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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군주 혹은 폭군 광해군>

[뛰어난 세자 , 폭군 왕]

[북인]

[대동법]

[동의보감]

[계축옥사]

[광해군의 패륜]

[궁궐공사]

[강홍립의 투항]

[인조반정]

<라봉봉>

 

[뛰어난 세자 , 폭군 왕]

그렇게 선조의 서자출신 세자 광해군은

적자 출신 왕자 영창대군의 탄생이라는 위기속에서

선조가 승하하자 왕위를 이어 조선 15대왕 광해군이 됩니다

 

광해군은 연산군처럼 재위 도중 신하들의 반정을 맞고 폐위된 왕이라

시호가 없이 왕자 이름인 군이라 낮춰불리는 임금이고

일단 광해군은 선조의 아들중 가장 뛰어난 아들답게

재위 초기엔 유능한 임금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급하게 세자에 책봉되어

의주에 숨어있던 아버지 선조와 달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의병들을 일으킨 

국란극복에 뛰어난 공이 있는 인물이었고

성급한 성격이 있었지만

평소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한 모습을 보여

서자출신 왕임에도 신하들은

딱히 그를 부정하거나 인정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모습을 보였는데

 

광해군은 총명한 인물이기도 했고

임진왜란 극복 공로 및 경험이 풍부한 세자 출신으로서

굳이 혈연적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인물이었지만

 

아버지 선조의 지나친 의심과 견제속에 성장하고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살육과 강간 , 민생파탄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인물로서

출생적 , 전쟁 후유증이 강한 인물이었고

이런 것들로 왕이 된 이후 미신에 의존한다거나

굳이 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세력까지 의심하고 죽이게 되는

'폭군' 이 됩니다

 

(아무리 광해군을 재평가해도 광해군은 폭군이었음)

 

두 얼굴의 임금 광해군(명군 혹은 폭군) , 광해 : 왕이 된 남자

 

[북인]

광해군 시대에 광해군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북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광해군은 선조시절 광해군VS영창대군 구도가 있을때

자신을 지지해준 남명 조식의 제자인 북인 정인홍을 등용했는데

 

정인홍은 광해군 시기 영의정을 지내며

할말은 하는 강직한 모습을 보인 인물이었습니다

 

정인홍

 

또 광해군 시기 북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광해군은 서인 이항복 , 동인 이덕형(이항복과 친구) , 남인 이원익 등 

여러 인물을 고루 등용하며

당파들은 균형있는 상태가 되었고

이에 안정된 국정이 시작되자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폐허속에 다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조선

 

조선 대신들의 회의

 

[대동법]

조선 최대의 개혁 ,

1606년 대동법이 시작됩니다

 

대동(大同) 이란 말은

크게 모두 같다라는 뜻으로

천하 , 세력들이 화합하고 번영하는 유교의 이상세계 개념으로서

 

유교의 대동세계는

기독교의 천국 ,

불교의 극락

 

개념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대동세계를 꿈꾼 조선 사대부들 , 김홍도의 '그림감상'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농토가 파괴되고 인구가 크게 줄자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세금제도를 개혁시켜

백성들이 지방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방납)' 을 없애고

공납이 아닌 쌀로만 세금을 통일시켜 내게 하는 '대동법' 을 시행합니다

 

대동법의 전국적 확대(초록색) , 북부지방은 쌀농사가 어렵고 조세를 국방이나 중국 사신접대에 사용

 

대동법은 마치 기독교나 불교식으로는

천국법 , 극락법의 의미와 같은데

세금제도에 유교적 최선의 이상세계 대동의 이름까지 들어갈 정도로

조선사 최고로 중대한 개혁이었고

 

대동법 ,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푸는 법이라 불렸습니다

 

기존까진 백성들이 특산물을 바치려

특산물을 찾아 헤매거나

방납업자 , 대행업자들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주고

공납을 대행시켰고

방납업자들은 중간에서 농간하는 폐단이 심했는데

백성들은 대동법의 시행으로 당시 표준화폐였던

쌀로만 세금을 내게 되어 부담이 줄게 되었습니다

 

