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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발전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폭군 네로]

[오현제 시대와 팍스 로마나]

[로마 제국의 모순]

[군인 황제 시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로마제국의 동서분할]

[서로마 제국의 멸망]

[로마의 문화]

<라봉봉>

 

[폭군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 이후부터 로마 공화정이 붕괴하고

로마제국이 시작되는데

로마제국은 제정 시기만 무려 1500년인 최강대국이자 최장수국으로서

오늘날까지의 유럽 세계를 형성하는 큰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과 밀고 당기기를 하며

나름 온건한 정치를 하다 사망했고

이후 로마 제국에는 카리굴라 , 네로같은 폭군황제가 등장해 큰혼란에 쌓이는데

특히 네로 황제는 자신을 내세우며 유흥과 사치에 몰두하느라

몸이 점점 비대해져갔고

네로 황제의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많은 세금이 사용됩니다

 

네로 황제

 

이후 네로는 로마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에게

날조된 죄를 뒤집어 씌어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고

황실 사람들도 반역죄를 씌어 처형하고 재산을 빼앗습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상류층 내부의 분쟁이었는데

64년 로마시에 유래가 없는 대화재가 있었고

5일에 걸쳐 로마는 타오릅니다

 

이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네로가 파괴된 도시를 보고 즐기려

일부로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았고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며 궁중 높은 누각에서 리라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까지 돕니다

 

하지만 이런 루머와 달리 네로는 화재 진압에 노력을 기울였고

대신 이러한 로마 시민들의 불만을 없애려

마치 관동대지진때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학살했듯이

네로는 기독교도들을 희생양 삼아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나라 행사나 군대에도 불참하고

대화재때에도 신전에서 울부짖는 로마시민들과 달리

신전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아

로마 시민들은 기독교 시민들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고

네로는 이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인들이 로마 방화 주범이라

죄를 뒤집어 씌어 처형하기 시작합니다

 

기독교도들을 화형에 처하라 지시하는 네로

 

이에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네로는 곧 희대의 폭군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됬습니다

 

일단 대화재 이후부터는 네로의 인기가 추락했고

네로는 원로원의 반발 및 반란으로 도망치다가 자살합니다

 

[오현제 시대와 팍스 로마나]

이런 폭군들의 등장으로 인해 로마제국은 잠시 내전시기에 돌입하지만

곧 5현제 시대(오현제 시대)가 시작되는데

 

5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달아 나와

로마는 황금시대가 시작되 평화와 번영을 맞았고

사람들은 이 시기를 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뜻의

'팍스 로마나' 라고 부릅니다

 

오현제

 

로마제국 최대영토

 

팍스 로마나 시기는

지중해 세력 전부를 제패한

로마가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2세기경의 시기를 말하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시대부터 5현제 마지막 황제 시대까지

약 200년의 기간동안이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 최전성기를 이끈 5명의 현명한 황제 5현제는

평화와 태평성대를 누렸고

많은 서양인들에게 황금시대 , 평화 번영기로 이야기 되고 이습니다

 

[로마 제국의 모순]

그러나 반대로 로마 제국 멸망의 모순이 아무도 모르게 쌓여가던 것도

5현제 시기때부터였는데

먼저 팽창력 , 통치력 한계로 더이상 로마인들은 영토확장이 불가능했고

로마인들은 거의 딱 지중해 둘러싸기 정도에서 영토확장을 멈춥니다

 

이로 인해 노예경제 사회였던 로마에는

노예 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전 공화정 시기 로마의 주역이었던 중산층 , 자영농에 비해

노예들이 비인간적 대우와 환경속에 아기를 낳을리도 없었고

낳더라도 고된 노동등으로 금방 죽어버리고

특히 농촌 노예 성비는 남초 현상이 심각했다 합니다

 

찰스 바틀렛의 '로마의 포로들(1888)' , 로마 노예그림들은 이렇게 알몸 여성그림이 많은듯 하고 로마 노예는 인류역사에서도 가장 열악한 인권이 있었다 하며 로마인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닌 가축이었고 폭행 , 살해나 성폭행이 일상화됬다 합니다 (괜히 로마가 망한게 아닙니다)

 

고대 로마(로마제국 이전) 의 검투사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드라마 '스파르타쿠스(미국 드라마 2010~)' , 잔혹하고 타락한 로마 사회상을 미화시키거나 필터링하지 않고 다룬 19금 미국 드라마입니다

 

(로마 공화정은 중산층과 자영농과 귀족의 나라였고

로마 제국은 황제와 노예와 군인의 나라였다 할 수 있습니다)

 

제국 경제를 하부에서 지탱하던 또 가장 주된 사업이었던

노예 공급 감소로

노예 가격은 10배가까히 상승하고

경제활동과 세수확보가 감소됬고

 

