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명한 왕 예종>
[의경세자]
[단명한 왕 예종]
[총명한 세자 예종]
[훈사 10조]
[재위 14개월만에 사망]
[나는 고난을 주었지만 , 너는 태평을 주라]
[남이의 옥]
<라봉봉>
[의경세자]
세조가 아끼던 첫째아들 의경세자는
세조가 단종을 살해한것에 대한 업보때문인지
단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1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렸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아들을 데려간 세조의 아들도 데려가야겠다며
세조를 꾸짖고 세조에게 저주를 내려
의경세자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돌았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속 조선국왕 27명의
평균수명은 고작 46.1세인데
조선왕실에서 단명하는 케이스들이 유독 많았고
이는 ,
태조 이성계가 고려 최영장군 및 고려왕씨 , 개성백성들 , 고려인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업보라는 전설부터
이렇게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인 것에 대한 업보라는 소문 등
여러 이야기들이 백성들에게 퍼졌습니다
의경세자는 거칠고 땅크기질의 아버지 세조와 달리
성품이 바르고 온화해서
가족과 백성들에게 많이 사랑을 받아
할아버지 세종대왕도 의경세자를 친히 안고 데리고 다니며
사랑을 쏟아 다른 왕손과 달리 대우했다 하는데
의경세자를 잃은 세조의 상실감은 매우 컸고
총명한 세자의 죽음은 조선인들에게도 불행이었습니다
[단명한 왕 예종]
하여튼 세조는 찬탈로 왕이 되고나서부터는
자신 역시 언제 찬탈당하거나 왕위를 뺏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정신병 , 피부병 등 여러 질환을 앓았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서는
한명회 , 신숙주 등 자신이 믿고있는 신하들에게
어린 둘째아들 세자 예종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시 세조의 조카 단종의 저주 , 업보 때문인지
세조의 아들 예종 역시 재위 1년만에 사망 , 요절했고
예종은 조선 역대왕중 가장 단명한 왕중 한명입니다
일단 세조의 첫째아들이었던 의경세자가 사망하자
세조의 둘째아들 이황 , 예종이 조선국 왕세자에 봉해졌습니다
[총명한 세자 예종]
세자 예종은 성품이 총명하고 검소했으며
책을 좋아해서
몹시 춥거나 덥다라 하더라도
책읽기를 정지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세조가 일찍이 세자 예종을 두고 말하길
<세조>세자가 육예(다방면의 학문) 에 이미 통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
며 기뻐했습니다
세조가 몸이 불편해져서
세자 예종에게 모든 정무를 참여해 결정하라 명하니
예종은 나랏일들을 자세히 듣고 판단하는 것을 밝고 적당히 했기에
세조는 기뻐하면서 말하길
<세조>일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
내가 근심이 없다
했습니다
[훈사 10조]
세조는 부부금슬이 매우 좋기로 유명했고
가족은 끔찍이 아낀 왕이었는데 (단 권력쟁탈전 제외)
세조는 총명했던 세자 예종을 위해
10개의 훈계가 담겨있는
'훈사' 라는 글을 지어 세자에게 내려주었습니다
이는 '훈사 10조' 라고도 불리며
이는 세조가
태조왕건의 '훈요 10조' 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조가 예종에게 내려준 훈사 10조>
부모가 너를 위하여 교육하고자 생각하는 바가 한 가지가 아니다.
네가 외로운 몸으로 장차 종사를 부탁받게 되면 ,
사람과 하늘이 애처롭고 가엾게 여길 것이니 ,
마땅히 이 뜻을 몸받으라
...
1조 ,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덕을 가질 것이다.
2조 , 신을 공경하여 섬길 것이다.
3조 , 간언을 받아들일 것이다.
4조 , 참소를 막을 것이다.
5조 , 사람을 쓰는 데는 마땅히 그 마음을 취하고 , 재주에서 취하지 말 것이다.
