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과 을사사화>
[급작스러운 명종의 즉위]
[문정왕후]
[대윤과 소윤]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윤원형의 전횡]
[문정왕후와 보우스님]
[마지막 훈구파 윤원형]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이루지 못한 도학정치]
<라봉봉>
[급작스러운 명종의 즉위]
중종이 사망하고 즉위한 세자는 조선 12대왕 인종이 됬는데
인종은 효심이 깊고 어진 인물이었지만
유약하고 융통성이 없어
아버지 중종의 제사를 지내는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죽 , 미음까지도 거의 금식을 했고
결국 허약함과 스트레스가 누적되
재위 8개월만에 급사합니다
이에 인종의 이복동생이자 인종이 세자시절 한때
인종과 왕위계승전을 벌였던
경원대군과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인종이 즉위할동안 두려움에 떨며 살다가
인종이 급사해버리자
왠떡이냐 싶듯 곧바로 즉위해
조선 13대왕 명종이 됩니다
[문정왕후]
경원대군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조선판 측천무후로서
문정왕후는
여인들의 궁중암투극으로 큰 화제가 되었던
사극 '여인천하' 의 주인공으로
사극의 제목처럼
좋게 말하면 여성이 주도하는 시대를 열었고
나쁘게 말하면 암탉이 막 울어대던 시기입니다
왜냐면 여성이 주도하는 시대를 연 진취적 여성 , 여걸임에도
그렇다고 유능한 여성 정치인은 아니었고
그저 자기 세력 , 이권 챙기기에 급급한
전형적인 부패한 훈구파 정치인의 모습을
보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단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번째 왕비로서
34세에 경원대군 , 명종을 낳았고
16살때부터 성인으로 인정되어
보통 그시기쯤부터 자식을 낳는 조선시대 치고는
늦게 아들을 본 케이스입니다
문정왕후가 뒤늦게 아들 , 경원대군을 낳자
조정은 왕위계승전이 시작되고 있었고
이전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는
세자(원자) 인종을 낳고 6일만에 산후병으로
2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기에
인종은 어머니 없이 성장해 세자가 되었고
세번째 왕비가 된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아버리자
새로 맞은 정식 왕후가 낳은 아들 역시 정통성이 컸기에
이미 세자였던 인종의 지위가 위태로워집니다
이에 권신 김안로는 세자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쥐고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 윤원형을 조지려 했는데
윤원형은 역으로 김안로가 국모인 문정왕후를 해치려한다 반격을 가했고
결국 김안로는 역풍을 맞고 중종에게 처형당합니다
일단 중종 역시 인종과 경원대군 둘다
정식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들이었고
어머니는 둘다 달라도 자신의 아들이었기에
이렇게 싸우는 것을 원치는 않았지만
중종은 그럼에도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파와
경원대군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파가
대윤(인종파 , 장경왕후) 과 소윤(명종파 , 문정왕후) 로 나뉘어
암투를 벌이는것을 보며 괴로워하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대윤과 소윤]
하여튼 중종이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해
결국 대윤파가 승리하는듯 하자
소윤파의 문정왕후는 두려워하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듯이
일부로 인종에게 언제 자신과 경원대군을 죽일거냐는 막말을 한다거나
오히려 계속해서 인종을 괴롭히고 갈구었는데
착한 성향의 인종은 그럼에도 계모였던 문정왕후와
이복동생 경원대군에게 극진한 효도와 우애를 다했고
당시 조정 대신들 역시 인종처럼 착함착함이 가득했기에
이에 문정왕후와 경원대군은 이도저도 못하다가
갑자기 인종이 급사해버리자
문정왕후는 12살의 어린아들 경원대군을 왕위에 올려
명종을 즉위시켰고 자신은 수렴청정을 시작해
대윤과 소윤의 관계는 역전되었고
결국 문정왕후와 소윤파가 왕위쟁탈의 최종승자가 됩니다
[을사사화]
승자가 된 문정왕후는
이전 문정왕후와 소윤파를 봐주고 어질게 대했던 인종과 달리
패자가 된 인종세력인 대윤파를 철저하게 조졌는데
(나쁜년임 !)
