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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 시기 교육정책>

[우골탑]

[한국 사회와 학연]

[한국 중고등학교 서열화]

[무즙 파동]

[서울유학과 고학생]

[중고교 평준화]

[삐뚤어진 교육열]

[한국의 대학 입시]

<라봉봉>

 

[우골탑]

1950년대에는 이승만정부때부터 한국전쟁을 떠나

높은 교육열을 보인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학교를 가서

그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에는 학생들이 꽉차서 다 수용하지 못했기에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할 정도였고

이를 콩나물 시루에 콩나물들이 빽빽히 들어선것과 같다해서

'콩나물 시루 교실' 이라 했다고 저번 이야기에 이야기 한 바가 있습니다

 

콩나물 교실 , 한국의 이러한 콩나물 교실은 사실상 90년대까지 이어지다 출생율이 급격히 감소한 2000년대 들어서부터 사라져갔다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시기 한국 교육정책과 한국 학교들은 어땠는가 하면

이승만 정부 말기인 1958년은 엄청난 아기들이 태어났고

세계 2차대전 종전 이후 서구권이나 일본에서 엄청나게 많은 아기가 태어나

아기가 폭탄같이 터졌다고 비유되는 '베이비 붐' 처럼

한국사회 역시 한국전쟁 이후 특히 '58년 개띠' 들이 너무 흔하다라 할 정도로

58년에 큰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났고 이를 58년 개띠라 부르는데

58년 개띠 및 당시 급증한 어린이들은 미군의 구호물자를 먹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팝송들을 듣고 자라게 됩니다

 

이 아이들이 국민학교(초등학교) 에 들어갈때에도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월등히 높았고 옛날 과거시험같이 학벌이 신분상승의 사다리라 여겼던 한국인들은

당시 농경사회였던 한국에서 재산 순위 1위나 상징이 당연 '소(음메)' 였는데

자식 대학을 보내려 소를 팔아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대학을 보냈기에

한국사회에서 대학교는 '우골탑' 이라 불릴 정도였고

4.19 혁명이나 수많은 민주화시위 , 운동때에도 대학생과 교수들이 앞다투어 나설 정도였으며

이러한 모습에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 역시 어려워했을 정도로

당시 대학교와 대학생들은 소수 엘리트나 지성의 상징이라 여겼습니다

 

한국인과 소 , 한국을 대표하는 동물이 호랑이라면 농경과 인연이 깊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친숙한 동물은 아마 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학벌주의를 상징하는 서울대학교 정문의 조형물

 

박정희 정부 당시 대학진학률은 낮았고

대부분 청소년 , 청년들은 농촌에 살다가 급속한 도시화 , 산업화가 진행되자

중고등학교정도만 마치고 서울 , 도시로 상경해 공장에 들어가거나 일을 하는게 대다수였다 하고

대학교는 소수만 갔고 (주로 부잣집) 한국정부 , 사회에서도 대학생의 대우가 높았고

당장 노동자 인권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신 전태일 열사도

1970년에 '대학생 친구 한명있으면 좋겠다' 말할 정도로 대학생은 지성의 상징이자

행동하는 양심 , 깨어있는 지식인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단 일제강점기 나온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이나

당대 학벌의 정점이었던 오늘날 서울대 건축학과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 를 나온

시인 '이상' 같이 그 이전인 일제강점기때에도

학벌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나 무기력감은 있었고

 

오늘날 한국사회는 대학을 가는 청소년 , 청년이 안가는 청소년 , 청년보다 많을 정도로

 

'개나소나 대학을 간다'

 

라는 말이 나돌정도로

과도한 대학들이 들어선 시대가 되서 옛날 대학이야말로 진짜 권력과 지성의 상징이자

출세의 지름길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학벌주의는 당시나 일제강점기에도 만능이 아니었고

한국과 비슷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인 일본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돈 드라큐라(1979년 작품 , 이 만화 일거로 기억)' 에서도

 

'요즘에는 대학을 나와도 호스티스(술집 접대부) 가 되는 시대다'

 

라는 이야기가 나올정도로 옛날에도 대학 안나와도 잘사는 사람도 있었고

명문대 나와도 망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하여튼 당시에는 대학수와 대학생 수가 적었고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한국의 '높은 자리' 에 있는 사람들 , 오늘날 정치인들이나

