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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전의 세종대왕>

[가장 도탑게 사랑한 막둥이]

[독서왕 충녕대군]

[세자 양녕대군의 비행]

[양녕대군 VS 충녕대군]

[세종대왕의 즉위]

[상왕 태종의 숙청]

<라봉봉>

 

[가장 도탑게 사랑한 막둥이]

아무런 말이 필요없는

한국사 명군중의 명군

세종대왕 !

 

세종대왕은 조선 최초로

고려출생이 아닌 조선출생 임금으로서

1397년(태조 6년) 4월 10일

한양 준수방의 태종 이방원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첫째아들 양녕대군이 태어날때

태종은 이전 세명의 아이를 잃은후였기에

양녕대군은 건강하고 탈없이 크길 바래

원경왕후 친정집에서 양녕을 키웠고

둘째 효령 역시 다른집에 맡겨 키웠습니다

 

태종의 가계도

 

그러나 셋째 세종이 태어날 무렵엔

이방원은 정적들의 위협때문에 몸을 숙이고 있었기에

셋째 아들은 직접 안아 키우며

시름을 달랬고

아명을 막둥이라 불렀습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종을

원경왕후와 태종은 번갈아 안아주고 업어주며

무릎에서 떼놓지 않아 키웠고

셋째는 가장 도탑게 사랑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방원이 아꼈던 막둥이 세종대왕

 

[독서왕 충녕대군]

태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셋째아들 이도는

충녕군(이후 충녕대군)에 봉해집니다

 

충녕대군은 재능에서

형이었던 첫째 양녕대군 , 둘째 효령대군보다

월등히 앞선 모습을 보였고

 

8살때부터 아버지와 나라의 기대와 전폭적 지원을 받아가며

후계자 교육을 받았던 첫째아들 , 세자 양녕과 달리

셋째아들 충녕대군은 스스로 책을 읽으며 홀로 공부를 했습니다

 

독서를 좋아한 충녕대군

 

충녕군은 아픈 와중에서도 책을 읽어

태종임금은 책을 거두어오라할 정도였고

 

 

그럼에도 충녕대군은 미처 관리들이 가져가지 못한

남겨진 책한권을 몰래 계속해서 읽을정도로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세자 양녕대군의 비행]

반대로

세자 양녕은 기대와 달리 계속 엇나갔는데

궐을 나가서 놀거나

남의 첩을 납치해 대궐로 데려오거나

세자가 공부를 안하고 기생들과 놀기만 좋아해

음란한 짓을 하는게 심하니

태종은 비오듯 줄줄 눈물을 흘렸습니다

 

태종의 세 아들과 양녕대군의 비행

 

<태종의 눈물>태조께서 관인(너그럽고 어짊)한 큰 그릇으로서

개국한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그 손자에 이르러 이미 이와 같은 자(양녕대군)가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 ㅠㅠ

 

자식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는 태종의 철퇴

 

망나니짓을 일삼던 형 양녕대군과 반대로

충녕은 어질고 재능이 매우 뛰어났지만

그럼에도 왕의 셋째아들이기에

벼슬에도 오를 수 없고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왕자이기에 ,

충녕의 재능이 안타까웠던 태종은

세종에게

 

<태종>너는 할 일이 없으니 편하게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라

 

라고 말하며

 

학문 , 미술 ,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능활동들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양녕대군 VS 충녕대군]

별개로 세자 양녕대군이 계속해서

사고를 치고 비행을 하며

국정을 어지럽히며

태종임금의 속을 썩이게 됬고

 

 

또한 양녕은 기생을 끼고 방종하게 놀며 술을 마시면서도

 

<양녕대군>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말하며 동생 충녕을 견제했습니다

 

하루는 세자 양녕대군이

유행하는 옷을 입고 모시는 자를 돌아보면서

 

<양녕대군>내 몸단장이 어떠한가 ?

 

하자

충녕대군은 형에게

 

<충녕대군>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모시는자가 탄복하며

 

<모시는 자>대군의 말씀이 정말로 옳습니다

저하께서는 이 말씀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에 세자 양녕대군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어머니(왕비)에게 말했습니다

 

<양녕대군>충녕의 어짊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대사를 장차 함께 의논하겠습니다

 

왕비가 태종에게 이 말을 전하니

태종은 듣고서 마음이 편안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자는 계속 속을 썩이고

반대로 충녕은 비범함이 계속 드러나고 있었고

결국 태종은 세자를 충녕에게 줄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가장 결정적 사건은

어리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은연중에 충녕대군도

왕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태종의 경고에도 양녕대군은 관리의 첩 어리와 몰래 만나며

덜컥 아이까지 낳았는데

이때 자신과 어리의 관계를 아버지에게 일름보했다고

의심받는 자가 충녕대군이었기에

양녕대군은 길거리에서 충녕대군을 보고서는 노하며

 

<양녕대군>어리의 일은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하니

충녕대군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세자 양녕대군은 아버지에게 혼나고 돌아오자

양녕대군은 다시 아버지에게 하소연하려 했지만

말투가 도리에 어긋났기에

충녕대군은 형이 아버지와의 의리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

형의 소매를 잡고 되풀이하여 달래며 깨우쳐 주며 힘써 만류했고

결국 세자는 자못 깨달아서 그만두었지만

돌아간 세자는 이전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충녕대군이 세자에게 문제가 있을때마다

그를 이끌어 감싸주려 했던게

이전부터 '한두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양녕대군은 유부녀 어리와의 자식을 가진것이 들키자

오히려 태종에게

 

'아바마마는 첩도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까 ?'

