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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소년왕 단종>

[적통 왕세손 및 왕세자 단종]

[단종대에 불행했던 조선왕실]

[세종대왕의 유능한 아들들]

[수양이 보고싶다]

[황표정치]

[계유정난]

[살생부]

[영의정 수양대군]

[단종의 양위]

[단종복위운동]

[단종의 명예회복]

<라봉봉>

 

[적통 왕세손 및 왕세자 단종]

비운의 소년군주 조선 6대왕 단종 이홍위 ,

 

그는 문종이 어렵게 얻은 하나뿐인 아들로서

그의 탄생은 할아버지 세종대왕과 아버지 문종의 크나큰 기쁨이었고

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왕실의 적통 인물이었습니다

 

단종

 

단종은 세종대왕에게 왕세손으로 책봉된 후

세종대왕이 사망하고 문종이 왕위를 잇자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

 

그러나 ,

허약했던 아버지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사망하자

어린 소년 세자 이홍위는

즉위해 12살의 나이로 조선 6대국왕 단종이 되었습니다

 

[단종대에 불행했던 조선왕실]

당시 조선왕실이 불행하게 꼬여있었는데

세종대왕 사후에

조선 왕실에는 어린 소년왕 단종을 섭정해줄

큰어른도 없었고

 

단지 여러 두각을 나타내던 재능있는 삼촌 , 세종대왕의

다른 아들들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가계도

 

단종이 즉위하던 날

근위병과 신하들은 모두 소리없이 울었고

세종대왕의 둘째아들 세조(수양대군) 가 가장 비통해 했습니다

 

최근 발견된 실제 세조 어진 , 의외로 창작물에서 묘사되는것처럼 날렵하고 날카롭게 생기지는 않고 둥글둥글하게 생겼습니다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 이용은

문종이 사망한뒤로 매번 대궐 뜰에 들어올때마다

기뻐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는데

 

세종대왕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이유는

애통함이 지극정성에서 나오니

신하들로서 바라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안평대군만은 한번도 참여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평소와 다를바 없었습니다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 사극 대왕세종

 

자 여기서 단종실록 단종 즉위속 이 기록은

 

둘째 수양대군은 형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는

우애있는 모습을 보이고

 

셋째 안평대군은 형의 죽음에도 기뻐하거나 잘먹고 잘지내는

사이코패스짓을 했다는 기록인데

 

이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점에서는

신빙성을 알기 어렵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라는 말처럼

패배자였던 고려 말기 역사를

승리자였던 조선정부가 폄훼했듯이

이후,

승리자인 세조 수양대군에 의해

패배자인 안평대군이 폄훼된 기록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당시 치밀했던 수양대군이 연기와 처세를 하며

눈치를 보고 있고

예술가 성향이 강했던

안평대군은 별다른 처세를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중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문종이 죽고 조선왕실에 웃어른이 없는 상태에서

소년왕 단종이 즉위하자

 

결국 왕실에서 가장 서열과 실력이 출중했던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과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왕좌의 게임이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수양대군 VS 안평대군

 

[세종대왕의 유능한 아들들]

당시 수양대군은

일단 위대한 아버지 세종대왕이 살아있을때는

그저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 둘째왕자였을 뿐이었고

 

첫째형 문종과 달리 둘째왕자임에도

자신에게 항상 기회를 주고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를 극도로 존경했으며

유능했던 세종대왕 역시

다른 왕자들 역시 그들의 재능을 살피고 그들의 재능을 지원해주었기에

 

첫째 문종은 국방과 기술에서 ,

둘째 수양대군은 무예와 훈민정음 프로젝트에 관여 ,

셋째 안평대군은 서예 , 가야금 , 그림에 강한 예술가성향이 강했고

 

세종대 세자 문종이 제작한 다연장 화살로켓포 '신기전'

 

세종대 수양대군이 한글로 쓴 석가모니의 일대기 '석보상절'

 

세종대 안평대군이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한 꿈속이상세계 '몽유도원도' , 하나같이 세종대 제작 ;;

 

호랑이 아버지 밑에 하나같이 뛰어난 아들이었고

수양대군이 왕위쟁탈 , 골육상쟁으로 이후 욕은 먹지만

기본적으로 큰 재능은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세종대왕은 자신 이전대의

조선 초기 왕실의 불안정한 왕위계승 선례와 달리

자신대부터는 적장자 원칙으로 왕위를 이어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문종은 일단 수양대군이 감히 왕위를 넘볼만한 형님은 아니었기에

단지 수양대군은 왕실의 종친 , 왕자로서 살아가고 있었고 ,

그러나 ,

문종이 급사하자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게 됩니다

 

수양대군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기회

 

갑자기 어린소년왕이 왕위에 오르자

조선 정국은 급격히 불안정해지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수양대군은 자신에게도

 

위대한 아버지가 만들어준 기회가 아닌

자신이 만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수양이 보고싶다]

문종이 사망하자

수양대군은 집에 돌아와 부인과 더불어 서로 대하고 울어서

비통함이 지나쳐

기운이 막혀 약을먹고 풀기까지 했고

 

수양대군은

 

<수양대군>형님(문종)의 은덕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 마음을 다하기를 원할 뿐이다

 

형님은 천성이 어질고 효도하여 사람들에게 대하기

신의가 두터워 가볍게 끊음 하지 않았다

...

