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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 , 문무왕>

[오줌바다 꿈을 산 문희]

[세상을 다스릴 영걸]

[황산벌 전투]

[백제의 멸망]

[김유신 장군의 쌀배달]

[취리산 회맹]

[고구려의 멸망]

[나당전쟁]

[김유신 장군의 죽음]

[신라의 삼국통일]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

<라봉봉>

 

[오줌바다 꿈을 산 문희]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왕위를 이어

신라 29대왕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되었습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태종 무열왕 김춘추 !

 

그의 인생은 왕이 되기 전부터

김유신 장군과 함께였습니다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어느날 첫째 여동생 보희는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오줌이 바다처럼 흘러 온 나라에 가득 퍼졌습니다

 

신라 수도 금성(서라벌) 복원도

 

이에 보희는 꿈 이야기를 동생 문희에게 했습니다

 

문희는 장난삼아

 

<문희>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

 

고 말했고

언니는

 

<보희>무슨 물건으로 사려 하느냐

 

이에 문희는

 

<문희>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이에 보희는

 

<보희>그렇게 하자

 

하여 문희가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하자

보희는

 

<보희>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

 

했고

문희는 비단치마로 꿈값을 치렀습니다

 

신라 여성 귀족의 복식 , 경주시

 

10일 뒤

김유신과 김춘추는 함께 축국(축구)을 하고 있었는데

일부로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습니다

 

축구의 원형 축국

 

김유신은 자신의 집에서 옷고름을 달자 말했고

집에 춘추를 데려왔습니다

 

김유신은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을 꿰매게 했습니다

 

그러나 첫째여동생 보희는

 

<보희>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히 귀공자와

가까이 한단 말입니까 ?

 

하고 사양했습니다

이에 둘째 여동생 문희가 김춘추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습니다

 

김춘추의 눈에 문희는

수수한 화장과 경쾌한 의복 ,

그리고 어여쁜 얼굴이 눈에 부시는듯 하였습니다

 

김춘추는 문희를 보고 기뻐하며

정을 통해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 가 존재했기에

왕족이었던 김춘추는 왕족끼리만 결혼해야했고

가야계 왕족 출신 신라 귀족인 김유신 집안과 결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문희가 임신한 것을 알고는 문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김유신>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하고

온 나라에 소문을 퍼뜨려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 했습니다

 

어느날 선덕여왕이 남산아래에 행차한 틈을 타서

김유신은 마당 한가운데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어났습니다

 

여동생 문희를 화형시키려는 장작불쇼를 기획한 오빠 김유신 , 대왕의 꿈

 

선덕여왕이 보고 무슨 연기냐 물으니

좌우 신하들은

 

<신하들>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 하옵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선덕여왕>그게 누구의 소행이냐

 

물었고

 

선덕여왕

 

이때 김춘추는 선덕여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크게 변했습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선덕여왕>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하니 김춘추는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며 문희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정식으로 문희와 혼례를 치뤘습니다

 

이로서 오빠 김유신의 꾀로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임신한 문희는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김법민이었습니다

 

[세상을 다스릴 영걸]

하여튼 김유신과 김춘추는 장군과 신하로서

선덕여왕 , 진덕여왕을 모셨고

진덕여왕대

김춘추는 당나라에 사신을 가서 나당동맹을 맺고 돌아왔습니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여러 신하들이 알천에게 섭정할 것을 요청했지만 알천은

 

<알천>나는 늙었고 이렇다 할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두텁기로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다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다

 

하고 춘추를 왕으로 삼으려 했고

춘추는 세번이나 사양하다 마지 못해 왕위를 이어

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이 되었습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일대기를 그린 사극 대왕의 꿈 , KBS 1TV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 (2012)

 

[황산벌 전투]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이전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백제군에 딸 김고타소를 잃은 적이 있었고

이에 김유신 장군과 함께 백제를 아예 멸망시켜

합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랜 고생끝에 신라 29대왕이 된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백제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이어

당나라 소정방 장군이 13만 수군을 이끌고 황해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자

신라 김유신 장군 등으로 하여금 5만 군사를 이끌고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게 합니다

 

백제를 공격하는 태종 무열왕 , 이종상 태종무열왕 (1976)

 