 

하는 글까지 올려

태종을 당황케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즉위]

세자 양녕대군은

온갖 말썽이란 말썽을 다 부렸기에

 

결국 태종은 신하들과 의논 후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키고

가장 어질었던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고 곧 왕으로 즉위시킵니다

 

폐세자된 양녕대군

 

<태종>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의 복이 된다.'

 

고 하였다.

효령 대군(둘째아들)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조목조목 일처리) 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왕후)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 대군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 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곧 태종은 세자 충녕대군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시켰는데

태종은 신하를 보내서 여러 의장들을 보내

왕세자를 맞아오게 했습니다

 

왕세자 충녕대군이 사양하자

태종은 노하며 세자와 신하들의 반대에도

모두 허락하지 않고

직접 익선관을 세자에게 씌워주고

국왕의 의복을 입히고

경복궁에서 즉위하게 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즉위

 

<세종대왕>내가 어리고 어리석어 큰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우므로, 

지성으로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허락)를 받지 못하고, 

부득이하여 경복궁으로 돌아간다

 

맞다싶으면 무조건 밀어붙이는 태종의 성격상

태종은 충녕대군의 인성과 재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아직 50세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22세의 젊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세종의 즉위교서>

그런데 근자에 오랜 병환으로 말미암아 청정(직접 나랏일)하시기에 가쁘셔서

나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시었다.

나는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으므로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하여,

이에 영락 16년 무술 8월 초1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축하)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로 높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

아아, 위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세종대왕 즉위식 , KBS 1TV 대하드라마 대왕세종 (2008)

 

경복궁 세종대왕의 즉위식 재현행사

 

[상왕 태종의 숙청]

태종 역시 셋째아들 세종의 즉위에 여러 리스크가 있었는데

그 역시 태조 이성계가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을

적장자 상속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결국 왕이된 후엔 자신이 그 원칙을 깰만큼

정치적 리스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석은 무능했고 너무어렸고

세종은 총명하고 나이도 어느정도 있었으며

또 양녕대군의 비행이 워낙 커서

세종 즉위에 대한 명분은 있었고

결국 신하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왕이 될 자질이 있었던 세종의 즉위를 밀어붙이고

세종 즉위 이후에도 상왕으로 군림하며

세종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하들을 숙청합니다

 

태종과 세종대왕

 

세종은 즉위 4년째에 상왕 태종이 사망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했고

차근차근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밀어 나갑니다

 

<라봉봉>세종대왕은 쓸 이야기가 엄청나게 다양하고 방대해

조선 임금중 기록이 가장 많은 편이고

세종대왕은 조선에서

세금도 제일 많이 거두어 들인 왕이었고

세금도 가장 잘 쓰여진 시대로서

제대로된 왕다운 왕의 시대가 나오게 됩니다

 

세종시대는

모든게 풍부한 그런 시대로서

태평성대를 연 인물인데

세종대왕의 개인적인 뛰어남도 있었지만

이런 세종대왕의 태평성대를 연 이면에는

태종 이방원의 눈물겨운 부성애가 있었습니다

 

철퇴 , 숙청왕 태종 이방원의 아들 답게

세종 역시 글만아는 유약한 선비왕이라기보다

자기 뜻을 밀고나가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고

 

셋째왕자로서 제약이 걸린게 많았지만

결코 평범한 왕족으로 인생을 썩혀가고

싶지는 않았던 인물이고

 

양녕대군에 은연중에 맞선

이런 모습들로

세종도 왕자시절 야망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가족도 숙청하고 보는

태종 성격상 세종이 없었더라면

양녕대군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꼴 나기에도 충분했고

오히려 양녕대군은 세종이 없었으면

정말 언제 사약을 받을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또다른 비화로는

태종은 죽기전 세종대왕에게

못난형 양녕이 그래도 너무나 사랑한 아들이라며

양녕을 간절히 부탁했지만

또한 세종대왕을 염려하며 세종대왕에게

만약 왕권에 위협에 되거든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습니다

 

착한 세종대왕은 이후에도 망나니짓 , 행패를 부리는

양녕대군을 신하들에게서 끝까지 보호하나

양녕대군은 세종대왕 사후 세종의 손자 단종이 수양대군에 죽을때

수양대군의 편을 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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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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