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로마 공화정의 붕괴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라티푼디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귀족파와 평민파의 대립]

[율리우스 카이사르]

[삼두정치]

[갈리아 제패]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의 내전]

[클레오파트라]

[왔노라 , 보았노라 , 이겼노라]

[카이사르의 개혁]

[종신 독재관]

[브루투스 너마저 !]

<라봉봉>

 

[라티푼디움]

로마는 포에니 전쟁 승리 후 부유했던 해상강국 카르타고를 멸망시켰고

지중해 세계에서는 더이상 로마의 적수가 없어지게 됩니다

 

북아프리카에 자리잡은 카르타고는 엄청난 부자나라였는데

당시는 북아프리카가 사막화 되기 전이라

코끼리(북아프리카 코끼리) 도 살았고

북아프리카는 풍요롭고 따뜻한 기후였기에

농사가 어마어마하게 잘됬습니다

 

이에 수많은 카르타고의 값싼 농작물들이 로마로 흘러들어왔고

중산층으로 구성된 로마 자영농은 몰락하고

노예농업과 대농장 '라티푼디움' 이 생겨나 수많은 아프리카산 곡물이

로마에 유입됩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 엄청나게 커졌고

수많은 지식인 , 부유층 , 노예들이 로마로 들어오고

엄청난 전리품들을 얻은 로마는

도시를 세계 수도에 걸맞는 모습으로 바꾸려

엄청나게 화려한 대규모 공사를 벌였고

백만 명의 인구를 수용하는 지중해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포에니 전쟁 이후 점령지 , 부는 귀족들이 독점했는데

로마 군사력 , 보병의 핵심은 자영농 , 중산층들이었고

이러한 노예유입 , 값싼 작물 유입등으로 중산층이 몰락하자

로마는 내부적으로 여러 사회모순이 발생합니다

 

일단 외부의 적도 사라진 상태에서

자영농 몰락 , 귀족들의 부패 등은

로마인들의 초기의 건전한 생활습관을 잊게 만들었고

더이상 이전처럼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비로 무장해 전쟁에 나갔던 평민도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앞장서서 죽어가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귀족들도

초심들을 잃고 로마 평민과 귀족들은 격렬한 대립을 하게 됩니다

 

점차 로마에서는 공화정의 탈을 쓴 귀족정치 기능이 어려워졌고

부를 독점한 원로원은 권력을 확장하려 농장을 늘려갔고

자영농들은 농장을 원로원에 헐값에 팔아넘기며

돈을 탕진하며 자영농들이 몰락합니다 (자영농 몰락=로마군대 붕괴를 의미)

 

이에 호민관(평민계급을 보호하는 관직) 이었던

그라쿠스 형제는 국유지(나라땅) 를 무산자 계급(재산 없는 자) 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농지법을 발의하는데

 

로마 정치가이자 최초로 귀족들의 부를 평민들에 분배하려 해 사회주의와 대중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라쿠스 형제'

 

이미 법률에 밝아 이 국유지를 점거하고 있던 원로원들에 강한 공격을 받게되고

그라쿠스 형제는 이 반발을 무릅쓰고 호민관 권리를 사용해

농지법 시행을 가결시켰고

이에 로마 공화정 , 원로원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원로원 최종권고 (긴급조치 격)' 를 발의해

초법적 , 무법적 , 폭력적 방법으로

그라쿠스 형제를 죽여 버립니다

 

그동안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탈을 쓴 귀족들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으며

결국 원로원은 로마법위에 서게되고

로마 공화정의 근본을 파괴하는 행위를 벌인 것이었고

 

이후에도 몇 명의 호민관들이 원로원에 대항하다

죽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귀족파와 평민파의 대립]

이후 로마는

귀족파(옵티마테스 , 부유층과 기득권) VS 평민파(포풀라레스 , 중산층과 서민) 의 구도로

분열했고

마치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자유한국당 , 공화당 (보수) VS 민주당 (진보)

의 이미지와도 비슷합니다

 

(참고로 그라쿠스 형제 살해 당시에는 귀족파가 법을 무시하고 노답이었기에

당시는 귀족파가 나쁜게 맞았지만

이후 평민파의 카이사르가 귀족파를 제거하고 역시

독재자가 됬고 귀족파나 평민파 자체가 옳고 그른게 아니라

법무시 , 독재가 나쁜 것입니다

 

