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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10·26 사건으로 김재규의 총을 맞고 사망한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아 1979년 10.26에 사망할때까지 무려 18년 5개월간 집권했으며

왠만한 한국사 왕들의 재위기간급이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는 사실상 대한민국의 왕이었으며 일찐이었으며

신이었으며 엄석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5년 영광국민학교(초등학교) 에 걸려있는 박정희 사진(육영수 여사 사망 이후 박정희 우상화 작업은 더욱 심해졌다 합니다)

 

정희팍은 역사에서 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

신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수많은 오만한 자들 같이

비극적 최후를 맞았는데

그의 긴 장기집권기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거나 죽게되었고

또 그 속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경제에 집중한 박정희답게 눈부신 경제발전도 있었고

그시절 대한민국에서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으며

아름다운 희노애락이 있었다고 할 수 있어

어두운 시기였음에도

오늘날에도 그 시절의 향수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본 가정 등에서는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삼신기(3신기) 라고

 

'흑백 TV, 냉장고, 세탁기'

 

라는 신문물의 생활도입에 놀라워했고

고속경제성장을 겪으며 패전의 아픔을 씻어내고

1964년 도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일본은

이후에는 신 삼신기라고

 

'컬러TV, 에어컨, 자가용 차'

 

의 도입을 신기해했으며 이러한 신문물들은 일본인들 생활 깊숙히 들어오며

일본 경제발전을 이끈 성장동력이 됬는데

일본식 경제를 모방한 한국 역시 이러한 신문물이 가정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대표적으로 1960년대 '라디오' 의 도입이 있습니다

(화려한 20세기 일본에 비해서는 한국생활사는 단순 , 초라한 느낌도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금성(LG전자)의 'A-501'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초까지 라디오 수신기 보급이 저조한 현실을 극복하고

정책 홍보등을 위해 라디오 수신기 도입을 강력추진했고

 

(단 독일의 히틀러와 괴벨스 등 나치집단 역시

독일 제3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라디오나 매체등을 활용해 선전방송을 했고 히틀러의 영향을 받은 박정희 역시

이러한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1963년 이후부터 라디오 보급대수는 꾸준히 늘어

1970년대까지 250만대에 이르렀고 라디오 황금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 엘지전자의 전신이었던 금성사가

1958년 국산 라디오를 처음 생산했고

1966년부터는 최초로 흑백 텔레비전 생산을 시작하는데

하여튼 역사적인 기업이고 오늘날에도 한국 가정에서

집에 옛날물건 좀 있는 집들은

금성 로고박힌 가전제품들이 하나 둘쯤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티비 금성(LG전자)사의 'VD-191'

 

(오늘날에는 '가전은 LG' 라는 말이 있고 저도 램은 삼성꺼 쓰지만

엘지 모니터 만족스럽게 쓰고 있고 제가 직접 보고 인상적으로 기억한 바로는

조금 웃긴게 공무원들도

고위 공무원들은 LG 모니터만 쓰고있고

하급[짬밥 낮은] 공무원들은 삼성 모니터 씁니다 ㄷㄷ;; )

 

나름 박정희는 국영 방송 독점 체제를 고집하지는 않았고

이에 여러 민영방송이 개국했고

점차 한국식 라디오 문화는 여러 사연과 제보 , 경품 및 여러 낭만과 갬성이 있는

시스템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등

한국인들에게 라디오 문화는

여러 이야기와 추억을 남긴 낭만스러운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흑백 텔레비젼(TV , 티비) 도 도입됬고 (일본의 영향을 받아 '테레비' 라고도 불렸음)

초기에는 티비가 수입 티비만 있거나 사치품이거나 매우 비쌌습니다

1961년 12월 국영 티비 방송 KBS 가 개국했고 처음엔 광고유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여러 난항을 겪다 점차 196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원활해지며

방송사 운영이 정상화됬고

라디오를 통해 귀로 드라마와 스포츠 중계를 들었던 한국인들은

TV로 그런것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서 TV에 대한 갈망이 점차 커졌고

 

처음엔 티비는 전화기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부잣집에서나

한두 집에만 있었고 인기 드라마나 대박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티비 있는집에 옹기종기 몰려들어 티비방송을 보는 진풍경도 벌어졌고

