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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개혁>

[철혈군주 태종]

[사병혁파]

[명과의 조공관계]

[육조 직계제]

[태종의 국가정비]

[숙청왕 태종]

[폐세자 양녕대군]

[호랑이 등에 탄다는 것]

[사돈을 숙청한 상왕 태종]

[태종의 행복한 노년]

<라봉봉>

 

[철혈군주 태종]

그렇게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 암살 , 왕자의 난 등 여러 피를 흘린끝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철과 피의 군주 태종 이방원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냉철했던 인물이었고

또 가장 지적판단력이 뛰어났던 인물이기도 했던

이중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클 태 太 자의 태종 시호같이 모든지 컸습니다

광기도 컸고

업적도 컸던 인물입니다

 

일단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이 된 태종은 나라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노력했습니다

 

고려에서 태어났던 태종 이방원은

고려왕실의 고질적 문제였던

왕실의 권한이 약하고

신하의 권한이 강한

군약신강 현상을 해결하려

적극적인 왕권강화책을 실시했고

 

이로인해 조선은 고려와 정반대로

왕권이 강하고 신권이 약한 형태로 흘러갔습니다

 

[사병혁파]

태종 이방원은 먼저 왕위에 오르기 전

정종대부터 개혁을 시작해

귀족 , 세력가들의 개인 병사인

'사병제도' 를 금지시킵니다

 

고려~조선초의 고질적 문제였던 세력가들의 사병소유 , JTBC 금토 드라마 나의 나라 (2019) My country

 

고려때까지만해도

왕건부터가 사병을 거느린 송악호족출신이었고

고려는 호족들의 연합체였기에

왕권이 매우 약했는데

 

몽골 등 외세의 침입이 크게 있자

고려왕실 , 나랏님은 강화도로 빤스런했기에

육지안의 지역 유지 , 호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고향과 터전을 지키기위해

개인 사병들로 무장했고

이성계의 전주 이씨가문 역시 마찬가지라

이성계 역시 자신의 사병 가별초를 거느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었고

이방원 역시 자신의 사병들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정권을 잡은 입장에서는

세력가들의 사병보유가 큰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전 이방원은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하려 하자

반발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죽였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다시금 사병혁파를 시행합니다

 

조져 !

 

이로인해 조선은

지방 귀족 , 호족들이 군대를 소유한 고려대와 달리

군대는 오직 조선정부에서만 보유할 수 있었고

이에 왕권은 강하고 신권이 약했습니다

 

(군강신약 조선 , 군약신강 고려)

 

[명과의 조공관계]

이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이 된 이방원은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시작했고

명나라는 당시 조선이 요동정벌을 시행할까봐 조선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태종은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명나라와 우호 , 조공관계를 세웁니다

 

이에 태종때문에 요동정벌이 좌절됬다는 이야기가 나오나

당시 명나라는 영락제시기로 명나라 역시 최전성기 시대였기도 합니다

 

또한 조선은 조공으로 명황실에 막대한 보물을 헌납하는게 아니었고

예의상 명황실을 높이고

상품들을 진상하면

명황실에서도 그에 맞는 예우로

그 값어치에 맞거나

그 이상의 하사품을 내려주는

 

'조공무역'

 

관계가 형성됬고

조선도 많은 조공품을 보내고

많은 하사품을 받아왔습니다

 

명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 조공무역

 

원나라와 고려의 경우는 고려가 원나라와 전쟁에서 지고

인질 , 공녀 , 보물이 뜯겨가던 형태의 진짜 조공이었지만

명나라와 조선의 경우 명나라와 조선은 전쟁 대신

형식적인 조공을 하며

조공무역이라는 우호관계를 택하게 됩니다

 

[육조 직계제]

또 1401년(태종 1년) 곧바로

여러 관직들을 의정부(조선 최고 기관)로 통일시켜

국가 조직을 의정부 중심으로 돌아가게 했고

 

1405년(태종 5년) 에는

육조 장관들의 권한을 강화시켰는데

의정부는 재상들의 기관이기에

고려나 조선초대처럼

재상들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태종은

의정부보단 육조를 중요시해

1414년(태종 14년) 육조직계제를 시행해

육조에서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보고가 올라가는게 아닌

육조에서 곧바로 왕에게 보고를 직접 올리는 형태로 바꿨습니다

 