동전(엽전 , 상평통보) 사용 전까지 한국에서 화폐로 사용된 '쌀'

 

공납과 대동법

 

[동의보감]

또 선조대부터 활약한 한국사 전설의 의사 허준은

광해군대에 이르러 

당시 한국 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 이라는 의학서를 남겼고

 

허준과 동의보감

 

백성들은 동의보감에 나온 내용을 보고 쉽게 병을 고치거나

비싼 중국약재가 아닌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토종 약재를 이용해 병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축옥사]

이렇게 여러 개혁과 발전이 광해군대부터 시작됬고

전란의 아픔 역시 극복되가는듯 보였지만

광해군 시기 조정 내부에선 신하들의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벌여지고 있었고

정국 역시 어수선해졌습니다

 

광해군은 서자출신의 왕이었기에 어떠한 불안감 ,

자신의 권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1612년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역모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많은 서인 , 남인들이 숙청되고

북인들은 더욱 세력이 커졌고

 

1613년에 북인들은 완전히 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킵니다

 

광해군의 신임을 얻은 북인들은

선조의 유일한 적통 왕자이자

한때 선조시절 광해군과 왕위 계승전을 벌였던

영창대군과 영창대군 지지파들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고

 

당시 은을 파는 은상인이

세상에 불만을 품은 서얼(서자) 출신 도적들에게

은 6700냥을 약탈당하자

 

북인들은 이들을 잡아 허위자백을 하도록 설득했고

 

결국 이들은 은 약탈은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군사를 모을 자금이라 했고

이에 계축옥사가 시작됩니다

 

계축옥사의 시작 문경 은상 습격사건 , MBC 월화특별기획 화정 (2015) 華政

 

선조의 적통왕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역모가 발생하자

나라가 뒤집어졌고

이때 조선 국왕 광해군의 정신병적 출생 콤플렉스가 다시 도져서

광해군은 직접 죄인들에 앞에 가서 고문하고

자백을 받는 '친국' 을 할 정도였습니다

 

계축옥사

 

결국 중요 대신 , 남인과 서인들은 모두 조정에서 제거되었고

반란에 엮인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 살해당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는 궁궐에 강제로 유폐(가둠)됩니다

 

유배되는 영창대군 , 화정

 

폐모살제 ,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

 

당시 광해군은 북인들 뒤에서 모르는척 영창대군을 숙청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영창대군과 인목왕후는 적통 인물일지언정

선조 말년에 잠깐 나온 인물이고

이에 광해군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감히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광해군을 지지했고

이 두 모자는 광해군의 위협또한 되지 않았는데

 

광해군은 본인의 자리가 공고함에도

괜히 영창대군과 인목왕후를 의심해

ㄹㅇ 죄가 없었던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왕후를 유폐시킨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위시키자

임진왜란대 나라를 구한 명재상이자 한국 위인 이항복은

광해군에게 인목왕후 폐위 반대상소를 올리다

북인들의 모함을 받아 권력을 잃고

60넘은 나이에 춥디 추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갔고

곧 추위속에서 병에 걸려 유배 5개월만에 생을 마감합니다

 

광해군에게 숙청당한 한국 위인 이항복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이 살해당하고

서인과 남인 , 명신하들이 줄줄이 숙청 , 살해당하자

정국은 요동치게 됬고

 

정권을 모두 독점한 북인독재가 시작되자

타 세력 신하들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됬고

 

광해군이 죄없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였고

당시 영창대군은 ㄹㅇ 죄가 없는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그저 혈연이 빵빵하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미움을 받고 9살의 나이에

이복형에게 의심을 받고 살해된 것이었고

 

마치 부자들이 대게 나쁜놈들이 많기에 욕을 먹지만

착하고 선량한 부자도 소수 존재하는데

착한 부자를 나쁜 부자라 의심 , 미워하며 이유없이 죽인 꼴이었습니다

 

[광해군의 패륜]

선조가 늦게 들인 왕후 인목대비는 

비록 광해군보다 나이가 9살 어렸음에도

 

엄연히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가 들인 정식 부인으로서

광해군의 어머니였고

 

