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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발전과 그림자>

[에드워즈 데밍의 품질관리]

[이코노미 애니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제]

[환경오염 문제]

[플라자 합의]

<라봉봉>

 

[에드워즈 데밍의 품질관리]

60년대 고도경제성장으로 대호황을 맞은 일본경제는

70년대에는 고도성장에서 안정적인 성장에 접어듭니다

1970년 일본은 오사카 엑스포(만국 박람회 , 만박) 를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오랜 장기호황과 신기술의 보편화로

1970년대 일본 경제는 낮은 실업률 ,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경제체제에 들어갑니다

 

1970년 오사카 만박의 심볼 '태양의 탑' ,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에서 이 만박 상징물이 나오며 일본 어른들은 빛나던 이 시기를 그리워합니다

 

일본산 제품은 점차 세계시장을 정복하기 시작하는데

일본 상품의 우수성에는 뛰어난 기초과학기술과 경영에 있습니다

 

기초과학기술은 이미 이전 에도시대대부터 서양서적을 번역하며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와있었던 것이고

경영이 특히 눈에 띄는데

 

1950년대까지만해도 세계 시장에서 일본산 제품은

오늘날 중국산 제품처럼 싸구려 , 카피 불량품으로 통했습니다

 

1950년대 일본산 식기제품이 미국에 납품될때

일본인들은 '나이프와 포크는 우리가 최고지' 하는 장인정신이 넘쳤지만

제품간의 품질편차가 컸고 납기일도 잘 지키지 못하며

장인정신은 가내수공업에나 한정되있어

고품질 대량생산을 하는 현대시대 일본제품과는 명백히 거리가 있었고

당시 일본제품들은 주먹구구식 경영으로 문제가 됬는데

 

일본은 이러한 문제들이 자국 공업기술의 가장 큰 문제임을 파악하고

미국의 에드워즈 데밍 W. Edwards Deming  같은 품질관리 전문가를 초청해

품질관리에 노력합니다

 

현대 일본경제의 스승 '에드워즈 데밍'

 

에드워즈 데밍은 장인정신이지만 가내수공업적 공업의 한계에 봉착해있던

일본을 현대 , 대량생산 시대로 이끌은 인물로

일본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는 일본 주요기업 사장과 중역들을 모아놓고

라디오와 TV를 통해 전국에 강연하며 다음과 같이 장담합니다

 

<에드워드 데밍>내말대로만 하면 , 일본이 수년 안에 세계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

 

도요타는 데밍을 고용했고

데밍이 훈련시킨 수천명의 관리자는 도요타 생산방식을 만듭니다

 

데밍의 방법으로는

 

1.제품과 서비스 향상을 위한 일관성 있는 목적만들기

2.기업철학 정립

3.생산&서비스 체계 개선

4.교육강화 , 리더쉽 정립

 

등 (총 14가지임) 여러 방면에서 일본 기업의 현대화 , 품질상승을 이끌었고

그는 일본 경제계 리더들에게 품질관리방식을 가르쳤고

일본 제조업은 데밍의 품질철학을 도입해

질높은 상품들을 대량생산하고

합리적 가격에 높은 수준의 일본산 제품들은

높은 상품경쟁력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합니다

 

1979년 개발된 일본의 혁신상품 '소니 워크맨' , 세계 최초의 소형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로서 20세기 빛나는 일본경제를 대표하는 상품입니다

 

[이코노미 애니멀]

70년대 일본의 JVC , 소니 , 파나소닉 , 도요타 , 혼다 , 캐논 등 전자, 제조업 기업들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미국과 유럽의 경쟁사들을 고사시키며

세계 시장을 장악했고

일본은 세계 1위의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막대한 자본을 비축하며 동시에 타 국간의 무역마찰도 심해집니다

 

일본인 , 일본 기업들은 마치 군대와 같은 조직력으로

전세계에서 세일즈 전쟁을 펼치며 세계 시장을 두두려 패고 있었고

이에 세계인들은 일본인들을 경계하며 일본인들을

'이코노미 애니멀(Economy Animal 경제 짐승)' 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경제상의 실리만을 위해 행동하는 기업 , 인간을 평하는 말로

당연히 좋은 말이 아니었고

일본인들은 전체주의적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개인의 자율성보다는 기업이 곧 가족이고 집이다는 마인드로

계속해서 세계의 돈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제]

일본 기업은 뛰어난 과학기술력으로 혁신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군대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세계사에서도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데

바로 '종신고용' 과 '연공서열제' 입니다

 

종신고용은 신입사원이 일단 회사에 고용되면

특별한 큰 문제가 없는 한 정년까지 계속 고용하는 것이었고

연공서열제는 근속연수가 긴 구성원을 승진과 보수등에서 우대하는 제도로

관료제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인데 (성과급제와 반대)

일본은 사기업체에서도 보편화 됬습니다

 

오늘날 일본 샐러리맨(직장인) 들

 

일본이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서구사회를 빠르게 따라하는 카피 , 추격형 경제시기에는

이러한 제도들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고

좋은 인재확보 , 사원의 충성심 , 결집을 얻는데 적합했지만

미국 다음(세계 2위) 혹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경제력을 갖추게 되며

더이상 추월할 나라들이 사라지고 기업내부에서도 카피가 아닌

혁신을 요구받게 되자

이러한 경직된 일본식 인사제도는 점차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한국은 미국식 정치제도에 일본식 경제체계를 모방했기에

