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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1958~1962)은

무리한 국가의 개입과 탁상행정등으로 실패해

3~5000만명의 중국 인민들이 굶어죽었고

실정으로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도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퇴했고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에게 국가주석을 넘겼고

덩샤오핑이 실용주의 정책을 펼쳐

대약진운동의 뒷수습을 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

인민의 호평 + 영향력이 커지자

마오쩌둥은 다시 위기를 느낍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소평)

 

당대 마오쩌둥은 여러 정책이 실패했음에도

그럼에도 중국에서

엄청난 정통성과 권위가 있는 인물이었는데

류사오치는 점차

마오쩌둥의 그늘에서 벗어나

실질권력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고

이에 화가 난 마오쩌둥은 10대 20대의 어린 학생들에게

마오 사상 교육을 시켜서 자신을 위해 싸우는

'홍위병' 을 조직하게 했고

마오쩌둥의 청소년 친위대 격인

이 홍위병들을 통해 류사오치를 견제하고

다시 재기하려 했습니다

 

일단 당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민중들의

의심과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는데

그렇다고 중국을 건국하고 중국에서 거의 신같은 존재였던

마오쩌둥을 대놓고 비판하는 인물은 없었다 할 수 있고

대신

 

'이게 다 관료주의나 옛 문화(구습) 들의 잔재들 때문이다'

 

라는 것으로 비판의 화살은 방향이 바뀌게 되었고

마오쩌둥에 의해 움직여지는 젊거나 어린 학생들은

당대 수천만이 굶어죽는 절망적인 사회현실 등에

더욱 과격해져서 마오쩌둥을 신격화하고 마오쩌둥의 사상을

더욱 공부하며

사회를 이지경으로 만든 어른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즉 일단 직접 원인 제공자인 마오쩌둥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

만만한 동네 , 근처 보이는 어른들 공격,, )

 

마오쩌둥의 어록집을 들고 있는 홍위병들 (대부분 어린 청소년들)

 

청소년들인 홍위병들은 몰려다니며

절이나 사당 , 유교 사원 , 궁궐들을 마구 부수고 다녔고

'낡은 사상을 가진' 어른들을 붙잡아 구타했고

중국 문화재나 전통 , 종교들이 거의 파괴되고

기존 관습들이 부정되고 (특히 이 사건으로 중국에서는

종교 세력이 힘을 잃음)

중국인들이 새로운 사상으로 재시작되다싶이한

'문화 대혁명 (1966~1976)' 이 시작됩니다

 

또 마오쩌둥의 명령등에 의해

중국 군대와 경찰은 이런 홍위병들의 사태를

사실상 묵인했고

이에 더욱 홍위병(청소년)들은 나서서

교수 , 예술가 , 학자 , 지식인 , 정치인(어른) 들을 잡아

구타하거나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시켰고

많은 중국의 문화유산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불타거나 부셔졌고 정부 건물들도 점거됬습니다

 

어른들을 벌주고있는,, 홍위병들

 

사태가 점점 커지자

마오쩌둥도 나서서

 

'무투(무력싸움) 말고 문투(글로 싸움) 를 하라'

 

라고 지시했지만

흥분하고 광기에 휘말린 어린 청소년들은

마오쩌둥의 말마저 듣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를 파괴합니다

 

하얼빈 시장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어린 홍위병들

 

공자 사당을 부수는 홍위병들

 

결국 마오쩌둥의 권위에 도전했던

국가 주석 류사오치는 홍위병들에게 잡혀가

고문당하다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사망했고

덩샤오핑도 홍위병들에게 두둘겨 맞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고

마오쩌둥은 다시 정치 일선에 복귀합니다

 

한편 폭주하던 홍위병들은

이제는 마오쩌둥까지 공격하려 하는데

일단 노련한 정치가였던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에 의해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다시 홍위병들이 비판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슬슬 홍위병들과 거리를 두려했고 (토사구팽 , 거의 유방급,,)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에게 이번엔 도시가 아닌

농촌을 혁명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구실을 대며

홍위병들을 농촌으로 보냈고 (;;)

