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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

[북벌을 다짐한 효종]

[김자점 VS 송시열]

[이완 장군]

[어영청]

[청나라의 의심]

[효종의 개혁]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무너진 북벌의 ]

<라봉봉>

 

[북벌을 다짐한 효종]

그렇게

반청파 , 북벌파(청나라에 복수하자)였던 봉림대군은

친청파 , 북학파(청나라를 배우자) 였던 형 소현세자의 의문에 죽음에 

급하게 세자가 되어

인조 사후 조선 17대왕 효종이 되었고

그는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아버지 인조의 뜻을 받들어

재위기간 내내 북벌(북쪽 지역을 치는 것 , 북정)을 다짐합니다

 

군복을 입은 효종 , 북벌을 꿈꾼 효종 , MBC 월화특별기획 화정 (2015) 華政

 

[김자점 VS 송시열]

당시 조정에는 간신 김자점이

청나라와 결탁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효종은 김자점을 꺼리며

자신의 왕자시절 스승이었던 성리학자 송시열 등을 중용합니다

 

조선 간신이자 역적 김자점

 

서인 노론 영수이자 효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

 

송시열 등은 당시 산림 山林 이라 불렸는데

산림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속에 숨어사는 선비를 뜻하는 말로

효종은 서인 산림세력등을 등용하며

김자점 등 친청세력을 견제하고

반청세력을 적극 등용합니다

 

[이완 장군]

또한 ,

효종은

군사개혁을 실시해

 

이전부터 북방 담당 장수이자 여진족(청나라)에 대해 잘 알았던

이수일의 아들을 이완을 등용해

이완 장군에게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맡기며

북벌을 준비시킵니다

 

(효종의 브레인이 송시열이었다면

효종의 검은 이완)

 

효종 북벌의 총책임자 이완 장군

 

[어영청]

효종은 북벌을 위해 어영청(포방부) 을 정비 강화했는데

주로 포나 조총쓰는 포수를 양성하는 어영청을 21000명까지 증원시킵니다

 

효종대의 조선 조총병

 

효종이 개량한 조선화포들

 

[청나라의 의심]

그러나 병자호란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 효종의 군비증강은

청나라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친청파 간신 김자점은 조선의 상황을 청에 일러바치는 매국행위를 했고

이에 효종은 일본에 대비한다는 핑계를 대며 겨우 위기를 모면합니다

 

당시 효종은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가 조선의 군비증강을 의심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효종>장차 무슨 말로 (청나라에) 변명을 해야 하는가 ?

 

이에 형조판서 이시방은

 

<이시방>저들이 성곽을 수축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힐책한다면

우리 또한 왜국의 정세가 예측할 없다는 것으로 핑계를 대야 하는데 

...

 

이시방

 

결국 어찌어찌 변명을 한 조선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만주에서 나와

막 중국을 점령해 거대한 중국을 통치하느라 정신없을때고

어짜피 조선은 아무리 강성해져도 당시 청을 칠 수준이 아니었기에

조선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효종의 개혁]

그런 청의 무관심 상황에서 효종은 다시금 북벌을 준비해

이완장군과 함께

1652년 어영군 2만 1천 + 예비군까지 합쳐

총 10만대군 규모의 어영청을 만들었고

 

군비 , 세금 확보를 위해

이전 광해군대부터 시행된 대동법 , 쌀로만 세금을 내게하는 법을 확대합니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준 조선 최고의 세금개혁 '대동법'

 

효종대 확대된 대동법

 

그러나 전란의 아픔이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효종이 무리한 군비확장을 실시하자

재정난도 커지게 되었습니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그러나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병자호란으로

수십만의 백성들이 인질로 끌려가고

여인들은 강간당한 입장 상황이어서

사회적 분위기가 청에 대한 복수심 , 분개심이 매우 컸던 상황이었고

 

병자호란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

 

당대 청나라 역시 막 명나라를 밀어내고 신생국가로서 한창 기틀을 다지던 시기였기에

급변하는 국제정세속

효종은 오직 자신의 집권대인 이 시기만이

북벌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때라 여겼고

 

스승이자 이조판서였던 송시열을 불러 독대(사람들을 물리치고 단 둘이만 얘기함) 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효종>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사를 말하자는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지금의 칸(청나라 황제)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

주색(술과 계집)에 깊이 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병사(군인)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천시(하늘의 때)와 인사(사람의 일)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화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하였을 때에 곧장 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명나라)의 의사(의로운 선비)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건대 ,

우리나라의 세폐(세금) 저들이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 두고 있으니 ,

하늘의 뜻은 아마 다시 우리의 물건이 되게 하려는 것인 듯하오.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과단성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것이오

 

이에 송시열은

 

<송시열>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입니다.

