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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 충선왕>

[원나라의 간섭]

[변발을 한 충렬왕]

[충렬왕의 폐위]

[충선왕의 폐위]

[충렬왕의 복위]

[충선왕의 복위]

[원나라에서 머문 충선왕]

[충선왕과 만권당]

[주변인 충선왕]

<라봉봉>

 

[원나라의 간섭]

원나라와 강화를 맺은

원종 이후부터

고려는 비록 자주적 국가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점차 원의 노골적인 간섭을 받게됩니다

 

(원 간섭기)

 

원간섭기 시기 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하기 위하 세운 기구들

 

원종은 그나마 원간섭기 시작전

마지막 고려의 자주적 왕으로서

종자 시호도 사용했고

고려인으로서 원의 요구에도

원의 풍속도 차마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원종>나는 차마 하루아침에 

조상 대대로의 가풍을 갑자기 바꿀 수 없으니

내가 죽은 후에 경들은 마음대로 하라

 

무신정권이 끝나고 권력은 왕에게 돌아갔지만

원종 이후부터는 권력은 원나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원종 사후

원종의 맏아들 , 태자 왕심이 왕위를 이어

고려 25대왕 충렬왕이 됩니다

 

충렬왕은 태자시절부터

몽골 공주와 혼인해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사위국) 이 되었고

 

점차 피가 섞이게 되는 고려왕실과 원나라황실

 

충렬왕대부터는 고려 왕실은

O종 같은 시호가 붙지 않고

충O왕 돌림으로 시호가 붙게되는데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자주적인 종자돌림의 시호를 금지하고

원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충자돌림 시호를 쓰게 한 것이고

 

원간섭기 시기 충자돌림 고려왕

 

충렬왕 1년부터

왕실 용어도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격하시켜

태자라는 직위도 세자로

짐을 고로

의복도 제후식으로

바꾸고 고려는 원의 제후국화 됩니다

 

고려왕실의 격하

 

[변발을 한 충렬왕]

원종 13년

몽골 공주와 결혼을 허락받고 귀국한 세자(충렬왕)는

고려의 복식이 아닌

몽골인들의 머리모양인 변발을 하고 몽골의 복식 호복차림으로 왔습니다

 

호복차림으로 귀국한 충렬왕

 

변발을 한 유목민들

 

몽골인들은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머리를 깎아

그 모양을 네모로 하는데

가운데 머리카락만 남겨두었고 (수염컷)

이것을 겁구아(케쿠르 , 변발) 라 하는데

충렬왕은 고려로 돌아올때

오히려 고려인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책망했습니다

 

충렬왕이 서북면으로 행차해

원나라 공주를 맞이하는데

신하에게 변발을 하지 않았다 책망하기도 합니다

 

왕이 몽골식 풍습을 따르자

처음에 고려인들은

통곡하기도 하고 크게 당황했는데

충렬왕은 전국에 명령해

모든 사람들에게 원나라의 의복을 입게 했습니다

 

몽골화되는 고려

 

사실 충렬왕이 적극 원나라 풍습을 따른 것은

아직도 고려내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진

무신정권의 잔재가 존재했기에

신하들에게 무신들보다 더 강한 원나라의 존재 및

고려왕실과 원나라황실이 특별한 관계임을 강조하려 한

정치적 의도였고

결국 신하들도 변발과 호복을 사용하며

이때부터 고려는 우리가 알고있는 고려와는 다르게

좀 판타지스럽게 변하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족두리와 연지곤지 , 설렁탕 , 소주 , 순대 등

몽골식 생활문화 , 몽골풍이 들어옵니다

 

한국 전통 결혼식의 족두리와 연지곤지

 

몽골에서 유래된 순대

 

충렬왕은 적극적으로 고려를 원나라화시켰고

원종때까지 왕이 직접 몽골에 입조하는게

부정적 인식이 있었던것과 달리

문제가 발생할때마다 충렬왕은 원나라로 건너갑니다

 

단 그럼에도 고려왕으로서의 책임은 있던 인물이라

현실적인 사대주의였고

충렬왕은 고려의 독자성을 인정받고

장인 쿠빌라이에게 직접 요청해

동녕부가 설치된 서경(평양) 지역을 반환받습니다

 

[충렬왕의 폐위]

그러나 이후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 왕원의 입지가 커졌고

세자 왕원은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자 칭기즈칸의 4대손이라는

엄청난 핏줄(칭기즈칸의 혈연=황금씨족)이었기에

 

충렬왕의 세자의 입지가 급부상해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세자는 어머니의 사망이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궁녀 무비에게 있다 생각해

무비를 죽여버렸고

환관등을 죽이고 40여명을 유배보냅니다

 

