후삼국을 통일해

백성들의 대대적 존경을 받았던 태조 왕건과 달리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잔인한 모습들도 보여줬기에

여러 논란도 있지만 승자였기에 많은 과오들을

힘으로 덮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고

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너무 맹신해서도 안되는게

서구 학설 '사회계약론' 같이

이성계가 아무리 어두운 면이 있었어도

그는 가장 당대의 지도자로서 합리적 인물이었고

뛰어나고 영리한 인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요동 정벌 반대 사불가론도 많은 한국사의 아쉬움으로도 남기는 하나

당대 가장 뛰어난 군사 전문가이자

백전불패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반대할 정도면

엄청난 부담이 있었던 것이기도 해

고려 왕실과 최영장군의 무리수와 오판이 큰 것도 있고

오랜 전쟁으로 고려 백성들의 삶이 어려웠다는 점 ,

자칫 요동은 커녕 더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었다는 점 등

단순히 이성계가 나빴는데 왕의 말을 안듣고

모든것을 무력으로 덮었다고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여튼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극도의 조선까들의 맹렬한 공격대상이기도 하고

요즘 조선이나 이성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 , 욕설등이 많이 보이는거 같은데

조선까들 특징이 조선은 무조건적으로 미개하고 더러운 나라였으며

비상식적인 나라라고만 이야기하는데

조선사에 대해 조금만 자세히 공부해봐도 그건 아니라 할 수 있고

오히려 조선을 도탄과 멸망으로 이끌었던

꼰대 유학자(진짜 선비들과 다름)들의 배타적 논리와

조선까들의 수준이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냥 조선 역시 문제가 있었던 나라고 한계나 문제에 대한 합리적 비판 ,

오늘날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런 것을 찾아야지

무조건적인 조선까나 이성계까는 세력들 정신상태도 이해도 잘 안되는 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한국사에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인물이고

이성계는 북방 여진족의 절대적 존경을 받은 인물이기도 했는데

그의 묘지에 뻣뻣히 서있는 억새풀처럼

그는 부드러웠던 농경민족족 기풍보다는

마치 고구려같은 거친 북방민족적 상무적 기풍이 강했던 인물이라

나름대로의 기풍과 멋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가 만약 조금 더 여진족들을 포섭했더라면 요동쪽은 아니더라도

두만강 이북 유역 정도는 수복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고

하여튼 이성계 사후부터 조선이 진취적 기풍이 아닌

철저한 문치적 국가로 선회해버린 경향도 있고

무엇보다 이성계와 조선을 존경하던 여진족들을 포섭하기보다는

적으로 만들어 버린게 이성계 후손 , 조선 왕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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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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