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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원종>

[고려 최장기 집권왕 고종]

[거란족의 고려침공]

[저고여 피살사건]

[몽골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

[쿠빌라이와 고려태자의 만남]

[무신정권의 몰락]

[원종의 개경환도]

<라봉봉>

 

[고려 최장기 집권왕 고종]

강종이 일찍 사망하자

최충헌은 강종의 맏아들인 22세의 왕철을 왕위에 올려

고려 23대왕 고종이 되었습니다

 

고종은 최씨일가의 무신집권기라는 시대를 거친 허수아비 왕이었지만

45년간 재위하며 조선 영조처럼 고려 최장기 집권임금이었습니다

 

<최충헌>폐하 자 따라해보시지요

나는 허수아비다 ,

모든 권력은 무신으로부터 나온다

 

<고종>나는 허수아비다 ,

모.. 모든 권력은 국민.. 아니 무신으로부터 나온다

 

최씨일가의 허수아비였던 고려왕들

 

[거란족의 고려침공]

그동안 고려북방에서 강성했던 금나라는

중국 북부만 지배했지

고려에는 옛 종족의 인정과

고려를 치다 국력이 약해진 요나라의 우를 범하지 않기위해

별다른 터치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

 

더 북방의 몽골초원의 칭기즈칸은

몽골민들을 통합해서 금나라를 두드려 패고 있었고

점차 금나라 아래에 있던 요동의 거란족은

금나라를 이탈해서 압록강일대를 넘어

고려를 침공해옵니다

 

칭기즈칸

 

칭기즈칸 등장기의 몽골과 동아시아 세력판도

 

최충헌은 고려국력을 과신하며

거란의 잔당일 뿐이라 여기며 초동대응에 실패했고

또 고려에서 천대받고 살던 양수척(백정 , 천민) 들은

거란의 길잡이노릇을 하게되며

거란군은 한반도 중부까지 깊숙히 내려옵니다

 

고려내 차별받던 유목민족 출신 천민인 양수척들 , EBS 역사채널 백정편

 

거란족 수만명이 고려를 침공해 강원도까지 내려오자

이를 추격하던 몽골군도 고려를 침범했고

 

갈국 고려군과 몽골군은 연합해서 평양 동쪽 강동성에서

강동성 전투로 강동성에서 숨어있던 거란군을 섬멸합니다

 

[저고여 피살사건]

이후부터 고려와 몽골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는데

몽골은 거란토벌을 도와준 것에

 

'우리가 도와줬으니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라'

 

라는 논리로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듯 행세하며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몽골 사신들은 고려에서 깽판을 부렸고

 

삥뜯기로 악명이 높았던 몽골사신들(다루가치) 들의 모습

 

힘들게 모아서 공물을 보내면

돌아오는 것은 없었고 고려는 갈수록 심각한 재정적자를 보고

점차 고려에는 반몽정서가 강해집니다

 

이후에도 공물을 어렵사리 보냈는데

몽골사신 저고여와 몽골사절단들은 국경근처에서 모조리 다 버리고

수달 가죽만 덜렁 챙겨갔고

이때문에 고려 민심은 악화됩니다

 

1225년 1월 저고여는 또 고려를 방문해 공물을 두둑히 뜯어냈는데

또 국경근처에서 비단등의 물건은 다 버리고

수달가죽만 챙겨갔습니다

 

저고여의 과도한 공물요구 , MBC 사극

 

그런데 그때

국적불명의 수십명의 괴한들이 저고여와 몽골 사절단 일행을 습격하고

이 과정에서 저고여가 피살당합니다

 

이때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려했지만

서하원정을 앞두고 또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6년을 지체하다가

1231년 저고여 피살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해

길고긴 여몽전쟁이 시작됩니다

 

자 일단

저고여를 누가 죽였냐는게 문제인데

몽골은 즉각 고려소행으로 간주했고

 

고려는 혐의를 부인하고

이 사건의 범인이 금나라 잔당이라 주장합니다

 

저고여 피살사건은

오늘날에도 누가 범인인지 알수 없는 미제사건이고

하여튼 몽골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해 여몽전쟁이 시작됩니다

 

몽골군의 침공

 

[몽골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

몽골군이 침공해 북쪽지역을 휩쓸자

고려조정은 곧바로 막대한 공물을 보내 달래서 돌려보냈고

1차 침입이 끝나자

 

당시 집권자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으로부터 권력을 계승해

최씨정권 2대 집권자가 됬는데

그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고

 

곧바로 유목민족인 몽골이 해전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길 것을 결정해

강화천도를 단행합니다

 

고려의 대몽항쟁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자

몽골은 개경환도와 고종의 입조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고려를 침공했고

짧게 침공하다가 스스로 물러갑니다

 

이 이야기는 이전 고려의 대몽항전 이야기때 썼고

하여튼 최씨정권은 계속해서 대를 이어오며

강화도에서 버텼고

 

내륙의 고려인들은 용맹하게 몽골군에 맞섰지만

 

