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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임팔 작전]

[도쿄 대공습]

[옥쇄 자살]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

[원자폭탄 투하]

[무조건 항복]

[일본의 전쟁범죄]

<라봉봉>

 

[임팔 작전]

(이전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그렇게 1942년 미드웨이 해전 및

이후의 여러 해전등으로

일본 해군은 궤멸되고

태평양 전쟁 초반 고전하던 미군은 완벽히 승기를 잡게 됩니다

 

처음엔 미군도 고전했지만

곧바로 압도적인 공업기반을 이용해 순식간에 열세를 극복했고

일본제국은 사실상 미드웨이 해전부터 망한 것입니다

 

물론 현재는 일본사 이야기이기에

다시 일본군 이야기를 하자면 ..

 

1942년 일본군은 버마(미얀마) 를 매우 쉽게 점령했는데

당시 버마의 영국 , 미국군이 너무 허약해서 입니다

 

그러다 점차 연합군(영국 , 미국) 의 전력이 강화되자

일본군 내부에서 불안감이 싹트었고

이에 일본군은 인도로 진격하겠다는 과감한(망상의) 작전을 구상합니다

 

1944년 일본군은

인도까지 손에 넣기 위해 임팔지역을 공격했는데

지휘관은 이전 중일전쟁을 일으킨 문제의 , 일본제국군 최악의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였고

 

일본제국 최악의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인상은 선하게 생겼습니다 ;;)

 

임팔 작전

 

무타구치 렌야는

열악한 물자에서 임팔작전을 강행하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옛날 칭기즈칸이 했던 것처럼

약탈로 보급을 취하면 된다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가지고 일본군을 출병시킵니다

 

<무타구치 렌야의 주장>

1)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2)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3)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하나같이 말도 안되는 일본군 대장의 주장이었고

군인들은 전투에 엄청난 고열량을 소모하는데

 

(보급 , 배식은 군대의 기본중의 기본으로

오늘날 한국군도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적은 양의 밥을 먹으면 명령거부나 식군기 위반으로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글로 진격하는 일본군은

더욱 더 많은 열량이 필요했고

보급보다 정신력이 중요하다 주장한 그의

엉망진창 , 무리한 공격으로 일본군은

3주치 식량으로 4달을 버티다 굶주림 , 말라리아 등으로

총병력 86000명 중 20300명이 전사하고 30000명이 병사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자멸합니다

(영국군은 총 150000명 병력 중 17500명 전사)

 

이 전투가 유명한 전투인 이유는

인도공격이어서가 아니라

일본제국군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모습이 드러나서인데

당시 일본군의 패배원인은 가장 먼저

무능한 지휘관 무타구치 렌야의 존재 그 자체였지만

그 뿐만이 아닌

폐쇄적이고 절대복종적인 경직되고 잘못된 조직문화 ,

일본인의 체면문화 등이었고

당시 일본군은 윗사람이 무언가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려도 ,

작전실패가 예상되는 상황에도 사령관의 체면을 고려해 철수하지 않는게

비일비재했고 이는 임팔작전때만이 아닌 일본제국군 내부의 고질적 문제였습니다

 

또 렌야는 지휘관으로서 더럽게 매우 무능한 인물이기는 했는데

실무능력보다 학연 , 인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던 일본군 특유 파벌주의로

육사-육군대학 파벌의 렌야는 중장까지 승진하게 됬고

그 결과는 일본군의 자멸로 이어집니다 ..

 

무타구치 렌야는 요즘말로 트롤링(팀킬 등)을 엄청나게 잘한

일본제국군 내부의 적중의 끝판왕으로서

한국의 숨겨진 독립운동가라는 별명이나

일본군 3대오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또 마음은 순수한 인물이었어서 ;;;

전쟁 포로들이나 민간인 학살 범죄에는 일절 손대지 않은 지휘관이었고

자신의 무능으로 자신의 병사들이 대규모로 죽어가기는 했지만

정작 지휘관으로서 무능했을 뿐이지 인간으로서 전쟁범죄에는 참여하지 않았기에

 

(일본제국군 지휘관들 중 똑같이 무능했음에도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지휘관들도 많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전범재판에서도 구제되

일본 자국내에서는 똥취급을 받으며 까였음에도

평온한 삶을 살게됩니다

 

이후에도 1962년 영국군 관계자가 무타구치 렌야를 조롱하려

'임팔작전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당께 ! ㅋㅋ'

라는 서한을 보내자

렌야는 진짜 그대로 믿고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자기변호 활동을 시작했고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의 실패는 내 탓이 아니라

부하들의 무능 때문이었다 !