광해군은 즉 죄없는 이복동생을 죽여버리고

어머니를 쫓아내려 한 

 

명백한

 

'패륜'

 

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패륜은 유교사회에서 가장 나쁜것중 하나로서

광해군이 저지른 패륜은 치명적 약점이 되었고

 

당시 광해군과 북인들에게 언제 숙청당할 줄 모르던 서인 , 기타 신하들의

반정 명분이 됩니다

 

[궁궐공사]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무능한 한국사 최악의 임금이었지만

그래도 평소 선비기질 , 깐깐한 기질이 강해서

선조는 임진왜란에 대한 죄책감이 강했던 인물이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함부로 폐허가 된 궁궐 복구 공사를 하지는 않았는데

 

깐깐한 아버지와 정반대로 성급한 성격에 미신을 믿었던 광해군은

수도 한양의 기운이 다했다 생각해

천도를 생각하거나 궁궐공사를 강행해 백성들의 원한을 삽니다

 

옛날 전통공사 , 태평성시도

 

당시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라

나라에 돈이 없었는데

광해군은 왕실 권위에 집착하며

거대 궁궐을 지으며 백성들을 수탈해 원성을 샀고

조선 농민경제 , 민심이 빠르게 붕괴해

광해군 재임기 동안 조선 민생은 한계를 넘어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강홍립의 투항]

또 국제적으로도 당시는 좋은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일본은 물러갔지만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왜란 시기 입은

전란의 상처가 너무 커서 한창 몸을 추스리던 시기였는데

 

이 틈을타서 명나라와 조선의 영향하에 있었던 만주의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여진족 영웅 누르하치는 재빨리 분열되있던 여진족들을 통합시키고

독자행동을 시행하는데

 

이전이라면 이들을 통제했을 명나라는

이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조선 역시 혹시 모를 여진족의 남해에 대비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수시로 군사훈련을 시키고

임진왜란때 위력이 입증된 신무기 조총병을 양성시킵니다

 

조선 조총병

 

결국 여진족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1618년 나라 이름을

이전 여진족 국가였던 금나라라하고 나라를 건국했고

누르하치가 세운 금나라는 이전 금나라와 구분하려 후금이라 부르는데

 

누르하치

 

세력을 확대하던 후금은 결국 명나라를 공격하며

요동을 두고 다투게 됩니다

 

 

이에 명나라는 광해군과 조선에게

이전 임진왜란때 도와준 은혜 ,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를 뜻하는

'재조지은' 을 갚으라는 요구를 하게 됬고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합니다

 

이에 결국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명나라에게 조선 정예병 1만 3천군대를 지원파병했는데

약체였던 명나라는 한창 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후금군에게

사르후 전투에서 몰살당했고

당시 강홍립의 조선군 역시 명나라군이 전멸당하자

후금의 수만 기병에게 얻어맞으며

조선군 9천명이 궤멸당합니다

 

후금이 요동 패권을 쥐게 된 사르후 전투

 

총포를 든 명나라군(오른쪽) 과 궁기병 후금군(왼쪽) 이 사르후 산에서 싸우는 모습

 

후금의 목표는 가난한 조선이 아닌 오직 풍요로운 명나라였기에

명나라군을 전멸시킨 후금은 강홍립과 조선 파병군에게 접촉해왔고

 

4천명밖에 남지 않은 조선군의 강홍립은 명나라군의 막장 실태를 확인하고

후금과의 전투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  

타국에서 개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

출병은 명나라의 요구로 어쩔 수 없던 것이었다고 말하며

후금군에게 투항합니다

 

강홍립의 투항

 

이에 순식간에 조선 정예병 1만 3천이 증발당했고

광해군과 조선은 멘붕에 빠지는데

 

이후에도 명나라는 끊임없이 조선에 지원병 파병을 요구하나

광해군은 이미 1만 3천 대병을 순식간에 잃었기에

이후부턴 명나라에 지원군 파병을 거부합니다

 

