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인조와 병자호란>

[인조반정]

[논공행상]

[이괄의 난]

[정묘호란]

[청나라의 건국]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소현세자]

[찌질이 임금 인조]

<라봉봉>

 

[인조반정]

광해군은 신하들을 숙청하는 것 이외에도

왕실 인사들까지 의심해

이복형제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조카일가까지 죽였는데

 

바로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은 광해군대에 역모혐의를 받다가

광해군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원종으로 추존)

 

이에 능양군은 광해군에게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고

광해군과 북인독재에 지친 서인 신하들과 결탁해

 

'인조반정'

 

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16대왕에 즉위합니다

 

인조반정 , MBC 월화특별기획 화정 (2015) 華政

 

이전 중종반정때

훈구대신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뜬금없이 왕실인물 중종을 앉힌것과는 반대로

 

인조반정은

능양군 , 인조의 주도로 일어난 것이었고

인조는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함락시킨 것이었으며

 

이전 중종반정대 왕만 물러나게 하고

신하들끼리는 변함없이

그대로 해쳐먹은 것과 달리

 

인조반정은 성공후

인조와 서인세력들은

광해군대 집권세력이었던 북인들을 철저하게 숙청했고

이에 조선에서 북인은 아예 사라집니다

 

숙청되는 북인

 

[논공행상]

왕이 된 능양군 인조는

곧바로 자신을 도운 서인세력들에 대한 논공행상 ,

공로를 조사해서 상을 주는 일을 시작했는데

 

논공행상은 참 중요한 것으로서

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을 분별해서 주어야 하며

또 공이 있는 사람끼리도 더 큰 공이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을때나

상을 받은 사람이 불만이 생길경우

 

혁명 , 반정 등에서 성공했음에도

이후에도 내부 불만이 일어나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 : 조선 건국후 권력에서 배제 된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임금지급 , 논공행상

 

[이괄의 난]

인조반정대 가장 큰 군사적 공을 세운 인물은

'이괄' 이었는데

 

젊은 이괄은 군대를 이끌고 인조반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성격이 급하고 옹졸한 인물이었고

 

인조는 일단 인조반정 1등공신에

인조를 왕으로 추천한 인물이자

서인들의 수장이었던 김류를 앉혔고

 

이괄은 2등공신으로 임명했지만

조선 노른자 꿀요직인 한성판윤(오늘날 서울특별시장) 에 임명하고

군권을 주며 크게 아꼈습니다

 

인조도 이괄이

공이 적어서 2등공신에 임명한 것도 아니고

나름 젊기도 하고 나이든 선배 대신들이 많기에

예의상 낮춰서 2등공신으로 준

일반적 2등이 아닌 아주 강력한 실세 2등공신에 임명해준 것이었는데

 

근데 이괄 이놈이 ㅂㅅ였던게

이괄은 인조반정 성공 공로로

서울시장이라는 꿀자리를 받았음에도

 

자신의 반정성공 대가가 고작 이거냐고 여기고

1달도 안되서 한성판윤에서 사퇴한다 했고

 

인조는 결국 이괄을 타이르다가

결국 이괄에게 평안도 병마절도사직 ,

조선북방 최전방의 최정예 군사 지휘직에 임명합니다

 

인조 시기 조선 최정예군 , 영화 남한산성

 

이는 사실상 인조가 이괄에게

조선 군권 전체를 맡기는 것과 다름없었고

이 역시 인조가 이괄을 배려하고 깊게 신임했던 것이었는데

 

이후에

이괄의 아들 이전이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자

 

한양에서는 이괄의 아들을 조사하기 위해

이괄의 군대에 있었던 이전을 붙잡으려 왔고

 

조선시대는 '연좌제' 가 있어

죄를 지으면

가족들까지 엮여 죽였는데

 

특히나 역모죄의 경우는 연좌제가 더욱 심했기에

아들이 역모죄에 몰리자

 

이에 이괄은

 

<이괄>역적의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느냐

 

라며

한양에서 파견된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괄의 난

 

조선 최정예 국경군을 지휘하고 있던 이괄군은

1만 2천 정예병으로 곧바로 수도 한양을 점령했고

위기에 몰린 인조는 곧바로 공주로 빤스런합니다

 

 

