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국가 조선과 성종>
[성종의 친정]
[폐비 윤씨]
[피 묻은 적삼]
[사림파의 성장]
[경국대전]
[숭유억불정책]
[관수관급제]
<라봉봉>
[성종의 친정]
그렇게 어린 나이에 대왕대비 정희왕후 , 한명회 , 신숙주라는
훈구파들에게 옹립된 조선 9대왕 성종은
어느덧 20세의 성인이 되자
대왕대비의 뜻으로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시작합니다
성종은 조선 전기의 성군 , 성스러운 , 현명한 임금이라 추앙받게 되는
인물인데
성종의 왕비 윤씨는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해
바로 세자 이융을 낳았고
이 아이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이후 조선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됩니다
[폐비 윤씨]
연산군을 낳은 성종의 부인
왕비 윤씨는 원래 후궁이었지만
왕비가 사망한후
성종의 총애를 받아 성종의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왕비가 되었고
더구나 태어난 아이가 아들(연산군)이었기에
왕비 윤씨의 위세는 더욱 커져갔습니다
처음 성종은
선녀같은 존예녀에
선량하고 예의바르며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성품을 보인 윤씨에게 반했고
(ㄹㅇ 미인이라 기록됨)
왕자까지 낳아준 왕비 윤씨를 총애했는데
점차 성종의 애정이 약간 식어서
다른 후궁들을 편애했는데
이때 왕비 윤씨는 투기심으로 패악질을 부리며
점차 성종과 주변사람들이 학을 떼게 만들었고
(사실 역시 원인제공은 성종이지만
역시 일부다처 , 왕정국가다보니 ㅉㅉ..)
결국 왕비 윤씨는
성종의 다른 후궁들을 질투해 후궁들과 맞다이를 떴고
그러다 방안에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독약이 성종에게 발각되며
왕비에서 폐출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세자를 낳은 왕비라는 점 때문 등으로
신하들이 간곡하게 말리게 됩니다
<신하들>중전마마께서는 원자마마가 계십니다 !! ,
옛날부터 투기하지 않은 부인이 없었습니다 !!
결국 조정 대신들과 성종은 왕비 윤씨가
개과천선(지난 잘못을 고쳐 선한 사람이 되다)
하기를 바랬으며
방양서와 독약을 반입한
나인만 죽이거나 처벌하기로 결정했고
윤씨의 지위는 유지합니다
그러나 왕비 윤씨는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가지지 않고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켰고
야사에서는
왕비 윤씨가 흑화해서
손톱으로 성종의 용안(왕의 얼굴) 에 상처를 냈다거나
식사도중 화를 참지 못해 국그릇을 엎어
성종의 옷을 더럽히는 등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보였습니다
<당시 왕비 윤씨가 궁녀들에게 한 말>
누구든 상감을 모시는 날이 있으면
나에게 죽을 줄 알아라...
[피 묻은 적삼]
결국
1479년(성종 10년) 폐위되어
궐밖으로 쫓겨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중궁폐출 교서>
...
왕비 윤씨는 후궁에서부터 드디어
왕비가 되었으나
음조(은밀히 뒤에서 도와줌 , 내조) 의 공은 없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만 가지어
지난 정유년에는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하다가
음모가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내가 이를 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이 합사(합쳐서 상소) 해서 청하여
개과천선하기를 바랐으며
나도 폐치는 큰일이고 허물은 또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
감히 결단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가지지 아니하고
실덕함이 더욱 심하여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결단코 위로는 종묘를 이어받들고
아래로는 국가에 모범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에 성화 15년 6월 2일에
윤씨를 폐하여 서인(평민)으로 삼는다
아아 !
법에
칠거지악(아내를 내쫓을 권리가 부여되는 일곱가지 나쁜 행동 , 근거)
이 있는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겠는가 ?