그러나 제갈량도 능히 (북벌에) 성공하지 못하고서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조선)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

 

이에 효종은

웃으며 이르기를

 

<효종>그것은 경이 나를 시험하는 말이오.

나는 능력이 충분히 일을 해낼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천리나 인심으로 보아 그만둘 없는데 ,

어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고 하지 않을 있겠소.

뜻이 진실로 굳게 정해지면 정성이 자연 돈독해지고 ,

정성이 돈독해지면 능력 또한 키울 있는 것이오.

때문에 항상 스스로 분발하고 있을 뿐이오.

더구나 하늘의 뜻이 이러하니 

나는 국가가 망하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

나와 경은 뜻이 같고 생각이 일치되어 항상 골육의 형제와 같으니 ,

함께 호응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나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 ,

앞으로 10년이면 나이 50세가 되오.

10 안에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지기(일을 이루려는 기개)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고 ,

그때엔 경이 물러가도 괜찮을 것이오.

 

또한 

효종은 송시열에게 세자(현종)는 매우 총명하고 온순하나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고 자라

자신처럼 군사일을 알지 못하니 

자신의 시대에 북벌을 이루고 나라 안정은 세자대에 이루기를 이야기했고

 

(태종-세종의 관계를 생각)

 

또한 효종은 이런 중대한 시기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며

 

<효종>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결과 ,

이로 인하여 나는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없겠소.

하늘이 나에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상관없이 한번 거사해 계획이니 ,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오.

 

하고 송시열에게

북벌 지원을 부탁합니다

 

[무너진 북벌의 꿈]

그러나 송시열 등 당대 신하들도

국왕 효종의 강력한 의지에 어느정도 맞장구는 쳐주었지만

재정부족 , 현실적으로나 조선-청의 국력차라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효종을 제외하고 신하들은 마땅한 북벌 대응책을 내놓거나 합류하지는 않았고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

침을 맞다가 침구멍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쏟아졌고

 

 

결국 효종은 과다출혈 , 의료사고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1659년 5월 4일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창덕궁에서 요절하게 됩니다

 

효종의 북벌은 단순한 북방공격 , 영토확장이 아닌

 

아버지의 굴욕에 대한 복수 ,

포로로 잡혀간 수십만 조선 백성들을 구하는 것 ,

명나라에 대한 은혜(임진왜란때 명나라의 지원) 를 갚는 것 ,

왕권 강화책 등

 

조선 사대부들과 백성들에 대한 명분적 성향도 강했고

이에 조선 지배층 , 사대부들도 현실적으로 북벌이 어려운 것은 이미 알았음에도

효종의 북벌정책에 대해 반발도 , 찬성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고

효종이 사망하자 북벌 정책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은 고구려 멸망 후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된

한국인들의 만주 , 북방영토 수복의지와도 연관되어

효종의 요절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고

 

효종은 이러한 지극했던 모습들 때문에

조선시대 최고의 가치였던 효도 효자 시호를 받아

효종 孝宗 이 됩니다

 

 

조선 후기 최초의 개혁군주 효종은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북벌정책은 흐지부지해졌지만

그가 북벌을 목적으로 세워둔 개혁정책으로 인해

조선후기는 번영의 길을 맞게 됩니다

 

또 인조대까지가 조선이 왕이 제멋대로 하던

중세적 왕정 성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더라면

효종대부터는 점차 정책과 규율이 중시되는

근대적 왕정시대로 변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라봉봉>효종은 특히 민중들에게 사랑받은 임금이고

당대 신하들에게도 존경받은 임금으로서

임진왜란 , 병자호란이라는 거대한 두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사회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명군 , 개혁군주이고

참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북벌의 꿈은 건강악화로 요절하는 바람에 실패했는데

마치 수면연장을 위해 촛불을 켜고 7일 기도하다가

기도 6일째 되는 날에 갑자기 부하가 촛불을 꺼트리는 바람에

촛불이 꺼져 결국 다시 건강이 악화되 사망해  북벌에 실패한 제갈량처럼

 

효종 역시 아슬아슬하게 북벌을 시행하려 할 시기 사망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고

참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중대한 시기 요절한 명군이라는 점에서

정조처럼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총명한 인물입니다

 

북벌은 당대 현실적으론 무리였지만

그러나 ,

효종은 청에 억울하게 끌려가거나 강간당했던

당대 조선민중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했고

 

조선 중기부터 조선에서 삼국지연의(소설 삼국지)가 유행했기에

효종 역시 이런 소설 등에 영향을 받기도 했던것 같습니다

 

(약소국 촉한의 명분론적 질서 , 제갈량의 북벌)

 

효종을 보니 제갈량과 겹친점도 많고

어린시절 닳고 닳게 보았던

삼국지연의의 명대사가 생각나는군요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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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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