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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사회·문화>

[남녀가 평등했던 고려사회]

[고려인의 사랑]

[고려의 결혼풍습]

[고려가요]

[국제무역항 벽란도]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라봉봉>

 

[남녀가 평등했던 고려사회]

요즘은 많이 없어지고 오히려 남자가 차별받기도 하지만

20세기까지 한국은 구시대 , 조선시대 잔재가 많이 남아있어

남존여비 사상 , 남자가 귀하고 여자를 천시하는 생각이 뚜렷했습니다

 

이는 조선뿐만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세계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과거보다 전쟁이 사라져가며

남성 인구도 덜귀해졌고

가사도구들이 발명되고

여성들이 가사일에서 점차 해방되어

남녀평등 , 남녀 참점권 평등 , 여성의 사회진출 등

여러 분야에서 평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진정해 내안의 투머치토커)

 

하여튼 조선시대=남존여비=과거엔 여자가 차별 ! 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고려시대 여성은 부계사회였던 조선시대 여성에 비하면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고 자유로웠습니다

 

고려여인들 , 출처 ???

 

고려사회는 음식과 빨래 등 집안일은 누군가 해야하기에

여성의 사회진출은 제한됬지만

 

(이건 전세계가 대부분 그랬

남자는 힘쓰는 농사와 목축 , 여자는 집안일)

 

기본적으로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고

남성이 결혼하면 처갓집에서 사는게 일상이었습니다

 

고려 문신 이곡은 원나라에 올린

공녀 폐지 상소문에

 

<이곡>고려 풍속으로 말한다면 남자가 차라리 본가로부터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게 돼 있는데… 

딸을 낳으면 애지중지하며 키워서 밤낮으로 그가 장성하기를 바라니 

그것은 딸이 부모를 부양해 주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재산상속에서도

아들과 딸이 똑같은 권리를 가졌고

제사 역시 아들과 딸이 번갈아가며 지냈습니다

 

또 상업이 발달한 나라답게

일부 고려 여성들은 사회활동도 했는데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는 고려의 잣과 인삼을 원나라로 수출해 이득을 얻었고

고려 여인들은 고리대금 , 상업과 무역에 손대기도 했습니다

 

고려 여성들이 그려진 벽화 , 박익 무덤

 

[고려인의 사랑]

고려 남녀의 사랑도 자유로웠는데

목욕덕후였던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하고

여름에는 하루에 두번씩 목욕했는데

 

고려남녀는 여름철 시냇물에 모여

벌거벗은 남녀가 어울려 목욕을 했지만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혼욕)

 

혼욕하는 모습

 

또 대형 불교행사인 팔관회 , 연등회같은 축제때는

남녀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교제했고

동네 모임에서도 별 제약없이 자주 어울리고

여자들도 사랑노래 , 시를 짓고 다니며

결혼전 남녀의 연애가 자유로워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인했습니다

 

팔관회

 

고려인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 SBS 월화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2016) Moon Lovers: Scarlet Heart Ryeo

 

충렬왕때 관리 허공은

달밤에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이웃집 처녀가 담장을 뛰어넘어 왔고 (사생팬 수준ㅋㅋ;;)

허공은 가까이하지 않고 예의에 어긋난 짓임을 타일렀더니

처녀가 부끄러워해서 돌아갔습니다

 

엣헴 물러가시오 ~ , 조선시대 기녀와 선비 그림 , 작자미상

 

또 김태현이라는 용모가 단정하고 눈매가 그림같은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친구들과 선배집에 가서 공부했고

선배집에는 과부가 된 딸이 있었는데

시를 약간 알았고

어느날은 그 딸이 시를 지어 김태현에게 창틈으로 던져 주었습니다

 

<과부의 시>

말 탄 소년의 얼굴 깨끗하기도 하이

석 달 동안 누구신지 이름 몰랐네

이제야 알고보니 김태현이란다

가는 눈 , 긴 눈썹 은근히 마음에 들어요 ♡

 

이에 김태현은 이 시를 읽고

그 집에 발을 끊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여성들도 연애에 적극적인 모습으로서

중매결혼이 국룰이었던 조선시대와는 상반된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중매결혼만 인정했던

엣헴엣헴 고려 유학자들은 이런 청년들의

자유연애를 통제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엣헴엣헴

 

[고려의 결혼풍습]

고려남녀는 고구려 남녀들처럼

혼인은 간소하게 치뤘고

폐백도 존재했지만

서민들은 저녁에 이웃과 친척들을 불러

신랑신부에게 절을 받게하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받으며

부부임을 인정받았습니다

 

단 왕실의 경우 신분 ,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잧아 여러 폐해도 나타났고

왕비의 가족들 , 외척이 득세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몽골의 침공으로

고려 남성들이 많이 죽자

원 간섭기 시기 고려는 잠시 여초현상이 있었고

충렬왕때 재상 박유는 어느날 충렬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룄습니다

 

<박유>지금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나 존귀를 막론하고 

한 아내만 둘 수 있어 아들이 없는자도 축첩을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외국인이 와서 여자를 제한없이 취해가니 

인구가 북쪽으로 흘러갈까 두렵습니다. 