승려 김윤후의 활약 , 대몽항쟁 기록화

 

점차 전쟁이 길어지고 강화도를 제외한 고려 전국토가

몽골군의 약탈 , 방화로 쑥대밭이 되자

 

점차 고려에서는 최씨 무신정권에 대한 반발의 기운이 커지게 됩니다

 

이전까진 개경에서 그러려니 말려니 하다가

남쪽 경주까지 몽골에 털리니 점차 분노하는 고려백성들이었습니다

 

몽골군에 불타버린 경주 황룡사

 

정복지 백성들을 강간한 몽골인들

 

또 1258년(고종 45년) 최씨정권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대신들에게 살해당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환도 , 몽골과의 화친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오랜 최씨정권을 거친 임금 고종은

대몽항쟁을 거치며 어느새 나이가 60대 후반이 되었기에

몽골에 태자를 보내겠다 했고

몽골은 받아들여

몽골로 태자가 출발합니다

 

그러다 고종은 태자가 몽골로 출발하고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기 직전

68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고려사 사관의 고종 평가>

왕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모욕과 치욕을 참아냈기에

왕위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정권이 다시 왕실로 복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이 오면 성을 굳게 지켰고 ,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조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직이 훼손되지 않았고 왕업을 오래도록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고종은 최씨정권과 대몽항쟁이라는 국내외적 혼란속에서

장기간 집권하며 조용히 잘 처세한 임금이었고

여몽전쟁이 끝나가는 것을 보다가 사망했습니다

 

[쿠빌라이와 고려태자의 만남]

고려 태자였던 왕전(원종)은

원나라와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로 향했고

마침 원종이 태자로서 몽골 대칸(몽골왕)을 만나러 갈때

몽케칸이 사망해버려

 

그의 동생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가

각각 대칸이 되어 내전을 벌입니다

 

쿠빌라이

 

몽케칸이 급사하자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가냐 , 아릭부케에게 가냐라는

고려의 운명을 건 줄타기에 고민하다

고려로 돌아오는데

 

고려의 운명을 건 고려태자의 줄타기

 

우연히 남송공격을 중단하고 군대를 돌려

몽골로 북상하던 쿠빌라이와 마주칩니다

 

(기록으로는 우연히라 써있지만

외교분쟁을 우려한 방어적인 기록으로서

원종이 일부로 결정을 내려 쿠빌라이를 만나러 간것이라 해석합니다)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금의 정통성이라도 더 필요했던

쿠빌라이는 고려태자를 우연히 마주치자

30여년간의 전쟁에서도 항복하지 않은 불굴의 고려의 태자가

항복하러 자신을 찾아온게 하늘의 뜻으로 여겼습니다

 

원종의 얼굴은 그림같고 행동거지는 예법에 맞았고

여러 고려신하들이 모두 직위에 따라 관복을 입고

뒤에 배열하며 서있었습니다

 

이에 쿠빌라이가 놀라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쿠빌라이>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

당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고 크게 칭찬하고

고려에서는 고종의 사망소식이 들려오니

태자 원종에게 귀국하라 하고

쿠빌라이는 다루가치 등에게 명령해서

태자 원종의 귀국행을 호위하라 했습니다

 

쿠빌라이의 심복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에게 말하기를

 

<조양필>고려는 비록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산과 바다가 가로막혀서 우리나라가 무력을 쓴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신하로 복속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에 고려 태자 왕전이 내조하였는데 ,

마침 황제께서 서쪽으로 정벌을 나가셔서 체류한 지 2년이 되었지만

그에 대한 대접이 소박하여 그 마음을 어루만지지는 못하였으므로

일단 돌아가면 앞으로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숙소와 음식을 후하게 하여

번왕 수준의 예로 대접하십시오.

지금 그 아비가 이미 죽었다고 하니 진실로 왕전을 세워서

국왕으로 임명하여 귀국시켜준다면

필시 은덕에 감격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것은 1명의 병사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1개의 나라를 얻는 일입니다

 

원종은 몽골세력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어 돌아왔고

고려 24대 국왕에 즉위합니다

 

[무신정권의 몰락]

고려 역시 작아도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기에

쿠빌라이에게는 집권정당성에 힘을 실어주었고

원종 역시 수십년동안 지치고 폐허가 된 여몽전쟁을 끝내고

개경으로 환궁하는 명분을 실어줍니다

 

결국 몽골군은 이례적으로

반항하는 정복지는 모두 폐허로 만드는데 비해

고려에서 다루가치(지휘관)와 군사를 모두 철수시켰고

 

일단 고려의 풍속을 몽골식으로 바꾸지 말고

개경환도도 언제하던 알아서 하라 했습니다

 

일단은..