 

라고 발언하기도 합니다

 

사실 렌야가 중일전쟁을 일으킨거나 임팔작전으로 일본군을 학살한 것들은

단순히 렌야만의 문제만은 아니었고

그것을 방조하거나 부추긴 일본군 내부의 분위기가 있었기에

그러한 일본군의 광기속에 렌야가 분위기에 편승해 여러 사고를 터트린 것이었고

렌야의 활동들로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이 더욱 앞당겨지기도 했고

하여튼 야만의 일본군 속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은 지키려 했던 인물이라

까이면서도 여러 이야기가 되는 인물이고

무능한데 순진한 트롤러 , 팀킬러였다고도 보여집니다 ;;

 

[도쿄 대공습]

1944년부터 미국에는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가 등장했고

1945년 3월 9일 밤 10시 30분부터 B-29 편대가 도쿄에 접근했고

6시간동안 300여대가 넘는 B-29들은 도쿄 상공에

확산탄 8500발 , 소이탄 자탄 (네이팜탄 , 화염폭탄) 50만개 ,

네이팜 소이탄 총 1700톤을 투하합니다

 

도쿄를 폭격하는 B-29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염폭탄 네이팜탄에

도쿄는 불바다가 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질식하거나 타죽습니다

 

불바다가 된 도쿄

 

화마속에 일본인들은

도쿄의 한강격인 스미다강으로 뛰어들었지만

네이팜은 강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잘만 타올라

강물도 끓어올라 강물속 사람들은 삶아져 죽습니다

 

도쿄의 목조로 된 일본가옥들은 모조리 재가됬고

83793명의 일본인이 죽고 4만명이 중상 , 이재민이 100만명 이상 발생합니다

(사상자가 약 15만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이날 사실상 도쿄는 사라집니다

 

폐허가 된 도쿄 (석조 건물들만 남음)

 

다음날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명 규모의 대탈출이 시작됬고

히로히토 천황은 방공호에서 기어나와 2시간동안 폭격지역을 둘러보았는데

일본인들은 '신의 화신' 으로 여긴 히로히토 천황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겨봤습니다

 

그동안 일본국민들에게는

수많은 침략전쟁 , 미국과의 전쟁등이 그저 먼 지역의 일 , 남일로 여긴 분위기가 있었는데

국민들은 도쿄 폭격이후부터 전쟁을 자신의 일로 실감하게 됬고

전쟁에 나간 젊은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부추기던

일본 고위층들도 폭격을 피해 시골로 다 튀어버리게 됩니다

 

3월 9일 도쿄대공습으로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폭격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고

3월 11일 나고야 , 13일 오사카 , 16일 고베 , 19일 다시 나고야가

공습의 표적이 되어 일본 주요 공업도시들이 10일만에 모조리 불바다 , 잿더미가 됩니다

 

단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다른 도시가 폭격을 받음에도

멀쩡해 사람들은 의아해했고 이 두 도시는 미국이 핵무기를 떨어트릴 장소였기에

소이탄 세례를 면하게 됬습니다 ;;

 

매일같이 일본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하기 위해 도망다녔고

미군은 발악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던 일본의 의지를 꺾기위한 목적으로

군사시설 뿐만 아닌 민간인 거주지에도 무차별적 폭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하늘에서 불비가 떨어지는 이미지의 공습은

오늘날까지 많은 일본인들의 최대 정신적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내에서도 역사의식 없는 평화주의자들은

최악의 민간인 학살사건이라며 이러한 미군의 행태를 비판하지만

당시 민간인들 역시 군인이 되거나 군수공장이 파괴되면 즉각 투입되었고

또 일본인 , 일본군은 특유의 전체주의 문화 및 복잡 , 민간과 밀착한 모습이 강해서

무기들도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졌고

미군 역시 일본 민간인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서

일본군을 상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당시 2차대전이 그랬듯이

모든 국민이 전쟁에 참여하는 '총력전' 의 본질을 꿰뚤어본 공습을 주도한 미국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커티스 르메이

 

<커티스 르메이>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단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 어린이들까지 그냥 죽어나가

일본내에서는 공포와 충격 , 자성의 계기가 된 사건이 이러한 대공습들로였었고

이러한 폭격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일본지식인들은 전후

일본의 전쟁범죄와 과거사에 극도로 조심스럽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본인의 시각에서의 공습 ,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트라우마등이 그려진 만화 '아돌프에게 고한다' , 작가가 공습으로 어릴적 죽을뻔하다 살아남았던 인물이라 반전의식이 강했으며 역사 의식은 있는 인물이고 만화는 군국주의 비판을 말하고 있으며 반전의식 속에 일본인의 피해의식도 없지않아 있어 만화가 꽤 독한 편입니다 , 데즈카 오사무 작품