청하건데 대소신료는 품계에 따라 서첩을 두고 

서인들도 일처일첩을 할 수 있게 하며 

서자들도 적자에 준하는 출세 기회를 얻게 하소서. 

짝 없는 이의 원망도 줄고 인구도 늘어나고 좋습니다

 

(지금 고려에 남자가 적으니까 첩제도 만듭시다)

 

이에 고려 부녀자들은 박유의 발언을 듣고

이를 모두 원망했고

연등회 저녁 박유가 충렬왕을 보필하고 나오자

어떤 노파가 그를 가르키며

 

<어떤 노파>저자가 축첩을 청한 요망한 늙은이다 !

 

하자

 

저새끼래 ~ 좌표찍었다 !!

 

들은 여성들도 잇따라 그를 손가락질했습니다

 

이노옴 !

 

이에 당시 재상중에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어

결국 첩제도는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의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이야기하는 이야기로 자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고려가요]

고려인의 사랑은

고려가요에 드러나있습니다

 

고려가요는 조선 사대부들에 의해

남녀상열지사라 폄훼되 불렸는데

남녀상열지사란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서 즐거워하는 가사라는 뜻으로

 

민중들사이에서 퍼졌던 고려가요는

조선 선비 , 유학자 , 사대부들에게 찍혀서

삭제 , 소실당하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고려가요는

여러개가 있는데 남녀 사랑뿐만 아닌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같은

풍류성 가요도 있고

 

일단 가장 유명하고 중요하고

한민족 보편적 정서를 다룬 고려가요는

당연 가시리입니다

 

<가시리>가시렵니까 ? 가시렵니까 ?

(나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

 

날더러 어찌 살라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두고 싶지만

서운하면 아니 올까 두렵습니다.

 

서러운 임 보내드리니

가시자마자 곧 돌아오십시오

 

가시리

 

이건 해석본보다 원본으로 보는게 더 찰진데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

후렴구인 위 증즐가 대평성대 등

여운이 강한 가사입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처럼

이별의 슬픔속에서도 집착하지 않는 모습 ,

희망을 노래한 모습은

고려 , 한국 음악정신의 절정을 이룬다 생각되고

아주 아름답고 인상깊게 보았던 고려가요입니다

 

이런 고귀한 고려가요도 있었지만

서민들 사이에서 퍼진 고려속요로서

조선 사대부들에게 남녀상열지사로 비판받는 노래도 있었는데

바로 '쌍화점' 이 유명합니다

 

<쌍화점>

만두가게(쌍화점) 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비(이슬람 위구르족 상인)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가 말한 것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그 둘이 잔 데 같이 뒤엉켜진 곳 없다

 

씽화점

 

일단 야릇한 느낌이 강하기에

조선 선비들이 부들부들 엣헴엣헴하기 좋은 은밀한 가사였고

이 쌍화점이 주목받는 이유는

작품성보다는 고려 사회상을 많이 담고있는데 가치가 있어서입니다

 

회회아비 , 이슬람 위구르상인이 고려에 자주 왔음을 알 수 있고

 

이국적 모습의 서역인

 

성적으로 좋게말하면 자유분방 , 나쁘게 말하면 문란했던

고려 사회상 , 상업이 발달한 모습 등의

여러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고려가요입니다

 

[국제무역항 벽란도]

고려인들은 오늘날 한국이 인천이나 부산항을 국제 무역항으로 이용하듯이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국제 무역항으로 이용했고

 

벽란도와 고려 국제무역

 

고려시대는 중국과 고려 사이엔 유목제국들이 강성했기에

중국과 직접 교류하기 위해

서해 바다로 교류하는게 매우 활발했고

고려 수도 개경과 가까운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애용됩니다

 

이곳에서 무역은 상당히 활발해

고려 특산품 송이버섯 , 종이 , 인삼 , 나전칠기 등을 수출하고

비단 , 약재 , 서적들을 수입했습니다

 

당시 교류를 보여주는 무역선 신안 보물섬

 

고려의 특산품 , 남부에 도자기 생산지가 집중되있습니다

 

이로인해 송나라 , 일본 , 동남아와 인도 , 이슬람까지

벽란도에 와서 무역했고

이슬람 상인이 고려를 중동에 꼬레아라 전하며

한국은 코리아 KOREA 로 서양에 알려지게 되어

영어 이름이 코리아가 됬습니다

 

고려에서 교역하는 이슬람 상인들

 

근데 이후 명나라가 들어서며

명나라가 국제적으로 나라문을 닫고 쇄국정책을 실시해

외국인들이 고려로 오는 길도 더불어 막혔고

 