의사 , 판사 등 여러 고연봉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을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대학에 환상을 가지지는 말자는 의미)

 

[한국 사회와 학연]

일단 당시는 학교가 수직서열화가 강했고

당연 학벌주의의 정점은 오늘날과 동일하게 SKY 대학으로 불리는

서울대(S) , 고려대(K) , 연세대(Y) 였고

오늘날에도 '학연' 이라고 많은 한국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 능력과 관계없이

서로 같은 학벌을 가진 선후배들을 끌어주고 밀어주며 한국 사회를 장악하게 됬습니다

 

<한국 졸업식 노래>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당시 한국사회는 가난해서 동생들은 언니 오빠들이 물려준 책으로 공부한

시대상이 담긴 노래로 한국인들은 졸업식때 들어봤을

일단 노래 자체는 아름답고 뭉클하고

감동적인 면이 있는 노래입니다)

 

70년대 한국의 졸업식 사진 , 당시 졸업식은 오늘날과 달리 떠나는 선배학생과 떠나보내는 후배학생들의 눈물의 이별의 행사였다고도 합니다 (오늘날 고등학생보다 당시 고등학생들에 기대감이 컸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 시기 한국에는 대학 이전에도 당시에는 명문 중 , 고등학교가 존재했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SKY 대학)같이 대표적인 한국사회의 3대 입시 명문고로

경기고 , 서울고 , 경복고가 존재했는데

고교 평준화 이전까지

이 학교들에서는 한 반에 대부분이나 절반 이상이 서울대를 갈 정도로

전국의 내노라하는 수재들이 모여서 한국사회 학벌의 정점인 서울대를 독식하게 됬고

 

당시 경기 , 서울 , 경복고 학생들의 어마어마한 서울대 진학율

 

특히 경기고가 고등학교계의 서울대였기에 이 학교 들어가는 것은

서울대 합격이라 여겨졌다 할 수 있었고

특히 경기고(K)-서울대(S) 테크트리는 한국에서 'KS 라인'이라 불릴 정도로

선후배 사이에서 특권 , 엘리트의식을 공유하며 밀어주고 끌어주었고

한국사회 요직이나 대기업들에서도 이러한 명문고, 명문대를 높게 여겨주었고

데려가려고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시절 고소영(고려대 , 소망교회 , 영남) 이나 강부자(강남의 부동산 자산가) , S라인(서울대)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고려대라 고소영이미지가 강했지만 당시 정부도 KS라인이나 서울대가 장악했습니다

 

(막말로 머릿속에 꾸역꾸역 쳐넣는 입시공부라는게 USB 하나에 다 들어가고도 훨씬 남는 지식인데

그거 잘외운다고 높은 수준의 인재라 여긴 한국사회였고

이는 자연히 국가 ,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고

이러한 문제는 한국사회뿐만 아닌 미국 , 일본 , 서양 선진국에도 존재하고

이에 오늘날까지도 이런 병폐가 많습니다)

 

[한국 중고등학교 서열화]

일단 엘리트의식 , 선민의식 , 귀족적 성향이 강한 박정희답게 

박정희 정부시기 (1960~70년대) 한국 중고등학교 서열화는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고

 

저의 아버지가 특히 52년생으로 이 3대명문고중 하나인

경복고를 나오셨는데 아버지는 어렸을때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고

아버지나 아버지 친구 , 선후배들은 경복고를

오늘날에도 엄청난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 그때의 추억속에 잠들어 살고있기도 합니다

 

일단 어렸을때부터 아버지따라 경복고 동창회

(보통 수준이 아니라 무슨 경복새겨진 명패도 주고

재벌회장 , 대기업 사장들이 동창 , 동기들이라

학교 운동장에 놀이기구도 있고 웬만한 대학축제급으로 엄청 거대했음)

 

에도 여러번 갔고

어렸을때부터 하도 경복고 시절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서 당시 학벌주의 , 학교상을

한국 현대사 서적에 나온 자료와 아버지 증언으로 교차검증이 되기도 했고

아버지가 나이도 많아 현대사에 대한 많은 교차증언을 들었고

이 글 쓰기전에도 많은 자문을 얻었습니다

 