 

(TV 있는 집은 동네에서 떵떵거렸고

TV 있는 집에 아부떨기 바빴다합니다 ,

ㄹㅇ 양반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시대로 진입하는 대한민국)

 

그 시절 이야기를 다룬 만화 '검정고무신' 같이 당대 대다수 만화방 , 다방 ,

일부 구멍가게 등에서는 거금을 들여 TV를 설치하고 푼돈을 받거나 단골 대상으로

TV를 볼 수 있게 영업했다 하며 당대 인기있었던 프로 레슬링이나 권투 , 한일전 같은

인기 스포츠 중계가 있을때에는 가격도 몇배 올라 원성도 자자했다며

여러 추억을 남긴 그시절 티비문화였습니다

 

1960~70년대 만화방에 있던 티비

 

라디오와 티비 등

점차 박정희가 보급하는 자본주의의 마력에 국민들은 열광했고

(정희팍의 빵과 서커스)

 

특히나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TV 프로그램은 스포츠였는데

프로 스포츠가 흥행하려면 스포츠인들의 실력 못지 않게

국민들의 수준과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경제력 , 인프라가 기본 요건이라 하며

당시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기에

많은 자본이 들지 않았던 헝그리 스포츠들이 크게 유행했고

TV에서는 대표적으로 개인종목이었던

복싱(권투) , 프로 레슬링 경기가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1965년 1월 도쿄에서 열린 동양타이틀전에서

대한민국 김기수 선수가 일본선수를 KO로 제압하고 챔피언에 오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로서 작은 집을 한 채 살 수 있는 거금 30만원을 하사했다고도 하고

 

동양타이틀을 획득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김기수 선수 (흐믓한 정희팍)

 

김기수 선수는 1966년 이탈리아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으며

한국인 최초 세계타이틀을 획득해 프로복싱 열기에 불을 붙이고 이후에도

대한민국에는 걸출한 세계 챔피언들이 나와

복싱은 70년대까지 최고 인기스포츠가 됩니다

 

(오늘날 가난한 필리핀의 희망이 된 파퀴아오가 생각납니다)

 

벤베누티를 누르고 환호하는 김기수 선수 , 복싱 열기가 수그라든 오늘날이지만 아직도 저는 복싱은 정말 멋있는 스포츠라 생각되고 그어떤 희열과 감동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박정희는 권투경기 시청을 굉장히 좋아했다는데

박정희는 박정희의 양아들로 불린 '전두환' 과 권투 중계 TV 시청을 자주했는데

전두환은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며 축구와 복싱을 좋아했기에

권투경기가 있는 날마다 박정희의 부름을 받았고

전두환은 그럴때마다 해설위원 못지 않은 구수한 입담으로 권투해설을 들려주며

박정희 대통령을 즐겁게 해줬다고 합니다 (드라마 제 5공화국에서도

이덕화 배우[전두환] 가 박정희 역 배우에게 찰지게 설명하는 장면이 뭔가 꿀잼입니다)

 

대통령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TV에서 가난한 나라 , 약소국인 한국의 선수가 세계 강대국들의 선수들을

쓰러트린다는 것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놀라움과

희열을 가져다주었고

오늘날에도 권투(복싱)는 '헝그리 정신' 을 대표하는 스포츠가 됬고

옛날 한국노래방 모니터에 꼭 한번정도는 나오는 권투 도장이 나오는 뮤비 장면이나

영화화되기도 한 소설 완득이 같이 2000년대정도까지 권투 도장이나 권투는

한국 생활사에 깊이 들어와있었는데 어느날부터 점차 잊혀지고

헝그리 정신또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권투 이외에도 프로 레슬링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1960~70년대 국민적 영웅이었던 김일 선수는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로서

국내 씨름판을 주름잡다가 역도산의 레슬링 기사를 보고

그의 문하생이 되려 일본으로 밀항해

불법체류자로 잡혀 1년간 복역하며 역도산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 끝에

도쿄의 역도산 체육관에 들어가 필살기로 박치기를 연마했고 이후 한국으로 귀국했고

그는 1958년 데뷔해 3천여 차례 경기를 하며 20여번 세계 챔피언이 된 전설적인 한국의

프로 레슬링 선수로서

 

박치기왕 '김일'