또 북방 게르만족들 사이에서 세력구조가 개편되

게르만족들의 조직력 , 군사력이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북부 서양인들의 모태가 된 게르만족 , 우리는 서양인 이미지를 금발에 백인에 푸른눈에 큰체격으로 보통 이런 게르만족을 떠올리지만 로마인들은 라틴족으로 검은머리에 키도 작고 어두운 피부였습니다 로마 투구 깃대가 높은 이유가 로마인들 작은 키 컴플렉스때문이라 합니다

 

또 로마 화폐였던 은이 점차 고갈나는데

은의 주요 공급지였던 히스파니아(스페인) 의 은광이 고갈되고

외부 원정을 통한 귀금속 유입이 감소되자

3세기에 들어서며 금화와 은화의 질이 하락하는데

카이사르 시대 90% 이상의 수치의 은화는

3세기 중반에는 30% , 말기에는 5% 로 감소했고

기존 화폐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물가폭등) 이 발생했지만

폭동을 두려워한 황제들은 군중을 달래기 위해

서커스와 같은 대량 자금이 투입되느 공공행사를 축소하기 어려웠고

반대로 농업생산성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화폐 데나리우스

 

이러한 상황속에서

노예노동에 의존하던 로마 경제는 점차 활기를 잃어가고

로마는 그저 민심을 사치나 서커스등으로 돌리려 할 뿐

자영농 육성에도 부진합니다

 

결국 5현제 시대 이후부터 이러한 모순들은 폭발하기 시작해

군단(군대)에 대한 봉급 지급이 지연되는 등

지역 주둔군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고

지방에 대한 로마 제국 수도의 통제력이 약화되갔고

지방 군단을 통솔하는 상급지휘관들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며

점차 자신들이 황제가 되려 했고

결국 내전을 반복하며 로마제국은 점차 군국주의 , 전제군주화가 진행됩니다

 

[군인 황제 시대]

결국 로마는 235년부터 284년까지 '군인 황제 시대' 가 시작되는데

황제가 되기위한 군벌들의 계속되는 싸움으로

49년동안 18명의 황제가 바뀝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자

게르만족들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강하고 호전적으로 로마 국경경비를 뚫고 약탈을 일삼았으며

동방에는 로마에 호전적인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등장하자

로마군은 게르만족 , 사산왕조를 이중으로 막아야 해서

군대 예산도 늘려야 하는데

로마의 경제 수입을 제공하던 노예가 줄자 화폐를 찍어내게 되고

인플레이션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후 로마에는 게르만족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4명의 황제를 뽑는 '사두정치' 가 시행되기도 했고

이후 4명의 황제는 내전을 일으키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승리해

로마 제국은 다시 1인 황제 체제로 바뀝니다

 

4두정치 시기 로마 세력권 ,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느 지역의 황제가 되고싶나요 ? (잡소리)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라 불리는 인물이며

로마와 세계사에 큰 이름을 남기는 인물인데

 

가톨릭 성인이라고도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밀라토 칙령을 내려 오랫동안 로마에서 탄압받은

기독교를 공인해 기독교 박해를 끝냈고

기독교 및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령을 내립니다

 

밀라노 칙령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후 국가통일을 위해

기독교 세력을 이용하려 했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 를 열어

정리되지 않은 기독교 교리 체계화를 시행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고후 파문하고

성부(하나님) , 성자(예수님) , 성령(성스러운 영혼) 이 하나의 하나님의 실체라는

'삼위일체론' 을 교리로 선포합니다

 

니케아 공의회

 

삼위일체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4년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동방지역의 비잔티움시를 새로운 로마 수도로 삼겠다 공언하고

330년 완성시켰는데

이것이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시초입니다

 

이러한 정책들로 로마를 안정시킨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인들 , 오늘날 서양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며

기독교는 전 유럽에 전파됩니다

 

[로마제국의 동서분할]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인 395년부터

로마는 결국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와 서로마로 분열했고

물론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만

제국 서부와 제국 동부는

서로 다른 국가로 인식하지는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갈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의 동서분할 경계

 

모든 포고령은 동서로마 황제 이름으로 공표됬고

동서로마 궁정은 서로 내정간섭을 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그런데 이후 훈족(흉노족) 이 서양에 침입했고

훈족에 밀려 게르만족과 이민족들은 로마로 대이동을 시작합니다

 

고대 서양인들을 공포에 떨게한 훈족의 아틸라왕

 

이로인해 서로마제국은 궁핍한 재정으로 국경이 숭숭 뚫리다가

여러 이민부족들의 침공으로 쇠퇴하다

476년 서로마제국 마지막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 용병대장오도아케르에 의해 강제퇴위 당함으로서

오랜 역사를 남긴 로마 , 서로마 제국은 허망하게 멸망하게 됩니다

 

'야만족에 의한 로마의 함락 , 410년' , 조셉-노엘 실베스트르 (1890) , 벌거벗은 서고트족 (게르만족) 병사가 서로마를 침략하는 모습입니다

 

게르만족(이민족)들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의 멸망 , 엄연히 동로마가 남아있기에 서로마 속주가 사라진것이지 로마제국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이유를