이렇게 광해군 시대는 임진왜란이 막 끝났음에도

국내외적 혼란에 휩싸이던 시기였고

백성들은 궁궐공사 수탈 , 후금과의 전쟁으로 고통받고

신하들 역시 언제 북인들과

총명함을 잃고 폭군화된 광해군에게 숙청당할 지 몰라 두려워했으며

 

가히 당시 광해군은 명백한 폭군이었습니다

 

[인조반정]

이에

신하들은 이전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때와 같이

반정을 계획하게 됬고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 명분으로 3가지 명분을 듭니다

 

첫번째는 폐모살제 ,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살해한 광해군의 패륜죄를 꼽았고

 

두번째는 궁궐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으며

 

세번째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친하게 지내며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셋다 광해군의 크나큰 실책이었는데

 

한창 위기에 몰리던 서인세력들은

결국 1623년 3월 12일 밤 행동을 개시해

'인조반정' 을 일으킵니다

 

당시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였던 능양군은 

광해군이 왕족들을 한창 의심하며 왕족들을 조져대던 시기

광해군에게 동생 능창군을 잃었고

복수심에 칼을 갈던 능양군은 서인세력과 결탁해

능양군과 서인세력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광해군에 맞서 반정을 일으킵니다

 

2000명의 반정군들은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쉈고

창덕궁에선 미리 포섭되있던 훈련대장 이홍립이 궁궐 문을 열어주며

궁궐은 반정군에게 접수되고

인조반정은 성공합니다

 

인조반정

 

갑자기 새벽에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놀란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탈출했지만

곧 반정군에게 체포됬고

조선국왕 광해군은 곧 서인(평민) 으로 강등당해 강화도로 유배됩니다

 

당시 민심은 광해군에게 한창 떠나있었던 시기였기에

한양 남녀들은 왕 , 광해군이 잡혀갈때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며

폐위된 왕을 욕하거나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광해 : 평민이 된 임금 , 화정

 

이이첨 등 광해군대 권신등은 모조리 참수당하고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은

왕좌를 접수해 조선 16대왕 인조가 됩니다

 

이전 반정 , 권력교체와 달리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은

북인 등 반대파를 완전히 몰살시켜버립니다

 

한창 광해군에게 유폐되어 숨죽이고 살던

인목왕후는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인목왕후>내가 이 날을 보기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나갔구나 !

 

하고 눈물흘렸습니다

 

 

<라봉봉>광해군은 새로 강성하게 일어나는 후금(청나라)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실행한 현명한 임금인데

인조 세력이 폭군으로 폄훼시켰다고도 이야기 되나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일지언정

광해군이 정말 정치를 잘하고있는데 일개 종친 능양군(인조) 과

서인세력들이 목숨을 걸고 반정을 일으킬 이유가 없으며

광해군은 당대나 오늘날 기준으로 보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폭정을 펼친

명백한 폭군이었습니다

 

단 선조가 찌질 , 깐깐한 성향의 인물이었다면

광해군은 융통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보여지고

 

광해군은 청소년기(당시는 성년) 임진왜란을 겪은 세자로서

온갖 참혹한 실상을 보고 전쟁통에서 큰 충격을 받은 인물 광해군은

임진왜란기 동안 수많은 융통성을 발휘해 전시 세자로서 이름날렸고

재위 기간내내 대동법 시행 , 여러 인사 등용 등 이런 융통성의 장점이 빛나기도 했지만

 

반대로 뜬금없이 형제를 죽인다거나

절제하지 못하고 사치나 미신에 빠진다거나

급변하는 국제 관계에서도 애매한 모습을 보이며 민심을 잃은 임금이었습니다

 

연산군과 달리 총명한 임금이었기에

오늘날에도 광해군은 재평가 대상으로서 아쉬운 임금이라 이야기 되고 있고

광해군은 정말 일반적으로 보기 어려운 , 명과 암이 뚜렷한 인물로서

좋게 보려 하다가도 또 정신병 기질 , 악행이 너무 큰 인물이라

 

광해군은

 

성종같은 명군도 ,

연산군같은 폭군도 ,

선조같은 암군도 아닌

 

혼군 , 혼란스러운 군주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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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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