귀족파 역시 소수정예나 고결함 , 자존심 , 전문성 ,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가치추구에

의의가 있었고 평민파 역시 개방성 , 민중성 , 다양성 , 대중성이라는 의의가 있는 것이며

 

귀족파는 지루하고 꼰대같은 느낌이고

평민파가 뭔가 착하고 좋아보이기는 하지만

평민파 위주로만 흘러가다 포퓰리즘[인기 위주 정책] 으로 사회가

그저 인기를 위해 대규모 복지정책만 남발해 사회가 파탄날 수도 있는 것이고

 

다른 예로는

사람은 가까운 부부라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고

인간이 서로 격이 없고 순결함과 고결함이 없으면

인간관계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고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가 발생해

사회가 파탄나는 것이고

이런 보수적 가치 역시 사회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기에

귀족파는 나쁘고 평민파는 옳다고만 봐서도 안됩니다)

 

이후 로마는 옵티마테스(귀족파)의 술라와

포풀라레스(평민파)의 마리우스가 맞다이를 떠서 내전을 하는데

술라는 마리우스파를 제압하고 이들을 대거 숙청해

로마 원로원 귀족들의 독재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귀족에 철저히 편향된 불공평한 사회속에

로마의 분노한 민심은 점차 원로원의 편에서 떠나고 있었고

원로원 귀족들의 정당성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때 로마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저)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로마를 홀린 남자 카이사르의 흉상(얼굴상)

 

카이사르는 젊은시절에 독서를 많이했는데

젊은시절에는 딱히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해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33세의 카이사르는 스페인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석상을 보고서는

 

<카이사르>알렉산더는 나와 같은 33세에 세계를 정벌했지만 

나는 아직 역사가 기억할 만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라며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대기만성형 인물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로마 정치계의 엘리트 코스인

 

'명예로운 경력'

 

을 차근차근 밟아 갑니다

 

[삼두정치]

카이사르는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 서부지역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로마 전쟁영웅 폼페이우스와 로마 최고재벌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이 세 인물은 연합해

'삼두정치(세 머리의 정치)' 를 시행합니다

 

폼페이우스(로마 최고의 전쟁영웅) , 크라수스(로마 최고의 부자) , 카이사르(로마에서 제일 똑똑한 자) 가 연합한 삼두정치(1차 삼두정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지원으로 집정관(대통령)에 당선되

농지법을 통과시켜 민중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갈리아 제패]

이후 카이사르는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총독에 부임해

갈리아 전쟁으로 갈리아를 제패하며

8년동안 갈리아 전역을 로마의 땅으로 만드는

업적을 쌓게 되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 라는 책을 남깁니다

 

고전 라틴어로서도 의의가 있는 서양 고전이 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 박석일 옮김

 

또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당시

바다건너 섬 브리튼(오늘날 영국) 을 침공하기도 합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 시민들에게서 단기간에 이탈리아 반도와 맞먹는 규모의

갈리아인 , 야만족의 땅을 따먹은

민중파의 거두 카이사르의 인기와 군사적 명성은 엄청나게 됬고

 

민중파 인물이었던 카이사르의 뛰어난 정치력을 경계한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죽이려 합니다

 

갈리아 전쟁을 치루며 숙련된 10개 군단을 보유한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가 집정관(대통령) 선거에 입후보를 하려 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임기 종료 뒤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고 민간인 출신으로 집정관 선거에

나서라는 요구를 합니다

 

카이사르는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는 순간

정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을 알았고

지휘권을 반납하고 로마땅을 반납하는 순간

원로원에게 살해당할지 , 암살당할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원정군을 소집해

루비콘 강 인근에 머물며 사태를 관망하다

원로원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을 소집한 후

 

로마를 위해 갈리아 전역을 평정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원로원의 이러한 대우뿐이라며 부당하다 호소했고

이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 것임을 연설합니다

 

이에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카이사르와 함께 싸우겠다 했고

결국 병사들의 결의를 확인한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 (Alea Iacta Est)'

 

라고 말하며

 

즉시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합니다 (위화도 회군과 비슷)

 

루비콘 강을 건너는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병들

 

루비콘강과 카이사르의 남하

 