문정왕후의 남동생이자 요부 정난정의 남편으로 유명한 윤원형은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역모죄로 몰았고
결국 명종 즉위년인 1545년
조선의 세번째 사화(선비들의 죽음)
을사사화가 일어납니다
대윤 수장 윤임은 인종이 사망하고 힘을 잃었고
소윤 수장 윤원형은 명종과 누나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윤임과 대윤일파를
모조리 숙청합니다
사실 대윤과 소윤 모두 훈구파였지만
당시 대윤에 협력하며 줄을 잘못 탄 사림파들이 피해를 입어서
사화라 불리게 됩니다
끊임없는 탐욕의 윤원형은 누나 문정왕후와 합세해
을사사화 다음해에는
곧바로 자신의 형 윤원로까지 사약을 내려 죽였고 정권을 장악해갑니다
[양재역 벽서사건]
명종 2년 ,
을사사화때 미쳐 숙청못한 대윤 잔당들까지 모조리 숙청되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는데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는
붉은 글씨로
'위로는 여주(여자 주인 , 문정왕후) ,
아래에는 간신 이기가 국정을 농단하니
나라가 금방 망한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라는 내용이 쓰여진 익명의 벽서(벽에 붙은 글) 가 발견되
명종에 올라왔고
윤원형은
<윤원형>을사사화 당시에 재앙의 근원들을 다 뿌리 뽑지 못한 데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 지금이라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라고 주장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나가
처벌받거나 처형됩니다
양재역 벽서사건은 정미사화라고도 불리지만
을사사화 다음해 일어났기에 을사사화로 포함되 불리며
조선 4대사화로 불리지는 않습니다
[윤원형의 전횡]
하여튼 을사사화 ,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완전히 국정을 장악한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당은 권력을 독점 , 전횡(권세를 혼자 쥐고 제 마음대로 함)
하게 됩니다
즉위부터 피바람이 분 명종대였고
자신을 살려준 어진 임금 인종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국썅(국가적 썅년) 문정왕후이기도 했습니다
을사사화의 여파로
조정은 혼란에 빠졌고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은 곧 이조판서 , 병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백성들을 수탈하며 재산을 증식했고
명종이 성장하는 명종 8년때까지 윤원형의 전횡이 계속됩니다
성년이 된 명종은 친정을 시작했음에도
드센 어머니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와 한패인 권신 윤원형은
계속 전횡을 하고 있었고
이에 명종은 윤원형을 견제하려 했지만
어머니 문정왕후로 인해 결국 하지 못합니다
[문정왕후와 보우스님]
문정왕후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다시 불교를 부흥시키려 했고
이는 문정왕후가 유학자와 사림파들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문정왕후 승려 보우를 신임해
보우는 문정왕후의 권력을 업고
불교진흥에 앞장서며
조선 사대부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게 됩니다
문정왕후는 불교부흥때문에 돈을 끌어모으려
외척들을 이용했는데
문정왕후 남동생 윤원형은
백성들의 고혈을 계속 빨아먹으며 재산을 증식시켰고
이에 황해도 지역은 개판이 되어
황해도에서는 도적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조선 마지막 훈구파이기도 해서
의의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훈구파들이 세력이 너무 강성할때는 국정농단의 사례가
흔히 나타났듯이
두 남매의 전횡으로
명종 당시는 워낙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였기에
명종대에 민심은 흉흉했고
갑자기 문정왕후가 성리학이 아닌 불교까지 지원해버리자
실록을 쓰는 사관(역사 기록관) 들도
이 시기가 ㅈㄴ 노답이어서
한탄과 한숨들을 많이 기록합니다
하여튼 성년이 된 명종은 어머니가 나섬에도
계속 참고 참다가
1565년(명종 20년) 어머니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드디어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고
문정왕후때 숨죽이고 있던 선비 , 사림 , 유생들은 살판이 나자
곧바로 일어나
곧바로 문정왕후 아끼던 승려 보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유학을 부활시키고 불교를 탄압하고 보우를 처벌하라는 시위등에
성균관 유생의 시위 ,
조정 대신들의 방관 ,
조선의 천재 성리학자 율곡 이이 역시
'논요승보우소' 라는 글을 올려
보우를 귀양보낼 것을 주장하자
명종은 결국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보냈고
제주목사는 당시 다시 힘을 얻는 유림 , 성리학계의 여론을 타고
명종의 허가도 받지 않고 보우를 죽여버립니다
[마지막 훈구파 윤원형]
또한 문정왕후 생전에 억눌려왔던 유림 , 사림들은
적폐청산의 여파로
척신정치(임금과 친척인 신하의 정치) 의 대표 윤원형은
탄핵을 받게 되었고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이
26조목으로 윤원형의 죄를 명종에게 올립니다
<윤원형의 26가지 죄>
전 영의정 윤원형은 본래 간사하고 음흉한 사람입니다.
국구(왕의 장인)로서 왕실과 가깝다는 핑계로 공신의 자리에 참여했으며
영상의 자리에 올라 일국의 정권을 쥐고
임금의 위엄을 빌어 생살 여탈을 제마음대로 하였으며
정신(조정 신하)들을 얽어 놓아 성쇠가 그의 입에 달려 있었습니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높아져서
형세가 양기(중국 한나라 척신)의 가문보다 더 빛나고 ,
축재하는 욕심이 한이 없어
동탁(삼국지 그새끼)의 만세오(동탁의 성) 보다 더 호화롭습니다.
백관이 앞을 다투어 뜻을 받들고 팔도에서 남보다 뒤질세라 뇌물을 바칩니다.
도로에 다니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성을 내고 눈을 흘기며
항간에 있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비방하고 구석에서 한탄합니다.