[충선왕의 폐위]

결국 충렬왕은 국왕자리를 세자에게 넘길 것을

몽골에 청했고

1298년 세자 왕원이 즉위해

충선왕이 됬는데

 

혈기넘치던 충선왕은 즉위후

곧 원나라의 간섭에서 나오려 하는 모습을 보이다

원나라에 찍히게 됩니다

 

또 충선왕 역시 아버지처럼 원나라에서 온 부인

계국대장공주와 불화하고

고려여인 조인규의 딸 조비를 총애하다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 황태후에게 편지로 일름보를 하게 됩니다

 

<계국대장공주의 편지>

조비가 저를 저주하기 때문에

왕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비를 가두고

조인규를 국문(심문)했고

 

100여명이 연루되고

조인규는 원나라로 보내집니다

 

또 조인규의 부인을 국문하는 것이

매우 참옥해 조인규 부인이 거짓으로

저주했음을 인정해버리자

원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

조비를 잡아 돌아갔습니다

 

주리를 트는 모습 , KBS 조선총잡이 (2014) Gunman in Joseon

 

이에 원나라 황태후는

티베트 승려 5명과 도사 2명을 고려에 보내

계국대장공주에게 걸린 저주를 풀게하고

충선왕에게 연회를 베풀어

충선왕으로 하여금 공주와 함께 사이 좋게 하게 했습니다

 

사이가 좋아진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

 

당시 고려 사람들은

 

<고려인들>왕께서 공주에게 장가들고부터 부부의 도리를 꺼렸다

그럼에도 다른 첩이 왕에게 나아가

하룻밤만에 임신한 까닭에

계국대장공주가 시샘해서 그런것이다

 

라 말했습니다

 

이는 이미 고려왕실과 처갓집(원나라 황실)간의 힘의 균형이

철저하게 처갓집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왕이 첩을 총애하자 강력한 처갓집이 왕을 두드려 팬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사건 ,

조비무고사건으로 인해

충선왕은 재위 7개월만에 폐위되고

계국대장공주와 함께 원나라로 가서

원나라 황실을 숙위(호위)하게 되었고

 

다시 충렬왕이 복위합니다

 

이전까지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강력한 힘을 느끼기만다

원황실에서 고려왕을 폐위하고 임명하는것 , 후궁들까지 간섭해버리고

실제로 고려에서 권력을 집행해버리자

 

드디어 좆됬음을 깨닫게 되었고

더욱 원나라를 두려워 하게 됩니다

 

또 이런것때문에 충O왕 시기 고려 왕사는

복잡한게 좀있습니다

 

[충렬왕의 복위]

복위된 충렬왕이었지만

원나라는 충렬왕에게 이전같은 신임을 보이지 않고

신하들을 보내 충렬왕과 함께 고려를 다스리게 합니다

원나라 신하들은 충렬왕 앞에 와서는

 

<원나라 신하들>공주께서 세상을 떠난 뒤로 왕이 홀로 거하며 

무료할 것이라 하여 황제께서 왕께 포도주를 하사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와 함께 국사를 의논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위후의 충렬왕의 왕권은 아내 제국대장공주도 사망했기에

더욱 떨어지게 되었고

원에서 파견된 몽골 관리들은 고려 관리를 처벌하거나

여러 노골적인 간섭을 하게 됩니다

 

[충선왕의 복위]

또 충렬왕은 원나라에 가있던 한때 왕이된 세자

충선왕을 견제하려 하나

몽골은 충선왕의 손을 들어주었고

복위후 실권을 잃은 충렬왕이 곧 사망하자

충선왕은 다시 복위해 고려의 왕이 되어

정식으로

고려 26대왕이 됩니다

 

고려왕임에도 원나라에서 산 기간이

더 길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원나라 수도 대도 복원도

 

충선왕은

원나라에서 자신을 모시던 신료들을 중심으로

측근들을 임명했고

 

충선왕은 몽골에 있을때

무종이 즉위하는과정에서 공을 세웠기에

요동에 있는 고려인(고구려 , 발해 유민) 들을 다스리기 위한 봉호

심양왕에 책봉되었고

이로인해 충선왕은 한반도와 요동의 동시 통치자가 됩니다

 

잠시 요동을 통치했던 고려 , 이후 고려는 요동을 다시찾기 위해 이후 요동정벌을 하게됨

 

[원나라에서 머문 충선왕]

그러나 다시 왕이 된 충선왕은

이전 한번 폐위된것에 대한 것때문에

이전같이 적극적인 정치를 펴지는 않고

고려에 있는 왕족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자신은 원나라에 머물며 원격통치를 합니다