'루비콘강을 건넜다' 라는 말이나

그가 말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미 결정이 끝나서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다' 혹은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를 상징하는 관용어가 됬고

그는 혹은 그의 관련된 이야기는 여러 띵언들을 남겼습니다

 

[카이사르의 내전]

카이사르가 군사들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넌다는 것은 곧 쿠데타를 의미했고

'카이사르의 내전' 이 발생합니다

 

이전에 한때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를 맺은 동맹자이자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 자극을 받아

군사적 업적을 쌓으려 전쟁에 나섰지만

그는 돈만 많지 군사적 재능은 없었기에

파르티아 원정에 직접 나서다 전사했고 ..

 

또다른 카이사르의 동맹자

폼페이우스는 로마 유일의 군사 영웅이자 반 원로원파였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원정으로 군사적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지자

계속해서 야심을 드러내던 카이사르를 질투하게 됬고

크라수스 죽음 이후 원로원파에게 넘어가

로마에는

카이사르(+평민파) vs 폼페이우스(+원로원 , 귀족파)

구도가 형성됩니다

 

한때 카이사르와 함께 원로원에 맞선 폼페이우스였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딱히 권력욕이 없었고

이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 계속해서 호의적으로 대하며

그를 원로원파로 끌어들이고

결국 한때는 동료였던 당대 로마의 두 군사영웅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내전기동안 싸우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 히스파니아(스페인) ,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세력의 군대를 격파하는데

대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망명합니다

 

[클레오파트라]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내전이 있어

프톨레마이오스의 승리로 클레오파트라가 추방당했는데

 

이집트인들은 폼페이우스의 망명 목적이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자신에 손에 넣고

카이사르와 다시 대결을 벌이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했고

결국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당합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이집트로 들어갔는데

프톨레마이오스가 카이사르에게

승자를 환영한다는 의미로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오히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목을 보고서는

한때의 동료에서 정적이 된 자의 초라한 죽음에 눈물흘립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죽인 것이

 

'비겁한 행동'

 

이라 분노하며

이를 빌미삼아 포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끄는

이집트를 박살냈고

 

(아무리 폼페이우스가 패장이었어도

로마 전직 집정관이자 로마 공화정의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고

이런 사람을 살해한 속국인 이집트 왕을 국왕에 앉혀놓는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융단을 선물받았는데

융단을 풀어보니 그 안에 매혹적인 클레오파트라가 나왔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융단(양탄자) 에 숨어 잠입해 카이사르를 만난 것입니다

 

융단에서 나와 카이사르를 만난 클레오파트라

 

결국 카이사르군에게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살해당핬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실권을 장악합니다

 

50세 초반의 카이사르는 20대 초반의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푹 빠졌고

클레오파트라는 엄청난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으며

실제로 빼어난 외모와 매혹적 목소리 , 재치와 지성을 갖추어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클레오파트라는 이후 로마의 새로운 권력자 안토니우스와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요사스러운 미모로 로마를 좌지우지하다가

로마 1대황제가 되는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의 이집트 침공으로

패배하여 도주한 뒤 맹독을 지닌 뱀인 코브라가 자신의 젖가슴을 물게 하게 해

자살합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을 뒤흔든

세기의 요부 , 팜므파탈(미모로 남성이나 사회를 파멸로 이끄는 여성) 이미지가

있는 클레오파트라였고

오늘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세계 역사가 변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포사나 양귀비 , 장녹수 같이

경국지색으로 나라를 뒤흔든 팜므파탈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왔노라 , 보았노라 , 이겼노라]

하여튼 카이사르는 이집트에도 영향력을 끼쳤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확인하고

클레오파트라를 파라오로 옹립한 뒤

몇 달동안 푹 쉬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마지막 파라오 , 여왕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이 내전에 집중한 것을 보고

페르시아계 왕국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는

소아시아를 공격했는데

이에 카이사르는 파르나케스 2세를 무찌르기 위해

군대를 규합해 소아시아로 원정을 떠났고

폰토스 왕국과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전투를 하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간단히 폰토스군을 궤멸시키게 되고

폰토스 왕국은 멸망해 로마의 속주로 쪼개집니다

 

폰토스 왕국과 카이사르의 원정로

 

카이사르는 폰토스군을 제압한 직후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

쓸데없는 서술을 과감히 생략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승전보를 편지에 보내게 됩니다

