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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 창왕 , 공양왕>

[신돈의 여종의 아들 우왕]

[이인임의 득세]

[요동정벌과 사불가론]

[위화도 회군]

[창왕]

[온건사대부 VS 급진사대부]

[우왕과 창왕의 죽음]

[허수아비 공양왕]

[공양왕의 죽음]

<라봉봉>

 

[신돈의 여종의 아들 우왕]

공민왕이 살해당하자

공민왕의 어린 아들 왕우가 왕위를 이어

고려 32대왕 우왕이 되었습니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었지만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아이를 낳지 못했고

우왕의 출생은 모호했습니다

 

우왕의 원래 이름은 모니노였는데

신돈의 첩이었던 여종 반야와 공민왕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고

매우 슬퍼하고 있었는데

반야는 노국대장공주와 외모가 닮아있었고

결국 공민왕은 반야를 가까이 하며 임신시켰습니다

 

화제가 되었던 사극 신돈의 노국대장공주와 반야 1인 2역연기 ,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미친 공민왕이 도플갱어급 반야를 보고 반가워하는 스토리가 압권이었습니다 , MBC 주말 특별기획 신돈 (2005~2006) Shin Don

 

이후 공민왕은 신돈을 숙청했는데

곧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공민왕>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여종을 총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놀라게 하지말고 그를 잘 보호하여라

 

라고 말했고

그가 바로 모니노(왕우) , 우왕입니다

 

단지 어머니가 신돈의 첩출신이라는 것 ,

공민왕의 아들인지도 모호하다는 것때문에

우왕의 출생은 끊임없이 논란에 휩싸였고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왕실을 폄훼하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거나

하는 등으로 우왕의 출신을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이인임의 득세]

하여튼간에

공민왕이 급사하자

 

신하들은 고려 종친(왕실 친척) 을 왕위에 올리냐는 태후 파와

왕우를 왕위에 올리냐는 이인임 파로 편이 갈라졌고

 

결국 공민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이인임 일파가 승리해

우왕은 10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사극 대풍수의 어린 우왕 , SBS 대기획 대풍수 (2012~2013) The Great Seer

 

이렇게 우왕은 어머니가 신돈의 첩출신이었기에

할머니였던 명덕태후에게도 인정을 못받았고

어린나이에 즉위하며

이인임 일파 , 권신들이 급격히 성장하는데

 

이인임은 공민왕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분으로

우왕을 옹립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인임

 

가뜩이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혼란한 고려는 더욱 혼란해졌습니다

 

당시 고려조정은

권문세족(친원파) 인 이인임과

 

이전 공민왕대부터 성장한

신진사대부(친명파) 들이 서로 대립했는데

 

지는 해 원나라와

뜨는 해 명나라 사이에서

고려 신하들은 줄을 타고 있었고

일단 친원파는 끝물이었지만

오랜 원간섭기때문에 권문세족의 몸집도 만만치 않았기에

서로 대립하게 됬습니다

 

이인임과 최영장군은 고려 구세력 , 친원파 , 권문세족의

마지막 불꽃이었습니다

 

고려말 대립했던 무장 최영(왼쪽)과 이성계 장군

 

[요동정벌과 사불가론]

1388년 명나라는

철령위를 설치하며

철령 이북은 원나라가 다스렸으니

원나라를 밀어난 자신들이 이곳을 다스려야한다며

고려에게 내놓으라 요구합니다

 

철령위

 

이에 최영장군은 분노했고

결국 최영장군의 주장에 따라

우왕은 요동을 다시 정벌할 것을 계획하고

당시 뛰어난 무관이었던 이성계 장군에게 전권을 주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 이성계

 

우왕은 이성계를 불러 말하기를

 

<우왕>요양(요동) 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

 

이에 이성계는

 

아니되옵니다 !!!

 

<이성계>지금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에는 네 가지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점이고 

여름철에 군사를 내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점이며 ,

온 나라를 들어 멀리 정벌하면 왜구가 그 빈틈을 타고 들어올 것임이

세 번째 불가한 점이고

시기가 마침 덥고 비가 와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임이

네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라며 사불가론으로 요동정벌에 반대했습니다

 

이에 우왕은 그럴싸하게 여기며 돌려보냈는데

밤에 우왕에게 최영이 찾아와서

 

<최영>원하건대 다른 말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라 했고

결국 우왕은 다음날 이성계를 다시 불러 말하기를

 

<우왕>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

 

라 했고

이성계는 결국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이성계>반드시 큰 계책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

어가(임금의 가마)를 서경(평양)에 머물러두고 가을을 기다렸다가 출병하셔야

곡식이 들판을 덮고 있어 대군의 양식이 풍족하기 때문에

북을 울리며 행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출병할 때가 아니니 ,

비록 요동의 한 성을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릴 때라서

군사가 전진할 수 없을 것이고 병사들은 지치고 군량은 고갈될 것이므로

화를 재촉하는 일이 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우왕은 이성계에게 강경한어조로 출병하라는 명을 내렸고

결국 이성계는 물러나며 눈물을 흘리자

이성계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이 이성계에게 물었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어찌하여 극심히 애통해하시는 것입니까 ?

