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임금 조선 현종>
[산림]
[가부장적 유교질서]
[예송논쟁]
[현종의 굴욕]
[소중화 사상]
[현종의 실험]
<라봉봉>
[산림]
그렇게 북벌을 꿈꾸던 부왕 효종이 의료사고로 요절하자
세자 이연이 급하게 왕위를 이어
조선 18대왕 현종으로 즉위합니다
현종대에는 정치적으로
산림세력들이 두각되었는데
산림이란
산속에 은거하는 선비를 뜻하는 말로서
지방이나 산속에 숨어살며 학문을 하며
조정에 매일 출근하지 않고 띄엄띄엄 얼굴을 비추지만
막후 실세 , 정치논객 등으로
막후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웰빙 , 워라밸(워크 라이프 밸런스) 선비 같은 개념으로서
조선 후기부터는
성리학이 점차 조선 국가사상으로 완전히 뿌리내리자
선비들은 점차 다양한 계층까지 인정받게 되었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속에
은둔형 선비들인 산림 역시
조정이 아닌 후방에서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 + 제자 양성등을 하며
비세속 + 신비주의 + 고고한 지식인 이미지와 맞물려
하나의 주요 지식인세력 , 정치집단으로 인정받게 됬고
서인 등 기득권 정치세력들 역시 산림세력들을 자신의 세력에 포함시켜
자신들의 정당을 고고하고 청류한 이미지를 만들려 노력합니다
(이런 것들은 역시 퇴계 이황이 원조랄까)
어진 임금이었던 현종대에 이러한 산림의 세력화는 더욱 나타났는데
이전 현종의 부왕 효종에게 큰 신임을 받았던
효종의 스승이자 신하였던 송시열이 산림의 대표 인물이고
송시열 , 송준길 , 윤증 등 산림세력은
평소엔 궐밖에 있다가
주요 문제가 있을경우 궐에 출근해
상소를 올리거나
사대부들의 여론을 움직이거나 했습니다
산림은 요즘 현대식으로 치면
재야 지식인 같은 성격이라 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정치인들이 선거철이 되면
숨어사는 재야문인 , 학자들과 만나 인증샷을 찍거나 하며
자문을 구하는 쇼를 하는 것처럼
비슷한 경향이라 보면 됩니다
[가부장적 유교질서]
또한 현종대인 조선 후기부터는
조선은 성리학 완전체 국가화 되는데
이전 임진왜란 , 병자호란이라는 대전쟁으로
남성들이 대거 죽어 사회 전반에 여초현상이 나타났고
이러한 현실속에
가부장적 유교원리가 강화되며 조선 여성들의 지위와 신분은
점차 억압 , 강화됬고
이런 사회적 현실속에 성리학이 남성우월사상으로 변질되
점차 조선은 남존여비(남자가 귀하고 여자가 천함) , 가부장적 남성주의 국가가 됩니다
조선 전기 성리학은
정도전 , 정몽주 등 신진사대부들이
고려말기 불교국가이자 문란한 국가였던 고려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나온 것이었기에
교조주의(원리원칙)보다는 융통성 , 현실참여적 성향이 강했는데
남녀차별보다는 여성에 대한 인지상정(인간적인 정) , 인간적 존중이 강했던게
조선 초중기 유교사상이었고
조선 후기부터는
임진왜란 , 병자호란이라는 대전쟁으로
남자들이 죽어나가고
무능한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의 권위가 떨어지자
점차 남성과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사상을 변질시키며
여성들을 억압하고
성리학은 점차 현실보다는 교조주의 성향 , 탁상공론적 이념논쟁으로 변질되고
조선 후기부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유교의 잘못된 이미지 , 유교 탈레반 같은 꼰대 성향이 나타납니다
[예송논쟁]
현종대부터 이런 성리학 ㅂㅅ짓이 심화되는데
바로 오늘날에도 역사학계에서 조롱받는 현종대의 '예송논쟁' 이
대표적 사건입니다
예송은 예절 예 禮 , 논쟁 송 訟 자로서
'예절에 대한것으로 논쟁한 사건' 을 뜻하며
효종이 사망할때 대비(왕의 어머니)가 상복을 몇년을 입어야 하냐로
서인과 남인은 피터지게 싸우게 되었고
1차는 서인이 이겼고
2차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역시 대비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냐로
서인과 남인이 피터지게 싸운것인데
2차 예송논쟁은 남인이 승리해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서인이자 산림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이 예송논쟁에서 패배해서 실각할 정도였습니다
무조건적인 조선까들은
예송논쟁같이 장례식에 상복을 몇개월 입어야하는가에 대한 것같은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조선이 멸망했다고 조선 후기 , 예송논쟁을 조롱하지만
예송논쟁은 사실 왕실정통성 국가체제 근본적인 것과도 연관되있어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일가와
첫째형인 세자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살아있음에도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제치고 즉위한
인조의 둘째아들 효종의 경우는
특히나 그런 것들에 대해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잘못 말했다가는 효종의 집권 정통성을 부정하는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이 큰 중대한 관례에 대한 사건이었고
(이전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죽이고 찬탈해 왕이 된 세조를 디스하다
숙청당한 김종직과 사림파들처럼)
현종은 예송논쟁을 이용해
각각 1차때는 서인 , 2차때는 남인의 편을 들어주며
정국을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단 현종은 어진 임금답게
서인과 남인 두 세력이 예송 논쟁으로 격렬하게 싸웠고
신하들이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음에도
양쪽에서 중재를 하며 잘 타협을 시켰고