 

'왔노라 , 보았노라 , 이겼노라 Veni, Vidi, Vici (웨니 위디 위키)'

 

카이사르는 이러한 아주 간단한 문구를 로마 본국에 보내

아직 내전중인 로마에서

자신의 군사적 우월감과 내전 승리의 확신을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옵니다

 

로마로 귀국한 카이사르를 대항할 적수는 존재하지 않게 됬고

그는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고 원로원파 잔당들을 소탕해 깨끗히 정리하고

유일한 로마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고 카이사르의 내전은 종결됩니다

 

[카이사르의 개혁]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1인자가 되어

로마에 방대한 개혁을 하는데

 

1년을 365일로하는 율리우스력을 만들었고

포룸(공공광장 , 집회장 , 시장) 건설 ,

로마최초 국립도서관 건설 , 극장건설 등을 했고

원로원을 약화시키려 원로원 의원 600명 정원수를 900명으로 늘렸고

늘어난 로마영토에 따라 속주를 재편성하고

곡물을 국가에서 매입하게 법제화 하고 곡물 수령자를 정하는

복지정책을 시행합니다

 

또 군대와 교육과 의료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군인 봉급을 2배로 늘리고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합니다

 

또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속주민 융화정책을 통해

카이사르는 속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원로원 계엄령인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합니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앓고 있는

질병을 파악해 이를 수술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하고

그는 이전 로마 권력자들과 달리

정적을 숙청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다방면의 새로운 시스템을 로마에 구축하며

로마의 여러 근본적 문제를 해결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풍부한 독서를 한 카이사르는

이때에 이르러 참아온 이상을 펼치며

다방면의 개혁을 시행했다 생각됩니다)

 

[종신 독재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개혁을 마친 뒤

종신독재관에 취임해 자신을 '임페라토르 (imperator , 최고 사령관)'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데

사실상 이때부터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권력을 가지게 됬고

로마의 1인자 , 절대 권력자가 되는데

 

루브르 박물관의 카이사르 조각상

 

사실상 이때부터 귀족정이지만 허울뿐인 민주주의 , 공화정의 간판은 유지하고 있었던

로마 공화정은 완전히 무너졌고

로미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황제의 나라 , 로마 제정이 시작됩니다

 

카이사르는 왕 , 황제를 자칭하지 않았지만

내전 종결이후 대놓고 왕처럼 행동했고

사실상 로마 황제가 됬고

임페라토르는 황제를 뜻하는 엠퍼러 Emperor 의 유례가 ,

카이사르라는 그의 이름은 황제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예로들면 러시아 황제 짜르나

독일 황제 카이저가 이 인물이 유례가 된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카이사르(황제)의 것은 카이사르(황제)에게 돌리고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라

 

그렇게 점차 로마에 황제의 개념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브루투스 너마저 !]

카이사르는 이후 파르티아 원정을 실시하는데

파르티아 원정 3일 전에 그는

그가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한 원로원파 ,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합니다

 

평소 자기절제가 철저한 인물이었던 카이사르는

내전이 끝나 모든 정적이 제거되고 로마 1인자가 된 이후부터

젊은시절의 이상실현 등 하고싶은것도 다했고 이미 볼장 다봐서

목적 , 의욕 상실때문인지 점차 대놓고 왕처럼 행했고

로마인들에게 충격을 줄정도로

이전의 냉철한 행보와 정반대의 유치하고 바보같은 일들을 하는데

로마 왕국 시절 로마왕들 조각상 옆에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 얼굴을 새긴 주화(돈)를 발행했고

사람들 앞에서 왕관을 쓰기까지 하는

슈퍼 어그로를 끌게 됩니다

 

처음으로 주화에 자기 얼굴을 새긴 카이사르

 

민주 공화정은 로마인들의 자부심이었고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총명함을 잃고 계속 어그로를 끄는

독단적인 카이사르가 점차 왕정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 , 불안감이 커져갔습니다

 

(카이사르가 말년에 ㅄ짓 한 이유는

이집트에서 기생충이 감염되 뇌손상을 입었다거나

원로원의 견제등으로 비롯된 우울증이 도졌다고도 이야기되는데

 

