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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사후

중국 권력은 그의 오랜 부하이자 동지였던 덩샤오핑(=등소평)에게 넘어갔는데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1인자가 되기 전까지

문화대혁명으로 잠시 쫓겨나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등

오랜 인고의 시간과 성찰의 시간을 겪었고

마오쩌둥 사후 그는 마오쩌둥을

 

'공칠과삼'

 

즉 잘한게 (공이) 70퍼센트고

못한게 (과오가) 30퍼센트다

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그를 적당히 옹호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고

덩샤오핑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권력을 잡자마자

그의 실용주의적 노선은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덩샤오핑

 

1979년 중국은 미국과 수교했고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집단경제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개인들이 농산물을 시장에 팔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적극적으로 경제 정책을 시행합니다

 

덩샤오핑은 외국 자본과 기술 도입을 목적으로

중국 동부 해안가 지역에 옛날 청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경제 특구' 를 설치하는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했고

마오쩌둥 사후 오랫동안 '죽의 장막' 이라는 중국의 폐쇄주의 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외국 자본과 기술을 중국에 유치하려 노력했고

경제특구에서는 소득세를 줄여주고 기업의 자율성과 해외 송금 등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정책으로 많은 외국자본들이 중국에 들어왔고

중국은 폐쇄주의 , 가난한 사회공산주의 국가에서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다시 경제가 조금씩 성장합니다

 

중국의 경제특구

 

마오쩌둥이 중국을 건국했다면

덩샤오핑은 중국의 기반을 닦았다 할 수 있는 인물로

그는 옛날 프랑스 유학경험 등을 토대로

서구 사회에 대한 이해와 공산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일단 그는 공산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 보여지지만

본인의 나라와 당이 공산주의를 채택하고 있기에

일단 생존형으로 형식적인 공산주의자 가면을 쓰고 살았다 생각됩니다

 

그는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으로 처참히 무너진 중국 경제를

되살리려 노력했고

 

'고양이는 흰 고양이(자본주의)던 검은 고양이(공산주의)던

쥐만 잘잡으면 된다'

 

라는 '흑묘백묘론' 을 주창하며

사회주의 중국경제에 자본주의 요소를 혼합시켜

부국강병을 꾀했습니다

 

흑묘백묘론

 

개인적으로는 한국으로 치면 마오쩌둥은 김대중 대통령 포지션이고

덩샤오핑은 박정희 대통령 포지션이라 생각되는 인물이고

실제로 덩샤오핑은 이웃나라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을 중요히 여겨

중국에도 한국의 박정희식 경제발전 모델(민간 중심인 서구권과 달리

한국은 국가 중심의 경제발전이 이루어졌음 , 박정희식 경제발전=국가주도) 을 따라했습니다

 

한국과 다른점은 한국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여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했기에

경제건설이 우선시되어 훗날에서야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중국은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나름 시작부터 별타격없이 세력을 확대했고

중국의 사상 자체가 공산주의였기에

건국초부터 진보주의 운동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훗날에서야 경제건설이 이루어졌다고 보여집니다

 

하여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후

무너진 경제기강을 세우며 다시 중국을 일으키려 했고

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개혁개방 시기부터 급격히 늘어난 중국의 GDP

 

이제부터는 그것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90년대부터는 '도광양회 韬光养晦' 를 주요외교 방침으로 정했는데

도광양회는

 

'빛을 감추고 어둠속에서 힘을 기른다'

 

는 뜻으로 일단 미국같은 패권국이나

서구 국가들에게 몸을 낮추고 실력을 기르다

일어나겠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는데

하여튼 경제분야는 밝은 인물이라서

경제분야에는 잘 몰랐던 마오쩌둥의 지시 아래

대규모로 이상한짓을 하다가 수천만이 굶어죽은 중국인들이

이번에는 덩샤오핑의 지시 아래 대규모로 열심히 일을 해서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고 지도자의 힘이 엄청나게 중요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경제가 발전하고 옆나라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냉전이 완화되자

자신감이 생긴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중국 정부에 인권과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베이징의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 이러한 열망은 더욱 퍼져

결국 1989년 6월 4일 중국인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옛날 그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였고

평화적인 분위기속에 처음엔 베이징 공안(경찰) 들도

시민들과 합류하며 평화적인 시위 분위기를 이어나갔는데

결국 선택은 덩샤오핑 손에 쥐어졌습니다

 

덩샤오핑은 인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느냐

시위대를 진압하느냐라는 갈래에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당시 덩샤오핑의 명령>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

 

인민해방군(군대) 를 보내 시위대를 처참하게 진압했고

시위대를 진압하려는 탱크들이 베이징 시내에 들어섰습니다

 

탱크를 막아서는 '탱크맨' 이라 불리는 베이징 시민 , 천안문 사태를 상징하는 사진

 

중국의 민주화운동은 덩샤오핑이 보낸 탱크와 중국군의 총탄에

무참하게 진압당했고

개혁개방을 해 경제발전을 이룩했지만

인민에 대한 이러한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그의

이중성이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고

그 역시 옛날 마오쩌둥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이만큼(건국 or 경제건설) 이나 너네한테 해줬는데

반란을 일으켜 ?'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결국 '천안문 사태' 라 불리는 이 사건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고 많은 중국 민주화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태 이후로 서구 사회를 비롯한 국제 사회의 신용을

잃고 점차 국제 사회에서도 중국에 대한 투자를 크게 줄였고

중국에 여러 외교적 고립을 불러와

중국인들은 다시 외교적 고립을 탈출하려 노력했고

이후에도 덩샤오핑은 경제특구를 방문하는등

중국의 경제발전에 신경쓰다 사망했고

그의 사후부터 그가 뿌려둔 씨앗들이 하나하나 결실을 맺어

오늘날 중국은 일본을 넘어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시대부터 경제발전을 하며 중국에도

인권 문제가 대두되거나 큰 빈부격차가 발생했고

이에 가난하지만 모두가 가난하기에 그나마 평등했던,,

마오쩌둥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중국인들도 있다하고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날에도 중국 사회의 큰 문제로 남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하여튼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이나

극과 극같은 인물이라 둘다 욕먹거나 찬양하는게 심한 인물들 같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대에 크게 무너졌던 경제를 다시 일으킨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역시 권력앞에선 마오쩌둥과 비슷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고

한국 역시 박정희 정부 , 군사독재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는데 과연 권력이 뭐길래 그런식으로 까지 해야하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 역시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의 통제를 받으며

개인의 자유나 인권들이 희생되었고

중국 역시 덩샤오핑 시대에 비슷한 과정을 겪었는데

권력이나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게 무엇인가 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되고

특히나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 등에서 오랫동안 경제가 발달해온

서양과 달리 국가중심으로 급격히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동양 사회는

이런 모습들을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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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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