 

김일 선수는 덩치 큰 미국 , 일본 선수들과 싸우며

가난에 찌든 당시 한국사회에 희망을 주던 선수로서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습니다

 

김일은 거구의 상대에게 제대로 된 파괴력 있는 박치기를 하기 위해

전매 특허기술로 엄청나게 힘을 싣는 박치기를 사용했고

체중이 잔뜩 실린 그의 박치기를 본 일본인들은 그것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과 흡사하다해서

'원폭박치기(쪽바리 녀석들 자학개그잼)' 라 불렀다고도 하고

 

박치기하는 김일

 

하여튼 김일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한국 사람들은 티비가 있는 집으로 빼곡히 몰려들어

링위의 결투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고

궁지에 몰리다 통쾌한 박치기 한방으로

외국 선수들을 넘어뜨리는 김일선수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찌든 가난을 잠시 잊었습니다

 

김일은 당대 한국과 일본에서 큰 존경을 받은 슈퍼스타이자

위대한 선수였다 할 수 있고

그는 '박치기 왕' 이라 불렸습니다

 

티비가 점차 보급되고

1960년대가 라디오전성시대였다면

1970년대는 흑백티비의 전성시대였다 할 수 있고

점차 극장문화는 티비문화로 바뀌어가게 됬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소비문화가 확산됬고

그렇게 티비속 스포츠도 인기있었지만 티비를 통해 드라마를 보게 되며

한국 드라마들도 발전하기 시작했고 대중문화들도 점차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되고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통제 , 억압적 사회분위기가 생겨났는데

박정희 정부의 독재에 비판해 일어나는 자 , 대학생들도 있었지만

당시 또다른 대학생들은 통기타 , 청바지 , 생맥주 등 소비성이 강한 서구문화에 빠지며

인간애 , 평등사회의 열망 , 자유를 향한 뜨거운 외침 같이

낭만속으로 현실을 도피하려는 모습도 보였고

이에 독재 타도를 외치던 다른 학생들이나 교수 , 대학 언론들은

그런 새로운 청년문화가

외래 스타일에 빠진 채 비판정신을 상실했다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시절 낭만의 상징이었던 청바지와 통기타

 

<통기타 낭만충 반대자들>느그들은 외래문화에 빠져

비판정신을 잃었다 이기야 !!

 

<통기타 낭만충들>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보랑께 ?

 

하여튼 1970년대 청바지와 통기타 , 포크송 , 고고춤 들은

청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고

서울에 있었던 한국 최초의 대중 음악 감상실인 '세시봉' 에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통기타 라이브를 하기도 했고

이중 송창식 , 윤형주 , 김세환 , 조영남 등 여러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 유명가수가 됬다고 합니다

 

세시봉을 모티브로 한 영화 '쎄시봉(2015)'

 

서구문화의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비판도 받은 청년 통기타 청바지족들이었지만

이들의 문화활동은 결국 자유를 필요로 했고

결국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던 기성세대 정희팍과 충돌하게 됩니다

당시 기성세대와 달리 해방 , 광복 이후 태어나 미국의 구호물자를 먹으며

일제의 기미가요가 아닌 미국 팝송들을 듣고 자랐던 이들은

이때 20대 초중반 청년이 되어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며 낭만주의에 빠져들었고

 

당대 세계에서는 문화대혁명 , 68혁명 , 대중음악계의 효시인 비틀즈의 세계정복시대 ,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 등

청년문화 , 낭만주의 , 히피 문화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고

(솔직히 요즘도 히피문화가 힙스터니 뭐니로 퍼지는데

개인적으로는 별로고 솔직히 쌉그지새끼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조국 근대화를 외치며 국가를 병영화 시키는 박정희 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됬고

우리의 박정희는 낭만충 청년들의 장발을 단속하며

'퇴폐풍조 추방운동' 을 벌이며 장발족들을 처단하기 시작했고

박정희의 명령을 받은 경찰들은 가위를 들고 댕기며 장발족들을 잡으러 다녔고

장발족들은 긴 머리를 보존하기 위해 경찰을 만나면 도망치기 바빴고

경찰들은 곤봉과 가위 , 바리깡을 들고 장발족들을 사냥하러 다녔던

리얼 시티헌터 시기이기도 합니다

 