일단 당시 국민학교 어린이들은 명문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찍부터 엄청난 입시경쟁을 치뤄야 했고

역시 3대 명문중에는 경기중 , 서울중 , 경복중이 있었습니다

 

한국 중고교 입시의 정점이었던 경기고 마크

 

[무즙 파동]

한국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겪으며 기존부터 있었던 높은 교육열과 맞물려 들어

이시대 한국 어린이들도 오늘날 한국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과도한 경쟁에 내몰렸고

대표적인 사건이 터졌는데

바로

 

'무즙 파동'

 

입니다

 

1964년 중학교 입시에는

자연 18번 문제에서 엿만드는 재료에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자연』 과목

※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① 찹쌀 1 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② 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③ 이 밥에 물 3 ℓ와 엿기름 160 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④ 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⑤ 짜 낸 국물을 조린다.

17. 엿기름이 녹말을 당분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위의 여러 가지 일 중 어느 것인가? 그 번호를 쓰시오.

18. 위 ③과 같은 일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 디아스타제 ② 꿀 ③ 녹말 ④ 무즙

 

걍 평범한 한국의 토속적인 문제같지만

52년생인 저의 아버지도 (나이가 고령이심) 당시 경복중 들어갈때 이 시험을 봐서

평소 공부한대로 '무즙' 이라 찍었는데

답은 놀랍게도 '디아스타제' 였고

 

당시 시험을 치고 경복중에 입학하신

아버지 말로는 당시 서열 1위 경기중은 3~4개(2~3개였나) 틀려야 갔고

2위 서울중은 4~5개 , 3위 경복중은 7~8개 , 그이후 틀린사람들로는

지방 이름이 붙은 지방 명문중들로 나뉘었다는데 (아버지는 총 7개 틀림)

지방 유지들은 걍 적당히 타협해서 지방 명문중고등으로 자식을 보내거나

경기 , 서울 , 경복에 보내려 서울로 유학시키거나 했다 합니다

 

그렇게 무즙문제가 나온 시험이 종료 된 후

이렇게 한두문제 차이로 명문중이 갈리는 상황이었기에

예민한 부잣집 사모님 , 엄마들이 치맛바람을 앞세우며 무즙이 왜 틀리냐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실제 무즙 안에는 디아스타제가 들어가있고

당시 국민학교 6-2 자연 교과서에는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 있다'

 

라는 내용이 존재했기에

당시 화난 아줌마(한국사회에서 입시문제는 주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강한 부분 !) 들이

항의하며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곤란해진 출제위는 이 문항을 백지화해 모두 점수를 주겠다고 발표하자

경기중학교 등 명문 중학교 지원자 학부모 30명은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몰려와 극렬 항의했고

그러자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처음 결정을 번복한 다음

당초 정답대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했고

결국 이대로 채점이 완료된 다음 합격자를 발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 교육감은 무즙으로 엿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는지

 

'무즙으로 엿이 만들어진다면, 무즙을 답으로 쓴 아이들을 구제해 보겠다'

 

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었고

분노한 학부모들은 직접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왔고

이에 엿을 보이며

 

'엿먹어라 !'

 

라는 말을 해 엿먹으라는 말이 'FUCK YOU' 를 뜻하는 한국의 욕설이 됬다는

설도 존재하고 (물론 그 전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엿먹으라는 욕이 있었다 합니다)

 

무즙파동 당시 신문기사

 

결국 이 일은 재판까지가서 1965년 재판부는 학부모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학부모들 편을 들어주고 무즙을 써 경기중에 떨어진 학생들은

다른 중에 다니다가 당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학기중에 경기중으로 전학을 가게 됬고

이 과정에서 일부 부유층 , 사회 지도층 자녀 21명이 묻어가기로 경기중에 부정입학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됬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조국 법무부장관 딸 조민 사건은 사실 빙산의 일각입니다)

 

하여튼 당시에도 빽으로 있는집 자녀들은 경기 , 서울 , 경복 등 명문중고등에

돈이나 뒷구멍으로 입학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하고

단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수시나 다른 방식의 입학제도가 전무했던 시기고

시험을 거의다 맞춰 자부심이 강했던 수재학생들이 모인곳이었기에

그렇게 입학한 자녀들은 소수였고 뒷소문이 나돌았다고도 합니다

 