정리해보면 로마제국 내에서는 오랜 부패가 있었고

그 부패로인해 그들이 바바리안(야만족 , 오랑캐)이라 불린

이민족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다

쭉쭉 털리며 허무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서로마는 476년 멸망하고

그 자리에는 이민족들이 세운 나라들이 들어서지만

동로마는 이후에도 1000년을 가서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당하는

1453년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고대 지중해 세계의 자존심을 지켰고

이후부터는 유럽 세계 사회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

이탈리아나 그리스에서 스페인지역이나 영국 , 프랑스같은

서유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로마의 문화]

로마는 실용적 문화가 발달합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 1권 서문에서 던진 질문>

지성은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

체력은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 로마가

어떻게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

 

로마 덕후 일본 할머니가 쓴 책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수많은 로마연구가 , 역사학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로마인들의 '개방성' 을 꼽습니다

 

(로마는 나라가 일어난 원인도 , 멸망원인도 개방성에 있다 합니다)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흡수한 상대 민족을 흡수하고

시민권을 주었고 노예나 이방인 , 적들의 것들까지도

모두 자기것으로 만드는 개방성과 포용성이 있었고

이에 거대한 로마 제국내에 수많은 민족이 로마의 법을 따르게 됬고

로마인들이 건설한 길인 '로마가도' 를 걷게 되었습니다

 

로마 도로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히 법의 나라라 할 수 있는 로마의 법은

12표법-시민법-만민법 순으로 발달했고

 

로마는 건축이 발달해

도로 건설 이외에도

서양의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전통이 밑바탕 된

구조 실용주의 건축이 발달해

아치형 건축  , 다리 , 돔(판데온이 대표적) 등이 발달합니다

 

로마시대 지어져 아치형 로마 건축이 남아있는 프랑스의 가르교 , 오늘날에도 로마인들이 고대시대에 서양 곳곳에 건설한 도로나 다리들이 사용된다 합니다

 

대표적 로마 건축물로서는 '콜로세움' 이 있으며

로마 황제들은 로마 시민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시민권을 가진자에 한정해 매달 빵과 콜로세움 경기 티켓을 주는

'빵과 서커스' 라는 우민화 정책(국민 바보화 정책) 을 시행합니다

 

콜로세움

 

예로부터 재밌는 3대구경이 불구경 , 물구경 , 싸움구경이라는데

이 콜로세움 투기장은 그 세가지를 충족시켜줬고

5~8만 로마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이 거대한 경기장에서

관객들을 위한 점심도시락 , 포도주가 무료 배급됬고

타락한 로마인들은

노예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는 대결을 그저 스포츠 보듯이 구경했고

검투사들이 세계 곳곳이나 아프리카 등에서 온 거대 동물 , 맹수들과

싸우는 것을 구경하고

동물들의 재주묘기인 서커스같은 공연도 이뤄집니다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호랑이와 싸우는 검투사 노예들

 

물을 채워 해전도 이뤄졌다 하고

하여튼 콜로세움은 로마의 대표적 고대 문화유산이지만

로마의 비인륜성 ,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콜로세움 수중경기

 

이러한 정책으로 민중 , 대중들은

배급되는 공짜 음식을 먹고

잔인한 콜로세움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등에 열광하며

점차 정치 , 민주주의 의식에서 멀어져갔고

황제나 귀족들은 이런 문란한 사회속에서

세계 곳곳에서 들어오는 진미 , 요리들을 즐겼고

식사도중 종종 먹은 음식을 뱉거나 토해냈는데

그 이유는 체해서가 아닌 먹은 것을 게워내 속을 비운 뒤

더 먹기 위해서라 하고

 

매일같이 파티를 즐기던 로마귀족들의 연회 (누워서 먹고 토합니다)

 

로마인들은 점차 옛날에 자영농 생활을 하며

올리브유와 채식요리를 먹는 소박한 생활에서 멀어져가고

 

로마 제국시기 이러한 타락은 극에 달했고

로마 시민들 스스로가 부패와 타락에 무너지며

이러한 빵과 서커스 정책 등에 놀아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라봉봉>그 거대하고 잔인한 로마 제국도 결국 한계를 보이다

내부모순 , 비인간성으로 무너지게 됬고

참으로 간디의 명언인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패배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단지 로마는 안정적 법치주의나 군사 초강대국 , 광활한 제국의 영역등으로

외부 세계에서 함부로 침입하기도 어려웠고

 

내부적 모순으로 길게 썩어가다가

한순간에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진게 인상깊고

지중해 깡패이자 난공불락의 로마가 말기의 타락속에

이민족들에게 너무 쉽게 뚫린것도 신기합니다

 

로마 제국은 워낙 고대국가 잔인함의 끝판왕이라

당시 검투사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게 유희거리였고

노예 , 기독교 탄압부터 워낙 막장 이야기가 많아

오늘날 영상매체 등에서도 많이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또 길게 간 제국답게 서양에 수많은 유산을 남긴 로마였으며

로마는 서양인들에게는 뿌리와 같은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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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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