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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국가 정비>

[집현전]

[왕도정치]

[과학기술 발전]

[세금제도 개혁]

[4군 6진 개척]

[훈민정음 창제]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세종대왕]

<라봉봉>

 

[집현전]

태종 이방원의 셋째아들 충녕대군 이도는

그렇게 왕위를 양위받아

조선 4대왕 세종대왕이 되었고

 

세종 4년 상왕이었던 태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본격적인 친정을 시행하게 됩니다

 

세종대왕

 

호학의 군주 , 학문을 좋아한 군주 세종대왕은 재위 2년부터

학문연구기관

'집현전' 을 설치해 관료들로 하여금 학문을 연구하게 했고

이로인해 관학파들이 등장합니다

 

집현전

 

세종때 키워진 집현전 관학파 관리 성삼문(왼쪽 , 이상적 인물) 과 신숙주(오른쪽 , 현실적 인물)

 

관학파는 관료+학자의 성향이 있는 세력으로

세종대 집현전에서 양성된 여러 학자형 관리들을 말하고

조선 초기는 집현전의 관학파들이 ,

이후에는 지방에서 공부한 사림파들이 학문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학문에 힘쓰는 집현전 학사들

 

원래 집현전은 이전 고려대부터 있었던 기관이었지만

유명무실한 허수아비 기관이었고

세종은 본격적으로 집현전 학자들을 키우며

새로운 유교국가 조선 건설에 힘쓰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 3월 16일>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집현전·보문각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

직제학·직전·직각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

그러나 ,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

이제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를 궁중에 두고 ,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였다.

 

[왕도정치]

세종대왕은

힘에 의한 정치 , '패도정치' 를 추구하며

무조건 왕권만 강해야 했던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달리

왕권과 신권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왕도정치' 를 실현하려 노력했고

 

이 왕도정치를 구현하기위해

성리학 연구 및 예악을 중요시했고

 

예는 국가의례로

나라의 행사와 제사, 장례 , 사신 영접 , 군사관련 등

5가지로 나뉘어 졌고 이를 오례라 불렀습니다

 

국립국악원이 재현한 조선 궁중예술의 정수 세종대 회례연(1월 1일이나 동짓날에 군신간의 화합을 위한 행사) , 150명의 악사와 150명의 무용수가 등장

 

조선건국 초기부터 여러 일이 많아

나라에 이런 예가 글로서 기록되지 않아있었고

태종대부터 예와 의식들을 표기하게 했으나

미처 못쓴 것도 있었기에

큰일이 있을때마다 예관들이 재량 , 적당히 판단해 일을 처리했고

이에 세종대왕은 여러 예들을 책으로 만들어 정하게 합니다

 

악은 음악으로서

옛날부터 한국의 왕실에선

음악은 백성들을 감정에 호소해

교화하는 수단이라 여겼기에

중요시했고

 

무엇보다 세종대왕은 20분의 1의 음차이도 구분할 정도로

'절대음감' 을 가졌던 인물이고

음악적 감각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

음악계와 매우 관련이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직접 작사작곡한 여민락 , 백성과 더불어 즐기는 음악

 

세종대왕은 당대 뛰어난 음악가 박연으로 하여금

음악을 정비하게 했고

직접 음악을 작곡하기도 햇으며

음의 박자를 표시할 수 있느 기보법인

'정간보' 를 직접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정간보로 기보한 단소악보 , 한국의 오선지

 

또 세종대왕은 모든 소리를 쉽고 단순하게 표기 , 구현할 수 있는

'한글' 을 만든 인물이기에

소리 , 음악과 관련이 매우 깊은 인물이고

가히 모차르트나 아인슈타인에도 전혀 꿀릴 것없는

한국사의 위대한 천재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세종대왕은 예악을 정비하고

법도 정비했는데

이전까지 수령이나 지배자가 감정 , 기분에 따라

 

'네놈이 네 죄를 알렸다 !'

