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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과 기묘사화>

[중종반정]

[유교적 명분에 입각한 중종반정]

[반정공신]

[조광조]

[조광조의 개혁]

[위훈삭제]

[기묘사화]

[주초위왕]

[조광조의 죽음]

<라봉봉>

 

[중종반정]

연산군의 폭정에 조정과 민심이 모두 괴로워했고

결국 성희안 , 박원종 등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병사를 모아 도성을 포위한 후

연산군을 몰아냈고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위를 이어 조선 11대왕 중종이 됩니다

 

중종 , MBC 대하드라마 대장금 (2003~2004) Jewel in the Palace 大長今

 

연산군은 호방한 성향이 강한 인물인데

조선의 호방한 왕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근본 국가 건국이념인

성리학 , 유교 정치를 거부합니다

 

조선 최악의 폭군 연산군

 

사실 현실정치가 성리학적 이념 , 법으로만 돌아가는건 아니었기에

왕이라면 이런 성향이나

백성을 위해서라면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을 어길 수도 있어야한다 생각되고

 

(쉽게말해서 융통성의 필요)

 

이게 나쁜것만은 아니였지만

연산군의 문제점은 호방한 성향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사치와 유흥을 위해

자신을 반대하던 사림파 뿐만 아닌

자신의 편이었던 훈구파까지 죽여버렸고

백성들을 쥐어짜내며 나라를 놀이터 , 룸살롱 , 사냥터로 만들어 버리고

가혹한 통치 , 인간 말종 , 음탕한 짓을 일삼았고

이런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곧 죽여버렸기에

백성과 신하들의 원망이 높아져갔습니다

 

[유교적 명분에 입각한 중종반정]

인간이길 포기한 왕에 괴로워하던 성희안은

연산군을 비난하는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이조참판 자리에서 파직된 후

박원종과 함께 무인들을 끌어모으며 반정을 기획했고

 

힘을 모으는 반정군

 

조선왕조 역사상 왕실끼리의 골육상쟁 , 왕위쟁탕전이 아닌

최초의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망설였지만

반정군에겐 유교적 명분또한 있었습니다

 

유교를 아주 자세히 공부해보면

유교는 비록 왕실 , 윗사람에

순종 , 충실해야한다는 이념을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기에

동아시아의 지배층들은 유교를 국가이념 , 주요 이념으로 삼은것이 있지만

 

유교는 결코 꼰대사상은 아니며

유교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왕에게 복종하라 가르치지 않습니다

 

유교의

 

'논어(공자)'

 

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하였고

유교의

 

'맹자'

 

에는

 

'군주의 권위의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백성에게 있다'

 

고 가르치고 있고

왕실의 권력은 천명 , 하늘의 명이지만

이 하늘의 명은 백성들의 민심과 비슷한 개념이기에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왕일지라도 바꾸어야 한다'

 

를 말하고 있기에

제왕이 하늘의 명을 받아 정치를 하지만

백성을 잘 살게하라는 천명을 어길시에는

혁명 , 천명을 바꾸어 그 제왕을 갈아치우고

새 제왕을 세워 천명을 대리케한다 말했고

 

민심의 이반시 혁명 , 천명 사상을 주창한 유교 사상가 맹자

 

이에 빡대가리 지배자들은

유교를 맹신하고 자기에게 유리한쪽 , 지꼴리는 대로만 해석하다가

이렇게 혁명 , 반정을 맞았고

 

이렇게 임금들은 천명사상을 가장 두려워했으며

오늘날 민주주의와도 일맥상통해

오늘날 대통령 , 국가 지도자들도

민심의 이반에 권력에서 내려온다거나 탄핵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성리학 끝판왕들인 조선 사대부들은

도저히 실드쳐줄 수 없을 정도로

선을 넘어도 한창 넘은

폭군 연산군을 갈아 엎어야한다는

이런 명분을 유교 서적에서 탈탈탈 찾아내며

중종반정을 기획하게 됩니다

 

결국

1506년(연산군 12년) 9월 1일 저녁

반정군은 모두 훈련원에

모여 반연산군 기조로 모두 합세해

폭군을 타도하는 중종반정을 시작했고

 

중종반정

 

반정군 용사들은

임사홍 등 연산군의 최측근 , 간신들을 제거했고

대비(중종의 어머니)에게 나아가 반정 사실을 알리고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인 성종의 아들 진성대군(중종)

을 왕으로 세울 것을 요청했는데

대비는 처음엔 연산군의 아들 , 세자가 왕위에 올라야한다 사양했지만

결국 폭군의 아들이 왕위를 이으면 훗날 또다른 후환이 있을 수 있었기에

대비는

 

<대비>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대로 따르리라

 

하고 진성대군은 반정군의 추대로 경복궁에 들어가 즉위했고

백성들은 폭군의 물러남에 눈물흘리며 반정을 환영했습니다

 