 

[옥쇄 자살]

이러한 공습속에서도 일본군은 태평양 지역에서 계속해서 발악하며

미군을 괴롭히고 있었고

일본군은 천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자신들의 목숨을 전혀 아끼지 않으며 돌격하는 모습들을 보여

생명중시 사상이 강한 미군들의 의아함을 샀고

 

일본군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본토의 가족들이 위협받거나

곧바로 살해당할 수 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비상식적인 군부의 명령을 따라

계속해서 자폭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궁지에 몰리자 '카미카제 특공대' 를 조직해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미국 군함으로 자폭공격을 했고

많은 조종사들이 강요속에 자폭공격대가 되어 미군함으로 뛰어들었지만

효과는 없었고 고급 조종인력들만 사라졌을 뿐이었습니다

 

미국 전함으로 돌진하는 카미카제 특공대

 

또한 일본 육군은 궁지에 몰리자 '반자이 돌격(만세 돌격)' 이라는 전술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미군앞에

총검이나 군도를 들고 뛰어들어 백병전을 전개하려 했고

뛰어들면서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

 

를 외치어 돌격했기에

이 전술은 반자이 돌격이라는 이름이 붙게 됬습니다

 

반자이 돌격하는 일본군 ;;

 

화력 열세속에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로 하여금 천황에 대한 광신적 충성으로

두려움을 잊게하려는 자폭공격이었고

당연히 미군 기관총 앞에 진압됩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패전기색이 뚜렷했지만

그럼에도 항복은 죽음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했고

(항복하면 자국내의 가족들이 피해를 입기에)

 

항복할 바에 '옥쇄'를 택하게 됩니다

옥쇄는 옥같이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명예나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는다는 말인데

일본군 내에서는 이 단어를 악용하며 계속해서 부하들의 자폭 , 죽음을 강요했고

지휘관들도 항복할바에 자신의 배를 갈라 자결하는

사무라이들에 행해지던 자결의식인 '할복' 자살을 선택하게 됩니다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준 일본의 자살 '할복' , 스스로 배를 가르면 뒤에서 목을 쳐줘서 고통을 잊게 합니다 ;; , 2차대전때에는 권총으로도 했습니다..

 

일본군은 항복직전까지도

미군을 그저 귀축영미(귀신과 짐승의 영국과 미국)라 여기며

비록 우리가 열세여도 정신력은 더 강하니 이길 수 있다고

자기 위안하며 계속해서 항전하게 됬고

 

이러한 잔혹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일본군의 모습에

미군은 크나큰 충격을 받고 일본이 상식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님을 파악합니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

태평양 전선에서는 여러 정글 , 매복등으로 미군이 고전하고 있었고

대표적 전투로는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등이 있습니다

 

미군은 도쿄 폭격을 위해 일본 본토앞의 이오지마 섬을 점령해야 했고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이오지마 섬을 요새화 시키며 미군의 진입을 막는 일본군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는데

수많은 미국 해병대원들이 일본군의 총탄에 죽어가며

미군은 총 25만군으로 6821명의 전사자를 남기며

이오지마 섬을 점령합니다

 

도쿄와 가까운 이오지마 섬의 위치

 

태평양 전쟁을 대표하는 사진 , 이오지마 섬에 성조기(미국 국기) 를 꽂는 미군 , 퓰리처 상 수상작

 

저도 어렸을때는 해병대가 용감하고 멋진 이미지라 생각했는데

이오지마 전투를 보고나서는 전쟁터에 가장 먼저 총알받이같이 돌격하는 게 해병대라

가장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해병대나 해병대 출신들은

무슨 특유의 긴장된 분위기가 있어서 저는 주변 사람들에서

해병대 나오신 분들을 잘 맞추는 편입니다 ;; ..)

 

하여튼 이오지마 전투나 인천 상륙작전 등 수많은 해병대원들의

호국수호 헌신이 있었습니다 ..