 

이성계는

 

<이성계>살아있는 백성들의 화가

여기에서 시작하는구나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년)

결국 이성계와 고려 정예군 5만 , 군마 2만필은

서경을 출발해 북진해 요동으로 출발했고

결국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서

군대를 개경으로 돌립니다

 

위화도 회군

 

압록강의 위화도 섬

 

위화도 회군 , 왕명을 어기고 수도로 군대를 돌린다는 것은

반역을 의미했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인해

요동정벌과 자주국가 고려의 꿈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시 이성계가 뛰어난 무공으로 아무리 국민적 존경을 받는

백전백승의 전쟁영웅이었다 한들

당시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명나라는 강해도 너무 강했던 것을 알고 있었고

도저히 승산없는 싸움에 백성들이 갈려나갈 것이 눈에 보였기에

회군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고려에서 군사를 탈탈 털어서 이성계 휘하로 들어간 것이었기에

개경에는 이성계의 5만군대를 방어할 병력이 없었고

결국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다음 왕으로 추대합니다

 

[창왕]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신흥무장인 이성계와 같은편이었기에

위화도 회군으로

친원 권문세족과 친명 신진사대부의 싸움은

완벽하게 신진사대부의 승리로 끝났고

 

우왕은 이성계를 암살시도하다 폐위됬고

이성계는 다음 왕으로

고려 종친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같이 위화도회군에 참여한 무장 조민수는

이전 이인임이 자신을 천거해준 은혜를 생각해

우왕과 이인임일족의 왕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왕창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대학자 이색과 몰래 모의하다 왕창을 옹립하려 합니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에게

 

<이성계>회군때 말한 바는 어찌하려 합니까 ?

 

하니

조민수는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길

 

<조민수>원자를 세우는 일은

한산군(이색)이 결정하였으니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

 

했고

결국 9살의 어린 왕창이 왕위에 올라

고려 33대왕 창왕이 되었습니다

 

[온건사대부 VS 급진사대부]

비록 이성계의 뜻대로 되지 않은 창왕의 즉위였지만

그럼에도 창왕에겐 힘이 없고

실권은 이성계일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일단 창왕시기 정국을 장악한 고려의 신흥무장 , 신진사대부들은

썩은 고려를 개혁하긴 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고

 

고려를 유지하며

온건 개혁을 주장하는

조민수 , 이색 , 정몽주 같은 온건 개혁파와

 

고려를 멸망시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이성계 , 정도전 같은 급진 개혁파가 맞서게 됩니다

 

정도전(급진 , 왼쪽) VS 정몽주(온건)

 

그러나 결국 칼은 이성계에게 있었고

이색과 조민수는 이성계파의 탄압을 받아

정치에서 물러났고

설상가상으로 유배되었던 우왕은

이성계를 암살하려합니다

 

[우왕과 창왕의 죽음]

아직도 정신못차렸던

우왕은 유배지에서 눈물흘리며 말하기를

 

<우왕>울적하게 이곳에 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

 

만일 힘센이 한 명을 얻어서

이시중(이성계) 을 해한다면

내 뜻이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평소 예의판서 곽충보를 좋아하였으니

너희는 가서 만나보고 일을 도모하라

 

하고는 검 한자루를 곽충보에게 전해주라며 말하길

 

<우왕>일이 성사되면 부인(곽충보의 아내) 의 동생을 처로 삼고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번 팔관일이 거사할 만하다

 

이에 우왕의 말을 곽충보에게 몰래 알리자

곽충보는 겉으로는 승낙하는 척하고는

이성계에게 달려가 일름보했습니다 (ㅋ ;;)

 

 

결국 또다시 우왕의 이성계 제거계획이 탄로나버리자

분노한 이성계는

정몽주 , 성석린 , 조준 , 정도전 등과 함께

흥국사에 모여서 군사 호위를 크게 벌여놓고 말하기를

 

<이성계>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신돈의 핏줄설)

종묘와 사직을 받들 수 없다

 

또한 천자의 명이 있었으니

 