 

그러나 최씨 무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집권하게 된 천민출신의 무인 김준 등의 무신집권자들은

개경으로 환도할 경우 무신정권의 생명이 끝날 것을 직감했기에

개경환도를 반대했고

 

노예에서 고려 최고권력자가 된 김준(가운데)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 '무신(2012)'

 

이에 몽골은 점차 고려에 압박을 하게 됬습니다

 

몽골은 김준 부자에게 몽골에 입조하라 요구했지만

김준은 몽골 사신을 죽이고 깊은 바다섬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워

원종에게 아룄지만

원종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김준이 계속 몽골명령을 거부하자

원종은 크게 불만을 품었고

김준은 몽골이 책망할까 걱정해

자기 집에 승려들을 많이 모아서

불공을 드리며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불안해진 김준은

 

<김준>일찍이 내가 권신(최씨가문)을 죽이고 그 축적한 재물을 내어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비록 내가 거리에 누워도 누가 감히 나를 해치겠는가 ?

 

하고는 갈수록 세력을 키우며 방자하게 굴었고

원종은 더더욱 김준을 미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준은

원종의 밀명을 받은 무인 임연에게 살해당했는데

새로 권력을 장악한 임연 역시

원종의 개경환궁을 반대했고

결국 임연은

1269년 (원종 10년)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왕창을 옹립합니다

 

그러나 몽골은 역시 원종만을 고려국왕으로 인정했고

당시 몽골에 가 있었던

태자 왕심(충렬왕) 은

원종이 폐위됬다는 소식을 듣자

몽골에 군사를 요청해

몽골은 국경근처까지 군사를 몰고와

원종과 왕창 , 임연의 입조를 요구했기에

결국 왕창은 다시 폐위되고 원종이 복위합니다

 

1269년은 몽골이 입조하라는 것을

임연 , 왕창은 거부하고

국왕 원종만 단독으로 몽골에 입조했는데

 

임연은 단독으로 삼별초를 내륙에 파견하고

육지의 인원과 물자를 섬으로 대피시키며

몽골과의 항전을 재개할 태세를 보였고

 

삼별초의 항쟁 , 애국VS무신정권의 연장

 

원종은 임연에게

개경으로 와서 해명하라는 명을 했지만

임연은 거부하고

여러도의 백성들을 강제로 섬에 들어와 살게하며

근심하다가 등에 종기가나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에

임연의 둘째아들 임유무가

1270년 정권을 장악해

마지막 무신정권 집권자가 되는데

 

임유무는 백성들의 개경환도를 막고

전국각지에 포고령을 선포해

대몽항전에 백성들이 적극 동참해줄 것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이미 수십년간의 전쟁에 쑥대밭이 된 고려 본토의 백성들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고

문신뿐만 아닌 무신들까지 개경환도를 강력히 주장했기에

곧 원종의 명을 받은 홍규 등에게 살해당합니다

 

[원종의 개경환도]

이로서

100년간 고려를 지배하던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왕정이 복고하고 강화도에서 개경환도가 이루어집니다

 

강화도의 고려궁지

 

원종은 곧 몽골간의 전후문제에 집중했고

원에 입조해있던

고려 태자와 몽골 공주인 제국대장공주가 정식혼인하게 되어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사위국) 이 됩니다

 

충렬왕대부터 원나라의 부마국(사위국)이 된 고려

 

원종은 무신정권 말기와 대몽항쟁 종결기라는 격동의 시대속에

몽골에만 3번 다녀온 임금이었고

비록 원종대에 무신정권은 종결되고 왕의 권위가 부활했지만

 

원종 다음왕대부터는

몽골의 노골적인 간섭이 시작되어

고려 왕은 종으로 끝나는 시호도 쓰지 못하고

원나라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앞에 충자가 붙어

충O왕 이런 왕들이 계속 나오게 됩니다

 

원종 이후부터의 충자 돌림왕들

 

<라봉봉>몽골의 침략 , 불행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래도 북방 유목민들은 중국과 한국을 항상 다르게 인식해왔고

중국은 정복지 , 드넓은 풍요의 땅(문화 , 경제)이라 생각했으며

한국은 좁고 산과 강이 많아 정복도 어렵고

 

중국 정복전 안정시켜놓아야 할 곳(군사 , 정치)이라 생각할 뿐

별 영양가 있는 땅은 아니었고

이러한 상황은 이후에도 외세들의 한국침략때 계속 반복됩니다

 

또 특히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북방 유목민족들에게는 유목강국이었던 고구려에 대한 리스펙이 강했기에

금나라나 원나라도 함부로 고려를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고

 

마침 태자였던 원종 역시

쿠빌라이에 줄타기 한 것에 성공해

고려는 이례적으로 몽골에 맞선 다른 민족들과 달리

정복이 아닌 독립을 보장받게 됩니다

 

이건 아주 특이한 일로서

역덕들에게도 여럿 이야기되는 것인데

몽골은 뛰어난 기동력과 궁기병으로 당시 세계를 제패했고

항복하지 않는 지역은 아무리 풍요롭고 강성한 나라일지언정

무자비하게 학살해 씨를 말려 그 잔악한 소문은

중국 , 중앙아시아 , 유럽에까지 널리 퍼졌고

 

한국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독립적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한국인들의 뛰어난 정치 , 외교술이 빛을 발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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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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