한국인들에게도 연공서열제 등이 IMF 전까지 널리 시행됬습니다)

 

[환경오염 문제]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뤄지며

환경문제도 심각하게 커졌는데

대표적 사건으로 환경오염으로 인한 여러 질병문제들이 나타납니다

 

1956년 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는

메틸 수은이 포함된 조개 및 어류를 먹은 고양이들이 미친듯이 발작하다

바닷가로 빠져죽었고

이후 주민들에게서 이 질환이 집단 발명하며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됩니다

 

당시 메틸수은은 인근에 있던 신일본질소비료에서 운영하는 공장이

바다에 방류한 것으로 원인이 되었고

독성물질인 수은이 몸에 축적되자 건강이 나빠지고 특히 먹이사슬 최정점의 인간에게

더더욱 위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공식 환자 2265명이 확인됬고

수은중독은 일본사회에서 '미나마타 병' 이라 불리게 됬습니다

 

'1972년 목욕하는 도모꼬' , 도모꼬는 수은중독 어머니로 태어날때부터 미나마타병을 가지고 있었고 1976년 21세에 사망합니다

 

또한 1972년에는

광산에서 아연의 제련과정에 의해 배출된 폐광석으로

카드뮴이 유출되 강으로 흘러들어가

이를 식수 , 농업용수로 사용한 일본 주민들 수백명이 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이 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56명이 되는데

사람들은 아픔을 호소할때

'이타이 이타이(아프다 아프다)' 라고 호소했기에

이 병은 '이타이 이타이 병' 이라 불리게 됬고

미나마타병과 함께 일본 경제성장기 환경오염의 대표적 병 , 사례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이타이이타이 병

 

1967년 쓰레기로 뒤덮인 오사카 하천 , 오늘날 깨끗히 정비된 도시에서 사는 일본인들이 한국이나 중국보고 무례하다거나 더럽다 비웃는게 이해되지만 한편으로는 웃긴게 얘네도 경제성장기때는 똑같았습니다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일본경제는 안정적으로 성장해

1980년대는 일본경제의 황금시대가 펼쳐집니다

 

1984년 일본 1인당 GNP는 1만 474달러였고

미국은 동시기 1만 5949달러의 GNP를 가지고 있었기에

엄청난 수준까지 일본경제가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10~50대 대기업 랭킹에서

일본기업이 절반 ~ 3분의 2이상을 차지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쟁 패배 , 워터게이트 , 오일쇼크 등으로

여러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여러모로 정치 , 사회 , 경제 전반적으로

일본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당시 블레이드 러너 , 로보캅 같은 영화에서도

일본에 의한 패권침탈 이야기들이 나왔고

일본인들은 쌓아놓은 돈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의 부동산 , 상징적 자산들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한때 세계의 공장소리를 듣던 미국 제조업은 망테크를 타고 있었고

급속히 성장하는 일본경제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에는

반일감정이 일어났고

엔화 가치가 낮은(엔저) 상황에서 엔화 가치를 높이기(엔고) 위해

일본과 '플라자 합의' 를 시행합니다

 

플라자 합의

 

플라자 합의는 미국이 일본에 엔화 가치를 높이라 요구한 것이었고

엔화 가치가 높은게 좋은게 아닌 이유는

100엔=1달러일경우

일본인들은 수출할 경우 1달러짜리 물건을 팔아 100엔을 벌었는데

엔화 가치가 높아져 50엔=1달러가 되면

1달러짜리 물건을 팔아 50엔밖에 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세계시장에서도 1달러 하는 일본산 제품들이

2달러로 올라가버리면 구매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고

이럴 경우 기업의 국내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고

수출 주도형 경제를 취하는 입장에서는 타격이 큰데

 

미국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를 30% 이상 급락시켜

미국 제조업체들의 가격 경쟁력을 회복했고

대유럽 무역적자도 줄이게 됩니다

 

그러나 엔화 대비 달러가치가 50%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적자는 해소되지 않았고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시장개방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외국 신상품들을 철저히 카피해 내수에 도입했고

외국 상품이 일본에 들어오려하면

관공서 , 기업이 협력해 서로 외국 상품들이 못들어오게 막을 정도로

외국 상품등에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플라자 합의로 점차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던 일본경제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고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수출이 감소하며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경기부양책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규제 완화책을 사용합니다

 

<라봉봉>그럼에도 아직도 일본의 경제성장은 멈추지 않았고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경제는 80년대 마지막 불꽃 '거품경제' 시기로 돌입합니다

 

패전후 무시무시한 속도로 세계 2등까지 ,

나아가 1등 미국 등앞까지 위협해온 일본이었고

상당히 위협적이며 강력한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제가 느끼기에 일본경제는 융통성이나 개방적인 모습이

한국이나 다른 나라보다 확연히 적었고

군대식 , 배타적 문화가 강해 고도 경제성장을 했음에도

일본 특유의 집단 ,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맞물려

개인 한명한명이 정말 자유롭고 행복했을까도 의문이고

이러한 모습들로 이후 경제가 폭방하는 시기가 오자

한국이 IMF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실직된 일본인들이 자살하거나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한국은 일본식 경제를 모방했기에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면도 있고

완전히 같다고도 할 수 없지만

현재 일본은 한국의 10년 , 20년 뒤를 보여준다는 무시무시한 말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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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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