장발충들을 처단하는 경찰쿤

 

이에 반항하려고 아예 삭발하는 청년들도 있었고

당대에도 남성들의 장발은 여러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가난한 나라였고 위생상태가 열악했던 당시 한국인들은 머리에 이가 많아

장발을 하면 이가 살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기에

이 퇴치에 의한 단발령은 박정희 정부의 청년탄압의 좋은 명분이기도 했고

여름에도 길게 머리기른 청년들의 모습을 못마땅해 하는 어른도 있었다 하나

하여튼 1945년까지 자국민을 매우 억압하다가

패전 이후 자유억압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장발에 관대했던 일본에 비해 한국은 이러한 장발에 강경한 풍조가 강해서

놀랍게도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때까지인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머리가 길면 자르라 하던가

학교에서 가위로 구렛나룻을 자른다거나 하는 막장짓들이 행해졌고

두발자유는 학생들의 최대 화두중 하나였고

더 놀랍게도 오늘날에도 한국학교에서 학생의

외적인 모습을 제한 , 강제시키는게 남아있고

 

두발자유 , 인권보장을 외치는 오늘날 한국 학생들

 

(솔직히 저도 머리 염색하고

지나치게 꾸미는 애들은 가정에서 사랑 못받은 애들이라는

저의 고모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강제로 제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그렇게해서는 안된다 생각합니다)

 

이후에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쓰려 하는데

진짜 한국은 21세기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세계 사회에 부끄러울 정도로

오늘날에도 남성강제징병 , 징용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역행하는 모습이 아직도 강합니다

 

하여튼 청년 남성들의 장발충 처단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젊은 여성들의 미니스커트 역시 풍기문란으로 단속했고

미니스커트는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할때 처음으로 입고 귀국해서

유명해졌다하는데 (실제로는 윤복희는 새벽에 조용히 귀국했고 대신

미니스커트를 즐겨입어 유행시켰다고 합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는 윤복희

 

미니스커트는 답답하고 긴 치마를 집어던진 활동적인 신여성의 상징으로

1970년대 한국에서 크게 각광받았고

사실 미니스커트 역시 하류문화이며 정말 좋은 여성을 위한 옷이라 할 수 없고

오늘날 페미니즘계에서 성상품화 상징으로 비판받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조신한 여성 , 긴치마 , 순종적 여성상을 강요하던 사회분위기에 대한

반발로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게됬다 할 수 있고

결국 한국에 미니스커트 붐이 일어나 당시 거의 모든 젊은 미혼 한국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는 매우매우 야한 사회풍경이 연출됬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남자 박정희는 그런 나쁜 미니스커트충들을

풍기문란죄로 처단하기 시작했고 (단 국민들은 올바르게 , 본인은 유명 연예인들과 엽색)

 

안심하라구 ~

 

경찰들은 30cm 자를 들고 길에서 지나가는 미니스커트 여성충들을 잡아세워 길이를 쟀고

무릎 위 15cm 이상은 처벌대상이 됬으며

경찰들이 자를 들고 처녀들 허벅지를 훑어대자

 

'우리도 경찰이나 되자'

 

라는 농담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모습 , 근데 당시 경찰뿐만 아니라 오늘날 학교 생활지도부나 선도부 선생들 역시 학생들 머리나 의복 단속하며 몰래 희롱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던거도 같습니다 (꼭 학교마다 변태찐따교사 한놈년씩은 있었던거 같았습니다)

 

하여튼 당시 남자 장발충 , 여자 미니스커트충들은

그것을 막으려는 경찰들과 숨박꼭질을 했던 시기였고

놀랍게도 오늘날도 헬조선 아니 한국 학교에서는

치마길이 , 헤어스타일을 제한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 역시 오늘날에도 치마를 홀복같이 줄이는 어린 여학생들을 보면

그 아이들의 미래가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일단 저 학생때에도 바지 줄이고 치마 줄이고 검사받을때는 가짜 치마 내고

그런 짓은 성행했고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바지나 치마를 줄이거나 헤어스타일을 변형시키는 것의

유해성을 교육시키는 것이 옳다 생각하지 그렇다고

그것을 강제로 제한하는 거나 오냐오냐 하는 것들 역시 옳지 못하다 생각합니다

 

