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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원나라에서 머문 충선왕]

[견제를 받은 충숙왕]

[충혜왕의 1차폐위]

[고려 최악의 폭군 충혜왕]

[충혜왕의 2차폐위]

[어린 명군 충목왕]

[어린 폭군 충정왕]

<라봉봉>

 

[원나라에서 머문 충선왕]

충선왕은 고려보다는 원나라에 머물기 좋아한 임금이었고

그는 원나라에 있을때

왕위를 세자 왕감에게 넘겨주려다

신하들의 만류로 중단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충선왕은 세자 왕감을 사형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충선왕이 고려국왕임에도

만사에 싫증을 느끼며

고려가 아닌 원나라 연경(대도 , 베이징) 에만 머물자

고려인들은 그런 왕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피곤하고 고되게 여겼고

왕을 모시던 신하들도

오랫동안 지쳐서 돌아갈 것을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원나라 대도

 

원나라 덕후였던 충선왕

 

또 충선왕은 심왕(요동왕) + 고려왕이라는

두가지 왕을 다하고 있었기에

이에 원나라까지 이런 상황을 싫어해서

충선왕에게 왕 두개씩 하지 말고

제발 좀 우리나라에서 꺼져달라 명했지만

충선왕은 그럼에도 원나라에서 있고 싶었고

 

심왕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요동을 통치한 고려 (원간섭기때도 은근 꿀잘빰)

 

마땅한 핑계삼을 것이 없자

결국 이전 첫째아들은 자신이 죽였기에

둘째아들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에서 존버탑니다

 

<고려사 사관의 평가>

충선왕은 이짓거리를 하니깐 토번(티베트)에 유배나 당하지 ㅉㅉ

 

[견제를 받은 충숙왕]

하여튼 충선왕은 결국 상왕으로 물러나

원나라에 머물렀고

고려는 그렇게 충선왕의 둘째아들 왕도가 왕위를 이어

고려 27대왕 충숙왕이 되었습니다

 

고려에 머물던 충숙왕은 뜬금없이 왕위를 받게 되었고

충선왕은 심왕 자리 유지 목적 및

원나라에 있고싶어서 둘째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 뿐이지

실권을 넘겨줄 생각도없었습니다

 

처음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을 견제하려

충숙왕을 왕위에 올리는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삼아버렸고

 

자신이 머물던 원나라에서

고려에 전지(왕의 편지) 를 보내며

중요 사안들을 직접 처리하고

편지를 통해 고려를 원격조종합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왕이 된 충숙왕은

아버지의 견제 못지않게

세자가 된 사촌동생 왕고의 견제를 받습니다

 

세자 왕고는 충선왕에게 심왕(요동왕)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오지랖 대왕 충선왕이 원나라 황실문제에 개입하다 토번에 유배당하자

이틈을 타

충숙왕을 위협합니다

 

왕고는 원황제에게

충숙왕을 모함해 원에 구류시키기도 하고

자신을 고려 국왕으로 삼게 하도록

고려신하들에게 강요하나

고려신하들의 강력한 반발로

일단 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충혜왕의 1차폐위]

3년동안 원에 구류된 충숙왕은

겨우 귀국했고

결국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은

15세의 세자 왕정 ,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하필 충혜왕은 고려사 최악의 폭군이었습니다

 

충혜왕

 

일단 고려 28대왕이 된 충혜왕은

복잡한 정국에서 왕이 되자마자

 

세자시절부터 해온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고

이에 원나라 황실에서는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그를 폐위시킵니다

 

폐위된 충혜왕은

원나라에가서 황제를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하는 일을 했는데

원나라에서도 원나라 황제 , 귀족들과 유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고

여자를 희롱하고 다니다가

 

원나라의 바이안은 그를 망나니라 부르며

원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바이안>

왕정(충혜왕의 이름)은 본디 행실이 나빠서

숙위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니 ,

마땅히 아비가 있는 곳(고려)으로 보내서 올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결국 원황제는 충혜왕을 고려로 돌려보냅니다

 

하여튼 아들 충혜왕이 폐위되자

충숙왕은 다시 복위했는데

아들까지 난리를 쳐대자 정치에 염증이 커진 충숙왕은

은둔생활을 하다 사망합니다

 

<고려사절요 충숙왕>

왕의 성품은 사람을 싫어하여 좌우 신하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이서가 왕이 혼자 가는 것을 염려하여

그 뒤를 따라가자 왕은 노하여 그를 죄주었다

 

상처받은 충숙왕

 

[고려 최악의 폭군 충혜왕]

그렇게 아버지가 사망하자

충혜왕은 다시 복위했는데

충혜왕은 왕이 되고나서도

정치에 관심이 없고

상식에서 벗어난 학행을 저질렀는데

 

백성들을 가렴주구(수탈) 하고

여색을 지나치게 즐기며

부녀자 ,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이 들리면

곧바로 모조리 후궁으로 들여 100명이 넘는 후궁이 생겼고

장모와 새어머니까지 강간하자

그를 따르는 불량배들도 부녀자들을 간음했고

 

그의 주변에 있던 간신배들도

인간이길 포기한 왕의 모습에 혀를 내둘러

원나라에 충혜왕의 죄를 일렀습니다

 

(간신배들도 왕이 적당히 무능해야 옆에서 붙어먹고 해먹는데

아예 왕이 미친놈이면 엮일까봐 곤란해짐)

 

[충혜왕의 2차폐위]

