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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세자 광해군>

[임해군 VS 광해군]

[전시 세자책봉]

[분조]

[명나라의 내정간섭]

[영창대군]

<라봉봉>

 

[임해군 VS 광해군]

조선 14대 임금 선조 후궁만 9명 , 왕자만 13명을 낳았지만

유독 정식 왕비 , 중전과의 사이에서만 아들이 없었고

그렇기에 후궁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아들 임해군과 둘째아들 광해군이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가 됩니다

 

선조 가계도

 

그러나 첫째 임해군은 성격이 사납고 막되어서

인심이 따르지 않았고 

게을러서 학문에 힘쓰지 않고 따르는 자들도 제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폐단이 더욱 커졌습니다

 

왠만하면 첫째를 중시하는 조선시대에서도 노답이라 할 정도니 말 다한겁니다

 

평생 잘난 친동생 광해군을 질투한 조선 희대의 망나니 임해군 , MBC 월화 특별기획  불의 여신 정이 (2013) Jung-Yi, Goddess of Fire

 

선조가 세자를 정하지 못해 

여러 왕자들의 기상을 보려 앞에다 보물을 성대하게 진열해놓고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는데

여러 왕자들이 서로 다투며 보물들을 취할때

유독 둘째아들 광해군만은 붓과 먹을 가져가기에

선조가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돌잔치에서 연필잡는 느낌)

 

 

또한 선조는 시험삼아 여러 왕자들에게 묻기를

 

<선조>반찬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 ?

 

하고 묻자

광해군은 

 

<광해군>소금입니다

 

했고

 

동양 군주들에게 중요시 된 근본식품 '소금'

 

이에 선조가 그 이유를 묻자 

광해군은

 

<광해군>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른 언행들로 광해군은 둘째임에도 선조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신하들 역시 게으르고 학문을 멀리하는 첫째 임해군보다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을 힘쓰던 광해군을 더 눈여겨 보게 됩니다

 

[전시 세자책봉]

그러다 ,

광해군이 18살이 되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후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오자

 

선조는 한양을 떠나 북으로 몽진(왕의 피난) 할 것을 계획했고

이에 신하들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세자를 정해 두어야 한다 했습니다

 

<신하 신잡>사람들이 위구심(염려와 두려움)을 갖고 있으니

세자를 책봉하지 않고는 이를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일찍 대계를 정하시어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

 

<선조>... 그 말이 옳다 ,

...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다시 형적(흔적) 을 보존할 수가 없다

경들은 누구를 세울만 하다고 생각하는가 ?

 

이에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대신들>이것은 신들이 감히 아뢸 바가 아니고

마땅히 성상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일입니다

 

이에 되풀이 하기를 서너차례 하자 밤이 이미 깊어졌지만

선조는 그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대신 이산해가 허리를 굽히고 자리를 피하려 하자

대신 신잡이 말하길 

 

<신잡>오늘은 기필코 결정이 내려져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

 

이에 대신은 다시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선조가 약간 미소를 띠고 이르기를

 

<선조>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워 세자로 삼고 싶은데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

 

이에 대신 이하 모두 일시에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기를

 

<대신들>종묘 사직과 생민(백성) 들의 복입니다

 

정식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원자가 아닌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후계자 책봉은 아주 까다롭고 예민한 것이었지만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급격한 상황속에서

선조와 소수 신하들의 동의만으로 급하게 세자의 자리에 올랐고

광해군은 별다른 책봉의식도 없이 세자가 된 다음날 새벽

곧바로 경복궁을 탈출해 피난길에 오릅니다

 

전시세자 광해군 , 영화 대립군

 

[분조]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평양을 지나 명나라와의 국경지역인

의주로 피난갔고

툭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피난가겠다 했지만

명나라로 조선국왕이 국경을 넘어 피난가는 순간

 

곧바로 명나라의 조선국왕에 대한 대접이 급격히 푸대접으로 바뀔 수도 있고

조선 내부에서의 장군 , 의병들의 사기도 크게 저하되기에

명나라에서도 반대했고

조선 신하들도 선조에게 ㅈㄹ좀 하지 말라며 간곡히 말립니다

 

의주로 간 선조와 남하한 광해군 부자

 

일본군이 수도 한양과 전국토를 쑥대밭을 만들어놓자

일단 신하와 백성들도

현재 선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였고

이런 상황에서 결국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왕의 권력을 반띵해주며

북부 지방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의병을 모으게 했습니다

 

이렇게 조선 조정은 선조 조정과 광해군 조정 둘로 양분되었고

조정을 양분한다는 뜻의

'분조' 가 시작되었고

 

무능한 왕 선조와 유능한 세자 광해군의 분조 , 농민신문

 

국가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선조 역시 할 수 없이 이런 긴급조치를 시행한 것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총명했던 광해군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조선 조정 , 정부는 아직도 살아있음을 알렸고

 

광해군은 비록 왜군의 위협이 덜했던

한양 북부지역 , 북한지역에만 한정해 백성들을 위무했지만

험준한 산길에서도 나무를 베어 땅에 박고 풀을 얹어 지붕을 지어

노숙하는 고생도 했고

 

분조 , 광해군의 고된 여정 , KBS 역사저널 그날

 

당시 조선 왕실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왕실의 힘은 다른 장수 , 의병들보다 역대급으로 약화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지만

 

한국 지배층 , 민초들에겐 이전부터 조선왕실에서 계속 뿌려둔 성리학 사상 ,

충효 사상이 발동하기 시작해

왕세자 광해군이 조선 조정이 아직 건재함을 알려오자

결국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의병

 

반대로 광해군의 형 임해군은

선조의 명을 받고 함경도로 들어가 병력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라는 임무가 부여됬는데