태조때 의정부서사제(왼쪽)와 태종때 육조직계제

 

[태종의 국가정비]

태종은 지방관제도 개편시켰고

형 정종이 수도를 잠깐 개경으로 옮긴 것을

다시 한양으로 옮기고 한양을 정비시켰습니다

 

태종은 유교국가 조선을 만들기위해

숭유억불정책 ,

유교를 높이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시행해 불교계를 정리했고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목잘린 경주의 불상

 

조선의 불교탄압으로 평지에서 산으로 옮겨간 한국의 절들

 

연등회를 폐지하고

고려 말부터 당시까지 한국 불교 , 승려 , 절들은 타락해서

온갖 노비를 거느리고 고리대금업 및 승려들도 사생아들을 낳는 등

여러 문란함이 강했는데

태종은 노비 8만명을 몰수시켜버립니다

 

또 양전사업으로 토지제도도 정비해

세금 거둘땅들을 파악 , 조사해 늘렸습니다

 

이렇게 태종대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나라 , 성리학 국가 조선의 기틀이 잡혀가고 있었고

 

즉위전에도 경쟁자들을 제거한 태종은

즉위후에도 태종 공신 , 외척들 차후 위험세력들을

제거 , 숙청하게 됩니다

 

[숙청왕 태종]

태종은 사돈이었던 이거이를

사병혁파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귀양보냈고

또 처남으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 , 민무질 형제를

죽여버립니다

 

태종의 민씨일가(부인네 가족들) 숙청 , KBS 역사저널 그날

 

또 불충을 이유로

나머지 처남 민무휼 , 민무회 형제까지

죽여버렸고

권력에 방해된단 이유로

자기 처남 4명을 도륙해버린 태종이었습니다

 

권력앞에선 양심과 도덕이 결여된 싸이코패스 + 유능함이 공존했던

태종은 자신의 말을 안듣거나 왕권에 도전하면 일단 목을 베고

유능해서 국가와 왕권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개인적으로 빡쳐도

활동은 보장해주었습니다

 

[폐세자 양녕대군]

앞길을 막는 자는

다 부셔버리고 치워버리고 찢어버린 태종 !

 

카리스마 이미지의 태종 이방원을 연기한 배우들 , 용의눈물 유동근 , 육룡이나르샤 유아인 , 나의나라 장혁

 

태종의 숙청은 친척뿐만 아닌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맏아들인 세자 양녕대군이 계속 사고를 치고 비행을 하며 속을 썩히자

결국 신생 국가 조선의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해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던 셋째아들 충녕대군을 곧바로 즉위시켜버렸고

충녕대군이 바로 한국사의 천재 '세종대왕' 입니다

 

태종 임금과 양녕대군

 

어질었던 충녕대군 , KBS 1TV 대하드라마 대왕세종 (2008)

 

그럼에도 양녕대군 역시

미운우리새끼였기에

태종은 양녕을 폐세자하며

통곡하며 흐느끼다 목이 메일정도였고

끝내 사심보단 나라와 공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태종>이르기를

 

'충녕 대군(세종대왕)은 영명 공검(뛰어나게 지혜롭고 공손하고 검소함)하고

효우 온인(부모형제에 우애가 깊다)하며 ,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

진실로 저부(세자)의 여망(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합니다.'

 

하였다.

내가 부득이 제(양녕대군)를 외방으로 내치고

충녕대군을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 옛 사람이 말하기를,

 

'화와 복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니,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의 사심이 있었겠느냐 ?