 

하며 지 꼴리는대로

주먹구구식으로 법을 집행하고 했다면

세종대왕은 법을 문자로 표기하는 '성문법' 을 중요시 여겨

법전을 편찬하고 법치국가를 추구했으며

지방에 있는 죄인들의 죄를 하나하나 직접 살펴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과학기술 발전]

세종대왕은 과학에도 힘써

장영실 등에게 물시계 , 해시계 , 혼천의 , 측우기 등

여러 측정기구들을 만들었고

이로인해 농사나 국정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대의 기술발명

 

또 인쇄술에서도 금속활자를 적극 이용해

경자자 , 갑인자 , 병진자들을 만들었고

 

금속활자 복원모습

 

군사에서도 다연장 화살 로켓 발사무기인 신기전 등

화약무기 제조술이 크게 발전합니다

 

신기전

 

1444년 세종대왕은

한국 최초의 독자적 역법(달력) 인

칠정산을 만들었습니다

 

칠정산

 

한반도에 정확하게 맞춘 역법으로서

일식 , 월식같은 천문현상을 실제에 가깝게 예측할 수 있었고

매우 과학적인 역법이었습니다

 

<세종실록 156권>역법에 더 아쉬움이 없다 하겠다

 

세종은 의학에서도

향약집성방을 편찬시켜

우리땅에서 생산되는 약재들을 이용하게 했습니다

 

향약집성방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6월 11일>

...오직 우리 나라는 하늘이 한 구역을 만들어 대동을 점거하고 ,

산과 바다에는 무진장한 보화가 있고 풀과 나무에는 약재를 생산하여

무릇 민생을 기르고 병을 치료할 만한 것이 구비되지 아니한 것이 없으나 ,

다만 옛날부터 의학이 발달되지 못하여 약을 시기에 맞추어 채취하지 못하고 ,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고 먼 것을 구하여 ,

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

이는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

약은 구하지 못하고 병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이제 우리 주상 전하께서 거룩한 덕으로 지극히 훌륭한 정치를 일으켜 

위를 지키고 정령을 내는데 오로지 이 도의 큰 것에 따르고 있거니와 ,

의약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까지 이와 같이 힘을 쓰니 ,

인정의 본말(처음과 끝)과 크고 작은 것을 남김없이 다한 것이라 하겠다

 

농업연구에도 힘써

세종대왕은 여러 도에 관리를 파견시켰고

관리들은 그 지역의 나이많은 농부들을 방문해

농사경험을 구해

글로 남겼는데 이것이 농업서 '농사직설' 이었습니다

 

농사직설

 

<조선왕조실록 세종 11년 5월 16일>

농사는 천하의 대본(가장 중요한 근본)이다. 

예로부터 성스러운 왕들이 이를 힘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세금제도 개혁]

세종대왕은 세금제도도 손봤는데

이전까지 세율은 지방관의 부정으로 폐단이 컸고

세종대왕은 공법상정소라는 체계적인 세금연구기관까지 만듭니다

 

세종대왕대의 세금 수취 , 전제상정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대왕은 새로운 세금제도를 만들기전

관리와 지방 무지렁이백성들까지 17만명에 이르는 백성들에게

'여론조사' 를 실시했고

 

옛날 왕정시대에

세금제도를 만든다며

나라에서 관리를 파견해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여론조사의 시행은

 

세종대왕이 얼마나 뛰어나고 시대를 앞서간 리더였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세종대왕은 세금제도 공법을 시행해

더욱 예측가능하고 효율적인 조세체계를 확립시켜

관리들의 폐단 ,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정하고

등급에 따라 세율을 다르게 적용하는 전분 6등법을 ,

 

전분 6등법

 

농사의 풍흉에 따라

최고 20두에서 최저 4두까지 징수케하는

연분 9등법을

 

연분 9등법

 

통해 세액을 정하는 공법이 시행됩니다

 

(세종대왕은

ㅈㄴ 과학적이고 합리 , 효율적이게 세금을 거뒀고

백성들의 세금부담도 줄였으며

 

또 그럼에도 조선 후대왕들보다 세금도 제일 많이 거둬들였고

세금으로 농서편찬 , 기술전래 등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제일 효율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세종대왕대 이르러

이렇게 문 , 무 , 예 , 과학 , 의학 , 기술 , 행정

수많은 영역에 걸쳐 급속도의 발전이 있었고

조선은 부강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됩니다

 

[4군 6진 개척]

세종대왕은 북방영토 개척 , 수복에도 힘썼고

4군 6진을 개척했는데

이전 고려의 불안정한 국경방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세종대왕은 강과 산맥을 경계로 새로운 국토 방어선을 만들려 했고

북서쪽으론 압록강을 , 북동쪽으론 두만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4군 6진을 개척해 영토를 늘리고

오늘날 한반도라 불리는 지형을 완성시킵니다

 

압록강엔 최윤덕 장군을 보내 4군을 ,

두만강엔 김종서 장군을 보내 6진을 개척했고

 

4군 6진

 

김종서의 육진개척 , 대한민국 우표

 