[서울유학과 고학생]

일단 박정희 정부 한국사회는 그렇게 정부 , 한국사회의 학벌주의 우대정책과 맞물려

학벌주의 경쟁이 가속화되던 시기였고

당시에는 돈있는 집도 해외에 가는게 자유롭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많은 지방 부호 자녀들은 자식들을 이런 3대 중고등학교에 보냈고

일찍이 성년이 되기전에도 아이들을 서울에 '유학' 을 보냈습니다

 

주로 서울사는 친지집에 머물거나

돈은 없는데 학교공부 잘한 학생들은 서울에 상경해

일을 하며 이런 명문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저의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장사로 돈을 좀 버신분이라

집에 식모(가정부를 당시 부르는 말 , 여성) 랑 경기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는데

둘 다 17~19살로 성인이 안된 나이였고

일단 가난한 형편에 자녀를 많이낳은 농촌 등에서 밥먹일 식구를 줄이려

20세가 되기도 전에 서울로 상경시켜 부유한 집에 식모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고

식모들은 주로 작은 방에서 지내며 집안일을 하고 적은 돈을 받고 일했다하며

또 경기고 다니는 학생의 경우 아버지 집에 머물며 (입주과외 , 입주교사라고도 부름)

하숙비 대신 아버지랑 아버지 남매들 과외를 해주며 머물렀다 합니다

 

(실제 24살까지는 청소년이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날 20대도 애취급 받는 사회현실과 다르게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회진출이 빨랐고

중고딩 나이만 되도 어른 대우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참고로 학교공부를 잘했던 퀴리부인도 이렇게 입주 가정교사일을 했다고도 합니다)

 

하여튼 당시 이렇게 일을 (주로 과외) 하며 서울에 상경해 학교를 다닌 학생들을

'고학생' 이라 불렀고

당시 고학생들의 이미지하면 고지식한 안경 , 까만 명문 중고등학교 교복 ,

이사할때 보따리에 책과 밥솥 등이 있었다 이야기 되는듯 하고

 

(특히 저의 친척중에도 경기고-서울대 나오신분이 있는데

백두혈통급 학교부심 및 상당히 고지식한 느낌이 강하시고

[4시간씩 자면서 전교가 아니라 전국 몇등 하셨다 합니다]

 

이러한 한국 학벌주의 이야기들이 잘 쓰여있는 '먼나라 이웃나라 - 한국편' 의 저자

이원복 교수나

정치인 '황교안' 이 실제 경기고-서울대 테크를 탄 사람들이고

딱 이런 고학생이나

고지식한 명문학교 수재 느낌에 적합합니다)

 

한국사회에서는 가난한 형편에 공부하는 이러한 고학생들을 높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던 훈훈한 미담등도 여럿 있습니다

 

단 저의 아버지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명문 중고등은 가난하게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보다는

대부분 부유층 , 정치인 자녀들이 입학했고

다들 사회에서 방구깨나 뀌는 집안 사람들 자녀들이 모인 학교라

(부유층 자녀중 여자들은 당시 남성과 어울리면 문란해진다는 통념으로

경기여자중고등 - 이화여대 테크를 타게함 ,

이에 서울대 남자와 이대 여자의 선자리나 결혼등이 이어지기도 했음)

 

그나마 인상깊게 기억하는게 아버지가 경복고다닐때 동창인 정치인 이계안이 집안이 어려워

도시락대신 수돗물을 마셨다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고

 

어려운 형편의 학생은 소수였다 하고

아버지 동창 , 선후배들은

현재 대통령 빼고 정치인 , 사회의 고위직 , 의사(현대 정주영 주치의 ??) ,

판사 , 연예계 대표 , 명품회사 사장 등

여러 분야에 포진해 있고 실제 집안도 대부분 좋았다 하며

소풍때 동창인 오늘날 SM 엔터테이먼트 회장인 이수만이 기타들고 왔다거나

(이수만 회장도 무즙파동시기 입시러임)

 

삼양라면 회장 , 삼성 이재용 , 현대 정몽구가

경복고 출신이라거나 하는 등 그냥 어마무시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일단 그시절이야기를 다룬 만화 검정고무신이나

여러 매체에서 '그시절 가난했던 우리네들'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과는 거리가 멀었고