임금의 세력이 날로 약해지고 국운이 장차 엎어지려 하니 ,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에 생긴 일이겠습니까.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저지른 죄악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머리카락을 뽑아가며 셀지라도
이루 셀 수 없고 온갖 간사한 작태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신들은 우선 만인의 입에 오른 것과
만인의 눈으로 본 것을 뽑아서 전하를 위해 조목별로 진술하겠습니다.
첫째 ,
...
결국 누나빽을 믿고 설친 윤원형은
누나가 사망하자 곧 탄핵을 받았고
그동안 눈치를 보던 명종은 사림파 , 대신들과 연합해
윤원형을 귀양보내고
윤원형은 귀양지에서 물거품이 된 권세를 그리워하다
부인 정난정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사망합니다
역사에 윤원형은 화려한 권력도 10년을 못간다는 권불십년 혹은
조선 간신 , 역적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조선 마지막 훈구파의 불꽃이기도 했고
윤원형 이후부터는 사실상 훈구파의 대가 끊겨버려
조선이 실용적 , 경제적인 기풍이 쇠퇴하고
씹선비 , 유교 탈레반 국가로 변질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국 윤원형 사후부터
훈구파들은 대가 끊기고
사실상 사림파들의 시대가 시작되는데
역시 청렴하고 깨끗했던 사림파들 역시
권력을 독식하자 다시금 사림파도 부패하며
사림파 내에서도
이전 훈구와 사림 구도같은 파벌이 나뉘게 되었고
파벌의 이름만 바뀌었을뿐 결국 당파싸움은 계속되게 됩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하여튼 문정왕후 사후부터 명종이 본격적으로 친정하자
윤원형은 숙청되고
을사사화 당시 피해입은 자들은 복권되었고
사림파들은 정계에 재등장하고
재야 사림파들은 지방 등에서 성리학 연구를 활발히 벌이게 되어
퇴계 이황 ,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들이 나오게 되는 시기가
명종 시기였습니다
명종은 두 조선의 천재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중용했고
이 인물들은 성리학에 뛰어난 대학자이기도 하지만
신하 , 인간적으로도 청렴하고 모범이 되는 진실된 인물들이었기에
한국사의 위인이 되었습니다
[이루지 못한 도학정치]
명종은 어머니 사후 올곧은 선비들을 등용하며 개혁정치를 펼치려 했지만
곧 사망해버립니다
<명종실록 사관의 명종 평가>
아 , 임금께서는 총명하고 예지의 덕이 있었는데도
국가에 베풀지 못했다
...
아 , 불행한 것은 오직 임금뿐인데
문정왕후를 어머니로 두었고 윤원형을 신하로 두어
어머니는 착하지 않은 것을 가르치고
신하는 그 가르침에 순순히 따랐다
아 , 임금이 요순처럼 훌륭한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은
상하의 도움과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니
아 , 슬픈 일이다
문정왕후 사후 명종의 정치로
수많은 유학자들이 등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게 되었지만
얼마 후 명종이 사망해버렸기에
많은 사람들이 명종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고
명종은 평소에
<명종>나의 시호는 명 (明 밝을 명) 자면 족하다
라 했기에
그의 시호는 명종이 되었습니다
<라봉봉>명종 이후부터 훈구파는 대가 끊기는데
사실 누군 태어날때 몸에 훈구라 써있고 누군 사림이라 써있지 않듯이
사람의 성향이나 취향은 살아가며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합니다
실제 조선이 오늘날 정당정치처럼
훈구파 VS 사림파 등으로 파벌이 엄격하게 나뉘진 않았고
훈구파 대신들의 자녀들이 과거에 진출해 젊은 신진관료 , 언관 등이 되어
사림파가 되는등
아빠는 훈구파 아들은 사림파 이런 식으로 차차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했고
대신 명분 , 성향적 차이는 뚜렷히 존재해서
도덕과 명분을 중시한 사림파들은 유교적 이념을 등에 업고
경제 , 실리 중시의 훈구파들을 밀어내고
점차 조선을 장악하며 명종 이후 선조대부터는 완전한 선비들의 세상이 오나
곧 임진왜란이 터지게 됩니다
명종은 평생 어머니 치마폭에서 살다가
어머니 사후부터 뭔가 해보긴 해보려했는데
곧 사망한 케이스로서
명종 시대는 사실상 문정왕후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후는 임진왜란이 터지기에 명종시기는
마지막 사화시대이자
조선 전기 당파싸움의 마지막 시대이기도 했는데
이전까지 조선의 정쟁이 왕실의 골육상쟁에서 이어지다
점차 신하들의 사화로 이어졌을동안
백성들은 별다른 피해까지는 없었는데
점차 이런 잦은 다툼으로 국력이 고갈되가자
결국 명종대부터는 백성들이 수탈당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등 점차 민심이 흉흉해지고
조선의 전체적인 힘이 약화되던 시기입니다
조선인들은 세종대왕 시대 이후부터
외세에 대한 침략을 150년동안 모르고 지내다가
결국 약화된 국력속에 다음 왕 선조대부터
통일된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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