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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배움이 느린 아이]

[아버지가 사준 나침반]

[대학 시절]

[기적의 해]

[상대성 이론]

[전쟁을 반대하는 과학자]

[대통령직을 거부하다]

[과학의 큰 별]

<라봉봉>

 

아인슈타인

 

[배움이 느린 아이]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음에서 유대인(=유태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천재의 대명사거나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이야기 되는

세계적인 과학 위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은

어릴적부터 운동도 못하고

다른 과목도 잘못해

학교 친구들에게 바보소리를 들었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학교에서 외우라는 것도

알베르트는 왜 외워야 하냐며 질문했고

이에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 역시 깜짝놀랐고

아인슈타인은 그런것을 외우고 엄격한 통제에 있는

학교가 정말로 싫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군비를 증강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나라여서 학교 역시

군대식으로 운영되었고

항상 호기심이 많고 자유로운 어린이였던 알베르트는

다른 독일의 아이들과 달리

이런 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아인슈타인

 

[아버지가 사준 나침반]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어릴적 아버지가 사준 

나침반을 보고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그 어떤 경이로운 감정을 느꼈고

수학에도 흥미를 가지고 깊이 수학공부를 했습니다

 

나침반

 

항상 다른 과목은 못했지만

과학과 수학은 뛰어난 성적을 받았고

음악가 출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바이올린도 곧잘 켰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평생의 친구였던 바이올린

 

알베르트는 당시 가족들은 이타리아 밀라노에 있었고

홀로 독일의 김나지움(독일의 중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14세의 김나지움을 다닐때의 아인슈타인

 

당시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있었던 독일의 학교 답게

김나지움에서는 학생들의 개성을 무시하는 군대식 생활을 시켰고

알베르트는 이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쇠약으록 건강이 나빠졌고

결국 학교를 떠나 가족들이 있는 이탈리아로 갔습니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알베르트가 한 말>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

 

이때부터 알베르트는 집근처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하며

닥치는대로 독서를 했고 홀로 잘지냈고

책은 학교 선생님처럼 엉뚱한 질문을 한다며

윽박지르지도 않았고

알베르트에게 책은 좋은 친구였습니다

 

이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과학 선생님이 되려 생각했고

대학을 진학하기로 생각했습니다

 

[대학 시절]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공과대학에 시험을 쳤는데

수학과 과학은 뛰어났지만 다른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고

결국 시험에서 떨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수학과 과학 실력이 뛰어난 것을 본

대학 학장님은 다시 아인슈타인을 불러

다시 김나지움에 가서 낙제한 과목들을 보충해오면

입학을 허가시켜 준다 했고

아인슈타인은 다시는 김나지움에 가기 싫었지만

결국 스위스 아라우에 있는 스위스 김나지움에서

1년 공부를 더했고

다행히 스위스의 학교는 독일같이 엄격한 군대식 교육을 하지 않는

토론식 교육을 했고 아인슈타인은 이곳에서 낙제한 과목들을

열심히 공부해 다시 스위스 공과대학에 합격하게 됬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공부를 해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곳에서 아인슈타인은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아인슈타인은 좋아하는 물리학에 열중하느라

수학도 등한시했고 다른 수업들도 빠지곤 해서

이에 그의 수학교수는

 

<아인슈타인의 수학교수>아인슈타인은 게으른 개다 !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졸업을 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시험기간에는 친구의 노트를 빌려 겨우 시험을 통과해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기적의 해]

그러나 대학졸업후 아인슈타인의 교수는 아인슈타인을 미워해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고 결국 아인슈타인은

여러 일들을 전전하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스위스 특허청의 발명특허 심사관이 되었습니다

 

평소 과학에 익숙한 아인슈타인에게

이 일은 어렵지가 않았고

곧 일이 익자 아인슈타인은

다시 일이 끝나면 물리학에 열중했습니다

 

1903년

24살의 아인슈타인은 대학 동창생이자 여자친구이자

총명한 여인이었던 밀레바와 결혼을 했고

얼마 후 아들을 낳았습니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가정이 안정되자

다시 물리학 연구에 집중했고

특허청에서 퇴근하고서는 아기를 안고 달래가며

책상에 앉아 열심히 물리학에 매진했습니다

 

과학계에서는 뉴턴의 1666년을 기적의 해라 불렀는데

이 해는 뉴턴이 정원 사과나무아래에서 사색하던 중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해였고