 

이오지마 전투당시 일본군의 시선에서 일본군의 비상식적인 ,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행태를 묘사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

 

이오지마가 함락되자

미군의 다음 목표는 일본의 제주도인

오키나와였고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을 감행합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지역이 아닌

이오지마 전투에 이어 최초로 일본영토내에서 이뤄진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으로서

미군은 태평양 전쟁 중 가장 큰 피해를 냈고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전투였습니다

 

4월 1일 순조롭게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저항없이 오키나와 북부를 장악했는데

당시 남부에 몰려있던 일본군이었습니다

 

4월 5일부터는 미군이 방심한 사이

무수한 동굴진지가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미군은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동굴진지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데

이로 인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오키나와 전투

 

일본군은 미군이 방어선을 뚫을때까지 싸우고

뚫으면 또다시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했고

미군은 하나씩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이후 일본군 사령부는 남쪽의 동굴로 퇴각해 결전을 준비했지만

일본군 대부분이 전멸 , 붕괴하자

일본 지휘부가 할복자살함으로서 전투가 종결됩니다

 

이 전투는 미군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는데

극도의 생명경시를 하던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동물' 이라 선동하며

항복하면 강간 , 살해당할것이라며

민간인들에게도 할복자결 , 전쟁을 강요했고

어린이를 징집해 전투에 동원한 최초의 전쟁이 오키나와 전투였고 ...

민간인들을 총알방패로 삼은 잔인한 일본인들이었고

이 때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인간방패 human shields' 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일본군은 패배가 명확해지자

오키나와 자국민들에게 집단 자결을 요구했고

주민들은 도망치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일본군의 소집명령에 순순히 따른 주민들은 모두 자살을 가장한 학살을 당합니다

일본군은 군인 , 사령관 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에게도

할복자결을 명해 주민들은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졸라 죽였고

12만명의 주민이 사망 , 학살당합니다 ...

 

극단적 생명경시의 일본군과 정반대로 오키나와 전투 당시 종교적 신념으로 총을 들지 않고 의무병으로 입대해 한명의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 했던 미군 데스먼드 도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핵소고지(2017)'

 

[원자폭탄 투하]

일본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1억 총옥쇄(1억명 일본인들이 싸우다 죽자) 를 외치고 있었고

오키나와 전투로 수많은 잔혹한 사상자가 나자

미군은 일본군이 완전히 미쳐있다는 사실을 알게 됬고

 

결국 미국은 100만명 규모의 일본 상륙작전 '몰락작전' 을

시행하기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

핵공격을 선택하게 됩니다

 

<존 키건의 '2차 세계대전사'>한여름(오키나와 전투)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몰락작전을 계획해

일본을 지구에서 사라지게 할 정도로의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일본에 상륙하면 너무 많은 피해가 입을 게 자명했고

또 일본은 매일같이 국민들이 굶주림과 공습위협에 시달림에도

국민들을 죽창 , 활 등으로 무장시켰고

당시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할 판이었음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

 

목숨도 버려가며 신으로 모시는 천황에 대한 충성 및

일본의 광기에 대해

미국 내에서도

 

'도대체 일본인들은 어떻게 된 미친놈들인가 ?'

 

식의 연구도 이루어 질 정도였습니다

 

결국 일본에 핵투하가 결정됬고

미국은 핵투하 전에도 마지막으로 일본에 항복을 권유했지만

일본은 미국의 항복권유를 묵살 , 무시합니다

 

미국은 이미 나치독일이 항복하고 종전분위기가 강해진 상태에서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막대한 미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내부에서도 눈이 뒤집혀 있을 정도로 분노가 심했던 상황이었고

 

진주만 공습대부터 일본에 대한 증오는 매우 심각해

핵공격을 시행할때도 한명의 일본인이라도 더 죽이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일본 도시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폭탄(핵폭탄)이 투하됬고

폭탄 이름은 리틀보이(작은 소년) 였지만

그 위력은 단 한발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일 정도였습니다

 

핵폭발 후 잿더미가 된 히로시마를 바라보는 일본 군인

 

3일 뒤인

1945년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다른 원자폭탄 '펫 맨(뚱뚱한 사람)' 이 투하됬고

이 폭탄 한발에 4만에서 7만의 시민이 그날 사망합니다

 

리틀보이와 펫멘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펫멘의 버섯구름

 

[무조건 항복]

이 시점부터 현실을 부정하던 일제 군부는 더이상

미국을 상대로 어떠한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했고

다음 핵폭탄은 천황이 사는 곳이 목표가 될게 유력했기에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미국에 무조건 항복합니다

 

수많은 사악한 이야기를 남긴 전범 히로히토는

8월 15일 정오 옥음방송이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항복방송을 라디오로 내보냈고

일본인들은 그의 라디오 항복방송을

땅에 머리를 박은채 업드려 들으며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의 옥음방송을 듣고 있는 일본인들

 

이미 오랜 전쟁으로 약탈당하거나 굶주림에 시달리며

미국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일본인들이었기에

치욕의 패배도 아닌 침울한 분위기도 아닌

그저 길바닥에서 업드린채 항복방송을 듣고 있었고

전쟁이 끝났음에 신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놀랍게도 발악발악하며 자결 , 자폭을 할지언정 끝까지 항복하지 않던