또 나더러

정대하고 충성하고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다르다 하여 항상 더불어 일을 논하였다.

일찍이 진법(군사 진법)을 만들었는데 말씀하기를 ,

 

'이정(당태종 이세민의 장군)·제갈량인들

어찌 수양 보다 나을까 ?'

 

하였다.

또 일찍이 내궁에서 칭찬하기를 ,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

 

하였다.

대저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

우리 형제가 이로써 감격하여 울기를 끝없이 하였다.

 

했고

문종은 병환이 위급했을때

좌우에 말하길

 

<문종>수양이 보고싶다

 

했는데 좌우에선 이게 후궁을 부르는 말인지 알고

수양대군을 부르지 않았는데

이건 아마 수양대군에게 후사를 부탁하려는 의미였습니다

 

(세조가 조작해 기록한 여지가 있고

하나같이 수양대군 세조를 높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황표정치]

당시 왕실엔 수양대군 이외에

별다른 큰 왕실 어른이 없었기에

단종대에는

세종대왕의 유능한 신하 , 재상들에게 섭정을 받는

형식으로 정국이 흘러가고 있었고

 

비록 세종의 신하들이 능력도 뛰어나고

하나같이 충성스럽고 강직한 인물이었지만

그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세종대왕대에는 맞는 말이었지만

세종 사후부터는 또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었고

 

또한 자칫하다간

다시 군약신강 , 왕권이 약하고 재상과 신하의 권한이 극도로 강했던

고려왕실 시즌 2가 펼쳐질지도 몰랐고

이에 수양대군같은 왕실인사는 큰 불안을 느꼈습니다

 

당시 조선 왕실엔

소헌왕후나 단종의 어머니도 이미 한참전에 사망했고

진짜 단종을 섭정 , 대리청정해줄만한 큰어른이 없었기에

 

당시 문종이 사망하기 전

영의정 황보인 , 좌의정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기에

 

이 두 재상은 '고명대신' 이 되어

어린 단종을 보좌하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고명대신 김종서 , 세종대왕시기 6진개척 장군 , 사극 공주의 남자

 

이런건 고려에선 흔한일이었지만

성리학적 유교질서와 강력한 왕권행사를 추구했던

조선에서는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고

 

신하들에게 관직을 제수할때에도

어린 임금 단종이 아닌

의정부 재상들이 직접 관여해

추천된 3명의 이름 중 쓸만한 자 1인을 취해서

그 이름 밑에 황표 , 노란 종이표를 붙여 아뢰면

 

그곳에 단종은 붓으로 점을 찍었고

사람들은 이를

황표정사라 했습니다

 

영화 '관상' 속 황표정사

 

황표정치는

비록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 임금을 보좌하기 위한

재상들의 형식적인 정치였지만

이건 올바른 지도자의 모습도 아닐뿐더러

올바른 왕도정치는 아니었습니다

 

[계유정난]

결국 곧바로

수양대군은 단종 1년에

 

자신의 동생 안평대군과

의정부 재상 황보인 , 김종서가

결탁해서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핑계로

자신을 따르던 무리를 동원해 정변 ,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죽이고 여러 대신들을 살해하고

동생 안평대군은 체포해서 강화도로 유배보낸후 살해합니다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새벽

자신을 따르는 권남 , 한명회 , 홍달손을 불러서 말하길

 

<수양대군>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간사한 무리)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 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힘센 사람)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 아뢰면 ,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에 모두 말하기를

 

<권남 , 한명회 , 홍달손>좋습니다

 

했고

수양대군이 돌아가자

권남이 곽연성에게 말하길

 

<권남>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지금 수양 대군께서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하여 의를 일으키는 것인데 ,

자네가 어찌 구구하게 작은 절의를 지키겠는가 ?