강을 국경으로 삼은 세종의 생각은 탁월해

이후에도 조선 북방은 오랜 안정과 평화기가 도래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한국의 영역으로 남아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세종대왕은 그의 인생에 가장 위대한 업적인

훈민정음 , 한글을 창제하는데

 

한자는 너무 어려워 소수의 지배층 , 양반들만 알 수 있었기에

글을 모르는 문맹자 , 백성들이 너무 많은 조선이었기에

백성들은 글을 몰라 허구한날 억울한 일을 당하기 일쑤였고

 

이에 세종대왕은 직접 외국어 , 한문 , 국어를 비교 , 연구하며

홀로 비밀리에 '한글' 을 만들어냅니다

 

 

이전까지 쓰인 글자 하나하나를 다 외워야하는

'표의문자' 인 한자에 비해

한글은

간단한 몇가지 글자를 조합해 수많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표음문자' 였고

 

표의문자와 표음문자

 

한글에는

세종대왕의 사상과 천재성이 모두 녹아들어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들은

항상

 

'대국인 중국의 것이 있는데'

 

하는 사대주의적 반발을 받았고

그럼에도 세종대왕은 신하와 백성들을 잘 설득 , 타협하고

또 중국 몰래 비밀리에 여러 프로젝트들을 시행했으며

한글 역시 집현전 학자들도 몰랐을 정도로

비밀리에 그가 홀로 만들어낸 글자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 30일>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훈민정음 , 한글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 9월 29일 훈민정음 공식반포>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ㄱ은 아음이니 군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쓰면 규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ㅋ은 아음이니 쾌자의 첫 발성과 같고 ...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昜)〔易〕 習, 便於日用耳。 

ㄱ牙音, 如君字初發聲, 竝書如蚪字初發聲。 ㅋ牙音, 如快字初發聲。

 

(조선왕조실록에 한자가 아닌 한글이 기록되는 소름돋는 순간입니다)

 

그의 위대한 업적과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마음은

차마 글로 다 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그는 평생을 백성을 위해 힘쓴 위인이었고

이로인해 워커홀릭 , 일중독으로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으로 젊은시절부터 사망시기까지 평생

여러 질환에 시달렸고

 

세종대왕과 조선왕실이 병치료를 위해 자주 찾은 온양온천 , 온양행궁

 

아내 소헌왕후와 자식들을 먼저 보낸 아픔도 겪었고

여러 개인적인 불행한 인생사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영응대군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2월 17일>

임금이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사망하셨다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

합(작은 문)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

태종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 매일 사야(새벽 1~3시) 면 옷을 입고 ,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

다음에 정사를 보고 ,

다음에는 윤대(왕이 신하들 차례차례 만나봄)를 행하고 ,

다음 경연(학문토론) 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으로 하고 ,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증거)과 원용(자기에게 유리하게 주장)을 살펴 조사하여서 ,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

문과 무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

 

예악의 문을 모두 일으켰으매 ,

종률(법률)과 역상(역법)의 법 같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

 

구족(친척)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

두 형에게 우애하니 ,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

간(충언)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 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불교일 , 가족을 잃은 말년의 세종은

성리학군주임에도 불교에 빠짐) 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세종대왕]

세종대왕 ,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설이 된 한국사의

레전드 중 레전드였던 인물이었고

저도 사실 다른 인물들은 예의상 높여 쓰긴 하지만

세종대왕은 '진짜' 였던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은 한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그렇게 많다 보기 어렵고

참 한국사뿐만 아닌 세상의 큰 복이었습니다

 

세종 승하후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문인으로서의 업적을 기려

문종이라는 시호를 올리려다

역시 학문을 좋아해 문종 시호를 탐냈던 문종의 반대로

세종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한국사람들은 그를 일반적 조선 국왕들과 달리

조선 국왕에서 유일하게 대왕이라는 존칭을 붙여

'세종대왕'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학문을 한 왕 문종이 아닌

세상을 안은 세종이라는 시호만큼

충녕대군 이도 , 세종대왕과 어울리는 시호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라봉봉>세종대왕은 왕다운 왕이었지만

너무 일을 많이해 살인적인 스케줄로 유명한 왕이고

인간인가 싶을정도인 그런 생각이 들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세종대왕과 세종대왕의 왕비 소헌왕후는

이후 조선 왕과 왕비의 표준이 됩니다

 

세종대왕의 치적으로

조선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이때 이뤄진 발전으로 임진왜란 , 병자호란을 버텨내고

500년을 이어갈정도였고

 

참 링컨처럼

우리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정치인 ,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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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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