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탈자 혹은 현실주의자 세조>
[사육신과 생육신]
[승자의 기록 , 세조실록]
[악몽을 꾼 세조]
[종기가 난 세조]
[불교와 무속신앙에 빠진 세조]
[훈구파와 사림파]
[세조의 왕권강화책]
[찬탈자 VS 현실주의자]
<라봉봉>
[사육신과 생육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해 왕이 된 수양대군 세조는
재위기간 내내 찬탈자 , 정통성이 약한 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이에 세조 즉위 이후
여러 세력들의 저항과 세조의 진압이 반복됬습니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 등은 상왕으로 물러나있었던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려다
내부 고발로 들통나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하거나 단종에 충성한 신하들중
단종을 위해 선비의 절개를 지키려 죽은 여섯신하는
'사육신'
으로
살아남았지만 벼슬을 버리고 바보행세를 하며 살다 죽은 여섯신하는
'생육신'
으로 이야기 됩니다
[승자의 기록 , 세조실록]
또한 순흥에 유배중이던 세종의 여섯째아들 , 세조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반란을 계획하다
정보가 누설되 사약을 받았는데
원래 사약을 받을때 죽기전 임금이 계신곳을 향해 절을 하지만
금성대군은
<금성대군>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
하며
죽기 전
세조가 있는 한양이 있는 쪽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이런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의 친형이자 한때 세자였던 양녕대군 및
영의정 정인지 등은
역도들을 용서하지 말고 대의로서 결단해
화근을 끊으라 했지만
세조는
<세조>불가하다.
옛사람의 말에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고 ,
또 성인은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았으니 ,
이제 만약 아울러서 법대로 처치한다면 이는 너무 심하다
하며 주동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노산군 , 단종은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자결하니
세조는 단종을 예의로서 장사지냈습니다
이는 ,
세조의 관대함을 찬양하고
단종은 그저 목매달아 스스로 자결했다 나오는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기록인데
단종은 실제론 세조에게 살해당했다하고
세조실록은 철저히 세조 중심으로 , 승자의 기록으로 써져있습니다
[악몽을 꾼 세조]
세조는 이렇게 재위기간 중
친동생 , 조카를 모두 살해했고
이로인해 '찬탈자' 라는
평생 , 죽어서도 역사에 남는 비난과 비판이 따라다니게 됩니다
세조 역시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1457년(세조 3년) 겨울 ,
세조는 궁궐에서 낮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렸는데
세조는 꿈에 세조의 형수였던 문종의 왕비이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고
현덕왕후는 세조에게
<현덕왕후>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라고 했고
악몽을 꾼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 , 소릉을 파헤치라 명했고
신하들이 석실을 부수고 관을 꺼내려 했지만
무거워서 들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놀라고 괴이해하니
글을 올리고 제를 지내고 나서야 관이 나왔고
사나흘을 바깥에 방치해두었다
평민의 예로 장사지내고 물가에 옮겨 묻었습니다
이는 세조가
단종을 낳은 형수를 왕실 무덤에서 파버리고
폐서인 시킨 것입니다
실제론 단종이 사망하기
1개월 전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미 당시 단종도 세조의 죽음의 위협에 몰려있던 상황이어서
정치적으론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시기가 비슷했기에
현덕왕후의 저주로
의경세자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돌았고
세조가 현덕왕후의 악몽을 꿨다는 등 여러 소문들이 퍼졌습니다
[종기가 난 세조]
이외에도 뒤통수 , 칼빵으로 정권을 잡아
재위기간내내 역시 자신에게도 뒤통수 , 칼빵이 올까 두려워했던 세조는
왕이 된 이후 평생을 이런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피부에 고름(종기)이 생기다 문둥병(나병) 이 걸리게 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원혼이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