한양을 점령한 이괄은 

왕족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곧 인조의 관군에게 진압당해

도망치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했고

이에 '이괄의 난' 은 종결됩니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조선 명장 정충신

 

그러나 ,

이괄의 난이 조선 사회에 남긴 악영향은 엄청났는데

막 임진왜란이 끝나 나라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광해군은 명나라를 지원하다가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 최정예병 1만 3천명을 증발시켰고

 

이런 상황에서 이괄의 난으로

이괄이 이끌던 북방 최정예병 1만 2천까지 또다시 증발해버리자

아직 복구되지도 못했던 조선 관군 , 최정예 병사들은

사라지고 북방 방어선은 구멍이 뚫리게 됬고

 

팀킬로 뚫려버린 입구

 

북방 안보가 너덜너덜해지자 

이 사실을 알게 된 북방의 후금은

조선 침공을 계획합니다

 

[정묘호란]

후금은 이전 북방 유목민족들이 항상 그래왔듯이

명나라를 침공해 중원을 점령하기 전

후방 안정을 위해 한국을 침략하기로 했고

 

결국 이괄의 난으로 조선이 북방군을 모두 잃어버리고

북방 국경문이 활짝 열려버리자

후금은 후방안정 , 후환제거를 위해 조선을 공격해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이 일어납니다

 

임진년 왜놈(일본놈)들의 난이라는 뜻의

임진왜란처럼

정묘년 호인(오랑캐) 들의 난이라는 뜻의

정묘호란이고

 

옛날 조선에서는 문화력이 떨어지고 후진성이 강했던

일본은 왜인 ,

북방인들은 호인(오랑캐) 이라 비하해 낮춰 불렀습니다

 

화제가 되었던 개그프로 감수성의 호복(오랑캐옷 , 청나라 옷) 차림의 '오랑캐' , 개그콘서트

 

옛날이라면 조선에 굽신거리던 왜인들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준 것에 이어

역시 옛날이라면 조선에 찍소리도 못했던 여진족들이 힘을 키워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조선을 침공해왔는데

 

사실 광해군이 패륜+폭군에 ㅂㅅ이기도 했지만

명과 암이 뚜렷했던 인물이기도 해서

안보는 ㅈㄴ게 잘했던 인물이었고

 

광해군은 이전 새로 일어나는 후금을 경계하며

후금과 적절히 잘 지내며 

북방군을 양성해놨는데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 , 광해군의 중립외교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후

광해군이 키워놓은 군사들을 믿고

후금과의 외교를 끊어버렸고

 

또 명나라 역시 후금을 고립시키기 위해

후금에 경제봉쇄를 시행했던 상황이라

당시 경제봉쇄에 대기근까지 겹쳐 굶어 죽을 위기였던 후금은

결국 명나라를 치기 전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공격하고

식량을 얻어낼 목적으로 

 

'전왕 광해군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

 

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해 정묘호란을 일으킵니다

 

정묘호란 , KBS 역사저널 그날

 

만주의 후금군 3만은 전쟁 시작 10일만에

허약해진 조선 북부방어선을 뚫고 평양성에 도착했고

이에 인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이전 고려의 대몽항쟁때와 같이

북방 유목민들이 해전에 약한 것을 알고

강화도로 피난갔고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조선 왕실의 고향 전주(전주 이씨 조선)로 내려가

분조(위기때 만약을 대비해 왕과 세자로 조정을 반으로 분할) 활동을 시작합니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의 반격도 시행되어

평안북도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가 끊겨버렸고

명나라 역시 후금을 공격하자

위기에 몰린 후금군은

결국 강화도에 피난가있던 인조에게

양국이 교역을 열고

형제국이 되는 조건으로 화약(화목하게 지내자는 약속) 을 맺고 철수합니다

 

정묘호란은 그렇게 끝났지만

이전까지 여진족 오랑캐들을 때리고 달래가던

여진족에 대해 부모의 입장에 있었던 조선은

갑자기 이전까지 무시하던 여진족과 형제가 된다는 굴욕에 빠지게 됬고

일단 그럼에도 왕이 강화도까지 피난가는 큰 전시상황이었고

여진족도 옛날 여진족이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넘기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건국]

그렇게 조선과 후금 양국 관계는 아슬아슬 유지됬는데

 