일은 반드시 여러번 생각하는 것이니
만세(긴 세대) 를 위해 염려해야 되기 때문이다
결국 왕비 윤씨는
폐비 윤씨가 되어
쫓겨났고 평민이 된 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반성했고
이에 신하들은
그녀가 세자의 생모라는 점등을 이유로 들어
폐비 윤씨를 살려두려 했지만
숙의 엄씨와 귀인 정씨의 모함으로
궁녀들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와 성종에게 허위보고를 했고
결국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고 28세의 나이로 살해당합니다
윤씨는 죽기전 친정어머니에게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비단 윗도리)을
가르키며
<폐비 윤씨>세자가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일단 폐비 윤씨 사사사건은
폐비 윤씨도 스스로 과도한 어그로를 끈다거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며
여러 논란을 낳은 등 윤씨 역씨 잘한것은 없지만
명백한 성종의 잘못이었고
성종이 부인을 12명을 두고
자녀를 12남 16녀 , 28명을 두었다는 점을 보면
아무리 당대가 왕정 , 일부다처 시대이고
설사 부처님같은 부인일지라도
정상인인 이상 쉽게 넘어가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림파의 성장]
일단 폐비 윤씨사건은 그렇게 끝나게 되었고
그외에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경연을 자주 열며
국정 문제를 토론했고
삼사 같은 언론기관을 활성화시키며
조선을 성리학 , 문치주의 국가로 만들려 노력합니다
결국 이런 경연 , 언론에서
신진 관료들이 활약하는데
이들이 바로 사림파들이었고
김종직 문하에서 배운 갱상도 사림파들은
김종직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며 세력화되어
다른 조정관료들에게 눈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경상도 선배의 무리 , 경상도 선배당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경국대전]
세종 초에 법전 반포에 실패한후
조선은
세조 즉위 이전까진 나라 법이
법 집행자에 따라 판결이 뒤바뀌는
중세 관습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대부터 시작한
조선 통일 법전 프로젝트
경국대전을 완성시켰고
비록 경국대전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근대적 , 합리적 , 과학적 법전은 아니었지만
이로인해
이전까지 조선은 명확한 준칙도 없는 관습법으로
권문세가와 관료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이 침탈되는 것을 막는
법치국가가 되었습니다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는 법전이 생기게 되어
이후 편찬되는 여러 조선법전들 모두 경국대전에 기초를 두었고
집안의 힘 , 세력가 위주로 돌아가던
고려의 중세 귀족적 사회와 다른
성문법 , 법치주의에 근간한
조선 양반 관료체제가 정비됩니다
이로인해 성종은 이룰 성자 묘호를 받아
성종 묘호를 받게됩니다
[숭유억불정책]
이상적인 성리학국가를 만들려 했던 성종은
유교에 충실하며
이전까지 조선왕실이 사대부들의 반발에도
불교 역시 중요시한것과 달리
성종은 철저하게 사대부들의 편을 들며
불교를 격렬히 탄압하게 되는
숭유억불정책(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 을 시행합니다
이에 성종은 승려자격증 도첩을 없애버려
스님들이 합법적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는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렸고
도첩제 폐지를
정확히 표현하면 성종은
백성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머리를 깎고
스님 , 승려가 되면
세금 , 부역을 피할 수 있었기에
성종은 국가의 도첩제공을 금지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시켰고
국가의 불교탄압에
선비 , 사대부들은 환호를 했고
스님 , 불교신자들은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쳐서
한국에는 조선시대부터 산사 , 산속의 절들이 많아졌습니다
[관수관급제]
이외에도 조선에서 관리들 월급 주는 방식은
여러 차례 변화하는데
조선 초는
태조 이성계의
'과전법'
이 시행되
전현직 관리들에게 과전이라는 토지를 주고
거기서 세금을 받아 생활하라 했고
점차 국가가 안정화되며 관리들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자
