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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관기의 아들]

[동래현의 기술자]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다]

[간의와 혼천의]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와 수표]

[부러진 가마]

<라봉봉>

 

장영실

 

[관기의 아들]

장영실은 1390년 조선 동래현(오늘날 부산) 에서

조선에 귀화한 중국계 원나라 유민 아버지 장성휘와

조선 동래현 관기(관아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영실의 어머니의 신분은 신분이 천민(기생) 이어서

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천민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관아의 기생 '관기'

 

천민(노비)은 조선 신분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고

이에 어린시절 영실은

다른 어린이들에게 차별받고

기생 아들이라며 따돌림 당했습니다

 

어린 영실은 혼자서 나무를 깍으며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했고

손재주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실을 보고

영실의 능력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사람들>쯧쯧쯧

어미가 기생이기에

재능이 뛰어나도 뜻을 펼치지 못하겠군

 

10세가되던 해 어느날 장영실의 어머니는

장영실에게 여러 귀한 음식들이 있는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었습니다

 

 

맛있게 먹던 영실의 앞에서

어머니는 눈물흘렸고

장영실은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장영실>어머니 , 왜 우시는 것입니까 ?

 

영실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장영실 어머니>너는 이제 관가의 노비가 되어

이 어미와 떨어져야 한단다

 

조선에는 일천즉천이라는 법이 있어

신분에 따라 부모중 한명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되는 법이 있었기에

장영실은 10세가 되자 관노가 되어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장영실은 어머니와 눈물흘리며 헤어졌고

10세의 장영실은 관노 , 관가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동래현의 기술자]

영실은 관가에서 기구를 고치는 일을 했고

사또 부인의 장농도 고쳐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모든것이 영실손에 닿으면

새거가되고 깨끗해졌기에

 

사람들은 몰려들어서

영실을 찾아 물건들을 고쳐달라했습니다

 

어느덧 청년이 된 영실은

동래 관청 무기나 농기구 수리를 맡는 책임자가 됬고

 

사극 '장영실' 중 관노 장영실

 

하루는 동래현에 가뭄이 들어 비가오지않자 사람들은 한탄했습니다

영실은 마을 북쪽 못에서 물길을 끌어오자했고

물길을 내어 높은 지역의 못의 물을

낮은 지역으로 끌고와 가뭄을 이겨냈습니다

 

이에 다른지역에서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지만

영실의 지역 동래현은 풍년이 들었고

영실은 그 공으로 동래현감에게 큰 상을 받았습니다

 

김홍도의 '타작도'

 

이 소문은 세종대왕에게도 알려집니다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다]

세종대왕이 전국의 인재를 모으자

동래현감의 추천을 받아 장영실은 한양의 궁궐에 입궐합니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세종대왕은 장영실의 실력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어

궁궐에서 연구를 하도록 했습니다

 

관복을 입은 장영실

 

신하들은 천한 관노에게 벼슬을 줄 수없다며 모두 반대했는데

세종대왕은 예조판서 황희를 불렀습니다

 

신분을 차별하지 않은 조선 명재상 황희

 

세종대왕은 황희까지 반대하면

더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으려했으나

황희는 영실이 뛰어난 재주가 있다며

세종의 뜻에 찬성했습니다

 

결국 장영실은 세종의 인정을 받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정5품 벼슬인 상의원 별좌가 되었습니다

 

장영실은 자신을 발탁한 세종대왕의 은혜에

눈물흘렸습니다

 

[간의와 혼천의]

세종대왕은 장영실에게 백성들에게 필요한 이로운 물품을 만들라 했고

이는 장영실의 생각과도 같았습니다

 

장영실이 처음 만든 과학기기는

1432년 만든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 였습니다

 

간의를 이용해 천체를 관착하는 조선 관료들

 

천체 관측기술은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기술이고

간의로 잰 조선 수도 한양의 위치가 북위 38도로 밝혀져

장영실의 뛰어난 관측기술력이 나타나있고

 

이듬해

1433년 장영실은

정인지 , 이천 , 정초 등의 학자의 도움을 받아

천문관측기구이자 간의를 더욱 발전시킨 '혼천의' 를 만들었습니다

 

혼천의와 만원지폐속 혼천의 , 한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이 공으로

1433년 장영실은 정 4품벼슬 호군으로 승진합니다

 

[해시계와 물시계]