마땅히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

(폐가입진 廢假立眞)

 

정창군 왕요는 신왕(신종) 의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니

왕위에 세울만하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으로서

왕위에 올라 국가를 더럽힌 죄를 물어

참수시켰습니다

 

이에 우왕과 창왕은

왕우 , 왕창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신씨 성인

신우 , 신창으로 기록되었고

 

고려를 부정해야했던 조선정부에 의해

신돈의 핏줄로 철저히 폄훼되었으며

시호도 받지 못하고

우왕 , 창왕이라 본명으로 불린 왕이 됬습니다

 

그렇게 이성계에 의해

철저하게 허수아비 , 꼭두각시 왕으로

정창군 왕요가 왕위에 올라

고려 34대왕이자 마지막왕 공양왕이 즉위합니다

 

[허수아비 공양왕]

마지막왕들은 마지막답게 비참하거나

무능한 인물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이란 항상 쓸쓸하고 슬픈 법입니다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이 왕위에 있는동안

이성계는 다음 세울 새로운 나라 , 조선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전 우왕 , 창왕대의 고려인사들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숙청해갔습니다

 

애초에 왕이 되기전 금수저 왕족으로 꿀빨고 있던 공양왕은

허수아비였지만 뜬금없이 이성계에게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왕을 '당한 것' 이었고

 

즉위하던날 저녁

공양왕의 사위의 아버지(사돈) 였던 강시가

공양왕에게 말하길

 

<강시>여러 장수와 재상이 전하를 옹립한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고자 도모한 것이지 왕씨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신중하시고 ,

가까이 하면서 신뢰하지 마시어 스스로 보존할 방도를 생각하십시오

 

공양왕대부터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열기전 대숙청을 시작했고

공양왕은 이성계의

숙청 , 살육들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공양왕은 걱정과 공포심에 밤에 잠도 못자며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공양왕>내가 평생에 입을 것 , 먹을 것 , 일할 사람들이 모두 풍족한데 ,

이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으니 ,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라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록인데도 좆같음이 묻어납니다)

 

 

결국 이성계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조선이 건국되고 고려가 멸망합니다

 

이성계의 즉위식 , 조선의 건국과 고려의 멸망 ,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2014) 鄭道傳

 

[공양왕의 죽음]

폐위된 공양왕은

 

<공양왕>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둔하고 느림)하여

사기(정세)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

 

하고는 이내 울어서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렸습니다

 

마침내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로 갔고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멸망한 고려의 왕족들 , 왕씨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고

조선신하들은 모두 말하기를

 

<조선 신하들>왕씨를 모두 제거하여

후일의 근심을 막게하소서

 

했습니다

 

결국 공양왕은 정식으로 사형이 집행됩니다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사형을 집행하러

교지(임금의 편지) 를 보냈습니다

 

<태조의 교지>신민이 추대하여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이요

군(공양왕)을 관동에 가서 있게하고

그 나머지 성씨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을 지키게 했는데

지금 반역을 도모했으니

군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같은 지경에 이르러

신하들이 12번이나 청했으니

여러날동안 굳이 다투고 대소신료들도 또 글을 올려 간하므로

내가 마지못해서 억지로 그 청(사형) 을 따르게 되니

군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

 

마침내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과

공양왕의 두 아들은 교살되어 (목졸라) 죽었습니다

 

 

그렇게 찬란했던 고려왕조 500년은 끝나고

왕씨들은 몰살되고

이씨들의 왕조 , 조선왕조 500년이 개국되었습니다

 

<라봉봉>고려왕조 500년 왕사를 끝냈군요

풀만화화를 시도해보려 액정 타블렛을 구매했는데

시간과 체력의 한계로 짤방정도에 만족해야할거 같습니다

 

워낙 그림 , 사진이 없는 시기도 많아

타블렛구매는 제 숙원사업 같은거였습니다 ㅋ,,

 

하여튼 공민왕 사후부터는

이성계의 원맨쇼타임이기도 하고

왕들이 별다른 힘이 없었고

별다른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려의 왕다운 왕이자

이성계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모셨던 왕인

공민왕의 말년의 타락이 더 아쉬운 것이며

고려 역시 조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나라였기에

 

조선의 단점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특히 고려의 멸망을 아쉬워하며 이성계를 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려 역시 말기엔

부패와 타락이 심했고

무엇보다 백성들이 홍건적 , 왜구등과의 오랜 전쟁에 지친 상황에서

요동정벌까지 감행했기에

결국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보수적인 신라와 조선과 달리

상당히 진취적인 나라였고

참 안타깝고 , 사랑받은 우리 한국의 민족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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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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