백제 멸망시 나당연합군의 진격로

 

김유신 장군의 5만 신라군이 당나라군과 합류하기 위해

황산벌로 진군하자

백제 계백장군은 5천 백제군을 이끌고 맞섰습니다

 

신라 김유신 장군 , 한국의 위인

 

백제 계백 장군 , 한국의 위인

 

백제의 운명을 건 계백장군과 백제 마지막 5천결사대는

필사적으로 신라군을 방어해냈고

10배의 수 차이에도

4번이나 신라군을 방어해냅니다

 

이에

신라 김흠순 장군은 아들인 화랑 반굴에게 말했습니다

 

<김흠순>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를 모두 다하는 것이다

 

이에 반굴은

 

<반굴>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하고는 곧 백제군진으로 달려들어 힘을다해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김품일은

화랑인 아들 김관창을 불러서

여러 장수들앞에 보이며 말했습니다

 

<김품일>내 아들이 겨우 열 여섯이지만

기백이 자못 용감하다

 

네가 오늘 전투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

 

관창은

 

<관창>예 !

 

라고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창 한자루를 들고 백제군진에 달려들었습니다

 

영화 황산벌속 화랑 관창

 

그러나 백제군은 관창을 생포했고

백제 계백 장군은 관창의 갑옷을 벗겨보고는

관창이 나이 어림에도 용감한 것을 보고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말했습니다

 

<계백>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이런 정도이니

하물며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

 

계백은 관창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어린 소년 관창을 보고 놀란 계백장군 , 백제군사박물관

 

이에 관창은 아버지 김품일 장군에게 말했습니다

 

<관창>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발을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는

다시 적진으로 나가 힘차게 싸웠습니다

 

계백은 결국 관창을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습니다

 

김품일이 죽어 돌아온 관창의 머리를 쳐들자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습니다

 

<김품일>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 !

 

신라 군사들은 이를 보고

비분강개(잘못되어 가는 세태가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 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진격했고

계백장군과 백제 5천 결사대는 모두 전사합니다

 

황산벌 전투를 다룬 명작사극영화 '황산벌' , 황산벌 (2003) Once Upon A Time In A Battlefield

 

<논산 육군훈련소가>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황산벌(논산)에 연무대 높이 서고

대한의 건아들이 서로 모인 이곳이

오오 젊은이의 자랑 육군훈련소

 

이날 바다로 온 소정방 역시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크게 물리쳤고

계백장군의 결사항전에 발이 묶여

겨우겨우 황산벌을 넘은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소정방은 김유신 장군이 늦게왔다는 이유로

신라의 김문영을 목베려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

 

하고는 도끼를 집어들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노기어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나오자

소정방의 부하는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

 

라고 말했고

이리되자 소정방은 늦게온 신라군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백제의 멸망]

합류한 나당연합군은

결국 백제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했고

다급해진 백제 왕자는

음식과 많은 선물을 보내고 용서를 빌었지만

소정방은 받지 않았습니다

 

백제 사비성 복원도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주했지만

결국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습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소정방과 함께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연회가 벌어져

의자왕에게 가끔 술을 따르게 했고

백제의 좌평(고위 귀족)과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소정방과 당나라군은

의자왕 및 왕족 , 신하 93명과 백제 백성 1만 2천명을 배에 태우고

당나라로 돌아갔고

백제는 신라의 땅이 되었지만

남은 백제인들은 백제 부흥운동을 시작합니다

 

아직 고구려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사망했고

삼한일통 , 삼국통일의 남은 과제는

그의 아들 태자 김법민과 그의 친구 김유신 장군의 어깨에 옮겨졌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쌀배달]

태종 무열왕이 사망하자

백제를 평정할때 신라군으로 참여한 태자 김법민이 왕위를 이어

신라 30대왕이자 한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통일신라 첫번째 군주

문무왕이 되었습니다

 

문무왕 표준영정 (태종 무열왕과 비슷)

 

문무왕은 먼저

서쪽의 백제 부흥운동군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백제인들이 만든 목책을 불사르고

수천명을 목베어 죽여 그들을 항복시켰습니다

 

백제의 방어시설 목책(나무 울타리)

 

한편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다가

보급을 받지 못하고 군량이 떨어져가자

긴급하게 신라에 군량을 요청했고

 