나라의 힘을 더욱 키우고

1635년 몽골을 정복하며 과거 원나라 황제의 옥새까지

운좋게 획득한 후금의 홍타이지(청태종) 는

 

1636년 

칭제건원 , 황제가 되려 했고

홍타이지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형제의 나라 조선에게

자신의 황제 즉위를 축하해달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청태종 홍타이지

 

후금왕이 황제가 된다고 하자

이전까지 황제는 오직 명나라 황제만이었던 

조선과 인조는 큰 충격과 분노에 빠졌고

 

성균관 유생들은 반발하며

후금 사신들의 목을 베라고 촉구하고

조선 군인들까지 후금 사신들 근처에서

무기를 든 채 돌아다니는 무력시위를 벌입니다

 

푸대접을 받은 후금 사신들

 

정묘호란은 조선-후금 양국이

확실한 서열을 정리하지 못하고

둘다 아슬아슬하게 끝난 것이었기에

 

조선은 나름

'오랑캐놈들' 을 형제로 여기는 은혜를 내려주며 배려해준 입장이었는데

아예 이 오랑캐놈들이 황제가 된다고 설치자 분노한 것이었고

결국 후금 사신단은 급하게 조선을 탈출했고

후금 홍타이지는 결국 황제로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청나라로 바꾸어

청태종이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에게

명나라와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하지 말고

청나라로 확실히 붙을 것을 요구했고

 

결국 양국 관계는 험악해져

결국 양국은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고

 

청태종은

정묘호란 9년후인

1636년 12월 1일 겨울 ,

병자호란을 일으켜

청나라 수도 심양에 군사 12만 대군을 모은 후

압록강을 넘어

조선 수도 한양에 진격하게 했고

 

병자호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12월 13일 평양 , 14일 개성을 지나며

초고속으로 남하합니다

 

인조는 정묘호란때처럼 강화도로 피난가려했지만

가는 길이 끊겨

세자와 신하들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데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서

강성한 청군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캐사기 성이었습니다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청나라군 시점 (헬조선은 외국인에게도 헬조선)

 

이에 청군은 40여일동안 인조가 틀어박혀있는 남한산성을 공략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남한산성을 포위해 물자를 고갈시키는 방법을 시행했고

남한산성 내에서 식량이 떨어져가던 조선군과 인조는

결국 버티지 못하다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군에 항복합니다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이날

삼전도에 도착해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삼궤구고두례)를 행했는데

삼배구고두례는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으로

무릎 1번 꿇을 때마다 3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극진한 오랑캐식 충성 예절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문명국 조선 인조가

오랑캐 청나라 황제 청 태종에게

9번씩이나 대가리를 박아야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시작됬고

결국 궁지에 몰린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군사들이 둘러싸는 가운데서

머리를 박기 시작했고

이를 '삼전도의 굴욕' 이라 부릅니다

 

삼전도의 굴욕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인조 , 사극 화정

 

이에 조선과 청나라의 서열정리는 확실히 되어

조선은 신하국 , 청나라는 황제국이 되는 군신관계가 되었고

조선과 청나라는 이전같이

형제의 관계가 아닌 부모자식 혹은 군신관계로 뒤바뀝니다

 

형제관계와 군신관계의 차이

 

청의 목표는 빈약한 조선이 아닌 오직 꿀땅을 가진 명나라였기에

조선을 완전멸망시키거나 자극하지는 않으려 해

청나라 역시 나름 패배한 인조와 조선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었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갔고

다시 본국에 돌아가려면 막대한 돈을 바쳐야했기에

조선 백성들은 연고도 없는 춥고 거친 북방 만주땅에서 청나라 귀족들의

첩이나 노예로 살다 죽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청나라로 끌려가는 조선 포로들 , 최종병기 활 (2011) War of the Arrows

 

삼전도의 굴욕으로 병자호란은 끝나게 되고

청나라는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청나라로 인질로 잡아 돌아갔고

인조는 인조반정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으로 즉위해

이괄의 난이라는 거대 반란을 겪은 상황속에서

또다시 정묘호란 ,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두들겨 맞고 머리를 박자

간신히 임금노릇을 유지한채

정치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울분을 참으며 조용히 짜져있게 됩니다

 

[소현세자]