(비록 반정세력이 조작했다 감안해도

계유정난때 백성들이 계유정난을 환영한건 세조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지만

 

연산군때는 백성들이 매일같이 쥐어짜이고 있었던 시기이기에

중종반정때는 진짜 기록일 확률이 높습니다)

 

[반정공신]

결국 연산군은 폐위되 유배되어 곧 사망했고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은

국정을 장악하고 반정 참여인물들은

정국공신으로 책봉되어 조선 정치를 주도했고

 

중종반정 1등공신 유순정 초상화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성공한 반정이었던 중종반정으로

그전까지 절대왕권을 행사하던 조선왕실은 급속도로 위축되고

국정은 신하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도 유교 자체가 왕실에 우호적인 사상이었기에

이후에야 다시 조선왕실도 권위를 회복했지만

그럼에도 연산군의 사례때문에 조선 국왕들도

신하들의 옐로우카드 혹은 레드카드를 처음으로 받은 격이어서

왕들도 유교적 , 사대부들의 눈치를 심하게 봐야했고

더이상 막가파식 정치는 행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새롭게 조선국왕이 된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 ,

조선 11대왕 중종은 연산군대 사라진 도덕을 다시 복구하려 노력했습니다

 

일단 진성대군도 갑자기 왕위에 오른 격이라

중종 초기 정국은 반정공신(훈구파)들에 주도될 수밖에 없었고

초기엔 중종 역시 훈구파들의 눈치를 봅니다

 

참고로 중종대 반정공신들은

사림파들이 아닌

연산군대에도 주요 고위층 , 훈구파들이었는데

 

원래 훈구파들은 연산군이 온갖 지랄을 하던 ,

백성을 착취하던 , 사림파들을 학살할때에도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점차 연산군이 훈구파들의 재산에까지 손을 데려하자

일치단결해서 연산군을 갈아치운 세력들이었습니다

 

중종반정은 사실 유교적 명분은 둘째였고

연산군이 훈구대신들의 이권들까지 침탈하자

팀킬로 일어난 격이었고 (훈구파는 안정성을 중시하고 원래 왕과 친함)

결국 왕만 바뀌었을뿐 신하들은 크게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조광조]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중종 반정은 유교적 명분으로 일어난 반정이었기에

조선 정국은 다시 성종대처럼 유교 , 사림파들이 우대되는 형세로 흘러갔고

이런 상황에서 사림파에서 조광조라는 인물이 일어납니다

 

사림 영수 조광조

 

즉위초 반정공신 , 훈구파들의 눈치를 보던 중종은

점차 즉위가 10년이 되고 어느정도 짬밥도 생기자

슬슬 반정공신들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고

이에 신진사림 , 조광조 등을 적극 등용해

훈구파들을 견제합니다

 

조선 사림의 거두 조광조 ,

조광조는

1510년 29세 나이에 진사시를 장원(1등) 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당시는 연산군시대가 끝난지 얼마 안되서

나라에 도덕이 무너져있던 시대라

조광조가 성균관에서 언행을 단정히하며

행동도 철저히 성리학 가르침에 따르는 모습을 보이자

다른 사람들을 조광조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습니다

 

뛰어난 수준의 학문을 익힌 조광조는

조정내에도 이름이 알려져

중종의 천거(과거시험이 아닌 발탁해서 벼슬에 오르는 방법) 로

벼슬에 오르게 되었고

관료들은 조광조의 거침없는 논리와 열정에 탄복했는데

조광조는 이후에도 성리학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떳떳이 벼슬에 오를 것을 다짐해

알성 별시에 응시해 을과 수석으로 급제했습니다

 

조광조는 벼슬에 올라서도

중종을 요순임금같은 성군이 되게 하려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건지려는 뜻으로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이에 좋은 , 깨끗한 (사림) 선비들이 감동하여 일어나

(옛날식 표현 ㅋㅋㅋ)

 

조광조의 행실에 감동해서 일어난 사림 선비님들

 

조광조 주변에 모여들었기에

조정 대신들이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중종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기개있고 열정있는 사림 선비 조광조를 아끼고 키웠고

중종의 지지에 힘입어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시작됩니다

 

[조광조의 개혁]

조광조는 유교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소격서(조선왕실의 도교 제사 장소) 폐지

, 천거(추천) 식 인재선발제도 현량과 실시 ,

향약의 전국적 도입을 시행했고

 

조선 도교 보존 관청 소격서 , MBC 사극 옥중화(2016)

 

지방에 양반중심의 성리학 질서를 만들려한 '향약'

 

조광조는 유학 , 사림의 영수(우두머리) 가 되어

중종의 의심없는 신뢰를 받았기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조광조>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이니

내가 직접 요순의 정치를 볼 수 있겠다

 

