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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 효소왕>

[김흠돌의 난]

[새로운 왕비를 들인 신문왕]

[신문왕의 왕권강화정책]

[당나라의 태종 묘호 간섭]

[만파식적]

[효소왕과 남북국시대]

[모죽지랑가]

<라봉봉>

 

[김흠돌의 난]

그렇게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

사망한 후 동해바다의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문무왕이 사망하자

문무왕의 맏아들 태자 김정명이 왕위를 이어

신라 31대왕 신문왕이 되었습니다

 

통일신라 첫번째왕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지만

문무왕은 삼국통일전쟁을 겪은 인물이었기에

신문왕대부터가 본격적인 통일신라의 시작이라 할 수도 있고

이 시기부터는 전쟁이 사라지고 신라에는 태평성대와 황금시대가 시작됩니다

 

신라왕궁 월성과 서라벌(금성) 의 모습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은 반란을 일으키다

곧바로 진압 , 처형되었고

왕비 김씨 역시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궁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신문왕은 통일신라를 이끌 첫번째 군주로서

내부안정의 과제가 주어진 임금이었고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으로 커진 군부세력 , 귀족세력들을

김흠돌의 난과 엮어 숙청했습니다

 

당나라인들이 그린 신라 사신도 , 가운데 조우관(깃털모자) 를 쓴 신라 귀족

 

[새로운 왕비를 들인 신문왕]

김흠돌과 왕비를 숙청한 신문왕은

신분이 그리 높지 않았던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삼기로 했고

김흠운의 집에

엄청난 폐백을 보내며

통일신라의 부를 과시했습니다

 

폐백 , 쌀 , 술 , 기름 , 꿀 , 간장 , 된장 , 포 , 식혜 , 벼

등 신문왕이 신부의 집에 보낸 선물은

300수레나 되었습니다

 

신문왕은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한 후

신하들의 아내와 딸 및 마을 여자 30명씩을 데리고 가서

부인을 맞아오게 했습니다

 

부인이 수레에 타자

좌우에서 시종하는 관원과 하녀로 따르는 부녀들의 모습이 성대했고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서

신라 대궐로 들어왔습니다

 

번성했던 신라 수도 서라벌의 모습

 

[신문왕의 왕권강화정책]

신문왕은 내정개혁에 힘써

국학을 설치하고

 

고구려 , 백제 , 말갈인을 포함한

친위부대 '9서당'을 만들어 군사력을 장악했고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9주 5소경(9개의 주와 5개의 작은 수도) 으로 나누어

지방통치체제를 완성했습니다

 

9주 5소경

 

또한 신문왕은 귀족들의 토지이자 특권이었던

녹읍을 폐지하는데

녹읍은 귀족들이 월급대신 토지를 받아

그곳의 조세권과 토지에 딸린 노동력과 공물까지 모두 수취할 수 있는

제도로서 귀족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제도였고

이에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는데

관료전은 녹읍과 달리 토지로부터 조세만 수취할 수 있었고

노동력 수취 , 사람들을 지배할 권한을 없었습니다

 

신라 신하 , 귀족들의 불만은 고조됬지만

당시는 신라가 막 삼국을 통일한 직후라

왕의 군사력과 재산 및 왕권이 너무 강해

신하들도 다들 예예하며 몸을 사리고 있었고

 

신하들은 계속 불만을 참다가

신문왕 이후 신라 왕권이 점차 약해지자

다시 녹읍을 부활시킵니다

 

[당나라의 태종 묘호 간섭]

이외에는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서

왜 신라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묘호에

당태종 이세민과 똑같은 태종 묘호를 사용하냐 꼽을 주었고

이에 신문왕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한 후에 대답했습니다

 

<신문왕>우리나라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성스러운 조상 , 당태종 이세민) 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컨대 ,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별세하던 때에

온 나라의 신민들이 그를 추모하는 심정이 극진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의 묘호에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교칙을 들으니 송구스러움을 다할 수 없습니다

사신이 황제에게 복명(보고)하되

이대로 보고해 주기를 삼가 바랍니다

 

신문왕은 예의껏

당나라의 태종 무열왕 묘호를 고치라는 간섭을 거부했고

당시 당나라도 나당전쟁 이후 신라랑 섭섭하던 시기라

이에 당나라는 다시는 이에 관한 말이 없었습니다

 

신문왕은 전쟁시대가 끝나고 평화시대의 첫번째 왕이었기에

재위기간내내

삼국통일전쟁 기간동안 강해진 귀족세력 , 군부를 계속 개혁하고

신하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했고

당시 신문왕은 문무왕으로 물려받은 왕권이 워낙 강했고

백성들도 전쟁이 끝나 큰 불만은 없던 시대라

신문왕이 신하들의 멱살잡고 끌고가는 형태였습니다

 

신문왕릉 , 경주시 배반동

 

[만파식적]