라며 세조에게 침을 뱉었고
그 이후 병증이 심해져
세조는 온천욕을 즐겨다닙니다
한번은 세조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
세조는 등을 밀어달라했습니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승에게
<세조>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임금의 몸) 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했더니
동자승은 미소지으며
<동자승>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지혜의 보살 문수보살)
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문수보살에게
등을 씻은
세조는 이후 온몸의 종기와 부스럼이 깨끗이 나아
부처님의 은혜에 감동해
5만명의 화공과 5만명의 목수를 동원해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문수동자상을 조성해
상원사에 봉안했습니다
이에 오늘날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고
1984년 10월 15일 국보 221호로 지정됬습니다
[불교와 무속신앙에 빠진 세조]
수양대군시절
항상 배포가 크고 총명한 왕자님으로
높은 대우만 받던 세조는
아버지와 형 사후
피를 흘리는 패륜을 하고 왕이 된 이후부턴
여러 악몽과 트라우마 , 불면증에 시달렸고
이런 것들로 가위에 눌리거나 몸에 종기가 나거나
정신병 , 망상에 시달리는 등
병세가 악화되 조선 국가이념 성리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불교 , 무속신앙에 빠졌고
여러 사대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세조는 이를 묵살하고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궐을 지원하고
훈구파+사림파 관료들이 연합해서 반대했음에도
궁궐내에도 불당을 지었습니다
이로인해 오늘날에도 유교계에선
세조를 그저 찬탈자 , 패륜으로
무차별적으로 졸라리 까지만
불교와 무속인들에겐 세조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에도 좋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
세조시대부터는 세조의 골육상쟁등으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던
조선 왕실의 권위엔 흠이 가기 시작했고
신하들의 파가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한 중앙 훈구파
VS
명분과 도덕을 중시하는 지방 사림파
로 나뉘는 분열이 시작되었는데
점차 조선 왕실의 권위도 균열이 가고
신진 관료들인 사림파의 성장에 정치판이 급변하게 됩니다
마치 군사정변 이후 체육관선거로 만장일치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 대통령처럼
정통성이 매우 약해
재위기간내내 정통성 컴플렉스에 시달렸던 세조는
즉위후 자신의 역모 , 계유정난에 가담했던 신하 및
자신에게 충성하는 관료들에게
시혜 , 호혜성 정책들을 마구마구 퍼주었고
세조 즉위년부터 한명회 등 2천 2백명이 공신에 책봉되
대토지와 관직독점을 허가받아
'훈구파'
가 됩니다
단 세조대부터는
조선 초기부터 공신들에게 나눠주던
토지가 점차 부족해지자
전현직 관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던 과전 , 과전법이 폐지되고
현직 관리들에게만 토지를 나눠주는 직전법이 시행됩니다
훈구파는 원래 조선 건국공신들을 말하는 것이지만
세조대부터 훈구파는 계유정난 참여공신들을 말하는 것이었고
둘다 중앙 권력 , 왕권에 충성하는 집단이라는
조선의 왕당파 , 보수적 정당이었다 보면 됩니다
이들은 세조 및 왕실에 결탁해
관직 독점 , 대토지 소유등을 하며
야당격이었던 사림파를 탄압하며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고
단 유교적 대의명분 , 신권중시 , 탁상공론에 치중했던 사림파와 달리
현실적 , 실리적 , 실용적 성향이 있었기에
훈구파들은 왕실과 불교에도 호의적이었고
사림파들에게 훈구파가 말살된 조선 중기부터
조선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되고
조선이 현실정치보단 사림파들의
성리학의 탁상공론 정치로 흘러갔다는
말들도 있기에
세조와 훈구파를 절대악 ,
단종과 사림파를 절대선으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세조의 왕권강화책]
정통성 , 집권정당성이 약했던
세조는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훈구파들과 결탁해
왕권 강화책에 매달렸고
아버지 세종대 의정부 서사제를 없애고
다시 할아버지 태종대의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권력을 재상이 아닌 왕에게 집중시킵니다