뉴턴은 당시 서양의 과학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근대과학시대를 연 '아이작 뉴턴'

 

그런 기적의 해가 한번 더 나타났는데

1905년의 '기적의 해' 로

1905년동안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하는

무명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에 엄청난 업적들을 남겼는데

 

1.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3월)

2. 분자가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는 브라운 운동 (5월)

3. 특수상대성 이론 (6월)

4. E=mc^2 로 잘 알려진 질량-에너지 등가원리 논문 (9월)

 

등이 이 해에 나왔고

26살의 무명의 과학자에게서 나온 이 이론으로

뉴턴의 이론이 부정되기도 해

세계 과학계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 해의 업적으로 아인슈타인은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E=mc^2

 

노벨상

 

이에 아인슈타인의 논문에 감격해

어느 과학자가 스위스 특허청의 그를 찾아갔는데

과학자같은 모습이 아닌 꾀죄죄한 젊은이가 나왔고

아인슈타인도 이때부터 이름이 알려져

본격적으로 과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점점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상대성이론을 지지했고

막스 플랑크나 퀴리 부인같은 유명 과학자들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지지했습니다

 

퀴리 부인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우쭐해 한다거나

별다른 미동없이

평소같이 다시 물리학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명성이 커지자

결국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초청장이 날라왔고

박사가 된 아인슈타인은 독일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됬습니다

베를린 대학은 아이슈타인이 강의보다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특별대우로 배려해주었고

이곳에서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1915년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 을 완성했고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중력이 시공간과 빛을 휘어지게 한다는 것을

밝혔고 실제 영국 탐사대가 개기 일식을 관측하자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전세계 신문은 신문 1면 기사로 이것을 대서특필했습니다

 

<전세계 신문들>아인슈타인이 옳았다 !!

 

엄청난 업적을 남긴 아인슈타인은

항상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부지런히 연구에 노력할 뿐이었고

항상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과학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때

독일 정부는 지식인들에게 전쟁 찬성 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고 많은 지식인들이 전쟁을 지지했음에도

아인슈타인은 소수의 지식인들과 끝내 서명하지 않고

전쟁 중지 호소문을 썼습니다

많은 독일인들이 그를 비판했지만

아인슈타인은 꿋꿋하게

진실된 물리학자의 길을 가려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의 이론을 이해하고 그를 인정했고

많은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잘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아이슈타인이 위대한 천재 과학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1919년 아인슈타인은

아내 밀레바와는 헤어지게 됬고

얼마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그를 위로해주던 사촌동생 엘자와 재혼했고

다시 가정도 안정되고 물리학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엘자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독일인들은 패전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떠넘겼고

아인슈타인은 핏줄만 유대인이고

유대인의 전통은 따르지 않는

사실상 독일인이었지만

이유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 됬습니다

또 다른 유럽국가들은 아인슈타인이

전쟁의 책임이 있는 독일 과학자라며

아인슈타인을 비난했고

아인슈타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습니다

 

1927년 과학자들의 모임인 솔베이 회의 , 가운데 아인슈타인과 그의 왼쪽에서 두번째 퀴리부인의 모습

 

이후 독일에는 히틀러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나치즘(나치당의 파시즘[독재] 사상) 이 생겨났고

히틀러와 나치(히틀러의 정당, 조직) 는 유태인들을 괴롭혔습니다

 

히틀러와 나치 , 군국주의의 대두

 

아인슈타인은 살해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고

1933년 히틀러가 아인슈타인에

5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자

결국 아인슈타인은 충격을 받고

나치를 피해 조국이었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

그에게 집과 연구실을 마련해준

미국 프린스턴 대학 고등연구소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통일장 이론' 연구를 시작했고

스스로도 이 이론을 완성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면서도

그는 후대를 위해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아이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을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함)

 

한편 그의 조국 독일에서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나치의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동원되거나

혹은 협조를 거부하다 나치의 탄압을 받고

다른 유럽국가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결국 1939년 히틀러의 야욕으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군국주의 체제로 간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같은 군국주의 나라들이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일본의 히로히토와

'삼국 동맹' 을 맺고 추축국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거나 다쳤습니다

 

일본의 삼국동맹 선전엽서 , 그림에 나오는 2차 세계대전의 상징인 나치독일 깃발 '하켄크로이츠' 와 일본제국 깃발 '욱일기' 는 오늘날 전범기[전쟁 범죄 깃발] 입니다

