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메이지 정부의 개혁과 발전>

[탈아입구론]

[유학생 파견]

[나쓰메 소세키]

[제국주의화 되는 일본]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무교육 실시]

[카레와 돈까스]

<라봉봉>

 

[탈아입구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중심의 일본제국을 성립하고

서양에 문호를 개방해 서구화 , 근대화를 진행합니다

 

메이지 유신 '헌법발포약도'

 

일본인들은 탈아입구를 외치며

아예 아시아에서 서양으로 편입하려 했고

외세 개방에 소극적이었던 중국 , 한국과 달리

서구 문물을 무조건 ,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정체성 자체를 서양인으로 바꾸려 합니다

 

탈아입구는 아시아에서 탈출하고

구라파(유럽) 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근대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가 1885년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 ,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나쁜 친구이므로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했고

동양은 후진적인것이므로 우리는 서양을 따라 근대문명인이 되자 주장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에서 정신적 토양을 제공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른 후진적인 아시아국가들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경멸의 , 미개의 대상으로 봤고

민중 경멸론자이기도 해서 자국민인 일본 시골사람들도 경멸했던 이상한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 , 군국주의에 영향을 준 악성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일본 최고액권 10000엔(10만원) 권의 후쿠자와 유키치 , 이 인물 말고도 이토 히로부미가 한때 일본 화폐에 등장해 논란이 되기도 했고 역사 반성의식 없는 악한 자들인가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 다행히 다음 화폐부터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빠지게 되었고 다행히 요즘 일본내에서도 역사 반성의식 , 변화의 바람이 부나 싶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에서 계몽활동을 하며

게이오기주쿠(게이오 의숙 , 오늘날 게이오 대학) 을 창립했고

많은 일본인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게이오 대학

 

한국 조선의 급진개화파 김옥균과 교류하며

그를 제자로 삼았는데

김옥균이 조선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나 3일만에 실패하자

이후부터는 탈아입구론을 내세우며 조선과 중국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고 합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살해당한 한국의 개혁가 김옥균의 모습을 그린 그림

 

또 일본내에서는 조선내부에서 또 친일계 조선인사들의

자체적인 근대화시도인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이전부터 한국을 정복하자며 꾸준히 제기됬던

'정한론(한국을 정복해야한다)'

이 대두됩니다

 

정한 토론 그림

 

후쿠자와 유키치는 제국주의의 핵심을 꿰뚫어봤지만

국제정세의 부조리를 비판하기는 커녕

그 비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의 막차에 타는데

주도합니다

 

[유학생 파견]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이 퍼지며

일본 근대화는 빠르게 진행됬고

 

특히 탈아입구론에 입각해

일본 메이지 정부(메이지 유신 정부) 는

서양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섬나라 영국에서는 해군과 정치 , 행정 , 산업 , 은행제도를

독일에서는 육군과 교육과 공업기술을

프랑스에서는 법률(대륙법) 과 음식과 예술을

이탈리아에서는 건축을

미국에서는 경영 , 법률을 가져와

일본 자국에 맞게 변화시킵니다

 

대표적으로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려 서구세계에 파견한 사절단을

'이와쿠라 사절단' 이라고 합니다

 

이와쿠라 사절단

 

일본은 이전부터 섬나라로서 그래왔던 것처럼

'이이토코토리(좋은 것은 받아들인다) 정신' 으로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고

한국과 중국이 점진적으로 동양 체제를 유지하며 서양문물을 수용하려 한 것에 비해

사상 , 생각 , 체제까지 철저하게 서양식으로 바꾸려 했던 일본인들이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당시 일본의 근대 지식인은

저는 후쿠자와 유키치라기보다

'나쓰메 소세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

 

소세키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1900년 문부성의 국비 유학생 1호가 되어 영국에서 2년 유학을 했고

영국유학생활중 극심한 신경쇠약 , 공포증에 시달리다 귀국했는데

그는 여러 경험들을 토대로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런던탑 , 도련님 , 마음 등

여러 문학작품들을 써내려갔는데

봉건인이 아닌 근대인의 고민 , 생각들이 드러난

일본 근대문학의 효시였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민망해서 'I LOVE YOU' 라는 영어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가 아닌

'달이 아름답네요'

라고 번역했다는 게 유명하고

 

특히 그가 쓴 '도련님(봇짱)' 을 감명깊게 읽은 저로서는

도쿄에서 자란

세상물정 모르는 순수한 도련님이었던 사고뭉치 주인공이 부조리함에 맞서는 코믹한 모습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 미운오리 새끼였던 그의 진실함을 알아보고 유일하게 아껴주고

끝까지 사랑해준 헌신적인 늙은 하녀 기요의 모습들이 인상깊었고

 

(비록 남녀간의 사랑은 아니었지만

도련님도 , 기요도 서로의 신분을 초월한 모성애적 사랑이 있었고

이상적인 남녀관계와 헌신적 사랑을 상징하는거 같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도련님 중에서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옳지 못한 일을 장려하고 있는 듯하다. 