세종대왕은 농사와 백성들의 삶을 편리하게 하려면

시계가 있어야 한다 생각했고

장영실에게 시계를 만들라 명합니다

 

장영실은 최신 시계기술을 알기 위해

명나라로 유학을 다녀왔고 중국의 뛰어난 과학기술에 놀랍니다

 

<연려실기술 세종 초>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장영실은 명나라에서 하나라도 더 배워

조국을 위해 써야겠다 다짐했습니다

 

명나라의 뛰어난 과학에 놀란 장영실

 

조선에서 돌아온 장영실은

시계를 연구해서

6년연구 끝에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장영실은 해시계 앙부일구를 만들었고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를 만들었습니다

 

해시계 앙부일구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

 

세종 20년인 1434년에는 장영실은

그의 일생 최고의 업적인

정교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 를 만들어냅니다

 

자격루

 

자격루는 정밀한 기계장치로서

시간이 되면 인형이 북을 치며 시간을 알리는 최첨단 자동시계였고

해시계와 달리 비가 오거나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었던

장영실과 조선 과학기술력의 정점이었습니다

 

자격루 복원 모습

 

이에 나라에서는 장영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였고 백성들도 크게 기뻐했습니다

 

장영실이 만든 시계는 곳곳에 퍼져

농사에 이용되고 백성들이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측우기와 수표]

어느날 장영실은 비가온 뒤 장독대를 보고

좋은생각이 나서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를 만들었습니다

 

측우기

 

1442년 장영실은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었는데

이탈리아 가스텔리가 1639년 측우기를 발명한 것보다

2백년이나 넘게 앞선 것이었습니다

 

측우기 발명 이후 자신감을 얻은 장영실은

연구에 매진해

강물의 깊이를 알게하는 '수표' 를 만들었고

청계천 수표교에 수표 세웠습니다

 

장영실의 수표

 

수표는 강의 높이를 알 수 있게 해주었기에

사람들은 수표를 보고 홍수때 피난을 할 수 있어

홍수피해가 사라졌습니다

 

강물의 높이를 알 수 있게한 청계천의 수표교

 

장영실은 점차 크게 유명해졌고

측우기와 수표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 벼슬로 특별승진합니다

 

[부러진 가마]

다음해인 

1442년(세종 24년) , 장영실이 53세가 되던 해

세종대왕은 각종 병으로 고생해서

온천에 자주 갔는데

 

조선 왕실의 온천욕을 위한 별궁이었던 충청도의 온양행궁

 

대호군 장영실에게는 세종대왕이 온천 여행을 갈때

타고갈 가마를 만들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장영실은 최선을 다해 세종대왕의 가마를 만들었고

가마는 매우 뛰어나고 화려했습니다

 

화성능행도병도에서 혜경궁 홍씨(조선왕실) 의 가마와 조선왕실의 행차모습

 

세종대왕이 장영실이 만든 가마를 타고

온천욕을 위해 이천에 다녀오는 중

가마가 갑자기 부셔졌습니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 (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신하들>대호군의 장영실은 가마를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게 만들었으니

형률에 의거해 곤장 1백대를 쳐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영실의 공을 생각해 용서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세종대왕은 장영실의 처벌을 감형해 주었으나

장영실은 결국 의금부(조선의 사법부)에서

불경죄로 매를 맞고 벼슬에서 쫓겨났습니다

 

조선의 형벌 '곤장'

 

이후 장영실은 행방불명 됬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사람들은 가끔씩 장영실의 뛰어난 솜씨를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장영실이 만든 소중한 한국의 과학 유산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장영실은 천한신분으로 태어났음에도

자신의 노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불행을 극복해

훌륭한 발명가가 되어 나라를 빛냈습니다

 

장영실로인해 한국 과학이 크게 발전했고

장영실은 한국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으며

그는 오늘날 한국 기술·과학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장영실을 이야기한 사극 드라마 'KBS 1TV 대하드라마 장영실 (2016)'

 

장영실 사극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2019) Forbidden Dream'

 

장영실 동상

 

<라봉봉>조선 초기는 세종대왕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나왔고

명군에 명신하들이 나오듯이

세종시대에는 황희정승 , 장영실 등 한국의 위인들이 나온 시대였습니다

 

조선 초기는 관 , 국가 주도의 과학발전이 있었고

대표적인 인물이 장영실으로서

그는 신분을 이겨내고 뛰어난 업적을 남겨

백성을 이롭게하고

한국을 빛낸 위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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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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