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에도막부>
[세키가하라 전투]
[에도 막부]
[오사카 전투]
[전국시대 최종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의 발전]
[조닌 문화]
[살생금지령]
[서민 실용교육학교 데라코야]
[은본위제도]
<라봉봉>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이야기때 쓴 것처럼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도중 건강악화로
그의 첫사랑과 관련있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간절하게 가신들에게 부탁하고 사망했고
(여러 다이묘들에게 히데요리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시킴)
결국 임진왜란은 그가 죽자 끝나게 됬습니다
그러던중 이전부터 히데요시를 의도적으로 피하며
힘을 기르고 , 참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야심을 드러내듯이 주변 다이묘(영주) 들을 포섭했고
결국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천하를 둔 전투' 라 불리는
일본사 최대의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가 시작됩니다
초거대 가문이 앞으로 일본 전국에 지배권을 들고
치킨게임 하듯이 '캐삭빵(지면 캐릭터 삭제라는 요즘 젊은이들 용어 ,
이기면 절대권력자 , 지면 멸문지화)' 을 뜬것인데
병력규모도 이에야스의 동군은
8만 가량이었고
도요토미 가문의 서군 역시
8만 가량이 참여할 정도로
일본 역사상 엄청나게 거대한 대회전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집권기부터 머리를 숙이고
엄청난 인내의 시간을 거치며
철저히 시나리오를 짜와 준비해온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군은
단 하나의 사람(도쿠가와 이에야스) , 단 하나의 목적(정권 탈취) 을 목적으로
철저하게 통일되어 움직였고
도요토미 가문은 이전부터 히데요시의 잔혹한 통치로
여러 내부적 불만들이 있었기에
잘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결국 서군은 '캐쳐발리며 (아무거토 못하쥬 ?)' 동군이 승리하고
이에야스는 서군 측 다이묘를 처벌하고
동군측 다이묘의 포상을 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 직할 영지를
오사카 성 및 그일대 60만 석으로 축소시켰고
자신을 적대한 가문을 모두 추방 , 감봉 시켜버리고
자신을 따르던 중신들 및 일족들을 전국의 요지에 배치합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철두절미한 논공행상입니다)
[에도 막부]
1603년 이에야스는
세이이다이쇼군에 취임하고
에도에 막부(바쿠후)를 열어서
일본의 조선시대격인 '에도 막부시대' 를 엽니다
이에야스는 1607년 조선에 임진왜란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임진왜란은 일본의 뜻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 혼자만의 책임이라 뒤집어 씌었고
조선과의 관계를 정상화시켜
조선은 1607년(선조 40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서
국교가 다시 열리게 됬고
일본은 조선 통신사를 통해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접촉하게 되어 ,
또 도쿠가와 가문의 국제 , 외교적 인정을 받게 되어
한국의 사신파견에 큰 환영을 했습니다
[오사카 전투]
그러나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은 무시할 수 없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점차 장성해가고 있었고
이에야스는 겉으로는 계속 유화적인 척을 했지만
여러 억지를 부리며 차근차근 도요토미가의 부를 줄이려 했고
결국 도요토미가문은 남은 자산을 끌어모아
최후의 발악을 하는데
이로 인해 1614년 오사카 전투가 벌여졌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막대한 자금을 풀어
몰락 무사(로닌) , 이에야스에 반발한 자들을 모았고
나름 10만명을 모아 큰 세력으로 맞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대군의 절반정도였으며
이미 권력을 잡아 승기에 있었던 이에야스 군에 비해
명분도 없고 단지 돈으로 움직이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산전수전 다겪은 아버지 히데요시에 비해
그냥 편하게 자란 도련님으로서 그의 가신들도
실전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고
어머니 요도도노의 간섭도 커서
결국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던
10만 도요토미군은 20만 도쿠가와 군에게
나름 분전하다 휴전도 맺고 그러다 싸우다가
오사카성이 함락되 히데요리는 자결하고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고 일본 전국시대 최종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됬습니다
