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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와 로마 제정의 시작>

[옥타비아누스]

[2차 삼두정치]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

[악티움 해전]

[로마의 이집트 정복]

[로마를 홀린 클레오파트라]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의 시작]

<라봉봉>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가 로마 절대권력자가 되면서부터

사실상 로마 공화정은 끝나고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 , 제정이 시작됬고

카이사르가 황제가 될것을 두려워한 원로원과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했고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원로원의 기대와 달리

카이사르의 독재 이외에도

이전 원로원 독재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로마시민들도 많았기에

로마는 또다시 내전에 휩싸입니다

 

공식적인 아들이 없던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당시

18세의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제 1상속자(후계자)로 삼았고

카이사르의 누이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제1상속자이자 양자로 삼아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 바티칸 미술관 소장

 

그러나 이전부터 갈리아 전쟁당시 군단장으로 복무하며

그가 죽기 전까지 카이사르의 2인자로서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크게 실망하고 어린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 안토니우스 , 이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재능이 드러나게 됬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후계자 고르는 안목은 탁월했다고 합니다)

 

일단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의 새로운 결집점이 되어

카이사르의 군대의 충성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원로원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격합니다

 

[2차 삼두정치]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의 공격에 결국 안토니우스는 패배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오른팔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는것도 중요했지만

원로원을 무력화시킨 독재자 카이사르의 상속자 옥타비아누스도 싫어했고

단지 안토니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싸웠어도

둘다 원로원과 대립한 카이사르 일파였음)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군대 지휘권을 이용해

거꾸러 원로원을 압박해 집정관(대통령) 자리를 얻어냈고

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화해해

다시 원로원의 뒤통수를 칩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 , 안토니우스는 역시 카이사르 일파였던

히스파니아(스페인) 총독 레피두스와 연합해

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고

이 삼두(세 머리 ,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는 곧바로

원로원파 척결 명령을 내려

여러 사람을 숙청합니다

 

2차 삼두정치 , 왼쪽부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

 

원로원 군대에도 대승한 삼두들은

로마 최고 권력자가 되어 로마의 광활한 영토를 나누어가졌는데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동방을 ,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선택했고

레피두스는 이용당하다 팽당합니다..

 

로마의 가장 핵심인 이탈리아는 명목상 공동관리였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잡았습니다 (옛날에도 패권다툼시

수도를 장악하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

이전 삼두 동맹에 의해

옥타비아누스의 누이는 안토니우스와 정식 결혼해있었는데

당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있던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는 동방원정후

원래 로마의 전쟁개선식은 반드시 로마시내에서 해야하는데

전쟁 개선식을 이집트에서 하거나

클레오파트라와 낳은 자신의 쌍둥이에게

동방을 분할해주겠다 선언하거나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아들이

옥타비아누스를 대신해야 한다 주장한다거나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자 제안하는 등

여러 개막장 선언으로

로마인들을 분노하게 했고

 

당시 로마 세력권

 

애초에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에 빠져

로마의 속국인 이집트에 로마땅을 바치는 것 자체가

로마인들의 상식에는 이해 되지가 않았습니다

 

이틈을 타 옥타비아누스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안토니우스를 맹비난하고 국가의 적으로 선포합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이전 삼두동맹으로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였지만

일방적으로 옥타비아와 이혼을 선언했고

 

빡돈 옥타비아누스는 분노해서

결국 안토니우스를 로마사회에서 매장시키기 위해

불법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고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해 공개해버립니다

 

이건 로마 전통과 상식에 위배되는 불법이었기에

법적 약점을 가질 수 있는 옥타비아누스의 승부수였지만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이집트)에 묻어달라'

 

라고 적혀있었고

설마설마 했던 로마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로마 시민들은 '에이 미치지 않고서야 ?' , '구라겠지' 하며

조작을 의심했지만

기막히게도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고

 

로마시민들은 이집트의 요부 클레오파트라와 놀아나

로마를 이집트에 통채로 바치려하는 안토니우스에 환멸감을 느꼈고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는 정치적 , 사회적 매장이 확정됩니다

 

(건강은 육체 , 정신건강 이외에도 사회적 건강이 있다 하는데

사회 구성원의 이익에 반하거나

신용과 신뢰를 잃을 경우

탄핵되거나 기득권 세력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마치 양치기 소년처럼

육체 , 정신을 잃은 것만큼의

고통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많은 안토니우스파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붙게되는데

이전부터도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은 카이사르의 부하였기에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힘을 합쳐 정적들을 몰아내기를 원했는데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로마 본토를 무시한

동방위주 정책 ,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놀아난 것에

분노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로맨스는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으며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동방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의심이 생겼고

이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많은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를 떠난 것입니다

 

(확실히 정치9단 카이사르가 괜히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를 냅두고

새파란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상속자로 한것이 아닙니다)