 

과학은 이당시 엄청나게 발달해있어

기존의 전쟁들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띄었고

과학무기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자

아인슈타인은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일제의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여성 성노예)

 

그러다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상대성 이론' 을 이용해

독일이 기존의 폭탄과 달리 엄청난 힘으로

지역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원자폭탄' 을 만든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고

이에 평화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더 큰전쟁을 막기위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나치의 원자폭탄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고

결국 미국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 를 실시했고

아인슈타인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얼마후 수많은 세계적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용해

원자폭탄이라는 인류를 전부 없앨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의 무서운 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

 

다행히 독일은 미국이 핵무기를 쓰기도 전에

항복했는데

일본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하는

'태평양 전쟁' 을 일으킨 뒤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미국에 저항했는데

피해가 막심해진 미국군은 결국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됬고

단 2발의 이 원자폭탄들은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단숨에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무기 리틀보이(위) 와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팻 맨(아래)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를 바라보는 일본군인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펫 맨의 버섯구름

 

핵이 투하되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했고

세계 2차대전은 그렇게 끝나게 되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독립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것에 대한

막심한 후회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전쟁 반대 명언>나는 제3차 세계대전이 어떤 무기로 치러질지 모른다

하지만 제4차 세계대전은 몽둥이와 돌로 싸우게 될 것이다

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3차 세계대전이 있으면 인류가 멸망한다는 의미)

 

세계 2차대전이 끝나자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핵무기 반대운동과

평화운동에 뛰어들었고

원자력을 다시는 전쟁에 사용해선 안된다 했습니다

 

[대통령직을 거부하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전쟁통에 미국으로 피난온

유대인 동포들을 돕기도 했는데

이후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은

결국 2차대전이 끝나고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 을 건국했습니다

 

이스라엘 국기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땅에 들어갔는데

하필 그 땅에는 오랫동안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냈고

또다시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소식들에 마음아파하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이었는데

어느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있는 아인슈타인에게

대통령을 해달라 요청했고

아인슈타인은 깜짝 놀라며

 

<아인슈타인>대통령을 할 만한 인물은 많습니다

하지만 물리학을 가르칠 학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대통령을 맡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라며 거절했고

대신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을 위해

여러 재능기부를 했고 전쟁을 반대하며

유대인 동포를 돕기위해 힘썼습니다

 

[과학의 큰 별]

이후 아인슈타인은 아내와 여동생 마야가 죽고

의지할 가족들이 사라지자

큰 외로움을 느꼈고 몸이 약해졌고

쓰러졌습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하던 의사들은

그에게 수술을 권유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더이상 병원신세를 지며 목숨을 연명하는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물리학 연구를 하다 품위있게 죽을 것이라며

수술을 받지 않겠다 했고

다음날 병실에 있던 간호사에게

독일어로 무언가를 말했지만

미국 간호사는 독일어를 몰라 아인슈타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55년 4월 18일 76세를 일기로

아인슈타인은 사망했습니다

생전

 

'나를 위해 묘와 기념비를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말을 남긴 그의 유언대로

아인슈타인은 화장되었습니다

 

그는 유언과 같이 큰 명성과 달리

항상 소박하고 근면성실함을 중요시 여겼고

전쟁 반대와 평화주의 운동을 한 지식인이자

자신의 과학이 인류애에 써야 한다고 여겼으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 , 맹목적인 믿음 ,

권위주의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장난끼가 많았던 아인슈타인

 

오늘날 '천재' 의 대명사가 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그의 업적으로 우주와 공간과 시간 , 에너지 등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고

뉴턴의 '근대 과학시대' 에서

오늘날의 '현대과학시대' 를 열었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누리는 과학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명언>오직 남을 위해 산 인생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Only a life lived for others is a life worth while

 

아인슈타인 동상 -워싱턴 D.C

 

<라봉봉>아인슈타인은 천재의 대명사로 이야기 되는 인물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 '신이 선택한 인간' 등

그에 대한 여러 찬사가 아낌이 없는 세계적 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을 부나 명성을 탐하는 인생을 살았다기 보다

남을 위하고 물리학에 대한 소중한 열정으로 근면성실히 산 인물이었고

남보다 늦었음에도 항상 오랫동안 , 깊이 생각하는 그의 탐구정신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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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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