[전국시대 최종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러나 오사카 성 전투 승리 1년후인
1616년 이에야스는 매사냥 도중에 쓰러졌고
4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평생을 인고의 시간을 거치다
히데요시 사후 곧바로 일본의 권력자가 되어
에도막부를 연 이에야스는
일본 전국시대 3영걸이라 불리고 있고
3영걸들의 개성은 서로 달라
일본 내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고
냉혈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오다 노부나가 ,
치밀하고 계산적이며 권모술수에 능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
인덕이 강하고 인내력이 강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울지않는 두견새' 이야기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급한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새를 죽여버리고
치밀한 히데요시는 울지 않으면 새를 달래어 울게 만들었고
인내력 강한 이에야스는 그저 새가 울기까지 기다리겠다는 이야기로
세 영걸들의 성향 , 성격이 나타난 일본의 고사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하여튼 문학의 영역에서도
인내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로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인물로 해석되는 편이고
그의 몸이 퉁실하고 능글맞고 음흉한 구석도 있어 너구리라고도 비유된다고 합니다
[에도 막부의 발전]
에도막부 시기로
일본은 도쿠가와 가문이 쇼군이 되어 지배하는
막부시대가 다시 시작됬고
미국의 개항요구 전까지 오랜 평화의 시기를 맞아
수많은 문화 , 예술이 발달합니다
에도막부시기는 이전과 달리
시해당한 쇼군이 한명도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고
안정기가 엄청나게 길어져
사무라이들도 점차 칼을 드는 것에 조심스러워졌고
동물이 보호되고 상업이 발달하고
문화와 예술 , 과학이 발달한 일본사의 모범운전시기라
이 시기에도 여러 문제들은 있었지만
일본은 이시기부터 조선을 완벽히 추월하고
국력을 차근차근 쌓아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구식 근대화가 되어
동양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도 막부는 여러 정책을 시행했는데
의외로 금교령을 시행해
일본내에 기독교를 금지하고
서양에 대해 쇄국정책을 실시합니다
단 쇄국정책에 숨구멍 하나는 만들어놓아
나사사키의 부채꼴 모양 인공섬 데지마에
네덜란드와의 교역만은 허가했고
이 조그만한 숨구멍 하나는
일본내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아
서구 학문 , 사상 , 기술들이 이곳으로 엄청나게 들어와
일본은 이후 서양의 동양진출당시
이미 서양에 대한 정보를 쌓아놓아
서양에 대해 아예 몰랐던 한국 조선에 비해 큰 충격은 없었습니다
이곳으로 '난학' 이라 통틀어지는
서양과학이 들어왔고
이에 일본인중 미적분을 발견하거나 변증법이 주장되어
일본이 훗날 과학대국으로 가는 기초가 생겨났습니다
또 에도막부는
지방 다이묘를 통제하려
참근교대제(산킨코타이 제도) 를 통해
지방 다이묘들을 1년 주기로 수도 에도(도쿄)와
자신의 영지를 번갈아가며 생활하게 했고
다이묘의 처와 자녀들도 에도에서 볼모생활을 해
이때 이동하는 과정에서 부담도 커져
여러 다이묘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고
그 과정에서 도로와 역참이 크게 발달하고
도쿄의 인구가 크게 늘며
이를 대상으로 한 상업도 크게 발전합니다
[조닌 문화]
에도막부 당시 일본 상인을 '조닌' 이라 했는데
조닌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조닌이 성장하자 조닌문화가 발달했고
점차 일본은 천황의 나라에서 사무라이의 나라로 , 에도시대에 이르러서는
서민의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에도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서민들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장하며
문화 창조와 보급의 핵심역활을 하게 됬고
소설 , 하이쿠(짧은 일본 시) , 가부키(일본 전통공연예술) , 인형극 , 우키요에(풍속화) 등
여러 분야에서 조닌문화가 꽃피워졌습니다
단 에도막부 시기 이런 서민문화가 발달했지만
신분이동은 여전히 엄격했고
조선왕조시기보다 더 철저하게 신분이동을 막았는데
농민은 농민만 ,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만 ,
칼만드는 사람은 칼 만들기만 , 우동뽑는 사람은 우동만 뽑는 등
평생 이것을 해야했고
잘만하면 대대손손 영구적으로 보존하며 가업으로 이어졌지만
가게를 옮기거나 다른 일들을 하지 못해
강제적인 장인문화 , 서비스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일만 죽도록하는
병폐도 낳았고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의 전체주의적 사고 , 후진적인 정치와 시민의식을