또한 다시 태종대 2년동안 시행되다 폐지 된 호패법을 부활시켜
본격적으로 조선의 호패제가 시행되
조선의 16세 이상 성년 남성은
의무적으로 호패(오늘날 주민등록증) 를 지니게 됩니다
세조가 호패법을 시행한 이유는
군역과 세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찬탈자 VS 현실주의자]
평생을 조카와 친동생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던 세조는
재위기간 내내 온갖 트라우마 , 정신병에 시달렸고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다가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한명회 , 신숙주 등을 불러
왕세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하고
세자(예종)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52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세조가 사망했을 당시는
훈구파의 힘이 강성했고
정통성 약했던 세조일가 , 조선왕실도 이에 예민했기에
관료 , 신하들까지 가세해
어떻게든 땡전뉴스급으로 세조를 찬양하며
단종과 사육신들을 폄훼하려 했지만
점차 사림파가 훈구파들을 몰아내는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는
세조의 부도덕함과 세조 측근들의 부패에 대한 이야기가 논의되고
단종과 사육신들은 유교적 명분에 충실한 사람들이라 재평가 되며
조선 후기부턴 점차 세조는 악함과 부정적 평가로 변화합니다
제가 보기엔 무능한 어린 소년왕이
단지 핏줄로서 재위하는 상황 역시
왕정의 부도덕함이라 생각되고
당시 수양대군 , 세조는 과정은 잘못됬지만
조선국 백성들의 운명을 어린 무능한 임금에게 쥐어주는 것 또한
세조같은 세력들에겐 불행한 사태를 발생하게 할 수 있기에
세조가 그저 악하다고만 볼 수도 없고
세조는 '현실주의자형'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이상주의자형 인물이었던 형 문종과 뚜렷히 대비된
현실주의자형 인물 동생 세조였고
두 인물다 위대한 세종대왕의 아들로서
나름 재위기간내내 세종의 흉내를 나름대로 내려 노력했다고는 생각되나
문종처럼 학문에 힘썼지만
자기관리 및 추진력이 대단했던 세종대왕이고
세조처럼 말년에 불교에 빠졌지만 사대부들의 눈을 의식해
결코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을 하진 않았던 고단수 정치인 세종대왕이었기에
두 인물 다 호랑이 자식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두 인물 다 아버지만은 못했고
사실 세조 역시 태종의 연장선이지
세종대왕같은 위대한 천재는
한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참 드물고 드문 케이스입니다
<라봉봉>
'찬탈자'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는 한국사 군주가 바로 세조이고
세조는 조선왕조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정당성이 부족한 왕이었기에
세조 실록은 대놓고 조작 , 찬양 기록이 많아
유치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고
이에 다른 기록들과 다른말들이 있고
후대의 조선 선비들이
세조와 세조의 신하들을 직 , 간접적으로 디스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세조와 훈구파들은
그저 악의 상징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고
한국에서
훈구파 , 수구파라는 말은
부패와 고집불통의 꼰대라는 표현으로 사용됬지만
이후 조선중기부터 사림파 독재가 시작되자
사림파가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한 위선집단으로서
조선을 가난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비판 ,
썩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고
훈구파들 역시
현실중시자로서 의의가 있었던 세력들이라
최근에 들어서 훈구파들 역시 재평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매체등에서
세조를 그저 악으로만 표현해도 안된다 생각되고
문종이 선한 사람이었지만 수양대군처럼
자기 관리 , 절제가 되지는 않았던 사람이었기에
요절했듯이
수양대군 세조 역시
의의와 한계가 있던 인물이라 평가되는게 맞을 듯합니다
'어린이 한국역사 > 2집 Human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성종의 즉위 (0) | 2020.06.22 |
---|---|
단명한 왕 예종 (0) | 2020.06.20 |
왕위에 오르기전 수양대군 세조 (0) | 2020.06.15 |
비운의 소년왕 단종 (0) | 2020.06.14 |
부인복이 없었던 문종 (0) | 2020.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