흥분한 수백만의 홍위병들은 농촌으로 퍼졌는데

당시 중국 농촌은 대약진운동 실패 등으로

답이 없던 상황이라 어린 소년 홍위병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항의하다 농촌에서 맞아죽었고

어린 소녀 홍위병들은 농촌에서 성희롱과 강간등에 시달리다

강제 결혼을 하기도 했고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잡은 중국 정부도 일단

홍위병 사태를 막기 위해 이런 농촌의 홍위병 실태를 알고서도

방관했습니다

 

하여튼 이시기(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청소년들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빠져나가 학력붕괴가 일어났다 하고

문화 유산들이 파괴되고

인문/사회 과학자들이 전멸하다싶이 해

이후 중국 정치에서는 문과 출신보다

그나마 문화대혁명 시기에 살아남은 이공계 출신들이

많다고 하고

기존 중국 수천년 역사는 그래도 내란이 있던

나라가 분열하던 이민족이 침략해오던

중국의 문화와 전통은 꾸준히 계승되오며

새로운 문화들과 결합되 새로운 발전이 있어왔는데

그런 전통들이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인들 자신들의 손에 파괴되서

오늘날 중국인들은 전통개념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하가 아니라 그런 경향이 있다쯤으로 해석하면 될거같습니다)

 

또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파괴하려 했던

기득권 세력은 타파되지 않고

오히려 태자당 등 중국 건국 세력 자제들의 세력의

기득권 세력의 세습으로 이어졌고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으로

어린 청소년(홍위병)들을 동원해 전통을 파괴한 대신

홍위병들을 대동한 도전세력에 대한 간접적인 숙청으로

다시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해

그가 죽을때까지 그의 자리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다 할 수 있고

하여튼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중국 내부에서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현대 중국의 흑역사라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과 홍위병은 그냥 어리석은

바보들의 행진을 한것이냐라면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되는게

 

일단 마오쩌둥은 자신의 권력의 위기를 느끼고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에서 다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이용했다 할 수 있고

어린 홍위병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중국인들이 굶주려 대규모 아사자가 나오는 상황들에

어른과 기성세대 , 기득권 세력들에 대한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나름 어린 소년 소녀들의 대규모 불만표출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중국사회가 진짜 세기말이나 혼돈의 시대 그런 느낌으로

움직이던게 문화대혁명이었고

그럼에도 홍위병 출신의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 시절이 좋았다고 회상하는 이들이 대다수라는데

당시에는 대문들도 닫고 살지 않았고 (대문 닫으면 홍위병들이

가서 구타하니깐,,) 어린 청소년들끼리 몰려다니며

옆집에서 밥도 얻어먹고 집회도 마음껏 열고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군인과 경찰의 묵인 앞에

어른들도 청소년들을 두려워하고 마음껏 어른같이 굴던가

신문이나 글들을 발행했던 시기여서

거의 당시 청소년들에게는 어른들도 간섭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왕국이 건설되는

'15소년 표류기' 같은 시대였다 할 수 있기에

어렷풋한 낭만주의 시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혼란과 피해를 야기한

'문화대혁명' 이었지만

이러한 진보적 낭만주의 같은 성향이 있기도 했기때문에

서양에서는 당시 냉전으로

올바른 공산권 국가의 정보를 알기 어려웠기에

문화대혁명은 나쁜점은 쏙빼고 '마오이즘' 이라는

마오쩌둥의 사상들과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엄청나게 낭만적이고 혁명적인 느낌으로 퍼져

서양 청소년들에게도 마오쩌둥이나 체게바라같은

공산주의권 인물들은 낭만적인 느낌으로 크게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 청소년들 역시 서구권에 퍼진

문화대혁명의 좋은 이미지들을

생각하며 1968년

정부 기관들을 점거하고 기성세대들을 위협하고

자동차를 불태운다거나 하며

시위를 벌이거나 하는 '68혁명' 을 일으켰고

 

이에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서는 대학가들을 중심으로 반정부투쟁인

'전공투' 투쟁이 벌어지고

한국에는 '386세대' 가 생겨나는 등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의 나비효과는