악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박힌 듯하다. 

가끔 솔직하고 순진한 사람을 보면 ,

'샌님'이라는 둥 '어린 녀석'이라는 둥 하면서 트집을 잡고 경멸한다 ...

 

곧은 성격의 도쿄태생 철부지 주인공은 시골에 부임하며 방황하다가

결국 기요의 무한하고 헌신적이고 맑은 사랑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기요가 있는 도쿄' 로 다시 돌아가게 됬는데

속고 속이는 야박한 사회속에 순수한 , 진실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일본 근대사의 전무후무한 걸작이라 생각되는 소설입니다

 

제가 20살때 읽은 일본 근대소설의 걸작 '도련님(봇짱)'

 

솔직하고 순수한 느낌 이외에도 헌신적인 사랑 , 정의에 대한

그의 마음이 드러난 순수소설이라 생각되며

그는 이러한 작품들로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립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제국주의에 영향을 준 후쿠자와 유키치에 비해

반군국적인 , 반전쟁적인 모습을 보인 평화주의 모습을 보였고

그 역시 제국주의 시대 인물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럼에도 자국이나 타국에서 큰 비판을 받지 않는 삶을 살았고

일본의 존경받는 지식인이자 도련님같이 산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옛날 일본엔화의 나쓰메 소세키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한정만이 아닌

역사 의식이 있으며 일본인들과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일본 지식인 계보를

나쓰메 소세키 - 데즈카 오사무 - 무라카미 하루키

정도라 보고있습니다)

 

[제국주의화 되는 일본]

하여튼 메이지 정부는

이렇게 서양문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서양에 유학생들을 파견해 자국에 도입시켰고

 

군비도 확장해

1873년 징병제를 실시하고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에 제국주의의 마수를 뻗게 됩니다

1879년에는 유구국(류쿠왕국) 을 병합해 오키나와로 만들었고

남방에서 한중일 세계와 중계무역을 하며 성장한

유구국은 오래 역사를 끝내고 일제에 합병되게 됩니다

 

아시아에서 중계무역으로 번영한 류쿠왕국

 

유구국 랜드마크 '슈리성'

 

유구국의 강제병합은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의 충격을 주게 됬고

일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점차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동아시아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해 오랜 동양의 종주국 노릇을 했던

중국 청나라를 꺾자

세계 사회가 크게 놀라게 됩니다

 

청일전쟁 지도

 

청일전쟁 당시 일본제국 보병의 사격

 

청일전쟁 결과처리로

일제와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는데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이 대표로 나섰고

청은 요동 , 타이완 섬을 일본에 넘기고

배상금 2억냥 지급(청나라 3년치 예산 및 일본 4년 반치 예산) ,

무역 승인 등

승전국 일본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약이었고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모두 없애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부터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한 간섭을 심화시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1889년 일본제국 헌법이 공포됬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했는데

당시 일본이 이길 것이냐에 대한 회의적 의견도 나왔지만

러시아 내부의 사정 및 가까운 나와바리(구역) 에서 전투한 일본과 달리

러시아군은 먼 길을 돌아 동양까지 와서 전투를 해야했기에

크게 지쳐있었던 상황등으로 일본은 러시아를 꺾고

동양에 더이상 일본을 견제할 세력이 없는 상태로 만들었고

동양의 패자로 서게 됬습니다

 

러일전쟁 그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대장 도고 헤이하치로

 

나름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선동등을 통해

아시아를 서양 제국주의등에 보호한다는 거로

동양 사회에 잠깐동안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러일전쟁 승리후 노골적으로 동양에 대한 침탈야욕을 보이기 시작했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5년 일본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한국) 황제를 협박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했고

이에 분노한 한국의 의병장군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저격해 살해합니다

 

일제의 간신 이토 히로부미

 

한국의 위인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최초 내각총리대신이자

일본 근대화를 이끈 거물급 정치인이었지만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없다'

 

라는 말을 남기며

여러 여성편력을 남기며 일본내에서도 엄청난 미친 색골로 비판받은 인물이었고

 

이토 히로부미 사망 당시 일본만평 '호색한의 최후 女ずき者の最後' , 뒤에 그림자가 여자 여 女 자를 보입니다

 

그러한 와중에 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는

이토 저격 명분이

동양평화 , 세계평화 및 공존 등이었음을 밝히자

일본 내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단순한 테러범 , 살해범이 아닌

의국지사 및 의사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라 여겨졌고

일본 내 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도 주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야욕에 맞선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오늘날 한국인들이 깊게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910년 결국 일제는 야욕을 보이며

대한제국을 일제에 병합시켜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경술국치)

 