또 충과 효에는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

자네는 구차히 사양하지 말고 큰 효를 이루라

 

그렇게 수양대군의 부하들은 하나로 움직이며

가장 큰 수양대군의 경쟁자였던 김종서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고

 

수양대군은 휘하의 병사들은 경복궁을 점령하라 지시한 채

본인은 직접 관복차림으로 무리들과 함께

김종서에 집에 이르렀습니다

 

김종서의 맏아들 김승규는 수양대군을 보고 맞이했고

수양대군이 그 아비를 보기를 청하니

김승규는 김종서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집문 앞에 멀찍이 서서

앞으로 나오지 않았고

김종서는 안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자

수양대군은

 

<수양대군>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이에 김종서는 두세번 들어오길 청하나

수양대군은 굳이 거절했고

결국 김종서가 부득이하게 앞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김종서도 이상한 낌새는 알았지만

수양대군은 나라를 장악할 만큼 큰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계유정난은 매우 급작스럽게 일어난 것이었기에

설마 수양대군이 역모를 할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

 

수양대군은 김종서에게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다며

모시는 사람에게 편지를 가져오게 합니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수양대군이 재촉하자

수양대군의 부하 임어을운은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고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자

수양대군의 부하 양정이 칼을 뽑아서 쳤습니다

 

계유정난

 

이 순간부터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시작됬고

곧바로 수양대군은 서둘러

도성 4대문과 주요 군시설 , 요충지를 확보한 뒤

이미 장악당한 경복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살생부]

수양대군은 단종을 만나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했다 보고한 후

광화문과 대궐문을 장악한 후

 

단종의 명을 빙자해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라 했고

 

수양대군에 우호적인 신하들은 죽이지 않고

수양대군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죽이는 살생부를 만들어

 

조정 대신들이 입궐하자

수양대군의 반대파였던

영의정 황보인 , 좌찬성 이양 , 이조판서 조극관 등을

모두 철퇴로 살해합니다

 

살생부

 

당시 철퇴에 맞아 사망한 줄 알았던

김종서는 심한 부상을 입었을뿐 죽지는 않아서

피신하려 했지만

다시 발각되 목이 잘리게 됩니다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의 죽음 , 공주의 남자

 

계유정난 다음날 아침

김종서 , 김승규 부자와

황보인 등 대신들은 역모죄라는 누명을 쓰고

목이 잘려 저자거리에 효시되었고

안평대군도 이후 역모로 몰려 강화도로 유배되 사약을 받습니다

 

효시

 

당시 김종서부자 , 황보인등의 목이

저자거리에 걸리자

길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겨

그 죄를 헤아리며 기왓돌로 때리는 자들도 있었고

여러 관청의 계집종과 사내종들 역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저자의 아이들 역시 노래를 불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 , 당연 세조가 쓴것)

 

이날 밤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해지자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고

근위병들이 놀라서 고하며 나팔을 불기를 청하니

수양대군은 웃으며 말하길

 

<수양대군>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

조용히 하여 진압하라.

 

했습니다

 

[영의정 수양대군]

그렇게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는데

조선시대는 태종대부터 사병도 혁파되어

세력가들이 개인 군대를 소유할 수도 없었기에

반정이 일어나기가 매우 힘든 구조였고

 

수양대군은 역대급으로 약한 전력 , 자신을 따르는 극소수의 무리들로

엄청나게 운들이 겹치고 겹쳐 반정이 성공하고 국정을 장악하게 됬고

당시 단종은 엄청나게 운들이 없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이 정난으로 이들의 역모를 막았다고 주장하며

정난의 1등공신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단종을 따르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곳을 자신을 따라는 세력들로 채워넣었으며

스스로 영의정 , 이조판서 , 병조판서 , 병마 도통사등

온갖 지위를 전부 겸직하며 조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에 북방에서 김종서의 부하 이징옥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됬고

결국 하루아침에 삼촌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긴 단종은

수양대군의 허수아비 왕이 됩니다

 

[단종의 양위]

수양대군은 곧 왕위에 오를 준비를 시작했고

단종의 처지가 외롭고 약하다는 논리로

왕비를 맞아야 한다하며

결혼시킨 후

 

단종과 정순왕후의 강제결혼 , 종로구

 

단종의 측근들을 반란죄로 몰아 지방으로 귀양보내자

단종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한다했습니다

 

<단종>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안과 바깥)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

이제 대임(큰 임무)을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영의정 수양대군은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사양했지만

단종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서

수양대군을 불렀고

수양대군은 엎드려 울면서 다시 굳게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단종은 손으로 옥쇄를 잡아

수양대군에 전해주니

수양대군은 더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단종은 명해서 부축해 나가라 했습니다

 

결국 수양대군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근정전 뜰로 나아가

단종의 선위를 받아

조선 7대왕 세조가 됩니다

 

실제 세조의 어진

 

또 단종은 명나라 사신에게 전하길

 

<단종>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

계유년에 안평 대군 이용이 반란을 꾀하여

숙부 수양 대군이 이 사실을 나에게 고하고 평정하였다.