세조대부터는 전직 관료는 제외하고
현직 관료만 토지를 받게하는
'직전법'
이 시행됬고
또 점차 직전법 토지까지 부족해지고
관리들은 토지 경작자들에게
각종 불법적인 일을 하며 세금을 쥐어짜자
결국 성종은
관청에서 직접 토지에 세금을 거두어
관리들에게 나누어주는
'관수관급제'
를 시행시킵니다
점차 관리들의 혜택은 감소했지만
여러 백성들에 대한 폐단도 줄게 되었고
근데 재밌는 점은
이 관수관급제 시행에 영향을 준 인물이
바로 훈구대신 한명회입니다
<한명회>직전의 세(직전법) 는 관(관청) 에서 거두어 주면
이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한명회는 돈에 미친 부패한 훈구대신이었는데
실제로도 ㄹㅇ 경제에는 밝은 인물이었다 생각되고
나름 개인적 탐욕과 부패속에서
조선 관수관급제 시행이라는
자신의 경제적 재능을 꽃피운 인물이라 보여집니다
훈구파들은 부패하고 썩은 꼴통집단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역사 , 과학 , 경제 , 예술 등
잡학으로 분류된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명분 , 이상주의 , 도덕과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문학 중심의 사림파들과 정 반대의 성향을 보였고
훈구파의 한명회나 신숙주 역시
부패하고 사악한 인물이긴 했지만
괜히 정권을 잡고 살아남은 이들이 아니고
ㄹㅇ 능력은 있었던 인물입니다
비록 유교적 , 도덕적 눈만으로 훈구파들을 바라보면
훈구파는 부패하고 사악한 집단일 뿐이지만
만약 경제적인 눈만으로 본다면
사림파가 부패하고 사악한 집단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실제로 한국 보수 , 우파계열에서
가난했던 성리학국가 조선을 졸라게 미개하다고 극혐합니다)
역사는 입체적이고 다양한 사고방식 ,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튼 성종은 훈구파들을 견제하려
사림파들을 키워주는 형태를 보였지만
그럼에도 훈구파 역시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던 시대가 성종대이고
나름 기묘한 조화와 왕권의 안정을 누리며
조선 전기의 태평성대를 연 현군이라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성종은 단지 아랫도리를 잘못 놀려서
성종 사후 성종의 아들 연산군은
나름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에 대해 분노하며
성종의 부인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등
조선에 큰 파란이 일어나게 됬고
성종대까지 쌓여왔던 절대왕정 조선 왕실의 권위는 크게 무너지게 됩니다
<라봉봉>심리학에서는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분노를 성숙하게 표현하거나 예술로 승화시킨다하나
보통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거나 표현하지 못해
분노조절장애나 여러 문제로 나타난다하고 있고
조선 왕실의 암투극이나 분노 , 부부싸움들 정치적 문제와도 엮여있어
역시 이러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폐비 윤씨도 사실 오늘날 기준에선 억울한 점이 많고
단지 그녀는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미신에 의존한다거나 독약을 들고다니는 등
충분히 반대파 , 성종의 다른여인들에게 치명적인 책잡힐 행동을 노출시킴으로서
사약을 받게 된것이었고
성종의 ㅄ짓때문에 역사속 세기의 미인 한명이 억울하게 죽어버린
안타까운 케이스입니다 (ㅠㅠ)
역사 인물들은 업적만으로 봐도 안되는게
사악한 독재자로 알려진 세조는
의외로 극진한 효자에 가정적인 남자이자 대단한 애처가여서
후궁도 2명밖에 두지 않고
밖에 나갈때도
부인 정희왕후를 항상 데리고 다니며
부인에게 순종한 순정남이었고 (솔직히 이건 그의 아버지 세종대왕보다 나았음)
성군이라 이야기되는 성종은
아무래도 같은 남자가 봐도 좀 그런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역사는 교과서에 나오는데로 업적 , 사건위주나
따박따박 표면적인 일부의 내용만 보려하지말고
당시도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했고
사람사는 곳이었다는 식으로 깊게 봐야합니다
하여튼 가정적이진 않은 남자였던 성종은
대신 유교적 , 성리학적 국가를 통치하려 했던 이상주의 임금이었고
사림파 인사들을 적극 등용해
훗날 선비 , 사대부들에게 찬양받게 되었고
여러 굵직한 업적을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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