제 생각은 카이사르는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가 지중해 패자가 된 이후

내부분쟁이 시작된 것처럼

견제 세력이 모두 사라지자

목적을 잃고 멘탈을 놓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튼 원로원파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카이사르를 암살하려 했고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3월 15일' 은 여러 의미가 생겨납니다

 

하여튼 기원전 44년 3월 15일 아침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정복을 논의하려

원로원에 갈 준비를 했고

카이사르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의

그의 아내는 그에게 원로원에 가지 말라 부탁합니다

 

카이사르는 집에서 나서는 길에

점쟁이 스푸린나를 만나는데

이전 이 점쟁이는 카이사르에게

 

<스푸린나>3월 15일 , 흉조가 있으니 조심하시오

 

이라는 주의를 주었고

카이사르는 이날 이 점쟁이를 보고 옅은 미소를 띄며

 

<카이사르>오늘이 3월 15일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군요

 

라고 말합니다

이에 스푸린나는

 

<스푸린나>아직 3월 15일이 다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라는 알수없는 답변을 합니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원로원으로 향했고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출근하자

모든 원로원 의원들은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슬쩍 그의 뒤로 갔고

한명이 카이사르의 옷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는데

이것이 공격의 신호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먼저 목이 찔렸는데

상처가 깊지 않아 카이사르는 칼을 빼들어 저항했고

주변 사람들은 하도놀란 나머지 카이사르를 돕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암살자들은 그에게 칼을 빼앗고

카이사르를 빙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고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그의 옛 적수였던

폼페이우스의 흉상(얼굴상) 으로 밀어붙였고

결국 브루투스와 일당들의 칼에

카이사르는 23번이나 찔려 난도질당해 암살당합니다

 

암살당하는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죽는 중

암살자 무리에 그가 총애하던 브루투스가 있는 것을 보고는

마지막 순간에

 

<카이사르>브루투스 너마저 !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고

 

(이는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카이사르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라 하나

서구권에서 이 '브루투스 너마저 !' 는 믿었던 사람의 배신을 의미하는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독재자이자 황제의 대명사' 혹은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혹은

'위대한 이상주의자' 라 불린 이 카이사르는

이날 심장이 멈췄고

 

카이사르를 죽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이전에

폭군을 몰아내고 로마 왕정을 끝내고

로마 공화정을 창건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부루투스의 후손으로서

 

브루투스

 

카이사르 암살 직후 로마시민들에게 카이사르 암살의 당위성과 지지를 얻기위해

자신의 암살이 로마의 왕정화를 막고 공화정을 수호하려

했다는 의도 등으로

시민들 앞에 나서 긴 연설을 합니다

 

<브루투스>카이사르가 살면 로마시민들은 노예가 될 것이고 ,

그가 죽으면 자유로워질 것이오 !

카이사르의 용맹함과 위대함은 나도 물론 찬미하던 것이었지만 ,

그는 황제가 되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눈물을 감수하고 날 아들처럼 보살펴 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소 !

 

카이사르의 죽음에 흥분한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를 죽인 그의 연설에 조금 안정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상복을 입은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나서

브루투스의 연설에 동감하는 척하다가

결국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충격적 반전 연설을 하는데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카이사르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연설을 계속했고

마침내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었고

분노하며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 일당을 비난합니다

 

<안토니우스>나는 카이사르의 장례를 치르러 왔지 그를 찬양할 생각은 없지만 ,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그는 로마의 노동력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했고 ,

수많은 돈을 국고에 기부했고 ,

사익을 위해 단돈 한푼조차 쓴 바 없으며 ,

가난한 이들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될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

여러분 중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

 

<로마 시민들>그말이 옳다 !!!!!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서를 들어보이며

 

<안토니우스>저는 도저히 이 유서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읽으면 여러분은 모두 그의 시신에 달려들어 발에 입을 맞추려 할 테니까요

 

로마시민들은 안토니우스의 말에 초조해졌고

유언을 공개하라 소리쳤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시민들을 카이사르의 시신 주위로 둥글게 앉히며 말했습니다

 

<안토니우스>이곳은 카시우스에게 찔렸고 ,

카이사르가 사랑한 브루투스에게 찔렸습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그 카이사르를 브루투스가 찔렀습니다.