아아 ! 중외(안과 바깥)의 대소 신료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

 

태종은 셋째아들 충녕대군 , 세종대왕의 효심과 비범함을 알았기에

적장자 상속 원칙을 어기고

젊은 아들에게 믿고 권력을 양도한 것이었고

단 세종대왕에게 폐세자 시킨 못난 형 양녕대군을 끝까지 보호하라 부탁했습니다

 

[호랑이 등에 탄다는 것]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양위할 당시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태종>18년 동안이나 호랑이 등에 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선 민화속 호랑이 , 호랑이로 비유되는 권력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그럼에도 군권은 계속 쥐고 있었고

아들 세종대왕의 앞길에 장애물이 없도록

세종대왕의 왕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계속해서 조지고 조졌습니다

 

세종대왕의 즉위 ,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실제 조선의 철퇴 , 철퇴왕 이방원

 

[사돈을 숙청한 상왕 태종]

태종은 세종의 장인 심온도

떠보았는데

아주 좋고 똑똑한 사위가 왕이 되자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고

 

일단 외척이라면 무조건 경계 , 의심하고

두드러기가 올라올정도였던 상왕 태종은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출발할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심온을 축하해주었다는 말을 듣고

심온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심온을 죽이려 했고

결국 명나라에서 돌아온 심온을 포박해

고문하고 반란에 억지로 연관시키고 사약을 먹여 죽입니다

 

심온의 고문 , KBS 역사저널 그날

 

진짜 심온은 죄가 없었는데

태종이 그냥 많이 모였다고 , 사돈이라고 경계하며 죽인 케이스였고

태종 이방원의 마지막 칼춤이었습니다

 

나름 태종 이방원도 정치 고단수였기에

뭔가 심온의 야심이나 낌새를 느끼긴 느꼈을 것이고

불경죄로 사형시켰는데

그렇다고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태에서

사돈을 처형시킨 것이었습니다

(유죄추정의 원칙 ;;)

 

일단 태종은 심씨가문 숙청을 종료시킨 후

며느리이자 왕비였던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는

세종대왕의 항의와 3명의 아들을 낳다는 이유로

왕비 자리에서 쫓아내진 않았고

또 당시 소헌왕후는 다른 외척들처럼

야심을 내보이진 않았습니다

 

하여튼 왕비였던 소헌왕후는

뜬금없이 시아버지에게 가족들이 몰살당한 것이었고

평생 조용히 세종을 내조하며 지내게 됩니다

 

시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잃었지만 이후 세종대왕과 조선 최고의 왕비가 된 소헌왕후 심씨

 

[태종의 행복한 노년]

젊은 임금 세종대왕은 매우 유능한 모습과 효심으로

왕위를 넘긴 태종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 , 만족시켜주었고

 

세종대왕의 뛰어난 자질을 눈으로 보고 안심한

상왕 태종은 한가롭고 평화롭게

놀러 다니고 사냥도 하며 신나게 살았고

명나라 사신들이

세종대왕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이후 세종대왕과 매사냥을 다녀온 직후

몸이 갑자기 나빠져서

1422년 5월 10일

한성 연화방에서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봉봉>태종 이방원은 젊은시절부터 조선건국 , 왕위쟁탈전에 참여하고

상왕이 된 후에도 사돈을 숙청하는 등

수많은 피를 흘린 인물이고

사심보다는 실력 중심의 엄격한 정치를 통해

건국초 불안정한 조선의 기반을 다진 인물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까빠들에게 욕도 먹고 찬양받기도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모든 세력들에게 인정받는 인생 최대의 업적은

세종대왕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ㅋㅋ)

 

이게 우스개소리로 이야기되는 이야기지만

세종대왕의 위대한 천재성을 생각해보면

차마 농담이라 하기 어려운 말이고

 

아들이 태어나보니 천재이기에

사실 아들이 대단한 돌연변이 같은 것이지

모차르트 부모나 아인슈타인 부모가 대단하다 보기

어렵기도 하지만

 

하여튼 뜬금없이 태어난 천재아들 세종의 출현은

평생 피를 흘리고 직진만 했던

태종 이방원의 크나큰 변수로 작용했고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을 끔찍히 아꼈고

세종대왕 역시 권력을 잡으며 수많은 정적들에 노출된

아버지 태종을 보호하려 극진히 노력했습니다

 

이로인해 태종은 말년에는 진짜 호랑이 등에서

안심하고 내려와

킬방원 , 칼방원의 가면을 벗고

엘리트 아들을 둔 편안한 아버지로서

편안하고 행복한 노후를 즐길 수 있었고

태종 다음왕 세종대왕의 출현은

한국사의 크나큰 축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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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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