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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당나라는 고구려 지역에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당나라로 대규모로 끌고갔는데

고구려 장수 출신 대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도 끌려간

고구려 유민중 한명이었습니다

 

대걸걸중상

 

발해 고왕 대조영 표준영정

 

대걸걸중상은 당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아들 대조영과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해 요하를 건너 옛 고구려 영역으로 들어갔는데

백두산 북동쪽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걸사비우

 

한국인의 영산 백두산 천지

 

백두산 주위에 있는 발해의 5경(주요 도시)

 

이에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는 장수 이해고를 보내서

걸사비우를 공격해 걸사비우는 죽고 이무렵 대걸걸중상 역시 사망해서

지도자를 잃어버린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은 대걸걸중상의 아들이자

고구려 장수 출신이었던

'대조영' 을 지도자로 추대했고

대조영은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이해고는 대조영과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을 추격했고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고구려와 말갈 군사를 이끌고

이해고의 당나라군을 격파했습니다

 

<대조영>우리가 승리했다 !

우리는 고구려를 다시 세울것이다 !!

 

<고구려와 말갈 유민>대조영 장군 만세 !!

고구려 만세 !!

 

이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과 걸사비우의 말갈 유민들까지

통합해서

옛날 읍루(말갈=훗날 여진족)족이 살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나라를 세웠고

대조영이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에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이 모두 대조영에게 갔습니다

 

대조영은 이후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고

북방지역의 수많은 곳을 정복해 영토를 넓히며

고구려 땅을 수복했습니다

 

처음에 대조영은 나라 이름을 '진' 이라 했지만

진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표방했고

이후 진은 '발해' 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발해의 신분구조

 

결국 당나라도 강성한 발해의 대조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대조영 역시 당에 사신을 보내서

국제적인 외교관계를 확립했고

나라를 튼튼히 했습니다

 

대조영은 719년 사망했고

시호는 '고왕 高王' 이 되었고

고왕은 고구려의 고자와 같기에 '고구려 왕' 을 뜻합니다

 

대조영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이자 한국 드라마의 걸작 '대조영' , 출처 : KBS 1TV 대하드라마 대조영 (2006)

 

발해 고왕 대조영의 이름을 딴 대한민국 해군함선 '대조영함'

 

발해 고왕 대조영 사망 이후

그의 아들 대무예, 무왕이 왕위에 올랐고

무왕은 흑수말갈을 모두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장문휴 장군을 시켜 발해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 산동반도(등주)를 공격했습니다

 

발해의 당(등주) 공격 추정도

 

또 무왕은 동해를 건너 일본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우리 발해는)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 蕃國 (오랑캐 나라) 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

 

이후 3대 발해왕은

문왕 대흠무입니다

문왕은 아버지 무왕 대무예가 사망하자 왕위를 이어고

당나라에 평화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고구려 유민출신 당나라 장수 이정기가

산동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을때

이정기에게 군마(군사용 말)를 수출했고

그 외에는 문왕이라는 이름답게

문치주의적 정책을 펴며 재위기간 내내

발해의 행정적 제도개편이 시작됩니다

문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국서에 자신을 '고려국왕' 이라 불러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고

일본에서도 발해를 고려라 불렀습니다

또 고구려 임금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을 천손(하늘의 자손) 이라 표방했습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중대성첩'

 

이후 여러 왕들이 있었고

발해 최전성기왕은 10대왕 선왕 대인수입니다

선왕은 고구려 멸망 이후 여러 세력이 있었던

요동지역을 완전히 발해 영역으로만들었고

내부적으로는 나라 행정구역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했고

백성들에게 학문을 장려했습니다

당나라와는 우호적 관계를 확립했는데

선왕 시기 국력도 강했고 내부적으로 안정됬기에

당나라는 선왕 시기의 발해를

'해동성국 海東盛國' ,

바다 동쪽의 강성한 나라로 불렀습니다

 

국제적으로 번성한 해동성국 발해

 

