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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한문보다 편한 한글]

[배재학당]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대한국어문법]

[주보따리 선생님]

[국문연구소]

[경술국치]

[한글]

[말모이 사전]

[민족의 혼]

<라봉봉>

 

주시경

 

[한문보다 편한 한글]

1876년 12월 22일

조선 황해도 봉산군 무능골에

주학원이라는 선비와 전주이씨 어머니의 아들로

주시경 선생님은 태어났습니다

 

주시경의 가문은

명종때 뛰어난 학자이자 정승 주세붕의 후손이었으나

올곧은 선비였던 아버지였기에

집안은 가난해 주시경은 13세가 되던

1889년 큰아바지 주학만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나왔습니다

 

주시경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는데

먼저 한자 음대로 읽고 그다음 우리말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우리말로 적으면 사람들이 쉽게 배우는데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이로인해 16세가 되던해 한글 연구를 하겠다 결심합니다

 

<주시경>내가 배우려하는 것은 한문으로 쓰인 뜻과 교훈인데

말이라는 것은 결국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니

한문도 결국엔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어려운 한문을 통하지 않고 쉬운 우리말로 교훈을 가르치면

얼마나 쉽게 깨칠 수 있겠는가 ?

 

주시경은 서당을 다니며

밤낮으로 글공부에 열중했습니다

 

김홍도의 서당

 

옛날 서당의 댕기머리 소년들

 

[배재학당]

1894년

주시경이 18세가 되자

현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합니다

 

배재학당

 

신학문의 중심지였던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처음 배운 주시경은 깜짝 놀랬습니다

 

표음문자(말소리를 그대로 기호로 나타낸 문자)

 

였던

영어의 짜임새가 훈민정음(한글)과 같음을 안 주시경 선생님은

훈민정음이

 

표의문자(하나하나의 글이 음과 상관없이 뜻이 있는 문자 ,

대표적으로 한자가 있으며 하나하나 다 외워야한다는 문제점)

 

였던 한자보다 더 과학적이라는 것을 ,

세종대왕이 생각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08년 지석영 선생이 출간한 영어교재

 

그러나 당시 한국의 지배층 , 선비들은 한문만을 글이라 생각하고

훈민정음은 평민 , 가난한 백성 ,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며

'언문' , '암클(암컷 , 여자 글)'이라 부르며 업신여기고 천하게 여겼고

주시경은 이런것이 잘못됬다 생각했습니다

 

훈민정음

 

훈민정음에 자부심을 가진 주시경은

댕기머리를 짧게 깎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주시경 선생님

 

그러나 주시경은 집안 형편때문에 마음놓고 공부만 할 수는 없어

수업이 끝나면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일을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몹시 힘들었지만

주시경은 쉬지않고 우리글을 연구합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주시경은 배재학당에 출강해 가르치던 서재필 박사를 알게됩니다

서재필 박사는 애국계몽사상가였고

우리글을 연구하려는 주시경의 뜻을 알아보고 기특하다 여겼습니다

 

서재필

 

서재필은 국민들을 계몽하기 위한

신문 , 독립신문을 만들려 했고

 

독립신문은 한문이아닌 순한글로 만들었기에

주시경이 독립신문의 틀린글자 교정하며

독립신문을 만드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1896년 4월 7일 최초의 우리글 민간 신문 '독립신문' 이 나왔습니다

 

독립신문 , 순한글

 

알기쉽게 한글로 쓰여진 독립신문으로 인해

사람들은 나라의 사정과 대신들의 잘못을 알고

대신들의 잘못을 비판하게 됬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대중 , 민중 집회였던 만민공동회 , 최대섭 1978년

 

주시경은 훈민정음과 신문의 힘을 느끼고 뿌듯해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 대신들은 신문으로 자기 잘못들이 드러나서

서재필을 싫어해서 쫓아내려 했고

결국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됩니다

 

주시경 역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승만 , 이동녕 , 양기탁 등과 함께

감옥에 수감됬으나

사람들의 도움과 고종황제의 특사령으로 석방됩니다

 

[대한국어문법]

주시경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는

우리글 문법책을 만들려했고

1897년 결혼 후에도 한글연구에 매달렸습니다

 

1898년 12월 31일 주시경은

최초 국어문법연구서인

'대한국어문법' 원고본을 집필합니다

 

대한국어문법

 

대한국어문법은

우리말 ,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의 특징을 밝히고

어떻게 발음하는지 정리하고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과정을 실은 책으로서

주시경의 독특한 음학이론과 분석방법이 들어간 책이었으며

주시경은 이 책을 교재로 삼아 사람들에게 우리말 , 우리글을 교육시킵니다

 

[주보따리 선생님]

주시경은 자신의 호를 크고(=한) 맑은(=하얀) 샘이라는 뜻으로

'한힌샘' 이라 했습니다

한힌샘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그의 야성적 표현이기도 했으며

우리말을 지키고 널리 쓰자는 뜻입니다

 

애국인물 한힌샘 주시경 선생님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주시경은 기독교 세례를 받기도 하고

신학문에 대한 갈망으로 계속해서 공부를 했고

국어연구에 집중하는 한편

학문연구는 국어교육과 같이 병행해야 한다 여기고

주시경은 선생님이 되어

서울 안에 국어 강의 , 국어 강습소에 나가지 않는 곳이 없게 되어

30살즈음에는 그는 20여곳에서 국어를 가르치게 됬고

서울 시내 각학교에서는 그가 가르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학교는 한국에 자리잡지 못하던 때라

선생에게 주는 보수가 별로 없었기에

주시경은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끼니를 걸러가면서도

국어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학교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선생님이 된 주시경은 교재를 등사판에 인쇄해서