하여튼 낭만주의나 히피문화는 반정부 문화와도 엮여

거의 극좌나 좌파세력과 연관있다고도 하는데

극(히피 , 낭만충 , 극좌) 과 극(박정희 , 애국충 , 극우)의 혈투가 벌어졌던 시기이고

 

낭만충 녀석들도 문제인게 이 낭만충 , 히피문화의 발원지인 미국에서는

히피청년들이 거지같이 하고 다니며 난교와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고

이후 이러한 잘못된 문화들은 한국 진보계 , 운동권계에 들어가

운동권 강간문화인 떼씹 , 집단 혼숙 ,

무책임한 문화(사실 문화라 할 수 없는데 표현상,,) 로

이어졌다고 생각되고

당대 사회의 우려와 같이

오늘날에도 범죄를 문화 , 낭만으로 포장한 찐따들을

제가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시 평범한 사람들은 질병이나 이가 많아

남자는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빡빡이로 하거나 했고

여자들은 바가지 머리를 했다고도 합니다

 

1970년대 한국인(인싸)들의 패션 , 지금은 다들 노인들,,

 

본격적으로 한국 대중문화가 꽃피워진 시기는 경제사정이 더 나아진

전두환정부인 1980년대라고 생각하지만

참예술가들의 열망은 가난도 막을 수는 없었고

하여튼 박정희 정부 시기에도 그렇게 여러 헝그리 스포츠와

청바지와 통기타 , 포크송과 고고춤 등

대중문화가 발달하기는 했고

또 1977년 제 1회 MBC 대학가요제가 시작되어 큰 인기가 있었고

배철수 , 심수봉 , 노사연 , 신해철 , 김경호 등 여러 많은 가수들이

대학가요제에서 이름을 알려 데뷔했습니다

 

대학가요제 로고

 

<라봉봉>하여튼 한국 현대사에서 웃픈 이야기 , 희노애락도 많이 읽고 느낀거 같은데

원래 더 많은 이야기를 쓰려다가 다음 이야기에 이어써야 겠다 생각할 정도로

풍부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사실 문화 , 예술 , 스포츠 등이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렇게 치면 돈이 안들어가는 분야가 결코 없고

한국에서 돈버는 인식으로 만만히 생각하는 공장 , 기술분야도 사실 공학분야로서

엄청난 노력과 재능이 필요한 분야이고

과학은 옛날 근대서양귀족들의 취미생활이기도 했고

수학은 고대 귀족 철학자들 , 음악은 귀족과 왕족의 취미생활 ,

역사학은 제왕학이라고도 불리며

엄청난 금수저들이나 하는 분야라는 등 워낙 이상한 개소리들이 많은데

정작 그 분야의 위인들은 금수저 , 흙수저 할 것없이 다양한 출신들이 있고

괜히 찡그린 인상쓴 얼굴로

 

'XX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니깐 못함'

 

같은 패배주의적 마인드 좀 남에게 퍼트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자신이 재능이 있다면 형편을 떠나서 노력해서 빛낼 수가 있다 생각하고

꼭 축구나 야구가 돈이 많이들어 80년대서야 발전했다기보다는

남미나 쿠바같이 가난한 나라에서도 훌륭한 선수들이 나오기도 해

꼭 1960~70년대 복싱이 헝그리 스포츠고 가난한 나라를 대표하는 운동이라 보기도 어렵고

예술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하지만 하여튼 가난했던 1960~70년대에도 여러 문화들이 일어났고

그때에도 그시절 인싸녀석들은 형편 생각하지 않고 막 지른 경향이 있었다 생각하고

살아남은 녀석들은 오늘날에도 티비에 나오는 유명 예술인 , 문화인 , 스포츠인이 됬다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헝그리 정신' 이 실종됬다기보다

다른 분야에서 또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고도 생각되지만

인터넷 뉴스에서도 스포츠도 온통 축구나 야구얘기만 지겹게 하고 복싱이나 프로레슬링같은

아름다운 근성 스포츠들 이야기는 없는거 같아 아쉬운 면도 있다 생각하고

오늘날 많은 운동선수를 꿈꿨던 사람들이 치킨집이나 다른일 등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봐서

안타까운 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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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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