이후

1644년(인조 22년) 1월 20일

청나라 수도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던 조선세자 소현세자가

서울에 돌아왔는데

세자가 한양에 들어오자

도성 안의 신하들과 유생 , 노인 , 백성들이 모두 나와 마중했고

길거리를 메워 앞뒤가 완전히 닿았으며

소현세자의 귀국에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소현세자

 

청나라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을 동안

차기 조선국왕이 될 소현세자를 길들이는 한편

청나라의 우수한 모습들을 보여주었고

또 총명했던 소현세자를 아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생활하는 10년동안

청나라화되어 예법도

극도로 실용적이었던 청나라인들이 하는대로만 따라했고

 

오랜 기간동안 거친 유목민들과 생활하다보니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도 용맹한 사내와 노비들 뿐이어서

학문보다는 재물과 이익을 가까이 하고

개와 말을 기르는 것을 일삼았기에

 

청나라에 굴욕적인 기억이 있어

청나라를 극혐했던

인조가 탐탁치 않아했고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다 소현세자는 조선에 귀국한지 고작 1년만인

1645년 4월 26일

창경궁에서 갑자기 사망했고

소현세자의 부인 , 세자빈이었던 강빈도 인조의 미움을 받아

후궁 별당에 감금됬다가

 

1646년 인조가 먹는 수라상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대역사건이 발생하는데

인조는 수라를 만드는 궁녀보다

강빈의 궁녀를 더욱 잡아 조졌고

의금부(사법부) 가 한달동안 조사해도 증거가 나오지 않자

인조는 아예 누명을 씌우기로 작정해

강빈을 직접 언급해가며  강빈은 요즈음 성내는 일이 많았으며

자신이 감금해놓은 강빈이

문안을 안온다는 이유로 독살시도 사건은 모두 강빈이 저지른 일이라며

강빈을 사형시키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했습니다

 

<인조>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

 

아무리 지 꼴리는 대로 운영되던 조선시대 법이었지만

인조 당대 신하들이 보기에도 어이가 없는 강빈 누명이었고

 

강빈을 미워한 인조의 의지로

끝내 36살의 강빈은 

인조 독살음모죄목으로 세자빈 자리에서 폐위되고 궁에서 쫓겨난 후 살해됩니다

 

강빈의 죽음 , 조선 개혁가 부부의 죽음

 

[찌질이 임금 인조]

그렇게 친청파 소현세자 일가는 아버지 인조에게 반역죄로 멸족됬고

이는 진짜 반역죄라기 보다

인조의 정치적 목적의 친청파에 대한 숙청 및 경고였으며

 

소현세자 사후

반청파이자 효자였던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은 아버지 인조의 뜻을 이어

세자가 되어 다음 국왕 효종이 됩니다

 

그렇게 인조는 폭군 광해군을 몰아내고 화려하게 즉위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왕이 되고나서는

광해군만도 못한 암군적 성향을 보이며

 

측근 관리 실패(이괄의 난) , 북방 관리 실패(호란) , 아들 관리 실패(소현세자)

 

라는

트리플 크라운 , 싹쓰리 악업을 남기며 

선조와 더불어 조선의 희대의 찌질이왕 , 암군 호칭을 받는 임금이었고

당대 조선 신하들에게도 'ㅅㅂ 이새끼 뭐지' 싶은 인물이었습니다

 

<라봉봉>인조는 나름 광해군의 폭정에 야심차게 일어난 인물로 보이고

초기에는 여러 신하들은 신임하고 적극적 의지를 보였으나

측근 이괄의 반란에 1차 멘붕 ,

호란에 2차멘붕을 겪고 멘탈이 나간채로 추악한 말년으로 왕위를 유지하다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자신이 극렬히 반대하던 광해군 못지않게

역시 자신이 왕이 되고나서 광해군 못지않은 폭군이 된 인물이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속 암군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이로인해 융통성이 있고 실리적 성향이 강했던 그의 아들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은

인조가 관여한 독살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도 있고

소현세자의 죽음이 정말 아쉽다 이야기 되고 있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급변하기에

만약 소현세자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반응형

'어린이 한국역사 > 2집 Human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종의 북벌  (0) 2020.08.09
즉위 전의 봉림대군 효종  (0) 2020.08.07
개혁군주 혹은 폭군 광해군  (5) 2020.08.02
임진왜란 당시 세자 광해군  (0) 2020.07.27
선조와 임진왜란  (1) 2020.07.26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