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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이후의 태조 이성계>

[정안군 이방원]

[태조 이성계의 목표상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왕자의 난]

[정종의 즉위]

[2차 왕자의 난]

[태상왕 이성계]

[조사의의 난]

[함흥차사]

<라봉봉>

 

[정안군 이방원]

그렇게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혹은 양반나라

조선왕조 500년이 시작됬고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도왔던

이성계의 아들들은 왕자가 되어

OO군 으로 불리게 됬고

 

조선건국에

가장 공을 많이 세우고

행동대장이 되어

가장 피를 많이 흘렸던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은

정안군이 되었습니다

 

정안군 이방원 ,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 육룡이 나르샤 (2015~2016) Six Flying Dragons / Roots of the Throne

 

[태조 이성계의 목표상실]

이성계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최영 , 정몽주 , 고려 왕실가문 , 개경사람 등

고려 충신 , 왕실 , 개경사람 등 수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모두가 존경하는 전쟁영웅이 아닌

피를 많이 흘린 냉정한 권력자가 되어

인심을 많이 잃었고

특히 조선건국대부터 차별당한

고려 수도 개경사람들이

이성계를 매우 싫어해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잘근잘근 씹어먹을 정도였습니다

 

점차 왕이된 태조 이성계는

목표상실 증후군 , 상승정지 증후군에 걸려

강인함과 총명함을 잃고 뒷방 노인네화 되었고

 

자신의 조선건국을 도운

정도전 등에게 권력을 주고

차츰 편안한 노후를 생각하게 됩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신진사대부이자 유학자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 조선을 구상한

설계자이자 이성계집단의 최고 브레인이었습니다

 

이성계가 부패하던 고려왕실에 칼을 들었다면

정도전은 무너지는 고려왕실에 붓을 들었고

 

둘은 합심하여 조선을 건국한

정치적 동지였습니다

 

삼봉 정도전

 

<정도전 명언>

1) 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2) 나라도 ,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정도전은

새 수도를 한양으로 결정해

종묘(왕실 제사 사당) , 사직 , 궁궐 , 시장 , 도로의 터를 정했고

태조 이성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양에 새 궁궐과 종묘공사가 시작됩니다

 

조선 한양 , 오늘날 서울특별시

 

정도전은 조선 궁궐 이름은

커다란 행복이라는 뜻의

경복궁으로 지었고 (해피하우스 , 의외로 단순ㅋㅋ)

하나 둘 새나라 조선의 제도를 정비해갑니다

 

조선 정궁 경복궁

 

조선건국사를 다룬 사극 정도전 ,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2014) 鄭道傳

 

[왕자의 난]

근데 태조 이성계는 건국대부터

ㄹㅇ 총명함을 잃었는데

 

1392년 8월 , 조선 건국 1달만에

여러 왕자들 가운데

조선건국에 쟁쟁한 공을 세웠던

이방원 등 장성한 아들들을 제껴두고

어린 10살배기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결정했고 (;;)

 

정도전 역시

이전 신권이 강한 고려식 재상정치 및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이전 고려와 관련이 전혀 없었던

어린 이방석을 밀어주었습니다

 

근데 이로인해

건국때까지 아버지를 구하며 온갖 더러운일에 앞장서며

피를 다흘렸으나

정작 왕자리가 어린 이복 동생에게 뺏길 위기에 처하자

왕자 이방원은

다시금 킬방원 , 철퇴본능이 꿈틀이기 시작했고

 

 

개인 호위 병사 , 사병까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분노한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고 살해합니다

 

이복형 이방원과 어린 세자 이방석 , 사극 육룡이 나르샤

 

당시 정도전은 이전 고려가 상황이 좋지 못해 못이룬 

고려의 마지막꿈인 요동정벌을 조선대에 이르러

계획하고 있었는데

요동 공격 논의 17일 후에 이방원에게 살해당합니다

 

고려 , 조선인들이 수복하려 했던 고구려 고토 요동(만주)

 

[정종의 즉위]

이방원은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고

일단 왕이 되기 전

나머지 세력들까지 숙청하기 위해

형 이방과에게 왕위를 미루었고

결국 왕자의 난이 일어난지 10일도 되지 않아

 

아들들이 죽자

이방원의 패륜에 빡돈 태조 이성계는 결국

이방과에게 왕위를 양위해

이방과는 동생 이방원 및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양보로

조선 2대왕 정종이 됩니다

 

정종

 

[2차 왕자의 난]

1400년(정종 2년) 에는

다섯째 동생 이방원이 권력을 잡은 것에

배아파하던 넷째 이방간은 사냥을 핑계로 사병을 동원해

동생 이방원을 죽이려했고

이를 2차 왕자의 난이라 합니다

 

개경 시내에서

방간군과 방원군의 접전이 벌어집니다

 

이방간은 형 정종에게 군사를 일으킨 사실을 알리고

상왕전을 지나며 태조 이성계에 알렸는데

둘다 이방간을 캐븅신 취급을 합니다

 

이방간은 형 정종에게

 

<이방간>정안공(이방원) 이 나를 해치려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이에 정종은 크게 분노하며

타이르기를

 

<정종>네가 난언(개소리 , 아무말 대잔치) 에 혹되어

형제를 해치려 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홀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살려주겠다

 

또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태조 이성계 역시

크게 분노하며 말하기를

 

<태조 이성계>네가 정안(이방원) 이와

아비가 다르냐 ?