 

[악티움 해전]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맞다이를 뜨게 됬고

두 군대는 그리스 서쪽의 악티움에서 맞붙게 됩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로마 역사의 주요사건 '악티움 해전'

 

근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리스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이집트) 에서 싸워야 한다 주장했고

안토니우스 병력이 그다지 열세가 아니었기에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았고

이에 안토니우스의 장군들은 모두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굳이 그리스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몽땅 내줄 필요도 없었는데

(고추가 뇌를 지배한) 안토니우스는 애인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받아들여

 

악티움에서 철수하려 했고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의 철수를 저지하려 했고

결국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고

전투가 벌어지자 겁먹은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서 도망치고

이에 보빨남(여성을 지나치게 추종하며 꼴사나운 행동을 하는 남성을 속되게 이르는

요즘 청년층의 신조어) 안토니우스도 군대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이탈했고

 

(클레오파트라의 철수신호를 못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퇴각하자 전투에서 패배했다 생각하고 철수하는 이집트 함대를 따라

퇴각합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이탈하기 전까지만 해도

옥타비아누스군은 우세하지도 않았는데

이 전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지휘관 안토니우스가 이탈해 버리자 안토니우스군은 혼란에 빠졌고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괴멸됩니다

 

도망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 패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고려하지 못했는데

악티움 해전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육지에서 군대를 모아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면 된다 생각했고

부하들을 버리고 자기들 몸만 빠져나온 것입니다

 

(이성에 눈이멀어 사회를 파멸시키는 자들이 있기에

안토니우스의 패배는 이때 확정된 것이었고

 

남자들이나 사람들이 보빨남[쾌락의 노예] 들을 그저 애처가로 보지 않고

싫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호구짓과 사랑은 다른 것이며

저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까지 생각하고 아끼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쾌락만 생각하며 그 사람만 사랑하고 그 주변은 개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아니라 욕망에 쌓인 불륜이라 생각하고

부하들을 죽음에 몰고가며

로마인들의 지탄을 받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세기의 불륜이었다

보여집니다)

 

일단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 해전의 패배에 대해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헬레니즘 세계 (그리스와 이집트 , 서아시아) 세계에

이 전투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고

 

로마 세력권의 동방 도시들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싸울때 이들의 눈치를 보며

누구에게 붙어야 자신들이 이득인지 각을 오지게 재고 있었고

특히 이들은 이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에서

얻은 교훈이 있어서 더욱 신중한 모습이었습니다

 

근데 안토니우스는 덩치값도 못하고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부하들을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뚜두려 맞고 있었고

이 요부와 놀아난 남자는 패배에도 별다른 죄책감이 없는 모습이었고

 

동방 도시들은 결국 안토니우스의 악티움 해전 패배를 듣자마자

안토니우스가 싸가지가 없음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버립니다

 

이는 지상전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제압하면 된다 여긴

안토니우스에게 치명타였고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로마군이던 동맹군이던 상관없이

계속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탈영하는

탈주러쉬가 시작됩니다

 

처음에 안토니우스는 탈영병과 배신자를 강하게 처벌했지만

이는 더 큰 탈영과 배신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1년만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모아온 세력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극소수 병력만 제외하고

모든 기반을 잃습니다

 

한편 승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고

동방의 그리스에 머물며 헬레니즘 세계와 문화를 익히고 있었고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귀순한 자들을 환대하고

1년간 그들과 우애를 쌓습니다

 

[로마의 이집트 정복]

이런 과정에서 거의 모든 도시를 얻은 옥타비아누스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에 상륙했고

이집트 수도이자 헬레니즘 세계 중심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동족인 로마인과 안토니우스를 파를 없애는게 아닌

로마를 가지고 논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 왕조의 만행을 없애고

지중해 세계의 평화를 다시 찾아오겠다 공언합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칼로 자결을 시도하다가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음을 알게됬고

안토니우스 부하들은 반죽음 상태의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데려갔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습니다

 

안토니우스마저 잃은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모든게 끝났다는 것을 알았고

안토니우스마저 죽은 마당에

 

'안토니우스를 유혹해 로마를 내전에 몰아붙인 이집트'

 

라 말하는 옥타비아누스의 다음 행보는 뻔했고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남은 이집트와 헬레니즘 세계의

불씨를 위해 그녀 자신이 카이사르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을 살려달라 옥타비아누스에게 간청하나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를 보내 카이사리온을 즉각 죽이도록 지시합니다

 

카이사리온은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에 태어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아들은 오직 본인뿐이었고

이집트에서 엄청나게 밀이 생산됬기에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데려가

로마에서의 개선식때 환상적인 전리품으로 사용하려

클레오파트라를 철저히 감시시켰는데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이집트 여왕의 체면을 지키려