6조 , 사치하지 말 것이다.
7조 , 환관이 명령을 전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 명령을 전하는 자는 마땅히 바꾸어서 맡겨야 한다.
8조 , 형벌을 삼가야 할 것이다.
9조 , 학문을 일으키고 무예를 익힐 것이다.
10조 , 부모의 뜻을 좇을 것이다.
사극 , 역사 창작물에선
세조가 그냥 사악하고 무식한 철퇴 , 땅크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수양대군 세조는 문무겸비 캐릭터라
세종대왕이 총애한 유능한 왕자기도 했고
세조도 사실 본인이 이것을 잘 실천하지 못했을뿐
효와 덕행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여튼 예종은 아버지가 하나하나 자신에게 정성껏 써준 이글을 받들어
훈사 10조 내용을 항상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재위 14개월만에 사망]
이렇게 세자 예종은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 세조의 기대를 받으며
여러 정통국왕수업을 체계적으로 밟아나갔고
세자 예종은 학문에 밝아 사람들이 감탄했고
단 아버지 세조가 호탕해서 신하들과 친목질을 열심히하며 달래가며
국정을 운영한 것과 달리
학구적 성향이 있었던 예종은 왕이 된 후
부지런하고 엄한 상사스타일로서 좀 찌질한 모습으로 신하들과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세조가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하자
세자 이황은
1468년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8대왕 예종이 되었습니다
예종은 세조가 말년대부터 병상에 눕자
세자시절부터 계속 아버지에 병간호를 하느라
밤을 지새우다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았고
세조가 사망한 후에는
예종은 슬픔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며
슬피 울고 물과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종은 총명하고 나름 기대받는 왕이었음에도
재위 14개월만에 사망합니다
[나는 고난을 주었지만 , 너는 태평을 주라]
예종은 세자시절부터 국왕수업 , 제왕학을 받으며
정통 엘리트코스를 밟았고
또 그런 엄격한 국왕수업을 따라갈만큼 재능이 있었습니다
예종은 왕이 된 이후에도
학문에 힘썼고
세조는 예종에게
<세조>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었지만 ,
너는 태평을 주라
라는 훈계를 내렸기에
예종은 세조의 즉위를 문제삼는 논의는 반역이라 못박았지만
이전 태종 이방원이 대의를 위해
고려충신 정몽주를 어쩔 수 없이 살해하고
곧바로 충신으로 포장하는 은혜를 내렸던 것처럼
세조가 충직했던 김종서나 황보인을 제거하지 않고선
거사를 이룰 수 없었기에
그들을 어쩔 수 없이 죽인것이므로
(이는 이후 영조실록대 나온 논리임)
예종은 아버지 세조의 즉위 정당성에 흠이 없는 선에서
세조의 계유정난때 연좌당한 사람들을 석방하고
과거사와 화해하려 노력했습니다
또 예종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데 급해서
재주와 덕을 품고도 산림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염려해
지방관들에게 그들을 찾아나서게 했고
조금이라도 예능(재능) 이 있는자는
모두 등용했습니다
[남이의 옥]
단 훌륭하고 뛰어난 , 그러나 단명한 왕이었지만
예종의 치세에도 커다란 흠이 있었는데
바로
예종 즉위후 한달만에 일어난
'남이의 옥(남이의 옥사)'
이었습니다
세조시절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는
세조에 반대해 거대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태종의 외증손자 남이 장군은 가장 용감하게 나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해 1등공신에 책봉되
26세라는 나이에 이례적으로 병조판서(국방부 장관) 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됩니다
남이 장군은 뛰어난 무공과 충성스러운 모습 ,
젊고 패기있는 대장부다운 모습으로
세조와 백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는데
세조는 어찌보면 예종보다 무예에 뛰어나고 강직했던
남이를 더 총애해 남이장군은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 받고 있었기에
이런 젊은 왕실인사의 고속승진에
당시 세자였던 , 깐깐했던 예종은 이를 몹시 꺼리었습니다
