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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마지막 불꽃 공민왕>

[강릉대군 왕기]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

[홍건적의 난]

[신돈의 개혁]

[요동정벌]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공민왕의 죽음]

<라봉봉>

 

[강릉대군 왕기]

공민왕 , 강릉대군 왕기는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폭군 충혜왕(첫째)의 동생이었습니다

 

고려 왕자 왕기(공민왕) 는 즉위전까지 20년간 원나라에서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생활을 했는데

강릉대군은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충목왕이 사망하자

나라를 걱정한 다수의 고려신하들은 원나라에 글을 올려

장성한 왕기를 왕으로 올릴 것을 청했지만

 

원나라는 친원세력의 지지를 받는

12세의 어린 충정왕을 즉위시켰고

 

충정왕 VS 강릉대군 왕기

 

외척세력이 발호하고

충정왕 역시 폭군짓을 일삼자

 

원나라는 결국 곧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머물고 있던

강릉대군 왕기를 즉위시키고

충정왕은 강화도에서 유배됬다 16세에 독살당합니다

 

그렇게 강릉대군 왕기가

왕위에 올라

고려 31대왕이자 고려 마지막 개혁군주이자 명군

공민왕으로 즉위합니다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

공민왕은

마지막 불꽃 , 마지마 왕다운 왕 ,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모신 고려국왕

등 여러 수식어가 붙는 인물이고

 

공민왕은 오랫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했음에도

원에 동화되지 않은 고려인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상황으로는

원나라는 점차 쇠해져

전국적인 농민반란 ,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있었고

 

일본 역시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며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어

지방의 일본인들은 해적 , 왜구가 되서

고려와 중국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국제상황에서 즉위한 공민왕은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반원자주개혁정책을 실시했고

즉위하자마자 친원파(부원배) 세력을 제거하고

고려 학자와 관료(신진사대부) 및 신흥무인들을 등용합니다

 

공민왕이 등용한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인들

 

당시까지만 해도 공민왕은 원의 제도를 따라

변발(몽골머리)과 호복(몽골옷)을 하고 조정에 앉아있었는데

신하 이연종이

 

<이연종>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므로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

 

했고

공민왕은 기뻐하며 곧 변발을 풀고

옷과 이불을 하사했습니다

 

이전까지 몽골풍으로 옷을 입은 고려관리들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 속 변발과 호복을 입은 사람

 

전통을 회복한 공민왕 영정 , 조선후기작품

 

당시

고려에서 원에 바쳐진 공녀출신으로

원순제의 총애를 받아 황자를 낳고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일가가 고려에서 득세했는데

 

기황후의 친오빠 기철은

원나라 황후가 된 여동생의 권세를 엎고

고려에서 권력을 쥐고 거만해지고 포악해졌으며

백성들의 토지를 무단으로 강탈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사극 신돈에서의 기철

 

공민왕은 이런 친원세력에 의해

정사를 뜻대로 펼치지 못했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나오기위해 준비를 하다가

원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1356년 음력 4월

98년간의 원간섭에서 벗어나

친원세력을 숙청하고 옛땅을 수복하는 반원정변 , 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공민왕은

부원배의 핵심인물 기철을 반란죄로 처형시켰고

원의 고려 내정간섭기구 정동행성과 이문소를 폐지시켰고

북방의 쌍성총관부 영토를 수복합니다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

 

당시 북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군에 협조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데 기여했고

북방에서 세력가로 살던 이성계 가문은 고려인으로 정식 편입됩니다

 

병신정변으로 고려 조정내 친원세력은 사라지게 됬고

격하되었던 고려관제는 회복되었고

이로인해 원나라의 관계는 악화됩니다

 

원나라는 이에

8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를 침공하겠다 위협했지만

당시 망해가던 원나라는 그럴 힘이 없었고

결국 그냥 쉬쉬하게 됩니다

 

[홍건적의 난]

그러다

중국의 홍건적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에 침입해왔고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가고

개경이 함락됩니다

 

공민왕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이후 개경을 되찾은 공민왕이었지만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삼아

고려를 침공해왔고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승리해

공민왕은 이후부터 원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고려말 두 신흥무인 최영(왼쪽)과 이성계 장군

 

[신돈의 개혁]

국정주도권을 지속시키기 위해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등용해 전권을 위임했는데

 

MBC 사극 신돈의 신돈 , 이때 사극이 진짜 재밌고 진중했는데 말입니다..

 

신돈은 무인 , 사대부세력들을 대거 숙청해

권력을 장악했고

개혁을 실시합니다

 

먼저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전국에 방을 붙였습니다

 

<신돈> ... 전민(밭과 사람)을 호강한 집에서 거의 다 빼앗아 점유하였다.

일부는 이미 판결이 났는데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일부는 백성을 노예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

주현의 역리 , 관노 , 백성 중에 역을 피하여 도망한 자들을 모두 숨겨

크게 농장을 두니 ,

백성과 나라를 병들게 하여 홍수와 가뭄을 불러일으키고 전염병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도감을 설치하여 바로잡고자 하여 개경은 15일을 기한으로 하여 ,

여러 도는 40일을 기한으로 하여

스스로 잘못을 알고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

기한을 넘겨 일이 발각되는 자는

죄를 조사하여 다스릴 것이며 망녕되게 소송하는 자는 도리어 처벌하겠다

 

이에 많은 권세가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었고

 

또 신돈은 노비들중 양민이라 호소하는 자들은

모두 양민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에 노예들은 주인을 배반하고 벌떼처럼 일어나

 

<노비들>성인이 나오셨다 !