어미가 다르냐 ?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

 

하고 분노했습니다

 

두 왕들 역시

이방간에게 지랄하지말고

빨리 빌으라고 요청했는데

 

이성계 역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인

이방원을 매우 증오했지만

그래도 아들은 아들이었고

 

나이들며 맛탱이는 갔지만

한때 청년시절 전쟁에서 이미 만렙찍었던 이성계는

애초에 이방간은 동생 이방원을 이길 그릇이 못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2차 왕자의 난

 

아버지가 동생 이방원을 증오하는 것을 이용해

군사를 일으킨 이방간은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대부분 왕족과 공신들 역시 전부 이방원 편에 서자

좆된 이방간은 이방원의 군사에게 참패하고

사로 잡혔습니다

 

이방원은 1차 왕자의난때 아버지와 민심의 분노를 산 것을 의식해

못난 형 이방간을 죽이지는 않고 귀양보냈고

이방간은 유배지에서 그냥저냥 편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태상왕 이성계]

하여튼 말년들어 이성계 역시

옛날 자신이 죽여갔던 고려인들에 대한 업보가 돌아왔는지

영 좋지 못한 상황들에 처하게 됬고

 

이성계는

아들들이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뒷방에서 지내다가

결국 2차 왕자의난 진압 이후

이방원은 정종에게 양위받아

조선 3대임금 태종 이방원이 되는 것을 지켜보고

 

이성계는 상왕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그러나 아무런 힘이 없는)

'태상왕' 이 됩니다

 

점차 권력의 무상함과 아들들의 피바람에 지친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떠나 여러 산들이나 고향을 돌아다니며

태종과는 거리를 두었고

 

옛 동북면 고향 함흥에 그리움을 품고

서울을 떠나 함흥에 머물며

대궐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함흥에 있는 조선궁궐 '함흥본궁'

 

[조사의의 난]

이미 조선을 건국한 직후부터 퇴물화되긴 했지만

아들 태종 이방원에게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 + 퇴물신세로 전락한

태조 이성계는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만 죽인것이 아닌

정도전을 비롯한 자신의 조선 건국 동지 ,

요동정벌을 기획한 정치 동지들을

모두 죽인 것이었고

 

당시 이성계는 아버지로서 분노한것만도 아닌

정치인 이성계로서도 상당히 분노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병을 핑계로 궁을 비워 함흥에 간 아버지 이성계에

태종 이방원은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냥 냅둘 수밖에 없었고

 

점차 이성계의 강씨부인의 친족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올라오며

사건은 변화하게 됩니다

 

뒷방으로 밀려가던 태상왕 이성계는

자신이 남은 모든 정치적 , 군사적 역량을 총동원해

한번 태종을 조지려 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병집단이 주둔하던 함흥에서

조사의를 간판으로 세워 1만군사를 일으켰는데

반란 주동자는 엄연히 이성계였고

 

태종 역시 아버지가 차마 반란을 일으켰다 할 수가 없었기에

조사의를 타겟으로 설정하고

4~5만 토벌군을 보내 조사의군을 조집니다

 

조사의의 난

 

사실 5만군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구상하며 훈련시킨

요동정벌군이었고

 

이성계는 갑자기 태종이 5만군대를 일으키자

그 군대가 무슨 목적으로 훈련된 군대인지 알았기에

크게 당황했고

 

결국

5만 조선정부 정예군 VS 1만 이성계 정예군이

청천강에서 붙었는데

아무리 이성계의 군대였지만

이때는 쪽수 압도적으로 밀리고

결국 반란으로서 명분도 밀려있었고

결국 이성계의 반란군은 일방적으로 태종군에 궤멸당합니다

 

조사의의 난으로

평생 한번도 진적 없던 백전백승의 이성계는

아들의 군대에 처음으로 패배했고

건국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오명을 남긴 후

자신의 사병집단 가별초도 이때 모조리 전멸당합니다

 

당시 태종과 조선정부도

조사의의 난이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이라는 쪽팔린 사건이기에

쉬쉬하고 넘어갔고

조사의 일가만 처형하는 것으로

매우 관대한 처벌로 끝내게 되고

이후 아버지와 화해하는 양식으로 흘러갑니다

 

[함흥차사]

이에 태종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함흥에 차사들을 보내 아버지의 환궁을 요구했는데

태종 이방원에 분노한 태조 이성계는 함흥에 찾아온

태종의 차사들을 모두 쏘아 죽였고

죽은 차사들이 10명이 넘어가자

 

먼곳에 떠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함흥차사' 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함흥차사

 

결국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의 어린시절부터의 친구

박순을 불러 설득시키게 합니다

 

박순은 일부로 태조에게 어미말과 망아지를 보여주며

어미말의 모성애를 보여주었고

 

또 이후 박순은 태조와 바둑을 두는데

마침 쥐가 새끼를 물고가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새끼를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때 박순은 바둑판을 옆으로 치우고

땅에 엎드려 우니

태조 이성계가 슬피 여겨서

곧 대궐로 돌아가겠다 합니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돌아와

아들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인정하고 안아주었습니다

 

이후 태조 이성계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내고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사망했습니다

 

거친 무인의 멋이느껴지는 이성계 무덤 건원릉의 억새풀

 

<라봉봉>하여튼 조선 건국 이후에도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가 여럿 있는데

 

나름 고려를 구한 이순신급 전쟁영웅으로

평생을 존경과 찬양만 받다가

고려인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고부터 쌍욕이 박히기 시작하니

태조 이성계도 멘탈이 많이 나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로인해 왕이되고부터는 점차 퇴물화되며

총명함을 잃은게 아닐까 싶고

나름 왕이 되고나서도 자신의 클래스를 재입증하려는 시도들을 했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는 우리 속담처럼

더 위험한 전투에서도 백전백승이었던 이성계 역시

태종에게 패배한 이야기 등

여러 인간적인 이야기를 남기다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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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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