(점장 고용후 오토돌리는 것과 비슷)

 

 

원나라 황금씨족으로서

칭기즈칸의 4대손 , 쿠빌라이칸의 손자라는

원나라 황실의 혈통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던

충선왕은 해마다 원나라로 고려 물품들을 가져가고

원나라에 계속 머물자

고려에서는 충선왕의 귀국은동을 벌이나

충선왕은 계속 거부하다

잠시 고려로 귀국해

결국 둘째아들 왕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돌아갔고

충선왕의 둘째아들 왕도는

고려는 27대왕 충숙왕이 재위하게 됩니다

 

[충선왕과 만권당]

이후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었는데

학문을 좋아한 충선왕은

만권당을 지어 여러 몽골의 유학자들을 불러 교류하고

고려 대학자 이제현 역시 충선왕의 부름으로

만권당에 와서 교류했습니다

 

연구하는 고려 학자들

 

충선왕은 이제현을 아주 좋아했고

원나라 학자들의 이제현에 대한

칭찬과 찬탄이 멈추지 않았다 합니다

 

고려의 대학자이자 신진사대부와 사림파의 시조 이제현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묻기를

 

<충선왕>태조(왕건) 때 거란이 낙타를 보내왔는데

태조께서는 낙타를 다리아래에 매어 두고 먹이를 주지 않아

굶겨죽게 하였다

그것을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굶겨서 죽이는데까지 이르렀는가 ?

 

충선왕과 이제현의 역사토론

 

이에 이제현은

 

<이제현>창업하여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임금은

그 식견이 원대하고 생각이 깊어서

후대 왕들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오랑캐들의 간사한 꾀를 꺾어버리려 하신 것이며

또한 후세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막으려 하신게 아니겠습니까 ?

 

대저 반드시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을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공경히 생각하시고 힘써 행하여 본받도록 하소서 !

 

이에 충렬왕은

 

<충렬왕>그라면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물이 중국과 같다했는데

지금은 배우려는 자들이 모두 승려들에게 글을 익히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

 

이에 이제현은

 

<이제현>원래 우리 태조가

나라를 다스릴때에도 여유가 없음에도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길렀는데

불행하게도 의종 말년에 무인들이 변란을 일으키니

모두가 타버렸으며

겨우 살아난 자들은 깊은 산으로 돌아가

관복을 벗고 승복을 입은 채 여생을 마쳤으니

승려 무리가 이러한 자들입니다

 

그뒤에 나라에서 차츰 문치를 회복했지만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있어도 배울곳이 없어서

모두 이 승려들을 따르며 공부하게 되었으므로

공부하는 자들이 승려들을 좇아 공부하게 된 것은

그 기원이 이런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다시 학문을 밝히시면

누가 참된 유가를 배반하고 승려를 따르겠습니까 ?

 

이에 충선왕은 기꺼히 이제현의 말을 받아들이고

이제현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주변인 충선왕]

그러나 충선왕은

너무 원나라 황실에 관여하다

원 인종이 원 영종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토번으로 유배를 가게 됬고

 

티벳까지 유배간 기구했던 충선왕의 운명

 

고려 신료들은 충선왕을 소환해줄것을 요청하는 표문을

원황실에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후 원 영종이 사망하고 정국이 바뀌고나서야

유배지에서 겨우 풀려났고

얼마후 원나라 수도 연경(대도 , 베이징)에서 사망합니다

 

그는 황금씨족의 일원으로서

원나라 황실에 관여해 큰 입지를 얻었고

원나라에 오래 머문 고려임금이었지만

 

그럼에도 혈통주의가 대단한 유목민들 사이에서

점차 고려인의 핏줄이라는 점으로

완전한 몽골인이 될 수도 없었던 인물이었고

 

말년에는 정체성이 고려인도 , 몽골인도 아닌

경계인(주변인)으로서 남게 되며

재일교포들의 입지같은 케이스가 되버리다

원나라에서 사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학구열이 강하고 성품이 총명했으며

늘 선비들과 역사상 국가들의 흥망과 군신들의 잘못등에 대해

지칠줄 모르고 열심히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역덕의 냄새가..)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던 충선왕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 MBC 월화특별기획 왕은 사랑한다 (2017) The King in Love , 충선왕이 변발을 안했다는 고증오류주의 !

 

<라봉봉>이때 고려역사가

왕실은 나름 국제적 낭만도 있었지만

백성들은 한창 권문세족 , 부원배(친원파) 들에게

수탈당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에도 있었다는

낭만인데

그런것에만 너무 치중해도 안되지만

사극이나 역사이야기에서는

잘 이런것을 이야기하지 않는게 있어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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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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