시종들에게 몰래 바구니에 맹독을 지닌 뱀 코브라를 넣어오라 했고

자신의 젖가슴에 코브라를 물려 자살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이로인해 이집트 마지막 여왕이자 파라오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이집트 프롤레마이오스 왕조는 문을 닫았고

이집트는 완전한 로마의 영토가 되었고

동방의 중심지이자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중 하나로서

중요한 요지로 유지되며 로마 수도에 밀을 바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나일강의 선물(풍요로운 농경지) 라 불리며 밀농사를 했던 이집트인들

 

단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 대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같이 묻어주게 됩니다

 

[로마를 홀린 클레오파트라]

로마를 홀린 여인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이집트 마지막 파라오이자 여성으로 로마 권력자와 관계를 맺었고

세기의 사랑과 불륜 등으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야기 , 창작물로 이야기 되고있고

 

엄청난 미모와 매혹적 목소리 , 재치와 지성으로

남자를 사로잡았다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일단 그릇에 비해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능력은 출중해

이전 프톨레마이오스왕조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가

이집트에 세운 그리스계 왕조입니다)

 

그녀는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그리스인 파라오였고

여러 외국어를 능숙히 구사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의 엄친딸이었고

이러한 모습들로 토착 이집트 백성들의 인기를 끌었다 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 망해가는 이집트를 구할 능력은 없었고

본인 역시 군사와 안보적 무능 , 부패와 사치에 탐닉했으며

망해가던 나라속에 로마라는 외세를 이용해 나라를 연장시키려 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그녀는 굉장한 대식가였는데

그녀가 시원스럽게 먹는모습에 카이사르가 반했다 하고

일단 카이사르와 연애는 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이집트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키려 클레오파트라를 그냥 냅둡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의 관계와 그와 낳은 아들을

자신의 정치적 안정으로 이용했다하고

그녀가 로마로 카이사르를 찾아와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까지 머물렀던 것을 보면

오히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에게 반했다고도 이야기 되는데

 

반면 안토니우스의 경우는

정말 홀렸다고 이야기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나름 로마 2인자로서

여자에 빠져 모든 것을 잃은 한량까지는 아니었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풍부한 경제력을 지원받고

반대로 그녀에게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을 제공하는데

단지 그런 정치적 계산만으로는 안토니우스는 그녀로 인해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끌려다녔고

 

쾌락주의자 커플이었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독창적인 간들 (Inimitable Livers) 이라는 음주클럽을 만들고

매일밤 파티를 열고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게임과 대회를 열었고

이 커플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변장한 뒤

알렉산드리아 거리를 활보하며 주민들을 희롱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는 그녀는 사치를 과시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하루에 20만 파운드(2억 ??) 의 돈을 다쓸 수 있냐는 내기를 걸었는데

이에 진주를 식초에 녹여 원샷했다고도 합니다

 

진주를 녹이는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는 군사적 능력이 전혀 없었던 그녀에게 군대를 맡겨

공동 지휘를 했는데

안토니우스의 로마군은 그녀와 이집트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반대로 이집트 군도 지휘부가 둘로 나뉘자 혼란스러워했고

결국 두 남녀는 모두 파멸하게 됬습니다

 

나이차가 크게 있지만

우아한 느낌에 서로 득이 된 카이사르와의 관계와 달리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는 뭔가 욕나올정도로

개판의 느낌이 강하고

당시 로마인들도 그런 더러운 감정을 느껴

안토니우스에게 탈주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가히 남자던 여자던 이성 한번 잘못만났다가는

삶이 천국이 될지도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되고

원래 남녀가 연애하면 정신줄 , 이성을 놓는다라는 어느 어른의 말이 떠오릅니다

 

[아우구스투스]

하여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죽음 이후

모든 정적 제거 , 이집트를 따먹은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양아버지 카이사르에 이어 명실상부 로마 최고 권력자가 되어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라 공인되게 됬고

그는 곧바로 오랜 내전으로 인한 로마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집중하고

다시는 로마가 분열되지 않기위해

카이사르의 생각같은 강력한 정치권력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그렇다고 카이사르처럼 노골적으로 황제행세를 하다

그같이 암살당해서도 안됬고

결국 그는 기원전 27년 모든이의 예상을 깨고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합니다

 

<옥타비아누스>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 !