한국 정궁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메이지 시대는 45년만에 막을 내리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됩니다

 

[의무교육 실시]

메이지 정부에서는

1872년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했는데

일손 부족등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싫어했던 국민들로

일본 내에서는 여러 폭동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메이지 시대는 농민폭동이 끊이질 않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의무교육 실시로

문맹률은 낮아지고 독일식 국가주의 주입식 교육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학교교육은

서양같이 이후 커져가던 군대에 징병인력을 수급하는데 일조하게 되었고

(근대시기부터는 군대에서 명령체계 등 때문에 문맹률이 낮은 군대가

승리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또 산업화 되는 시기 노동인력을 키우는데 일조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소학교 , 중학교 등이 생겨나고

에도막부의 개성소와 의학소를 합해

1886년 도쿄제국대학이 생겨나게 됬고

사립학교로는 게이오 대학(후쿠자와 유키치) 및 와세다 대학이

사립대학의 양대산맥이 됬다고 합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엄청났으며

학력중심 사회가 되어

오늘날까지 입시에 대한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합니다

(병폐)

 

이외에도 메이지 정부는

1890년 '교육에 관한 칙어(교육칙어)' 를 발표해

이걸 외우게 하며

일본 천황에 대한 복종 , 충성심을 강요했습니다

 

교육에 관한 칙어 본문

 

[카레와 돈까스]

메이지 시대 식문화도 활발히 발전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서양에 갔고

서양식 요리들이 일본에 들어오게 됩니다

 

영국 해군에서 카레 스튜를 맛본 다카키 가네히로는

일본해군을 괴롭히던 각기병(비타민 부족으로 몸이 약해지는 병) 의 원인이

쌀밥 위주 식단이라 생각하고

식단 개선 일환으로 영국 해군 식단인 카레를 일본 해군에 도입합니다

 

카레라이스

 

그렇게 일본식 카레라이스가 생겨났는데

일본카레는 감자 , 당근 , 양파 같은 야채가 풍부하게 들어가

이러한 노력들로 각기병이 완전히 해결됬고

일본식 카레는 이후에도 크게 발전해

돈까스와 더불어 일본 근대화를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고

일본인들의 소울푸드 ,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일본 근대화 시기 로맨스 이야기가 담긴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 (Tokyo Girl, 2008)' , 나쓰메 소세키 제자 문하생이 우연히 현대에서 온 핸드폰을 주워 현대 여고생과 전화데이트를 하며 카레라이스를 먹는 일본인의 사랑 , 근대화 상징 이야기들이 알차게 담겨있습니다

 

일본 근대화를 대표하는 3대 음식이

카레 , 고로케 , 돈까스인데

카레는 앞서 이야기했고

고기 튀김요리인 고로케와 돈까스는

메이지 유신이후 일본이 1200여년간 오랫동안 실시한 육식금지령을 철폐하고

고기를 못먹어 왜소해진 일본인들의 체격을 키우기 위해

서양식 고기요리인 크로켓 , 커틀릿을 들여와 만든 것으로서

고로케는 프랑스 크로켓에 영향을 받아

남은 자투리 고기를 사용해 채소나 감자로 싸 튀겨 먹었고

 

일본 서민음식이자 소울푸드 '고로케'

 

돈까스는 돼지고기 튀김인 포크 커틀릿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고

오랫동안 육식금지령으로 고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이었기에

육류문화에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돈까스는 튀김옷을 두껍게 둘러 고기처럼 보이지 않았고

맛도 좋아 점차 일본인들도 고기 섭취에 익숙해 지게 됬고

오늘날 일본인의 사랑을 받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습니다

 

일본식 돈까스

 

<라봉봉>한국에는 참으로 악연이 깊은 메이지 정부지만

일본 내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세계 강대국에 진입한 계기가 됬던

시기이기도 해서 여러 이야기가 되는 시대가 되었고

 

한국 역시 오랫동안 쇄국정책으로 외국 사정에 무지했고 또

외국에 대한 배타적 성향이 강했고

내부 분쟁도 강해 좋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여러 발전이 있었고 빛나던 메이지 시대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이때부터 한국과 중국에 대한 오랜 열등감을 완전히 없애고

아예 한국과 중국을 업신 여기기 시작했으며

여러 동아시아 갈등의 악의 씨앗을 뿌린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쓰면서 갑자기 어렸을때 본 미래를 걷는 소녀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마치 소설 '독일인의 사랑' 같은 순수하고 애잔하고 아련한 첫사랑같은 영화고

단지 나쓰메 소세키같은 근대화시대에 대한 고민을 하던 훌륭한 인물도 나왔고

그 시기만의 사랑과 낭만도 있었기에

일본이 국내외적 폭력국가로 전환되기전 마지막 과도기 시기이기도 해서

일본인들에게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같은 아련하고 애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