하며

선비들에게 자신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쳤고

백성들에겐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인륜을 가르치자

악이 제거되고 선이 드날리니

3 , 4년 사이에 나라의 풍속이 크게 변했습니다

 

이에 사림파들이 감동해서 일어났는데

사림파 내에서도 명예를 좋아하는 자들이 뒤섞여 나왔기에

언론이 너무 날카로워졌고 급진적이게 되자

조광조는 사림파들에게

 

<조광조>일을 하는데는 서둘러서는 안되고

마땅히 점점 나아가야 한다

 

하며 타이르고 억제시켰지만

경박한 무리들이 도리어 조광조를 험담하며 탄핵하려 들었고

결국 조광조는 점차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위훈삭제]

또한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에 불만을 느낀

조정 대신 , 훈구세력들은 점차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조광조는 훈구파들의

역린(건드리면 반드시 살해되는 약점)을 건드립니다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중종반정때 임명된 공신중 실제로는 공이 없으면서

공신으로 서훈을 받아 이익을 챙긴 무리들을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받은 직위와 재물을 반납케하자는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

 

을 일으켰는데

연산군 시절 신하들도 너무 궁지에 몰렸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신하가 왕을 갈아엎는 반정을 일으킨 것이었기에

지지세력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 유래없이 중종반정공신 숫자가 많았고

중종반정공신 숫자는 총 117명으로서

조선 개국공신 , 왕자의난당시 공신 , 계유정난공신 등을 통틀어서

그 숫자가 가장 많았습니다

 

위훈삭제

 

당시 중종반정세력 , 훈구파들에게도 중종반정은 리스크가 너무 큰 모험이었기에

안전빵 측면에서도 어중이 떠중이 , 좆같은 잡놈들까지 다 포섭해서 우리편 , 같은 편으로

만든 것도 있었지만

또한 중종이 즉위한 후

훈구파들은 자신의 세력을 늘리기위해

측근이나 지인까지 공이 없어도 공신자리를 뿌린게 분명 있었습니다

 

당시 훈구파들도 사림파들이 득세한것은

중종의 의도인 것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참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사림파가 위훈삭제를 주장한 것은

원칙적으로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결국 훈구 죽이기와 다를바가 없었고

 

중종은 일단 자신을 왕위에 올린 세력이 훈구파였기에

사림을 적극 등용하면서도 훈구의 몰락을 원치는 않았습니다

 

또한 강성한 세력의 훈구파였기에

중종 역시 훈구파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연산군 꼴나거나

무슨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생각했고

 

왕조차도 이런 난처한 상황임에도

한창 기세좋게 올라가며 흥분해있던 사림파들은

1절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흘 밤낮을 엎드려서

중종에게 떼를 쓰며 위훈 삭제를 주청합니다

 

떼쓰는 사림파들

 

위훈삭제는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정치는 혼자서 하는게 아니고

좆같은 놈들과도 힘을 모아야할 경우도 필요하기에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이 아니었고

 

중종에겐 위훈안에 있던 공이없던 '잡놈' 들마저도

그들이 공이 있건 없건

친왕파로서 왕실을 보호하는 가장 든든한 친위세력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이전 계유정난이 솔직히 명분은 없는거고

그냥 수양대군 , 세조가 왕이 되고싶어 일어난것도 있었기에

승자들을 함부로 건들면 곧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것이었기에

김종직 일파들이 무오사화때 세조를 비판한 것을 이유로 살해당했듯이

 

이러한 위훈삭제는 원칙 , 도의적으로는 맞아도

결국 중종반정의 명분과 기반 ,

중종의 권위를 뒤흔드는 위험천만한 발상이기도 했기에

 

결국 참고 참던 훈구파들은 다시 폭발해버려

사림파에대해 칼을 뽑습니다

 

(ㄹㅇ 1절만 하고 기분좋게 훠훠훠 끝내야 되는데

우리 조상님들도 꼭 찐따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키운 사림파들이 너무 나대며

자신을 왕위에 올린 훈구파들을 아예 조져버리기를 주장해버리자

결국 중종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고

 

일단 ,

훈구파들의 강한 반발에도

처음엔 중종은 조광조일파의 의견을 들어줍니다

 

결국 중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서

모든 공신중 4분의 3인

76명의 훈작이 삭탈되고 토지와 노비가 몰수됩니다

 

<중종>초창기(초기 중종반정 시기)에는 일이 황급하여

원대한 계책에 어두웠으므로

바르게 결단하지 못하고

녹공(공신 등록) 을 분수에 넘치게 하여

우리 현저한 공신까지 흐리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거의 나라를 탐욕으로 향하는 길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이 때문에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 갈수록 울분이 더해가니

또한 내가 어찌 감히

'함께 허물이 있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내가 어질지 못하더라도

감히 하늘을 속이고 백성을 속일 수 없다 ,

내 어찌 공훈없이 헛되이 기록된 것을 국시로 결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기묘사화]