의외로 세계적으로 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68혁명 , 68혁명을 다룬 역사책에서도 '마오이즘'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준 사건으로 나옵니다

 

각목과 화염병을 든 일본 전공투 , 거의 일본의 마지막 반정부 시위시대

 

물론 냉전시기 전세계에 퍼진 이런 사회현상들은

실상보다는 냉전으로 서로에 대한 실상을 잘 알지 못한채

낭만적이고 좋은듯한 그러한 이미지만 보고

생겨나 유행한 세계적인 사회현상이라 생각되고

이러한 운동들은 소수자들이 사회에 나설수 있게된 기반이 됬다는 평가와

과격한 시위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6.10 민주항쟁 당시 한국의 386세대 , 그러나 이러한 세계적 운동들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냉전으로 인한 정보의 비공개화 ,

불균형등은 여러 환상과 또 부정적인

사례들을 낳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마오쩌둥 역시 말과 행동에 괴리가 있기도 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문화 대혁명은 그렇게

마오쩌둥이 죽을때(1976)까지 이어지다가

그가 죽자 곧 문화대혁명도 끝나게 됬고

문화대혁명 당시 일어난 홍위병들은 사실상 정치적으로 이용된

마오쩌둥의 청소년 친위대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이 죽자 해산됬다고 생각됨)

 

하여튼 문화대혁명은

현대 중국판 '분서갱유' 라고도 이야기 되고있고

과학기술은 중국 건국 초부터 핵무기 개발등

군사적이거나 냉전사회의 대립때문에

나름 보호받았다 할 수 있지만

많은 인문, 문화 , 예술 등이 이때 파괴, 불태워져서

(이를 반달리즘이라 합니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은 전통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자유롭다면 자유롭지만 그런 개념들이 희박하다고 생각됩니다

 

중국 근현대사와 문화대혁명 시기와 중국 전통문화 이야기를 다룬 중국 영화 걸작 '패왕별희' 근현대사 시기의 비극과 사라져가는 전통에 대한 쓸쓸함과 문화대혁명 시기 광기들이 잘 묘사되있음 , 출처 : 패왕별희 (1993) 覇王別姬 Farewell My Concubine

 

이외에도 문화대혁명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은

죽기 전까지 다시 정책 일면에 나섰는데

중국은 문화대혁명 당시부터 '죽의장막(대나무 막)' 이라는

외국에 대한 폐쇄정책을 시행했고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전까지 기본적인 정책으로 유지됬지만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과도 교류해 소련을 견제하려고도 했고

중국은 1971년 UN 총회에서 대만(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표국가로 승인되어

UN 상임이사국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UN 총회에서 중국(중화 인민공화국)이 UN의 중국 대표국가가 되자 기뻐하는 중국측 대표단
UN 총회에서 중국(중화 인민공화국)이 UN의 중국 대표국가가 되자 반대로 굳어버린 표정의 대만(중화민국) 대표단

 

1972년에는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만나

회담을 가지기도 해서 당시 냉전의 완화나

세계적 평화 무드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시 중국과 미국의 공통 목적은 소련 견제였음)

 

역사적인 만남 , 미국 닉슨 대통령과 만나는 중국 마오쩌둥 주석

 

<라봉봉>그렇게 현대중국 시대를 연 마오쩌둥의 시대는

문화대혁명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고

그는 독재자라는 평도 있고 실제 그런 행위를 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국이나 자유주의 국가들은

오랜 기간동안 냉전등으로 공산권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 생각되고

결과적으로는 소련이 망하고 오늘날 공산국가들은 사실상

해체되던가 세계화됬지만

일단 공산권 국가들을 단순히 독재국가라고만 여기고

무시하기에는 자유주의 진영 역시

공산권에게 밀린 적도 있었기에

오히려 자만이나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 생각되고

마오쩌둥 역시 독재자였지만 일단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고

(특히 중국입장에서는)

당대 중국의 지식인으로 중국을 이끈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아직도 화폐에 그의 초상화를 넣는다거나

천안문 광장에도 그의 그림들이 걸려있는 등

그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되고 있고

하여튼 여러 이야기를 남긴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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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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