한국 현대사는 이러한 모습도 모두 기록한다 할 수 있습니다

 

단 경기고가 대기업 총수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도 하고

하여튼 한국 사회의 요직을 장악한 명문중고등-서연고 라인이었고

오늘날에도 이러한 출신의 중장년층들은 자식에게도

학벌주의 , 의사 판사나 전문직등을 대물림 시키려

자폐적 교육이라 할 수 있는 입시등에 수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고있습니다

(병폐)

 

한국사회의 입시병폐를 다뤄 흥행한 드라마 'SKY 캐슬' , 근데 JTBC 드라마 특징이 사회 병폐를 노골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오바하며 다루는 경향이 있는듯하고 실제 저렇게 오바 안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학벌주의는 문제입니다

 

[중고교 평준화]

하여튼 경기고 , 서울고 , 경복고에는

한 반의 과반 이상이 서울대 , 연세대 , 고려대 , 사관학교 ,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 한의대 등

당대 내로라하는 명문대를 독식하듯이 했는데 (단 옛날에는 서울대 독식구조였다가

점차 연세대 , 고려대가 치고올라와 오늘날 SKY 대학이 됬다 합니다)

 

이미 시험점수 올리기에는 통달한 녀석들이 들어가는 수재고등학교들이라

당연한 현상이었고 이전 무즙파동 등의 여파로 이미 중학교 평준화가 시행되

1971년부터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어 한국사회에는 명문중들이 사라졌고

 

1969년 2월 서울 지역에서 처음으로 중학교 무시험 추첨 배정이 시작되 국민학생(초등학생)들이 물레 모양의 추첨기를 돌려 중학교를 배정받고 있는 모습 (이 물레때문인지 평준화는 '뺑뺑이' 라고도 불립니다)

 

이러한 것들이 심화되자 결국 고등학교 역시

 1974년 당시 정부 직할이었던

서울특별시와 부산시에 최초로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가 적용되

박정희 정부의 철퇴를 맞고 평준화 되게 됬습니다

 

(이로 인해 경기 , 서울 , 경복등 명문고들에서는 후배들을

평준화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고도 하고

근데 이렇게 철퇴 때려봤자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학벌주의의 힘이 아직도 강력히있고

[당장 기업이나 공무원들도 현장직이나 기타직종이 아닌 경우등에는 대졸이상을 채용]

근본적 문제를 뜯어고치지 않는한 한국사회 학벌주의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봅니다)

 

[삐뚤어진 교육열]

고교 평준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갔고

명문고교의 위상은 사라져갔다지만 오늘날에도

이러한 '그들만의 리그' 같은 거나 특권의식 등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또다시 외고나 과학고 , 자사고 등 학교들이 부활했고

사실 한국사회에서 가장 힘이 강한것은 대학이기에

중고등학교는 명문중고를 나와도 아무런 힘이 없지만

학연과 지연 혹은 '질떨어지는 가난한 애들' 과 어울리게 하지 못하게 하려

일부로 부유한 집안 학생들이 몰리는 외고 , 과학고등에 보내는 경향이

오늘날에도 있고 (드라마나 영화속 악역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오늘날에도 임대아파트랑 입주아파트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역겨운 놈년들이 있을 정도로

천민자본주의 , 노예근성이 만연한 한국 사회의 부끄럽고 어두운 민낯입니다

애초에 가난한 애들이랑 어울려 나빠질 정도 애면

이미 애가 부모닮아 집안 덩치값도 못할 만큼 수준이 낮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강남 등 입시열이 높은 지역에서는 고교 자퇴후

검정고시 치고 바로 명문대 입학하는 테크도 유행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등

하여튼 대학의 힘이 강한 오늘날 한국 , 미국 , 서구선진국들의

입시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사실상 SKY나 의대 , 치대 , 한의대 (고소득 전문직) 는 양반계급 ,

나머지는 평민이나 노예라는 우스개소리가 나오지만

웃고만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같이

참 미개하고 사악한 쓰레기같은 사실상 현대판 신분제의 일환이라 생각도 됩니다

 