결국 충혜왕은 원나라 사신에게 체포되어

원나라에 압송됬는데

 

충혜왕의 패악질에 놀란 원나라 순제마저

충혜왕에게

 

<원순제>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

 

결국 충혜왕은 귀양가게 됬는데

그를 싣고가던 수레가 너무 빨리달리는 바람에

충혜왕은 온갖 고통을 겪다가

30세의 젊은나이로 급사해버렸고

 

귀양가는 수레

 

사람들은 그가 독살됬거나 귤을 먹고 죽었다는 등

여러 소문이 들었는데

하여튼 충혜왕이 죽자

고려인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낮은 백성들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

 

하고 기뻐 날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귀양가던 충혜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원나라에서 손을 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합니다

 

<고려사의 충혜왕 평가>왕은 성품이 호협(좁고)하고 

주색을 좋아하였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하였다.

황음무도하여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사람이 가까운 사람인지

귀한지 천한지에 관계없이 모두 들여서

후궁으로 삼았는데 거의 100여 명이나 되었다.

또한 재물과 이익에 관계되는 것이면 털끝만한 것이라도 나누고 쪼개어

늘 재산을 늘리는 것을 일삼았다.

...

새로운 궁궐을 짓는 공사에서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가서 감독하였다.

궁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고 ,

단청을 칠할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에게는 몇 배의 베를 징수하였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간사해졌으며 백성들은 근심하고 원망하였다.

군소(소인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배척당했으며 ,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여 버렸으므로

사람들마다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어린 명군 충목왕]

그렇게 충혜왕이 원나라에 끌려가서 죽자

충혜왕의 8세의 어린 장남 왕흔이 왕위를이어

고려 29대왕 충목왕이 됩니다

 

충목왕 시대는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절정을 달했고

아버지가 끌려가 죽고 갑자기 왕위에 오른 충목왕은

 

어린 나이었지만

아버지가 사망한 이유를 알았기에

아버지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 했고

 

어머니 덕녕공주(원나라 공주)의 섭정을 받으며

충혜왕대의 폐단을 고치고

여러 개혁정책을 실시합니다

 

충목왕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새로운 세력 권문세족들이 백성을 수탈하지 못하게

부당하게 권세가들에게 뺏긴

토지와 노비등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등

개혁정책을 폈습니다

 

어린 명군 충목왕

 

충목왕은 정치도감을 설치해

권세가 처단 등 여러 과감한 개혁을 했지만

 

고려여인에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친척까지 정치도감에서 곤장을 맞고 사망해버리자

정치도감은 원의 견제를 받고 쇠퇴했고

충목왕이 1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정치도감도 끝나게 됩니다

 

나름 어린나이에 총명하고

성군의 기질이 보인 인물이지만

너무 일찍 사망했던 인물입니다

 

[어린 폭군 충정왕]

충목왕이 사망하자

충혜왕의 둘째아들 , 충목왕의 한살 어린 동생이

12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고려 30대왕 충정왕이 되었습니다

 

혼란속의 고려는 그렇게

연속으로 어린 왕이 즉위했고

 

이에 당시 답답해진 고려인들은

이미 장성하고 총명했던 충혜왕의 동생 왕기(공민왕) 가

왕위에 오를것을 바랬습니다

 

충정왕 VS 왕기

 

어린 충정왕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하는데 성공한 자 , 외척들은

권력을 좌지우지했고

 

왕기를 지지했던 신하들은

대부분 정치에서 소외됩니다

 

당시 강성했던 원나라는 점차 쇠락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원의 지배를 받던 중국 대륙에서는

전국적인 반란이 하나 둘 일어나게 됩니다

 

붉은 두건을 썼던 홍건적의 난

 

또 일본은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며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어

지방의 일본인들은 점차 해적 , 왜구가 되서

고려와 중국을 약탈하고 있었고

 

일본 남북조시대

 

고려말 왜구의 침입

 

그런 국제상황에서

충정왕은

밤에 가까운 내시들과 새벽까지 놀거나

학문하는 관리의 옷에 먹물을 뿌리거나

여자와 가까이 하며 길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해 그 사람이 재상이라도 마구 때리고

때때로 쇠몽둥이로 사람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고

한겨울에는 얼음과 눈이 섞인 물을 가지고

언 밥에섞어서 사람에게 먹이기도 하는등

폭군의 행동을 벌입니다

 

이렇게 혼란의 국제정세에

고려 정치까지 어린왕과 외척들로 흔들리자

 

원조정은 고려 정치상황을 불안하게 바라보다

결국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원나라 수도 대도(베이징) 에서 머물고 있던

강릉대군 왕기를 왕위에 올려

고려 31대왕 ,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이자 명군 공민왕이 즉위합니다

 

폐위된 충정왕은 강화도로 유배됬다가

14세(16세)의 나이로 독을 먹고 사망합니다

 

(원나라 혹은 공민왕이 독을 먹였다고 합니다)

 

충정왕의 비극적인 최후

 

충정왕까지가 원조정의 고려간섭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였고

총명했던 공민왕대부터

다시 고려는 충자 돌림을 폐지하고 자주권을 찾았고

500년 왕조 고려의 마지막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라봉봉>참 고려말기 원간섭기가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이 많고

고려왕은 언제든 원황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폐위되고 복위되는게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슬아슬 겨우겨우 독립국 지위는 유지했고

원이 흔들려가자

점차 다음왕 공민왕은

고려의 주권을 회복하고 원나라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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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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