또 명나라와 고려는 만주를 중심으로 국경이 붙어있었기에

굳이 해로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

해상무역이 쇠퇴하고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위주 교역으로 변화하며

벽란도 역시 쇠퇴합니다

 

[고려청자]

고려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바로 생각나는 것은 바로바로

고려청자입니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 국보 68호 , 간송미술관

 

화려한 고려 귀족예술의 정점을 찍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 예술이라 할 수 있는

고려청자 ,

청자는 10세기 , 고려초기 중국의 청자에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 제작되었고

12세기부터는 고려의 독자적 특색이 나타납니다

 

고려청자는

은은한 푸른 빛깔의 신비로운 비색과

 

푸른비색을 내는 고려청자향로 , 보물 1027호 청자구룡형삼족향로

 

상감기법 , 그릇 표면에 무늬를 새긴 후

그 안을 하얀 흙으로 채운 후

구워내 무늬를 만든 상감청자로 유명하고

 

상감기법으로 새겨진 학무늬

 

처음엔 중국에서 영향받아 만들어졌지만

중국기술을 뛰어넘어 고려인들의 매우 섬세한 장인정신이 들어가

당대나 오늘날이나 고려청자는

세계 최고의 도자기로 인정받았습니다

 

<송나라 태평노인의 발언>

건주⋅촉 지방의 비단 , 정요 백자 , 절강의 차 ,

고려 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

다른 곳에서는 모방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가면서

청자토가 풍부한 남해안이

왜구의 침입을 받고

남해안의 청자장인 , 도공들이 왜구에 죽어나가고

조선시대에 와서 화려한 귀족문화보다는

사대부의 사치를 멀리하는 검약정신이 강조되어

도자기 , 청자 기술이 더욱 쇠퇴했습니다

 

강진 청자촌의 고려도공상

 

[팔만대장경]

고려는 거란 , 몽골 등 북방 유목제국들의 침략을 겪으며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고려 왕실과 불교계는

민족 통합 , 부처님의 힘으로 국가 수호(호국불교) 목적으로

불경 목판인 '대장경' 을 만듭니다

 

고려 현종때 거란군의 침입을 막기위해

초조 대장경을 만들었지만

초조 대장경은 이후 몽골의 침입때 불타 많이 사라졌고

 

초조대장경

 

이후 몽골이 침입하자

고려인들은 8만장 , 5272만 9천자에 달하는 대장경 목판을 다시 제작했고

이를 팔만대장경이라 부릅니다

 

팔만대장경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려는 고려인들의 마음은 간절했기에

한글자 새길때마다 세번씩 절을 하며 새겼다 합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불교정신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며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있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한국에서 일어난 세계적인 발명은

조선시대엔 한글이 있다면

고려시대엔 금속활자가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가나다라마바사' 를

하나씩 붓으로 써야했다면

이후 목판활자기술이 발명되어

'가나다라마바사' 를 한번에 찍어내는 혁신이 있었습니다

 

통일신라대 인쇄된 현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활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그러나 '가나다라마바사' 라 새겨진 목판은

'가나다라마바사' 밖에 찍어낼 수 없었고

목재라 내구성도 낮아 먹을 먹다보면 갈라지기 일수 였습니다

 

팔만대장경 목판

 

그러다

'가' , '나' , '다' 이렇게

한글자씩 새겨진 금속활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금속으로 만들어져 반영구성에

내가 원하는 글들을 조합해서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경제성도 있었습니다

 

이걸 고려에서 최초로 발명합니다

 

만월대(개경 왕궁)에서 출토된 금속활자(왼쪽)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 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로 인정받고 있고

 

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와 직지 표지

 

중국에서는 자신들이 먼저 발명했다며

어떻게던 직지심체요절 이전의 금속활자본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런건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려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 인쇄술보다 앞서있으며

요즘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기술은

고려를 다녀간 교황사절단을 거쳐 전파된 기술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라봉봉>개방적이고 국제적인 화려한 고려의 사회·문화였고

이에 정반대로 폐쇄 , 쇄국 , 검소했던 조선 사회·문화가 까이는 경향이 있는데

 

당시 고려는 국제적으로도 중국이 분열되거나

개방적이었던 시기와도 맞물리기도 했고

조선은 명나라 , 청나라가 기본적으로 쇄국적 입장을 견지했던 시기라

함부로 동일선상에서 비교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 개방적이고 화려한 고려문화였고

한국 장인들의 지극정성과 섬세한 모습이 들어간

아름다운 예술품들이 많이 만들어진 시기입니다

 

고려문화는 해양적 문화와 관련도 있는데

한국은 고려 멸망부터 이런 해양적기풍이 딱 끊긴듯하고

섬나라인 일본은 이런 고려스러운 문화가 오늘날에도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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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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