그러나 그 남은 일당들이 아직도 존재하여

다시 궤도에 벗어나는 일을 꾀하고 있으니 ,

이 어찌 유치한 내가 능히 진정할 바이겠는가 ?

수양 대군은 종실(왕실)의 장(수장)으로서

사직에 공로가 있으니

중임(중요한 임무)을 부탁할 만하다.

이에 그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 서리(대행)토록 하고

장차 이를 주문(황제에게 아룀)하겠다

 

이에 명나라 사신은

 

<명나라 사신>이는 곧 국가의 큰일인데

이제 그 유서(왕의 명령)를 받으니 기쁩니다

 

대답합니다

 

결국 어린 소년왕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추대되었고

세조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단종복위운동]

왕위찬탈에 대한 반대 , 성리학적 명분으로 세조를 인정하지 못했던

신하들은

단종을 복위시켜는 운동 ,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했고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한 세종대 명신 성삼문

 

세종의 신하들인

성삼문 , 박팽년같은 집현전 출신 신하들과

고위 무관 , 단종 외척세력들이 연합해서

세조를 책봉하는 명황제의 조서를 가져오는

명사신을 위한 연회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세조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결국 단종 복위운동 사실들이 내부고발로 세조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세조는 연루자들을 급하게 체포해 심문하고

가혹하게 고문했고

 

사육신들에게 가해진 고문

 

그 과정에서 의금부(조선 수사기관) 에서는

성삼문에게 묻기를

 

<의금부>상왕(단종)께서도 역시 너희들의 역모에 참여하여 알고 있는가 ?

 

이에 성삼문은

 

<성삼문>알고 있다. 권자신이 그 어미에게 고하여 상왕께 알렸고 ,

뒤에 권자신·윤영손등이 여러 번 약속을 올리고 기일을 고하였으며 ,

그날 아침에도 권자신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니 ,

상왕께서 대도자(긴 칼)를 내려 주셨다

 

이에 권자신에게도 물으니

권자신의 대답도 성삼문과 같았습니다

 

결국 상왕 단종이 모의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자

대신들은 상왕을 지방으로 내치자 했지만

일단 세조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이후 단종의 장인 송현수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생각을 바꿔 송현수를 의금부에 가두고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궁에서 내보내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킵니다

 

강원도 영월군의 단종 유뱃길 단종문화제

 

이후 단종의 측근이었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 마저

반란을 도모하다 사약을 받자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들은 단종은 슬픔에 못이겨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세조실록 기록)

 

단 후대왕들 기록을 보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 하고

실제론 의금부에서 사약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에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다 살해당한 것이라 합니다

 

살해당하는 단종 , JTBC 주말특별기획 인수대비 (2011~2012) 仁粹大妃

 

[단종의 명예회복]

세조와 세조의 후손들은 이후

어린 소년군주 단종을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어리석은 왕으로 폄훼시켰고

그는 그저 노산군이라 불리다가

이후 세조에 반대하며 지방에 숨어있었던

성리학자 , 사림파가 성장하자

단종은 억울하게 죽었다 재평가되어

결국 숙종대에 이르러 491명의 대신들과 회의를 하며

결국 왕호를 복위시키기로 결정하고

단종 시호를 올립니다

 

비운의 소년왕 단종의 또다른 어진

 

또한 이후 정조대에는 단종 복위운동때

반역자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처벌받은 사람들을

단종충신으로 올렸고

 

고려 말기 조선에 반대하다 죽은 고려충신 정몽주가

이후 고려세력이 전부 사라지자

다시금 왕실에 대한 충신의 대명사로 조선에서 찬양받아 이야기 된것처럼

 

점차 조선 후기로와서 더이상 단종세력의 위협성이 없어지자

다시금 왕에 대한 충성과 성리학적 유교명분이 중요시되며

 

단종대 단종을 위해 죽은 신하들은

사육신과 생육신으로 이야기되며

그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죽음으로서 선비의 절개를 택한 사육신과 살았지만 세조의 신하되길 거부한 생육신들

 

충신 성삼문을 기리는 후손들

 

<라봉봉>조선왕조실록중 가장 판타지적 성향이 강한 부분이

단종~세조실록인데

그 이유는 당연 찬탈자였던 세조가 단종을 폄훼하고

자신의 집권정당성을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놓고 조작이 의심될정도로

유치한 세조찬양등이 많고

하여튼 단종은 적장자로 태어났음에도

여러 불운과 불운이 겹친

조선 비운의 소년왕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단 단종 역시 상왕으로 물러나 조용히 잘 처세하며

복위를 넘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면

세조 역시 단종을 살려두고

혹시 세조사후 단종이 복위할 수 있었을지도 또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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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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