낳았다는 병폐도 있습니다
[살생금지령]
이외에도 에도시대에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데
에도 막부 5대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유학과 불교에 심취해 열심히 공부하고
문치 , 덕치주의 시기를 열려 했고
개혁정책을 실시해 여기까지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1685년부터 이상한 행보가 시작됬고
1685년 츠나요시는
<츠나요시 쇼군>쇼군이 지나가도 개와 고양이가 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
는 법령을 발표했고
1687년부터는 동물의 살생을 금지하는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생류연령 , 살생금지령)'
이라는 법령을 발표하는데
동물 애호가인 그는 동물 보호 시설 만들기 ,
떠돌이개 10만마리 보호 등 여러 방법으로
국세를 소모하기 시작했고
개를 먹이는데만 연간 금 9만 8천냥(막부 수입의 11퍼) 이 듭니다
극단적 동물보호령은 점차 다른 동물로 이어졌고
결국 닭 , 조개 , 새우 요리도 금지되고 조개 , 장어 채취판매도 금지되고
사실상 육식이 금지됩니다
그가 죽은 후 생류연령(살생금지법) 은 열흘만에 폐지됬고
하여튼 백제 법왕같이 살생을 금지한 특이한 왕이었고
일본 요리는 이때 말고도
오래 전부터인 675년 덴무천황시기부터 육지금지령이 내려져
한국이나 중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어
해산물이나 채소 위주로 이어졌고
이 시기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육식이 금기시되어
육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서야 외국에서 각종 레시피가 들어와
육류요리가 등장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의 평균신장은 이상하게만큼 왜소하고 작았고
대식을 하며 육식을 즐긴 조선 , 한국인들에 비해 특히 작았습니다
[서민 실용교육학교 데라코야]
에도시대 교육은 한국의 서당격인
데라코야에서 이루어졌고
당시 상공업과 조닌(상인) 들이 일어나던 시기이기에
이곳에서 기초 , 실무적 교육이 이뤄졌는데
데라코야에는 남녀공학이었고
이곳에서 일본 어린이들은 글쓰기 , 계산 , 산수 , 도덕 ,
역사 등을 배웠고 데라코야 교사들은 주요 학식있는 평민이었고
하여튼 높은 교육열로 실무중심교육이 서민층에도 뿌리깊게 정착해
메이지 유신시기 일본의 문해율은 세계 최고수준이었다고도 합니다
이외에도 상위학교로 번교와 사숙이 있었습니다
[은본위제도]
나름 여러 문화가 발달하고 오랜 평화를 가진 에도막부였고
당시 동아시아 세계는 임진왜란 , 청나라 건국 이후부터는
대체적으로 한중일 삼국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교역하고 교류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초기 획기적인 은생산방법인
'연은분리법' 이 조선에서 발명됬지만
정작 은광개발 금지등으로 조선에서는 쓰이지 않았고
이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가 널리 사용되
16세기 일본은 세계 3위 은 생산국가가 됬고
에도시대부터는 일본은광의 은 산출량이 커져
일본내로부터 은을 화폐로 쓰는 '은본위제도' 가 확립되고
조선과 청과의 교역에도 유용히 사용됬고
서구 열강들에게는 일본이 매력적인 나라로 인식되
일본은 서양과 잦은 교류가 생기게 됬습니다
(한국에서 발명됬지만 정작 자국에서 묻히고 일본에서 꽃펴
세계적으로 한 획을 그은 연은분리법입니다)
<라봉봉>인내의 중요성은 예로부터
엄청나게 많이 비유되 있어왔고
사람이 짐승과 다른점은 어찌보면
바로바로 욕구를 분출하는 것이 아닌
인내하는 것이 있어서 같기도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뛰어난 덕과 인내심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포정치 시기를 지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출정을 다이묘들에게 강요할때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신의 병력을 아꼈는데
이런 모습들은 히데요시 사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머리가 영특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그의 모습들은 그다지 큰 혼란 없이
에도막부를 열고 이후 에도막부가 평화적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한
힘이 되었고
에도막부는 나름 여러 평화와 번영기가 있었고
에도막부 다음시기부터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게 됬기에
일본 내에서도 한국인들이 조선시대를 공격하는 것과 반대로
에도막부는 평화시기 , 좋은시기라는 이미지도 있습니다
단 에도시대 역시 봉건시대라는 한계가 있는 시기였고
마치 한국 조선시대처럼 일본인들에게는 여러 전통 이야기를 남긴 시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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