이에 신라 신하들은

적진 깊이 들어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했지만

김유신 장군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김유신>제가 과분한 은총을 받아

외람스럽게 중책을 지니고 있으니

나라의 일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늙은 몸이 충성을 다할 때이오니

제가 적국으로 들어가 소장군(당나라 소정방)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무왕은 자리를 앞으로 당겨

김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흘렸습니다

 

전권을 위임받은 김유신 장군은 고구려 경계에 들어가서

칠중하(임진강)에 이르렀습니다

 

신라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먼저 배에 승선하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김유신장군은

 

<김유신>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왜 여기에 왔는가 ?

 

김유신이 스스로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니

모든 장졸들이 그 뒤를 따라 칠중하를 건넜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두려워하는 신라군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 만일 적을 가벼이 여긴다면

필히 공을 이루고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사로잡힘을 면할 수 있으랴 ?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누구나 일당백의 용기를 갖기를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이에 모든 신라장졸들이 말했습니다

 

<신라 장졸들>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구차하게 살아갈 마음을 감히 갖지 않겠습니다

 

김유신 장군과 신라군은 결국 평양으로 향했고

소정방을 만나 군량을 전해주었고

소정방은 식량을 얻게되자 곧 당나라로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경주 황성공원 김유신 장군 동상

 

[취리산 회맹]

원래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동맹을 맺고

백제땅은 신라가 , 고구려땅은 당나라가 가지기로 합의했는데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와 약속을 어기고

백제까지 , 나아가 신라까지 당나라 영역으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었고

이에 당나라는 백제 왕자 부여융으로 하여금

취리산에서 문무왕과 함께 동맹을 맺으라 강요합니다

(취리산 회맹)

 

신라 문무왕 김법민과 백제왕자 부여융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리산에서 흰 말을 잡아

하늘과 땅의신 , 강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입에 피를 발랐습니다 (삽혈)

 

관련은 없지만 동양의 삽혈의식이란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입처럼 이런 이미지랄까요

 

그리고 맹세하는 글은 당나라에서 지어줬는데

신라와 백제는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취리산 회맹>

... 두 나라는 혼인으로써 약조를 맺어

맹세를 다졌으며

짐승을 잡아 피를 머금었으니

언제나 함께 화목하며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 환난을 구제하며

형제와 같이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

 

그러나 백제를 통합하는데 실패한 신라와 문무왕의 불만을 두려워한 부여융은

곧 당나라로 돌아가버렸고

이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신라는 그간 치른 전쟁에 대한 대가를 찾으려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멸망]

취리산 회맹 이후

문무왕은 백제는 이미 평정했으므로

고구려를 멸하자며

당에 군사를 요청했고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군사를 이끌고 수도 금성을 떠나 북진했는데

이때 김유신 장군은 노환과 풍병을 앓아

금성에 머물러있었습니다

 

결국 나당연합군은 평양을 포위했고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은 항복했고

고구려 700년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포로 7천명을 이끌고 금성으로 돌아왔고

문무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고

다음과 같이 고했습니다

 

<문무왕>삼가 선왕의 뜻을 이어서

대당과 함께 정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묻고

그 괴수를 처단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국운이 태평하여졌기에

감이 고하오니

신이시여 들으소서

 

문무왕은 두 나라를 평정시킨 후

전공을 세운 자에게는 모두 상을 주었고

전사한 자들에게는 큰 재물을 주었습니다

 

[나당전쟁]

삼국통일을 이루나 싶었지만

당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뿐만 아닌 백제와 신라까지 당나라의 소유로 만들려했고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 것 뿐만 아닌

백제지역에 웅진도독부를 , 신라지역에

계림대독부를 설치하는 등 노골적으로 한국 전지역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당나라의 야심에 결국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문무왕은 백제를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당나라의 눈을 돌리기 위해

먼저 신라 설오유 장군을 보내

고구려 고연무 장군과 연합해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가 점령한

요동 오골성을 공격하게 했고

신라군의 선제공격에

삼국통일전쟁 마지막전쟁이자

7년에 걸친 전쟁인 '나당전쟁' 이 시작됩니다

 

(신라는 백제 , 고구려 , 당나라를 차례로 격파했음)