오늘날 이야기되는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머시기머시기' 등등 대학서열 , 또 서울대 위에 의치한약수라고도 하고 의대 치대등 전문직과 연결되는 학과는 지방대여도 서울대보다 성적이 높아야 들어가기에 보통 성적 높은순으로 지방의대까지 다채워지면 그때부터 서연고 서성한이 시작된다고도 합니다

 

하여튼 1960~70년대까지 이런 중고교 입시 폐혜나 입시경쟁 등이 있었는데

이런 것이 폐지된 이후 (한국 학벌계는 박정희 , 전두환 등 나름 보수계가 폐지하거나 칼질했지만

오늘날 보수계에서는 이러한 수직적 제도나 시험으로 치는 입시가

뒷구멍이나 부정입학 가능성이 높은 수시보다 차라리 더 공정하니

다시 존치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많은 공감을 얻고 있지만

저는 어짜피 정시나 수시나 결국 입시를 여유있게 할 수 있는

돈많은 집안에서 유리하다 생각합니다)

 

하여튼 과도한 입시경쟁에 어린 학생들이 가출했다는 이야기도 나타날 정도로

병폐 역시 심각했으며

중고교 평준화 이후 한국 군사정부에서는

학생들을 불안 ,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해방시켰다며 자찬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대학입시에 대한

입시경쟁을 잠깐 유예한 것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 입시]

58년 개띠나 베이비붐 세대들은 70년대부터 대학을 가게 됬는데

이때 대학 가는 사람은 오늘날보다 적었지만 이때에도

대학문(서울대 등) 은 좁았고

이즈음 문교부 관련 교육연구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개인 및 집단 과외비로 연간 2조1000억 원 ,

학원비로 1조1000억 원이 지출됬으며

이 같은 과외비용은 정부 예산의 6%, 전체 교육예산의 3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4당 5락'

 

4시간 자고 공부하면 서울대에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이

유행처럼 나돌았고 주변에 서울대 나오신 틀딱들이 이런거로

4시간 잣다며 부심부리는 분들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 4시간 자는 것은 시험기간에만 그랬거나 허세라 생각되고

사람이 계속 4시간씩 자면 대장암 걸리거나 죽는데

꼭 부지런한 '척' 하는 사람들이 목숨 위험한지 모르고

4시간이나 5시간 잔다는 등 하는 경향이 있는게 이해가 안됩니다

 

(서구선진국 역시 입시병폐가 참 크지만

한국은 유독 입시열이 세계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높고

어짜피 시험공부라는게 암기위주기에 진정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은

과거시험 보던 조선시대에도 제기되던 문제였고

한국인의 삐뚤어진 애국심 같이 삐뚤어진 교육열이라 생각합니다)

 

학습이라는 명목으로 오늘날에도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아동 · 청소년 학대 ,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반드시 밤 10시부터 2시까지 자야 키가큰다는데 하여튼 아동학대가 따로 없습니다 , 출처 : SBS 뉴스

 

1960년대에는 대학입시가

본고사라고

학교별로 따로 치뤄진 시대였고 다만 오늘날같이 입시제도가

복잡하지는 않아 당시 수험생들은 학교공부에만 매진하면 됬다 합니다

(단 이때는 중고등 서열시대라 국딩[초딩]때부터 입시경쟁판에 뛰어듬)

 

옛날 시험장 입구에서 학생들의 시험을 기다리며 정문에 엿을 붙이는 학부모들 , 엿같이 한번에 착 붙으라는 의미로 요즘은 엿을 붙이지는 않지만 수능기도회가 종교단체에서 대규모로 열린다거나 엿을 나눠준다고도 합니다

 

1969년부터는 대학입학예비고사가 도입되

대학별로 각기 치뤄지던 입시와 달리

전국적으로 동일한 시험이 치뤄져 오늘날 수능같은 제도가 됬다 할 수 있고

한날 한시에 치러지는 전국 예비고사 시험장에는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학부모들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합니다

(과거시험 시즌 2)

 

1972년 숙명여고 예비고사 수험장을 방문한 문교부(교육부) 장관 , 학생들 표정이 영 좋지않습니다

 

좁은 대학문을 통과하려고 수많은 학부모들이

과외와 입시판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자

당시 항간에는

 

'과외 잡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겠다'

 

는 말이 떠돌 정도로 과외비 부담이 컸다 하고

그러다 1980년대부터 신군부의 전두환이

그러한 민심을 다독이려 시행한 '학력고사' 시대가 펼쳐졌고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방안이라는 명목으로 교육조치를 발표해