갑자기 맛있고 달달하게 빨던 연금 , 꿀들이

위훈삭제로 박탈당하자

훈구파들은 발작을 하기 시작했고

눈알이 돌아간 훈구파들은

사림파들이 자신을 조지려 한다는 것을 체감하고

결국 조광조 죽이기를 시작하며

위훈삭제 즉시부터

조광조 일파들을 탄핵합니다

 

일단 사림파들의 말을 들어주고

위훈삭제하긴 했는데

훈구파들의 발작이 심상치 않자

중종은 다시 위기감을 느껴

위훈삭제를 중지해야겠다 생각했고

 

당시 중종 역시

사림파들이 사흘밤낮 떼쓰며

위훈삭제를 주청했기에 일단 그들의 말을 들어주긴 했지만

사림파들의 비타협성과 융통성의 부재로

감정이 많이 상해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위훈삭제 4일만에

훈구파들의 발작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중종은 사림파에 대한 신임을 거둬버리고

조광조와 사림파 숙청 , 기묘사화를 일으킵니다

 

[주초위왕]

기묘사화때

훈구대신 남곤 , 심정 , 홍경주 등은

자신들을 탄핵하려 한 조광조 일파들을 죽이려 결정했습니다

 

남곤은 훈구파로 알려져있지만

이전에 김종직의 제자인 갱상도 사림파이자

조광조 스승 김굉필과 동문 , 베프였기에

 

사림파 계보

 

기묘사화 이전시기

남곤은 11살 연하였던 조광조에게 다가와 친구하고 같이 놀자며

조광조에게 교류를 요청했지만

이상주의 , 씹선비 기질이 강했던 조광조는

현실적 , 중도적 성향이었던 남곤을 허락하지 않았고

남곤은 유감을 품고선 조광조를 죽이려 합니다

 

남곤은 나뭇잎의 단것을 좋아하는 벌레를 잡아 모아

꿀로 나뭇잎 여러장에

 

'주초위왕 ,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

 

라는 글자를 써놓고

벌레가 갉아먹어 자연적으로 생긴것처럼 했고

 

주초위왕

 

남곤은 이 나뭇잎들을 물에 띄어

대궐안에 흘려보내게 했고

중종은 이 나뭇잎을 보고 매우 놀라서 조광조를 죽이기로 생각합니다

 

[조광조의 죽음]

사실 기묘사화는 중종이 사림파를 견제하려 기획한 것이었고

중종은 이미 사화를 일으킨 이상

훗날의 일을 막기 위해

조광조 일파가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는 자리를 차지하고선

과격한 인사를 일삼는 것 등으로 국정을 문란하게했다는 이유로

결국 조광조를 살해하고 사림세력 수십명을 유배시킵니다

 

<중종>조정의 큰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지체해서는 안된다

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려라

두세번 재촉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결정을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조광조를 총애하고 키운 중종은

조광조를 단칼에 죽여버렸고

당시 이런 중종의 결정에 훈구 , 사림할것 없이 조정 대신들이 모두 놀랬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12월 16일>

(조광조는 중종을)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서 나온 일 같다

 

중종은 처음엔 훈구 견제 , 왕권강화목적으로

조광조와 사림을 등용하고 아낀 것이었는데

계속해서 사림파들이 중종의 보호속에 날뛰어대자

다시 훈구파들을 등용하며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사림파들을 냉정하게 죽여버린것이었고

가히 어느편에서도 서지 않았던 중도성향의 왕으로서

괜히 가운데 중자의 중종 시호가 올려진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중립 , 중용의 필요성은 어느 집단에서나 존재하지만

갑작스러운 중종의 조광조 처형에 다른 신하들도 놀랠만큼 ,

권력앞에서 옛날의 우정과 의리는 저버릴 정도로

인정머리 없는 중종의 기묘사화이기도 했고

 

중종의 정치적 중립은

단순히 왕권 강화목적일뿐의 ,

인간의 의리를 저버린

기계적 중립이었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라봉봉>중종대 다시 안정을 찾은 조선이었지만

이때부터는 다시 사림 VS 훈구간의 당파싸움이 시작되었고

중종은 이런 상황에서 사림을 키우며 훈구를 견제하려다

사림이 너무 나가자 사림을 숙청하는 기묘사화를 일으킵니다

 

아주 정치적 이야기가 많은 시대가 중종대였고

사실 사화니 환국이니 하는것은

말은 어려워보여도 결국 왕이 신하들을

급격히 숙청 , 물갈이 하며 정국을 변화시킨 것이라 보면 되기도 합니다

 

중종은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쪽에 편에만 집중하지 않고

양 세력을 왔다갔다 하며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한편으론 그 어느세력에게도 지지받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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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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