 

나당전쟁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은

왕과 귀족 및 수많은 백성들이 머나먼 말도통하지 않는

당나라로 대거 끌려간 것을 보았고

이에 그래도 동족이었던 신라를 돕기로 결정했고

백제의 해군력과 고구려의 육군력이 신라를 지원하게 됩니다

 

신라군은 당나라군에 맞서

홈그라운드 , 자신의 지역에서 싸운다는 강점을 철저하게 활용했고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매소성 전투에서 당 육군을 물리치고

기벌포 해전에서 당 수군을 물리치며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은 결국 신라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백제 지역에 세운 웅진도독부에서도 철수를 결정합니다

 

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

 

당나라가 물러나자

결국 신라는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죽음]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군의 완전격퇴를 보지 못하고

나당전쟁 기간도중 사망했는데

김유신 장군이 죽기전

갑자기 김유신 장군의 집에서 귀신 병사들 수십명이

나와 통곡하며 사라졌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김유신>이는 필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신의 병사 , 저승의 병사) 이

나의 복이 다한 것을 보아서

이 때문에 가는 것이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

 

10일후 김유신 장군은 병들어 눕게됬고

문무왕이 직접 행차하여 김유신 장군을 문병왔습니다

 

문무왕은 김유신 장군에게

김유신 장군이 떠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냐 울면서 물었고

이에 김유신 장군은 말했습니다

 

<김유신>신은 우둔하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지키고 나아감) 하는 것이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문무왕이 울면서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자신의 집 침실에서

향년 79세로 사망합니다

김유신 장군의 부인은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여자 스님)가 되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신라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유신 장군의 죽음에도

문무왕과 신라인들은 의기를 모아

끝내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습니다

 

통일신라의 영역과 북방의 고구려 계승국가 발해

 

경주 통일전 기념비 , 왼쪽부터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김유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수도 금성을 새롭게 꾸미려

스님 의상대사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의상대사는 말씀하십니다

 

의상대사

 

<의상대사>비록 풀밭과 초막에 살지라도

바른 도를 실천한다면

복스러운 세업이 오래 갈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사람을 고생시켜 성을 만든다 할지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문무왕은 수도 꾸미기를 중지합니다

 

문무왕은 사망하기전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문무왕>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

 

납세와 부역을 줄여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과거와 오늘) 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 가는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뭇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오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후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

 

원근(멀곳과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문무왕은

화장한 뒤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습니다

 

동해바다 위의 암석에 있는 경주 문무대왕릉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

문무왕은 생전 항상 지의법사에게 이르기를

 

<문무왕>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나라를 지키는 큰 용) 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고 말했습니다

 

이에 지의법사는

 

<지의법사>용이라는 축생(짐승)의 업보(대가)인데 어찌합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문무왕은

 

<문무왕>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 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한다

 

고 말했습니다

 

문무대왕릉 해룡일출제

 

문무왕의 유해는 이로인해 동해 바다 대왕암이라는 바다위에 묻혔고

문무왕이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켰는지

이후 통일신라는 정말로 동해바다 , 왜구의 피해가 사라지게 됩니다

 

<라봉봉>신라의 삼국통일(삼한일통) ,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과

고구려 만주영역 이남의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비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사극

대왕의꿈의 명장면으로

나이든 김춘추가 젊은시절 패기있던 김춘추가 대면하는 독백신이 유명합니다

 

나이가 들어 어느새 당나라와 손을잡은 현실주의자가 된 김춘추는

젊은 김춘추에게 당나라와 굴욕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비판을 받게되었고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에 고민하다

결국 자신의 결단을 후회하지 않음을 밝히고

끝내 아들과 손자 , 후손들에게 진정한 삼한일통의 과제를 남기고 떠난다는 명장면이 있습니다

 

지략과 외교의 달인이었던 김춘추를 연기한

배우 최수종씨 역시 대본을 리딩하며 눈물흘렸고

제작진들 역시 이에 숙연해졌다 합니다

 

삼국통일을 이뤄냈지만 불완전했기에

이중적인 평가를 받고있는 김춘추와 신라라는 비판도 있고

최초의 민족통합을 이루었다는 의의도 있고

훗날에도 한국인들은

고토를 수복하려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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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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