발해의 정치체계는 당나라의 정치체계를 모방했으나

관직명이나 운영에서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발해의 중앙 통치조직 , ( ) 안은 당나라의 관직 명칭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온돌을 사용해

북방의 추운 겨울을 견뎠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당나라같은 바둑판식 궁성을 지어 왕궁 정면으로는

주작대로가 펼쳐져 있고 네모란 모습의 수도건설이 있었고

건물에는 고급스러운 장식을 해 꾸몄다 합니다

 

고구려 기와와 흡사한 발해 기와

 

발해 석등 , 6.3m의 거대석등

 

발해 문왕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무덤 양식은

고구려와 같은 굴식 돌방무덤이었습니다

 

정혜공주묘에서 나온 '돌사자상' , 오늘날 발해를 대표하는 유물

 

또 발해 문왕의 넷째딸 정효공주 무덤은

당나라(중국) 양식인 벽돌무덤이었습니다

 

정효공주묘 벽화

 

문왕의 두 딸 무덤은

정혜공주는 고구려 양식 ,

정효공주은 중국 양식 무덤으로 무덤을 만들었기에

중국 선진 문물을 수용하나 독자적이고 자주성이 있었던

발해인들의 사고방식이 나타나는

무덤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정효공주묘에서는 문왕을 황상(황제) 라고 표현했기에

중국에서 발해는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이라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반박할 근거가 생겼습니다

 

이외에도 발해인들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후손임을 표방하고

황제를 칭한 자주국이었습니다

 

이후 발해인들은 농경+유목 민족이었던 고구려인들처럼

멸망할때까지 북방에서 농사를 엄청나게 지었는데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농사를 계속해서 지어

한국 북방지역을 풍요로운 곳으로 바꾸게 해놨고

발해 멸망부터는 중국의 최대 위협세력이

북방 초원길 지역이나 서방 비단길 지역이 아닌

발해가 있었던 만주, 연해주 영역이 되었고

이후부터는 초원지역의 원나라를 제외하면

이후 중국사는 만주에서 성장한 유목민들의 위협이나

만주 유목민들의 정복왕조가

시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발해는

15대왕인 대인선 임금(마지막 왕이라 시호가 없음) 때

백두산이 엄청나게 크게 폭발했는데(백두산 폭발설)

당시 발해는 내부다툼이 커서 분열하고 있었고

그런 혼란한 상황속에 거란이 침입해

빠른 속도로 발해 수도 상경이 포위되고

포위된지 3일만에 발해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발해 백성들은 혼란속에서 거란에 맞서기보다

남쪽에 어진 인물인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 로

대규모로 피난가는 것을 택했고

결국 발해 대인선 임금은 유목민족인 거란족 임금

요태조 야율아보기 앞에서 항복하며

발해는 15대왕 대인선 임금을 끝으로 건국 228년만에 멸망했고

대신 대인선의 태자 대광현이 발해 유민들을 이끌고

남쪽의 고려로 대규모 귀순을 했으며

놀랍게도 당시 발해는 수도만 함락되고 다른 지방은 굳건했기에

지방에서는 계속해서 발해부흥운동을 했는데

만주지역에서 발해 유민들은 이 외로운 싸움을

200년간 지속했고 그 이후부터는 안타깝게도

한국인의 원류지역이었던 만주지역은

유목민들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발해부흥운동

 

그러나 남방에서는 신라를 계승한

한국사의 자주국가 고려가 등장했고

발해태자 대광현의 귀순 등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구려 계승을 표방해 북진정책을 실시해

끊임없이 잃어버린 옛 조상들의 고토를 되찾으려 했습니다

 

가수 서태지씨의 분단 상황에 있는 남북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발해를 꿈꾸며 (1994)'

 

<라봉봉>고구려와 발해라는 이름은 한국인들에게는

그 이름만 들어도 어떤 가슴뛰는 웅대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저 넓고 넓은 만주벌판을 자유롭게 달린

선조들의 얼이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

고구려와 발해 모두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기에

한국이 세계사적으로 결코 변방에 있거나 약소국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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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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