예송논쟁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예라는것을 무시해서도 안되는게
예는 오늘날 대한민국이나 현대사회에서도 주요 논쟁으로 작용하고 있고
국기에 대한 경례 , 애국가 제창 ,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예우 , 장례식 기간 등
현대에서도 여러 방식에서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
역사를 통해 배우며 과거의 비생산적 논쟁을 반복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현종의 굴욕]
현종대에는 청나라의 간섭도 점차 심화되었는데
이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청나라를 탈출해 본국으로 돌아온 조선인들을 조사하러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었고
이에 현종은 고국으로 도망쳐온 조선인 포로들을
숨겨주기도 , 알리기도 뭐한 상황이 옵니다
이 속에서 현종은 결국
청나라 사신에게 거대한 뇌물을 주며 사건을 덮으려 했고
국왕이 청사신에게 뇌물을 주는 굴욕적 상황속에
송시열 , 송준길 등 많은 신료들이
신하된 자로서의 부끄러움 속에 사직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소중화 사상]
그러나 조선 지배층들은
이전 금나라 , 원나라 오랑캐가 중원(중국을 뜻하는 말)을 차지했음에도
곧 금방 중국 문명인들에게 밀려 다시 북방으로 쫓겨났듯이
청나라 오랑캐 역시
중국을 차지해봐야 얼마 못간다는 생각이 퍼져있었기에
그런 상황속에서도 항상 청나라를 깔보고 있었고
조선 지배층들은 문명 사상인 중화사상(중국 문명 사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소중화 사상' 이 유행합니다
소중화 사상은 작은 중화사상을 뜻하는 말로서
한국인들이 자신을 한민족이라 부르듯이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중화민족이라 불렀고
정통 한족 , 중화민족 국가였던 중국 명나라가 멸망한 뒤
주변국들에서는 이 중화 사상은
오랑캐인 청나라가 아닌 자신들이 중화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 생각했고
이를 작은 중화 , 소중화사상이라 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화사상이라는 말은
선진사상이라는 말과 동급이었기 때문에
당시부터 조선에서 유행한 소중화사상은
중국을 빨아주는 것이 아닌
동서남북(청나라와 일본 , 베트남)으로 오랑캐밖에 없으니
이제 남은 문명국은 우리 조선뿐이다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실제로 명나라 멸망이후
동아시아에서 유교 명맥을 원형대로 유지하는 국가는
사실상 조선 하나뿐이었기에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 , 반발심과 맞물려
열악한 현실속 정신적 자위책이 필요해
이런 소중화사상이 번진 것이었고
과거에는 지리학 , 통계학들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해
서로의 국력이 오늘날처럼 체계적으로 나와있는 시대도 아니어서
서로에 대한 과대평가 , 과소평가도 강했던 시기라
조선후기부터 유행한 소중화사상은
참 문제가 있지만 어쩔수 없는 유행이었습니다
명나라 멸망 이후부터는
소중화사상으로 조선인들은 중2병이 도져서
오랑캐들로 둘러쌓인 세상속
자신들만이 유일한 문명국이라는 자위를 시작했고
하여튼 이로인해 명나라식 유교문화 , 예법 등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나라가
조선-대한민국이기에
오늘날에도 중국은
청나라의 한족 탄압과 현대중국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유교 원형문화가 완전히 소멸되었기에
명나라식 유교 원형문화를 복원하기 위해
한국을 찾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미국이 외계인들의 침공으로
지구에서 삭제됬는데 각지의 미국인들이 미국 전통문화를 복원하려
한국 이태원을 찾는 꼴)
[현종의 실험]
현종대에는 병자호란의 아픔과 청나라의 간섭 뿐만 아닌
경신대기근이라는 거대한 흉년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여러 난세속에 지배층들은 위기를 맞으며
유교적 정신승리 , 가부장적 꼰대 질서를 확산시켰지만
현종은 이러한 난세속에서 현명한 임금답게
노비법 , 호포제(양반도 세금을 내게하는 법) , 대동법 등
조선 후기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것들에 대해
신하들과 여러 주요 논의를 펼쳤으며
이러한 현종대의 실험들은
후대 왕들 대에서 꽃피워집니다
<라봉봉>조선 현종 시대는 온갖 위기로 가득한 시기였지만
현종은 그의 시호 밝을 현자처럼
어린시절부터 학문에 부지런하고 어진 인물로서 싹이 좋은 인물이었고
임금이 되고나서도 여러 명군적 자질을 보이며
위기를 잘 극복해내고 사망한 인물입니다
(고려 현종과 비슷한 인생)
현종은 조선의 온실속 화초임금이라 할 수 있는 인물로서
기본적으로 매우 온화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하며
여러 어진 정치 이외에도
일반적인 조선 국왕과 달리 후궁을 단 한명도 두지 않고
부인이 왕비 명성왕후 김씨 단 1명이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인물이고
이에 아들도 단 한명이었지만
이 아들이 바로 조선 후기 다혈질 명군이자
장희빈 이야기 , 조선 후기 궁궐하렘의 주인공 숙종이 됩니다
(아버지와 정반대 성격..)
고려 현종이나 조선 현종이
비록 대중들에게 잘 이야기되거나 하는 등의 유명한 임금은 아니지만
오히려 유명한 임금들과 달리
내부 분쟁등으로 피바람 부는 모습이 없이
온화한 모습으로 잘 지냈던 시기였기에
고고하고 조용한 명군으로서
이 또한 아름다운 인물들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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