카이사르조차 브루투스를 보고는 얼굴을 가리고 쓰러졌으며 ,

그 순간 , 저도 로마 시민 여러분도 모두 쓰러진 것입니다 !

 

안토니우스가 피투성이가 된 카이사르의 옷을 들어보이자

분노한 로마 시민들은 살인자를 잡으라며 소리를 질렀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토니우스>유서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로마 시민 전체에게 74드라크마 씩의 돈을 나누어 주라고 했으며 ,

자신의 별장 , 과수원 , 사유지를 전부 시민들의 처소로 바쳤습니다.

이런 로마의 영웅이 죽음을 맞았단 말입니다 !

 

(자세히 쓴 이유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이렇게 대중 , 시민들을 선동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적재적소에 수식하거나 어휘를 선택하는

'수사학' , '웅변술' 을 주된 덕목으로 여겼고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 , 철학자 , 소피스트들이

밥먹고 대중들 선동하거나 토론하는게 일상이었기에

이런 수사학 , 변론술 , 웅변술은 고대 그리스 , 로마인들의

주요 교양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사학은 오늘날 정치계에서도 중요한 모습이고

광고나 영화등 영상매체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런 고전 수사학은 오늘날에도 교양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단지 실체없이 선동만하면 그건 사기꾼이고

정치인들은 공익을 위해 올바른 뜻으로 올바른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설등에

마침내 이성을 잃은 로마 시민들은

 

'브루투스와 그 일당들을 끌어내 죽여라 !'

 

라고 외치며

브루투스를 조지려 했고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급변한 상황에 놀라

잠적하고 도망치고

이후 브루투스는 그리스에서 병력을 모아

카이사르의 후계자에게 맞서나

전투에서 패한 후 자결합니다

 

브루투스 역시 현실이나 정세파악력이 모자라기는 했지만

로마에서 이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 수호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고

또 배신자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충신들도 브루투스의 고결함과 애국심은 존중했고

다만 브루투스 사후 그의 머리는 잘려

카이사르의 조각상 아래에 바쳐집니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됬는데

화장 당일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을 낭독하며

그의 재산은 로마시민들에게 헌납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했는데

 

이에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도 더욱 높아집니다

 

로마 군중들은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장례용 장작에 놓인 카이사르의 유해에다 직접 구해온

나뭇가지 , 가구조각 , 옷가지들을 땔감으로 수북이 덮어줬고

여자들은 보석들까지 불길에 넣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독재자이자 민중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그는 당대 로마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기도 했기에

이런 모습들에 많은 로마 시민들이 이 인물의 죽음을

크게 추모하게 된 것 같습니다

 

화장후 뼛가루를 수습하려하는데

비가 세차게 내려 뼛가루들은 전부 강으로 쓸려가

묘소를 만들지 못했고

이때 혜성(핼리 혜성)이 하늘을 지나가 사람들은

그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 믿었고

오늘날에도 카이사르의 무덤은 없는데

참으로 로마의 풍운아다운 모습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쿠데타에 성공한 반역자 , 로마인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라는

이중성이 있는 인물이었고

절대권력을 가진 그의 사후 로마는 또다시 거대한 내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라봉봉>로마 공화정은 여러 사회모순속에 빠르게 붕괴해갔고

그러는 와중에도 로마 정치사는 오늘날에도 보이는

사회현상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참 법이 발달한 나라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야심가이자 풍운아로서

제국주의 끝판왕 국가의 끝판왕격 인물로

그는 서구 독재자들의 로망같은 인물이 됬고

독재자 vs 로마인들이 사랑한 사람

등의 이미지로 하여튼 로마사회의 내부적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고

공화정 말기 모순속에 끝내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됩니다

 

책도 많이 읽고 머리는 똑똑한 인물인데

나쁜놈이기도 해서

하여튼 사회는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놈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동양인들에게 진시황 , 당태종 , 태종 이방원 , 수양대군 , 박정희

이런 인물들이 야심가 이미지라면

서양인들에게는 알렉산더 대왕 , 한니발 , 카이사르 , 나폴레옹 같은 인물들이 야심가 이미지이고

(히틀러도 이쪽 부류긴 한데 이 자는 아예 악인으로 분류됩니다)

 

동양 독재자들은 패륜적 요소가 있고

서양 독재자들은 불륜적 요소가 있는 느낌도 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