세조가 남이 장군을 고속승진시킨데는
예종의 생각과는 달리
남이장군의 뛰어나고 화려한 무용도 있었지만
세조는 왕실친척들 , 종친들을 통해
훈구파 대신들을 견제하려 했던 의도도 있었고
이에 태종의 외증손자인 남이가 이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너무 젊고 패기넘치던 군지휘관이었던
남이 장군은 신하들에게 극도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예종이 새로 왕위에 오를때
때마침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습니다
남이는 대궐안에서 숙직하다가
다른 사람과 말하길
<남이>혜성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배치하는 형상
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자광은 평소 남이의 재능과 명성과 벼슬이 자기 위에 있는 것을 시기했는데
혜성이 나타난 이날 ,
그 역시 대궐에 들어와 숙직하다 벽을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서
남이의 그 발언을 엿들었습니다
이에 유자광은 거짓말을 꾸며 보태
남이가 반역을 꾀했다 은밀히 아뢰어
옥사가 일어나고
남이는 마침내 처형됬으니
이때 남이의 나이 28세였습니다
남이 장군은 일찍이 북방을 토벌할때 시를 지었는데
<남이의 시 '북정가'>
백두의 돌 칼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 말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남이가 일찍이 북방을 정벌하며 쓴
호연지기 , 조선 대장부의 기상을 노래한 시였는데
유자광파는 이 남이가 쓴 북정가에서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을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으로 고쳐서
남이를 역모죄로 몰았고
끝내 남이장군은 역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너무 재능이 뛰어나 질투와 미움을 받아
한창의 나이때 사망한 남이장군이었고
백성들은 억울하게 죽은 남이장군을 기리며
남이장군을 신으로 모셨습니다
세조가 사망전 남이 등을 등용해
한명회 , 신숙주 같은 구 공신들을 견제하려 했던 의도였지만
남이 역시 세력이 커지며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됬고
예종은 26세로 병조판서가 되어 벼락출세한
남이를 위험하게 생각하며
즉위후 곧바로 남이를 죽여버립니다
예종은 충성스럽고 재능이 뛰어나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남이 장군을
정치적 의도로 곧 죽여버림으로서
찌질이 왕 이미지가 생겨났고
나름 학구적인 왕이었던 평이 있는것과 달리
남이장군을 질투해 죽인 왕으로 이야기되며
오늘날까지도 평이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라봉봉>예종대 가장 큰 사건이라하면
단연 남이의 옥인데
남이 장군은 이후에도 민중 , 백성들에게 사랑받은 인물이었고
뛰어난 재능으로 혜성처럼 등장해 최연소 국방부 장관이라는
초고속승진을 하고
혜성처럼 사라진 ,
혜성처럼 살다간 인물입니다
간신에 희생당한 억울한 충신의 모습은
마치 중국 송나라대의 악비장군이나
임진왜란대 이순신 장군과도 비슷하고
남이 장군은 한국 민중들에게 크게 사랑받은 인물로서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남자 20세에 나라를 평안히 못하면 후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라는 패기있는 그의 시는
봉기나 데모대의 구호로 사랑받았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뒤 민족지도자 김구선생님은 반탁데모대에
이 시 구절을 선사하며 격려했다합니다
겨울연가 촬영지로 유명한 남이섬 역시 그의 이름을 딴 섬이고
참 안타까운 인물들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시대나 재능있는 뛰어난 사람들은 나오길 마련이지만
현명한 임금 , 지도자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숨어있을지라도 산골짜기 끝까지 찾아내 그들을 등용했고
폭군들은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 있을지라도
내쫓거나 죽였습니다
세조대부터 세종대의 유능한 신하들 , 재능있는 인재들이
죽거나 산골짜기로 숨어들거나 방랑하게 되었고
예종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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