이외에 신문왕대의

태평성대를 이야기하는 설화로서

평화를 불러오는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립 경주박물관의 2개의 옥피리

 

신문왕의 아버지 문무왕은

동해바다를 건너오는 왜병(일본군)을 막기위해

동해바다의 용이 되었고

신문왕은 동해에 감은사라는 절을 세워 아버지를 기렸습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

 

어느날 동해에 작은 산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왔고

신문왕은 이상히 여겨서

신하에게 점을 치게했습니다

 

신하는

 

<점치는 신하>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진호(난리를 진압하고 나라를 보호하다) 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도 삼삼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세계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는데

 

이 두 성인이 덕을 함께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신문왕은 기뻐하며

나아가서 그 산을 보았고

신하를 보내 산을 살펴보도록 하니

배를 타고간 신하는

그곳에 한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진다 했습니다

 

이에 궁금해진 신문왕은 직접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를 바치므로

신문왕이 용과 영접하며 앉아서 묻기를

 

<신문왕>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물었고

용이 대답합니다

 

<용>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성스러운 왕)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신다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天下和平 천하화평)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었고

유신은 다시 천신(하늘신) 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시어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신문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제사지내고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문왕이 용에게서 만파식적 피리를 받았다는 이견대 , 이견대에서는 문무대왕릉(대왕암) 이 내려 보입니다

 

대궐로 돌아온 신문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궁궐 창고에 간직해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앚았습니다

 

 

이에 이 피리를

만파식적 萬波息笛 

(만가지 파도가 쉬는 피리 ,

세상의 파란을 잠재우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

이라 부르고

국보(나라의 보물)로 삼았습니다

 

신라는 동해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만파식적 피리 덕분에 왜병의 침입이 없었고

한동안 평화로웠습니다

 

[효소왕과 남북국시대]

신문왕이 사망하자

신문왕의 태자 김이홍이 왕위를 이어

신라 32대왕 효소왕이 되었습니다

 

효소왕 당시 북방의 옛 고구려 땅에서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해

고구려를 계승했고

이에 한국사는 통일신라시대 혹은 남북국시대가 시작됩니다

 

남북국시대

 

또한 효소왕시대부터는

이전 나당전쟁을 했던 당나라와 화해해서

다시 당나라에 조공을 재개합니다

 

[모죽지랑가]

효소왕대에

죽지라는 이름의 화랑 , 죽지랑이 이끄는 화랑 낭도(화랑도 , 화랑 무리) 에는

득오라는 낭도가 있었는데

매일 같이 나오다

한번은 10일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었고

이에 죽지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득오가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득오의 어머니는

 

<득오의 어머니>당전 모량부의 익선이

내 아들을 부산성 창직(곡식창고를 지키는 직책)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가느라고 미처 그대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죽지랑은

 

<죽지>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라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

 

죽지는 떡 한그릇과 술 한병을 가지고

사람들을 거느리고 득오를 찾아갔는데

죽지를 따르는 화랑이 무려 137명이었습니다

 

정창섭-화랑도의 수련(1977)

 

죽지가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 득오가 어디있냐 물으니

득오는 익선의 밭에서 부역을 하고 있다 했습니다

 

이에 죽지는 밭으로 찾아가

득오에게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합니다

 

죽지는 익선에게 휴가를 청해서

득오와 함께 돌아오려 했으나

익선은 굳이 반대하고 허락하지 않았고

 

죽지는 익선의 고집불통을 비루하게(더럽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주도록 청했으나

그래도 익선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죽지는 말안장까지 주었는데

그제서야 익선은 득오의 휴가를 허락합니다

 

이후 조정의 화주(花主 화랑을 주관하던 관직) 가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서 익선을 잡아다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 주려하니

익선은 도망쳐서 숨어버렸고

이에 익선의 맏아들을 잡았습니다

 

정의와 의리를 중요시한 화랑들

 

화주는 익선의 맏아들에게

겨울 몹시 추운날에

성안에 있는 못에서 목욕을 시켰고

익선의 맏아들은 이에 얼어붙어 죽었습니다

 

효소왕은 이 말을 듣고

명령하여 모량리 사람(익선의 지역) 으로 벼슬에 오른 자는

모조리 쫓아내어

다시는 관청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복도 못입게하고

만일 승려가 되더라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득오는 이후

자신을 구해준

죽지를 사모(생각하고 그리워함) 하여 노래를 지었는데

바로

'모죽지랑가(죽지랑을 사모하는 노래)' 였습니다

 

<모죽지랑가>

간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고 하는구나

눈 깜빡할 사이에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이까

 

모죽지랑가가 기록된 삼국유사

 

<라봉봉>통일신라시대가 시작되자

신문왕은 숙청으로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고

신문왕 이후세대대부터 태평성대가 있었기에

신문왕은 신라의 태종 이방원이라고도 불립니다

 

이외에 만파식적 피리나

모죽지랑가들은 한국인들의 평화사상 및 풍류사상과 낭만사상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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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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