학원 , 과외를 금지시켰고 (그러면서 전두환 본인이나 돈있는집들은 몰래 뒤로

자녀들 귀족 족집게 과외 시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정치인들 내로남불이란 참 ^^])

 

그러다 학력고사로 지식암기 및 점수 줄세우기식 대입이 이어지다

1994년부터 암기교육이랑 뭐가 다르나 싶지만

단순 지식암기를 지양하고 사고력 쑥쑥잼이라고 주장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 오늘날 제도인 수능시험이 등장하고

수시제도 등이 크게 확대되어 여러 논란이 있는 게

(수능이 과거시험이면 수시는 음서제에 비유됨)

오늘날까지 이어지는게 한국 대입시험의 역사인데

 

하여튼 1960~70년대에도 이런 입시수직서열화가 강했고

오늘날도 강한데 도대체 한국사회에서

입시나 학벌주의 , 학연등의 병폐가

이름 , 간판만 바뀌었을뿐 50년동안 뭐가 변했는지도 의문입니다

 

<라봉봉>사실 대학문제등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라 볼 수두 없고

저 어렸을때에도 '공부의 신' , '80일만에 서울대 가기' 같은 근본없는 프로그램들이 나왔는데

이러한 문제도 결국 동경대(도쿄대) 를 최상위로 쳐주는 일본식 입시제도의 영향을 받은

풍토에서 나왔다 할 수 있고 일본식 교육은 독일이나 서양의 군인 , 노동자 단기양성에서 나온

주입식 학교교육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한국은 이러한 서구식 교육도입이

과거시험같은 입시열과 합쳐 유독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됬다 할 수 있고

자기들끼리 우물안에서 서울대나왔다고 서울대 합격한 눈물감동실화 책도 쓰고

서로 천재니 뭐 해주지만

정작 입시제도같은거 외우고 허비하느라 창의력이 파괴되

외국 따라하기에만 급급하지 기초과학분야에서 노벨상 하나 못타는 나라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애타는 부모의 마음을 이용한

장사꾼들이 수많은 간절한 학부모의 지갑을 노리고 털어가고 있고

또 정부 역시 이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못하고 오히려 권장하는 분위기이며

사회상 역시 이러한 분위기속에 대학들이 엄청나게 많아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대학진학을 하게 되며 대학에 퇴직금 , 소중한 돈들 , 혈세들을

쏟아붇는 현실이고 사실상 한국인들 모두가 이러한 역겨운 병폐를 알고 있음에도

제대로된 행동하는 사람도 없고 답답할 지경이라

특히 한국 교육제도에 대한 저의 분노심은 상당합니다

 

단지 시험문제를 잘 외워서 된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 명문대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실제 능력도 없고 학계와 사회에서 아무런 공헌도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한국 교육제도의 약점을 파고들어 서열을 나누고 , 혈세를 도둑질하며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교육은 상당히 취약하다 생각되며

마치 폭탄돌리기나 비트코인같이 모두가 지는 다단계게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라 생각되고

저는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후세에게 이러한 잘못된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잘보는 학생을 수재라 부른다고 하는데

항상 한국 드라마나 일본만화와 애니 , 스포츠계에서도

싸가지없고 똑똑한 수재와 기묘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마음따뜻한 천재의 대결은

주요 떡밥과 클리셰입니다

 

수재는 시험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통 의미하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천재라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고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수재들이 있고

매학기 , 매년마다 닫힌 그룹내에서

전교 1등 , 전국 1등 , 시험 만점자들이 무수히 많이

나오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사회의 발전을 돕는다고는 할 수 없고

학벌에 편승하는 것은 사회의 암을 키우는 것과 다를바 없다 생각하며

결국 천재들이 이러한 닫힌 세상을 부수고 열린 세상을 열 수 있다 생각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다룬 칼럼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는데

옛날부터 꾸준히 이러한 글들도 분명 나오고 만들어진다는 것은

학벌주의에 패배한 사회에 살고있는

우리들 역시 분명 잘못된 것에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암기에만 집중하며 시험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과 세상을 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 불의에 분노할줄 아는

천재들이 많이 나오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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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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