 

하고 외쳤습니다

 

신돈의 개혁

 

그렇게 전국에서 신돈의 개혁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신돈은 소송하는 부인들 중에

용모가 아름다우면 겉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척하면서

집으로 유인해 간음하고 일처리에서 그녀들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이에 여자들이 신돈에 청탁하는게 성행하자 (성접대)

고려의 선비들은 신돈에 이를 갈았습니다

 

또 당시 소인배들이 몰려든

신돈의 집에는 수레와 말이 거리를 가득 메웠는데

궁궐문은 적막하니 배운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신돈의 개혁이 끝난 이후에서야 공민왕은

다시 친정을 하겠다 선언하고

신돈을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잡아 처형시킵니다

 

[요동정벌]

한편

1368년(공민왕 17년)

원나라 수도 대도가 명나라군에게 함락되고

원황제가 북쪽으로 도망치자

명황제는 공민왕에게

명나라의 건국을 알리며

북쪽으로 오랑캐 임금을 쫓아버렸으니

새롭게 모시라 합니다

 

원명교체기 당시 지도

 

이때 공민왕은 아직 명나라가

요동에 세력을 얻지 못한 틈을 타

동녕부 , 요동정벌을 단행합니다

 

요동정벌

 

당시 고려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원수가 되어

기병 5천과 보병 1만으로

압록강을 넘어 북진해 오녀산성을 함락시켰고

 

오녀산성

 

이후 이성계군은 원나라세력을 물리치고

험준했던 요동성을 함락시킵니다

 

요동성

 

당시 보우마스터 이성계의 무공도 전설적이었고

고구려가 멸망하고 수백년만에 정식으로 수복한 요동이었는데

하필 요동성을 점령할때

군량고에 불이나 식량이 떨어지게 됬고

결국 고려본국에서도 보급이 오지 않아

고려군은 요동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공민왕은 여러 업적과 개혁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원나라 출신 부인이지만 각별히 사랑했던 부인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점차 총명함을 잃어갔고

 

노국대장공주 영전(초상화 모시는곳) 공사에

막대한 인력과 돈을 동원하고

언제나 슬퍼하며 불공이나 탄식으로 날을 지세웠습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영정

 

사극 신돈에서의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원래부터 여색을 좋아하지 않은 공민왕이었는데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로

여러 비를 들여 별궁에 두었지만

가까이 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슬퍼하며

노국대장공주를 생각하다

마침내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공민왕의 죽음]

이후 공민왕은

나이가 어리고 예쁜 용모를 가진 미소년들을

자제위에 속하게해서

 

자신은

노국대장공주의 모습으로 화장을 하고

홍륜 등의 자제위와 음행을 저질렀고 (남자끼리 ;;)

 

공민왕은 후사가 없음을 염려해

자제위들에게 여러 비들을 강간하고

아들을 낳게해서 자신의 자식으로 삼게했고

몇몇의 비들은 죽음으로 저항하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공민왕과 자제위의 동성애를 모티브로 해 화제가 된 영화 '쌍화점 (2008) 雙花店, A Frozen Flower (Ssanghwajeom)' , 청소년 관람불가

 

이후 익비궁에 행차해

자제위와 간통하게 했지만

익비가 거절하자

공민왕이 검을 뽑아 치려하자

익비는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익비는 임신했고

환관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몰래 보고하기를

 

<최만생>신이 익비전에 갔더니 익비가 말씀하시길

'임신한지 5개월이 되었다' 고 하셨습니다

 

하니

공민왕이 기뻐하며

 

<공민왕>내가 일찍이 영전(노국대장공주를 모시는 곳)을

부탁할 곳(아들)이 없어

근심했는데

익비가 이미 임신했다 하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

 

라고 했고

곧 공민왕은

 

<공민왕>누구와 관계를 가졌더냐 ?

 

묻자

최만생은

 

<최만생>익비가 홍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공민왕은

 

<공민왕>내일 창릉에 참배하고

거짓으로 술자리를 베풀어

홍륜 등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것이다

너도 이계획을 알고있으니 모면할 수 없을게야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최만생은 두려워하며

홍륜 등 자제위들과 모의했고

 

공민왕의 침전에 들어가

공민왕이 크게 취한 틈을 타서

최만생이 직접 칼로 치고

나머지들이 달려들어 공민왕을 시해합니다

 

 

관리들은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말년에 부패할대로 부패해버린 공민왕에

사대부들마저 등을 돌린것이었고

그나마 왕다운 왕이었던 공민왕마저

노국대장공주 사후부터 총명함을 잃고

방탕하게 지내다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라봉봉>옛날에 어렸을때 사극 신돈을 본게 생각납니다

지금도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노국대장공주를 떠나보낸 공민왕의 슬픔이 인상깊었던 드라마고

공민왕은 한국사의 로맨티스트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점차 총명함을 잃고

음란에 빠지게 되었고

참 안타까운 시대이자 인물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활활 타오르지만 재로 되어 사라진

불꽃 , 그보다 공민왕을 표현하는 말이 또있을까도 싶습니다

 

옛날에 신돈 OST 온새미로라는 노래가

참 서글프고 서정적이어서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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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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