큰 보자기 , 보따리에 싸서 옆에 끼고 다니며 학생들에게 나눠주며 강의했는데

이에 사람들은 주시경 선생님을 '주보따리' 라고 불렀습니다

 

보따리를 든 주시경 선생님 동상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교단앞에 서는 주시경 선생의 눈은

또렷하고 정성스러웠고

주시경은 열정적으로 교육 , 강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우리글의 중요성과 자주독립정신을 심어주려 했고

그의 열정적인 교육과 말에는 겨레의 혼이 들어있었습니다

 

주시경 선생님은

대한국어문법을 교과서로 삼아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일요학교와 야학까지 열어 밤새 사람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상동청년학원(상동교회) , 국어강습소를 열어서

국어선생님을 꿈꾸는 청년들을 가르쳤습니다

 

1900년 세워진 서울 상동교회

 

또 주시경은 신문과 잡지에도

글을 실어 우리말과 우리글 쓰는게 왜 중요한지 실었고

1906년에는 10년동안 매달린

'대한 국어 문법' 을 인쇄해 출판합니다

 

그만큼 당시 주시경의 우리말 알리기 노력과 열정은 매우 뛰어났고

당대 주시경을 따라올만한 우리말 , 국어 연구자가 없었습니다

 

[국문연구소]

이에 고종황제 ,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국어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국문연구소를 만들어

1907년 주시경은 지석영 선생님과 함께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에 임명 되어

우리글 맞춤법과 발음연구를 했습니다

 

한글 독립에 기여한 인물들 지석영 , 주시경 , 헐버트 , 고종

 

주시경은 나라의 강함과 약함 , 흥망성쇠 ,

민족의 보존의 근원은 언어 , 말에서 나온다 여기셨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시경>자국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케 하는 길은 

국성(國性 나라 문자 , 언어 , 종교 등 그 나라를 대표하는 것)을 장려함에 있고 ,

국성을 장려하는 길은 국어와 국문을 숭상하며 사용함이

가장 필요하다

 

[경술국치]

그러나 나라가 점차 기울어갔고

1910년 경술년 8월 29일 대한제국 ,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경술국치 , 경술년의 나라의 치욕이라 불렀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주권을 빼앗겨버리자

우리말과 우리글도 강제로 빼앗기게 되고

우리말을 '국어' 라 부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교사

 

점차 일본어가 한국에 들어왔고

주시경 선생님은 이럴수록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고

나라를 사랑해야한다 말했습니다

 

[한글]

주시경 선생님은

더 열심히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셨고

1912년에는 훈민정음을 '한글' 이라는 말로 바꾸셨습니다

 

주시경 제자들이 만든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세종대왕이 만들고 이름붙이신 '훈민정음 訓民正音' 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었지만

그 역시 한자이름이었고

 

주시경 선생님은 훈민정음 이름도

좋은 이름이었지만

순수 우리말로 짓기위해

하나의 크고 바른글 혹은 한민족의 글이라는 뜻으로

'한글' 이라 이름붙이셨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만드신 우리글을

훈민정음 , 정음이라 부르지 않고

한글이라 부르게 됩니다

 

[말모이 사전]

주시경 선생님은

국어문법 정리 , 말의소리를 펴내 한글을 알리려했고

또 우리 나라 첫번째 국어사전인 '말모이' 를 만들려했습니다

 

1910년대 말모이 원고

 

우리 말과 우리글 탄압하는 일본형사들은 이런 주시경을 계속 탄압하고 감시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주시경은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고

그러던 어느날

1914년 7월 27일 주시경 선생님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오고 복통을 일으켜

곧 병원에 갔지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39세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가 하던 우리말 , 한글연구를

그의 제자들이 이어갔고

그의 제자들은 '조선어 학회(한글 학회)'에서 활동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 우리 말을 모으는

'말모이 작전' 을 펼치고 '조선말 큰 사전' 을 펴내려 했습니다

 

1935년 현충사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

 

그러나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없애버리고

조선 말 큰 사전같은 원고들을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후 서울역에서 원고가 발견됬고

1957년 조선말 큰 사전이 펴내졌습니다

 

민족혼이 깃든 조선말 큰 사전

 

조선어학회 사건을 토대로 만든 영화 '말모이 (2019) MAL • MO • E - The Secret Mission'

 

[민족의 혼]

말과 글에는 그 나라 , 민족의 혼이 배어있으며

말이 없으면 나라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주시경 선생님은

평생을 한글연구와 나라사랑에 몸바치셨고

주시경 선생님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와 한글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수천년간 중국글자인 한문을 사용한 한국인들이었지만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평생을 우리말 우리글 사랑에 바치신

주시경 선생님의 국어문법연구로 한글은 더 나아갈 수 있게됬고

이로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쉽고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글학회에서 세운 '주시경 스승 묘비'

 

<주시경 선생님 묘비명 , 이은상 선생 지음>

한힌샘 겨레의 스승

이 땅에 태어나시어

한평생 오직 한 길 

우리 말 글 키우시니 

그 공덕 어디다 비기리까. 

해달같이 빛나옵니다. 

 

겨우 서른 여덟 해 

짧은 한 뉘 사시는 것을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겨레 위해 바치신 이라.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그리워집니다.

 

<라봉봉>흔히 위인전에서 보았던

방정환 , 주시경 이런 인물들이

그저 낭만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며 독립운동에 힘쓰신 생각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고

한국의 위인다운 인물이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깊게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이며

무엇보다 주시경 선생님은 뛰어난 어문실력 뿐만 아닌

국어 , 언어가 민족에 미치는 영향 , 역사와 언어의 중요성을 안

역사의식이 뛰어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더 큰 존경을 받는것이고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은 일제의 탄압속에

소중한 우리글을 지켜내려는 노력을 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소중한 한글을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주시경 선생님은 현대 한글의 아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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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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