일본군은 천황의 항복선언에 갑자기 유순해져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게 되어

많은 미국인들이 놀랐습니다

 

미주리 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윤봉길 의사가 다리를 절게 만든 인물입니다)

 

핵폭탄에 대한 일본인들의 트라우마는

공습 못지 않아서 수많은 충격 및 (역사의식이 결여된) 피해의식을 주었는데

정작 당시 미국 장병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했던 심정이었고

매일같이 일본군의 미친짓을 보며 죽어가며 지쳐있었던 미군은

죄책감보다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이 강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기뻐하는 미군

 

그렇게 지옥같던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이 끝났고

일본제국은 멸망하고 새로운 시대 , 현대 일본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현대 일본의 시작을 알리는 이미지이자 원폭을 맞고 잔해만 남아 오늘날 평화기념관으로 쓰이는 '히로시마 원폭돔'

 

[일본의 전쟁범죄]

일본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여러 전쟁범죄를 저질렀는데

일본군의 포로 대우는 나치독일 못지 않을 만큼

매우 잔인했습니다

 

인도차이나(동남아) 전선의 포로들은 교량건설 , 기지건설 등 노동에 동원됬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단순한 재미로 포로들을 처형했습니다

 

<영국 참전군인의 회고>미얀마 정글에서 있었던 행진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다리 건설에 동원되기 위해 현장으로 이동하던 중 

한 일본인 장교는 곧 있을 검술대회 연습을 위해 포로 몇 명을 모았다. 

키가 작았던 그는 영국군 포로들에게 우월감을 표시하기 위해 

큰 나무 상자 위에 올라섰다. 

그리곤 포로들의 목을 베었고 매우 흡족해 했다. 

다리 건설에 투입되기 전에 이미 수많은 나의 전우들이 재미로 혹은 

아무런 이유없이 살해되었다.

 

일본은 중국 점령지에서 대학살을 벌인다거나(난징 대학살) ,

731 부대를 운용해 중국 , 한국인들을 수용시켜 잔혹한 인체실험을 했고

식민지 조선인(한국인) 들을 태평양 지역등의 전쟁터로 끌고가 총알받이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도가 운영됬는데

일본군의 성욕을 해소할 목적으로

인신매매범 , 매춘업자등에게 납치 , 매수등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 , 중국인 및 일본제국이 점령한 지역민들이 징발되어

일본군 위안부(성노예)가 되었는데

위안부의 뜻은 위로할 위 , 편안할 안 , 며느리 부자로

아주 치욕적인 말이라 성노예라 불러야 한다고도 하지만

적당한 다른 용어가 없기에 위안부 피해자 협회 등에서도

오늘날 일단은 위안부라 불리는게 권장되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하루 30번 이상의 성행위를 강요당하거나

일본군의 재미거리로 학살당했고

일본군은 아편이나 히로뽕등으로 위안부를 중독시켜

매춘을 강요시킵니다

 

2차세계대전 일어난 일본군 전쟁범죄 문제들은

위안부 문제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본전쟁범죄들이 있고

오늘날에도 일본 정부는 이 사실들을 왜곡 ,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

세계적으로도 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제작된 '위안부 소녀상(위안부 평화비)'

 

<라봉봉>현재는 일본사 이야기를 쓰며 일본 위주로 이야기를 썼기에

일제의 식민지 , 점령지에 대한 전쟁범죄 이야기는 많이 못쓴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잔혹하고 여러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 일본인들이었고

공습과 핵폭발은 참으로 천벌받았다 , 인과응보다라는 말들이 떠오릅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 , 피눈물 나게 하는데

그대로 , 그 이상으로 돌아온 일본인들이었고

일본 무고한 국민들이 학살당했지만

그럼에도 한국 , 중국 및 여러 식민지의 무고한 국민들이

일제에 대규모로 학살 , 살해당한 이야기 역시 외면해서도 안되고

이러한 역사를 반복해서도 , 잊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 전쟁으로 나라가 잿더미가 되어 재기불능상태가 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해 태어난 전후세대들은 과부 , 고아 , 장애자 등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눈으로 , 피부로 겪었기에

반성하는 모습들을 보여왔는데

이 이후 전쟁을 모르고 경제성장기에 태어난 일본인들은 점차

전쟁의 죄책감 , 반성 등을 잊어가고 만행 , 망언을 해

오늘날 세계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는 말처럼 오늘날에도 이러한 역사를 잊어서는 , 반복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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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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