임해군은 광해군과는 정반대로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다녀

참다못한 국경인이라는 인물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

임해군을 사로잡아 가토에게 포로로 넘겨주었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을 공포에 떨게한 임진왜란 대표 왜장 가토 기요마사

 

[명나라의 내정간섭]

명군이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어

조명연합군은 다시 일본군에 반격을 시작하며

평양 , 한양을 탈환하게 됬지만

 

반대로 명나라는 점차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선조와 조선 신하들이 반발하자

명나라는 일부로 선조를 길들이기 위해

총명한 세자 광해군을 한껏 띄워주며

광해군에게 군사일을 맡기라는 등

왕위 교체를 압박합니다

 

일단 명의 압박에 결국 선조는

광해군에게 병조판서 이항복 등

강직한 명신하들을 붙여준 상태로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군권을 주었고

 

명황제 역시 대놓고 국왕 선조가 아닌 세자 광해군에게 직접 칙서를 내리며

부왕의 실수를 만회하고 앞으로 잘하라는 말들을 보내자

 

이에 당시 가뜩이나 한창 열심히 활약하며

명성을 높여가던 이순신 장군마저

반역하지 않을까 하며 의심하던 의심대마왕 선조는

자기 친아들 광해군까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당시 빡돈 선조는 아들 광해군에게 양위하고

국왕노릇에서 전혀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일단 명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병을 핑계로 광해군에게 양위하겠다는 양위쇼를 15번이나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명나라는 광해군은 총명하다며

대놓고 오구오구하며 이뻐했고

반대로 선조는 무능한 새끼라는 태도를 견지하며

조선 조정을 압박합니다

 

차라리 이순신 장군의 경우 선조의 관할 장수기에

조지던 등용하던 선조의 마음이었지만

 

명나라의 경우는 조선의 상국이며

당시 명황제는 조선왕의 담당 일진이었기에

선조 역시 이런 상황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었고

 

당시 광해군 역시 아버지가 계속 마음없는 양위쇼를 벌이며 자신을 의심하자

불안해합니다

 

광해군을 탐탁치 않아한 선조와 선조 앞에 무릎꿇은 광해군 , MBC 월화특별기획 화정 (2015) 華政

 

그러다 임진왜란이 결국 끝나게 되었고

위기가 사라지고 전란 극복에 공이 있는 광해군이 선조 사후 조선국왕이 될 것이 확실해지자

명나라는 다시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

 

광해군에 대해 급격한 태세변환을 시작하며

광해군은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선 왕세자 책봉을 거부했고

멍청하고 무능했던 첫째 임해군을 세우라 요구합니다

 

[영창대군]

임진왜란이 끝났음에도

그렇게 명황실의 인정을 받지 못한 조선 왕세자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견제 외에도

자신을 밀어주는줄 알았던 명황제의 견제까지 받게 되는데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선조가 새로 들인 정식왕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아버립니다

 

영창대군과 광해군 , 혈연적 꼬임으로 서로 존재 자체가 불편했던 관계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9살 어린 광해군의 의붓어머니였고

영창대군 탄생전까지는 여러 대내외적 압박과 견제 , 선조의 의심속에서도

그래도 가장 왕자들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장성하고

임진왜란 극복 공로가 있는 왕세자로서 차기 왕권이 확실했던 광해군이었지만

 

선조가 말년즈음 뒤늦게 중전 인목왕후와 아들을 낳아버리자

조정 대신들까지 세자 광해군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선조의 첫 정식 아들 영창대군을 비호하기 시작했고

이에 총명했지만 성급한 성격이었던 광해군은 큰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하여튼 그러나 선조는 얼마후 오늘내일 하게 되었고

세자 광해군이 차기 왕임을 인정하고

광해군에게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남긴 유서>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헐뜯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몸받아라

 

결국 선조가 사망하자

광해군보다 9살 어렸던 광해군의 의붓어머니이자

선조의 정식 왕비 인목왕후 역시

세자 광해군을 인정하고 그를 새로운 임금으로 인정해

광해군은 조선 15대왕으로 즉위합니다

 

여러 논란속에 왕이 된 광해군에겐

선조가 싸놓은 똥 치우기 ,

임진왜란 전후 복구라는 거대한 과제가 주어집니다

 

광해 , 왕이 된 남자

 

<라봉봉>광해군 역시 연산군과 비슷한 폭군형 인물이라면 폭군형 인물인데

(막 내지르는 성격)

 

특히 광해군이 오늘날 대중들에게 안타까운 인물로 사랑받는 왕이 된 이유는

일단 빡대가리였던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은 총명했고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란기를 극복해낸

전쟁 영웅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광해군은 그저 욕먹는 연산군과 달리

급변하는 시대속 미완의 개혁군주로 이야기되는 감도 있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공통점이 공통점이라면

아버지가 모두 선비형 캐릭터 혹은 발암캐릭터였다는 점인데

성종이나 선조 역시 문치주의 임금으로서 호방한 성향보다는 의심과 깐깐한 쫌생이 기질이 강했던 왕이었으며

이에 반동작용으로 세자시절 발암 아버지 밑에서 참아온 아들들이

왕이 되서 막 권력을 내지르다 신하들의 쿠데타를 맞고

폐위된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군이 어머니나 신하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듯이

광해군 역시 불안정한 혈통 및 세자시절 아버지 선조의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라는 거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고

 

광해군 역시 어질지 못하고 성급한 성격으로

왕이 되고 나서도 이런 히스테릭 증세를 보이다 폐위 된 것이며

임진왜란 당시 무능한 아버지와 뚜렷히 대비되며 신하와 백성들의 큰 기대를 받은 유능한 세자가

왕이 되고나서 폭군이 되었다는 점 때문에

안타깝기도 하고 한국사에서 가장 동정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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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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