 

그가 카이사르같이 할줄 알았던 원로원은 당황했고 또 환호합니다

이에 흡족한 원로원은 막 30세를 넘긴 이 젊은 로마의 최고 권력자에게

'존엄한 자' 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주게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최고존엄' 이랑 뜻이 같다 보면 됩니다)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의 시작]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강성한 안토니우스를 뚜두려 팬 자답게

정치 9단의 노련한 젊은 지도자였고

공화정 뼈대는 유지하나 실제 알맹이들은 전혀 내려놓지 않았고

수령(프린켑스 , 제 1시민) 이자 총사령관(임페라토르 , 황제) 으로서

죽을때까지 로마를 통치하게 됩니다

 

원로원은 마치 가마솥에 삶겨지는 개구리(서서히 죽어 죽는지 모름)처럼

이러한 것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는 공화정을 되살린다 안심시킨 후

능구렁이처럼 뒤로는 야금야금 권력을 집어삼켜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고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생전

계속 원로원을 속이고 타협하고 회유하려 부단히 노력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모습으로 계속 로마 지도층을 안심시켰고

그는 군사권 이외에도 정복지 이집트의 땅을 영지로 흡수해

로마 식량공급 및 경제권도 쥐고 있었고

현대 독재자들의 귀감이 될만한 예술적 정치공학의 정수라 하는데

아우구스투스 스스로는 모든 권한을 원로원에 되돌려준다 선언했지만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자신 이외에

갓 정복된 속주를 안정시킬 능력이 있는 인물은 없었고

당시는 로마 관료제가 발달하기 전이라

더욱 그랬습니다

 

결국 원로원은 여러 속주들을 관리할 권한을 주었고

계속해서 권력을 쥐자

슬슬 원로원 의원들도

그의 공화정 복귀 주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을 내려놓았는데

계속 그런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에 질서를 가져다 준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서

특권들을 요구했고

이러한 것들로

 

그는 프린켑스(원로원 제일인자 , 제 1시민) 이자

최고제사장 , 총독 , 특권 등을

모두 합법적으로 가지게 되었고

 

그는 국가원수로서 군권 , 인사권 , 거부권까지

사실상 군주로서 필요한 모든 권리를 합법적으로 거머쥐고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어

역사상 가장 독특한 군주정중 하나인 로마 제정(로마 제국)을 시작하게 됩니다

 

로마제국 최대영토 ,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 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집권기동안

그는 뛰어난 내정과 정치력으로 로마의 제정을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만들었고

시민들의 질서와 생활환경을 정리하고 내실을 튼튼하게 해

이후 로마제국을 긴 장수국가로 만든 원동력을 키웁니다

 

그가 제정을 연것에 대해 여러 의견은 있지만

이미 공화정시기 로마는 말이 공화정이지

정복 , 제국주의 국가였으며

넓은 땅을 통치하는데 점차 당시 공화정은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특권과 편법으로

그의 시대부터 로마에는 '황제' 라는 지위가 생겨지게 됩니다

 

정치 9단의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죽기전 그리스의 희곡을 인용한

유언을 남기며 유쾌하고 평온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어떤가 , 내 배역을 잘 수행했지 ?

그렇다면 박수를 쳐서 나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해주게

 

<라봉봉>2차 삼두정치 시기는

카이사르가 활동한 1차보다는 덜 흥미진진한 느낌이 있는데

일단 옥타비아누스도 카이사르가 점찍은 인물답게

훌륭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100년묵은 구렁이나 구미호 같은 요망스러운 느낌도 납니다

 

온갖 불륜 , 암투 등 막장드라마의 교과서 시대가

로마라고도 할 수 있고

특히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는 이후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이야기 됬는데

조그만한 가족에서 이런일이 일어나면 그냥 콩가루 집안이고 이또한 문제지만

최고 권력자 , 왕들이 이짓거리를 하면 국가가 멸망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이고

참으로 요부(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여자) 였다 할 수 있습니다

 

역사속이나 세기의 요부들 특징이 여러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이나

정작 제대로된 것은 하나도 못하거나

군사나 안보관 , 경제관들이 없다는 점이라 생각하고

자기 인생을 남자에 모두 걸다 파멸한다 생각됩니다

 

소설이나 창작물에서는 이런 요부들이나 보빨남들이 파멸하고

정의가 구현되는 것을 보면

꼬숩고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들지만

현실과 역사에서 이짓거리를 하면 불륜 당사자들 뿐만 아닌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에

참으로 꺼려지고 무시무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아우구스투스 시대때부터 로마 제정 , 로마 제국이 시작되는데

그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부터 기원후(서기) 14년 8월 19일까지 생존했으며

만 75세로 사망했는데

그의 생존기동안 예수님이 태어나서 청소년 예수님은

한창 생계를 위해 목수 공부를 하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온 세계에 호적등록을 명하자

요셉과 임신한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당시도 로마는 이런 정치적 암투와 전쟁 , 불륜 등으로

사회가 부패하고 썩어나가던 시기이고

이러한 사회모순속에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도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시고 떠나게 되시는 것이며

 

하여튼 예수님 탄생 전을 '기원전' , 탄생 이후를

'기원후' 혹은 '서기' 라 부르며 이 글을 쓰는 현재가 서기 2020년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부터는

오늘날 연대표인 서기시대이기에 좀더 역사 연대표를 보기가 수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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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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