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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세손 조선 현종>

[현종의 시호]

[조선 최초로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

[총명한 세손]

[효종의 세자]

[효종의 죽음]

[송시열]

<라봉봉>

 

[현종의 시호]

조선 후기 최초의 명군 , 개혁군주 효종이 41세라는 젊은나이에 요절해버리자

효종이 주도하던 북벌사업은 막을 내리게되었으나

다행히 효종의 아들 , 세자 역시 훌륭하고 총명한 인물이었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조선 18대왕 현종이 됩니다

 

밝을 , 나타낼 현 顯 자의 현종 칭호는

명군을 의미하며 나타낼 현자는

 

분명하다 , 귀하고 높다라는 뜻도 있어

 

군주의 칭호중 상당히 좋은 칭호로서

강감찬 장군과 함께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인들의 생명을 지킨 

고려 현종과 같고

 

조선 현종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를 수습하고

거대 자연재해 , 재앙속에서 조선 백성의 생명을 지킨 인물입니다

 

조선 후기 명군 현종 , MBC 월화 특별기획 : 마의(2012)

 

[조선 최초로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

현종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고

이전 인조대에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수도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고

이 당시 봉림대군 부부는 청나라 심양에서 현종을 낳았습니다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오른쪽) 와 봉림대군 형제 , MBC 월화특별기획 화정 (2015) 華政

 

청나라의 첫 수도 심양 , 심양고궁

 

[총명한 세손]

현종은 어려서부터 특이했는데

두세살때부터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았고

4살때 효종보다 먼저 조선에 귀국했는데

인조가 손자에게 무엇을 물어볼때마다 마치 어른처럼 대답했으므로

인조가 매우 기특히 여기며 사랑했습니다

 

 

인조는 다른 왕자 , 왕손들과 다른 손자 현종을 보고서는

 

<인조>이 아이는 보통 아이보다 특별히 다르니

내 뒷날의 근심이 없겠다

 

하며 기대했습니다

 

이 시기 효종이 미처 귀국하지 못했기에

세손 현종은 부모를 그리워하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때마다 기도하기를

 

<현종>부모님이 어서 돌아오게 하여

내가 뵐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했습니다

 

 

총명한 아이 현종은 공부도 잘해서

인조가 한번은 현종에게 역사이야기를 하며

제왕들의 어짊과 어질지 못함에 대해 말했는데

현종은 요순(중국 성군 요임금과 순임금)은 지극히 어짉

걸주(중국 폭군 걸임금과 주임금)는 매우 나쁘다 대답했습니다

 

중국 정치 태평성대의 상징 인물인 요임금과 순임금 (유교로 치면 공자와 맹자의 관계)

 

주지육림 , 술로 연못을 만들고 ㅅㅅ파티를 즐긴 중국 정치 폭군 , 악의 상징 주임금

 

이에 인조는 현종에게 묻기를

 

<인조>요순은 어째서 어질고 걸주는 어째서 나쁜가 ?

 

하자 

현종이 대답하기를

 

<현종>요임금은 흙으로 계단 세층을 만들었고

금과 옥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여으며

그의 인자함은 하늘과 같고 

그의 지혜로움은 신과 같았으니 ,

 

어찌 어질지 않습니까 

 

걸주는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창고에 채워 놓는가 하면

궁전과 누대를 화려하게 지었으며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하고

의견을 올리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였으니 ,

 

어찌 나쁘지 않습니까

 

이에 인조는 더욱 기특히 여겼습니다

 

현종의 미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참 미담이 많고 선하고 올바른 어린이였는데

 

하루는 인조가 방물(방납 , 지방 특산물) 을 받다가

표범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 하자

7세의 세손 현종은 인조 곁에 있다 말하기를 (귀염)

 

<현종>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 합니다

 

하자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 보내지 말라 명했습니다 (오구오구)

 

조선민화 '까치와 표범'

 

현종은 부모님 효종이 쓰는 의복과 말과 마차 , 물건들은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공경을 다해 다뤘고

감히 다른데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현종은 때로는 어염집(일반 백성들의 살림집) 에 나가 임시 거처하면서도

부모가 원하는 행동은 감히 하지 않았고

어염집에 거처할때

가까운 이웃 백성중에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어

현종의 시종이 꾸짖어 금하자

현종이 말리기를

 

<현종>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내지 않을 있겠는가.

마땅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된다

 

했습니다

 

한번은 현종이 궁중에서 나오다

떨어진 옷을 입고 얼굴색이 검은

문을 지키는 군졸을 보고 묻기를

 

<현종>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

 

하니

시종이 대답하기를

 

<시종>얼고 굶주려서 그렇습니다

 

했습니다

 

 

이에 현종은 탄식하다 옷을 주도록 명하고

내시로 하여금 남은 밥을 계속 주되 

그가 복무 기간을 마칠때까지 그렇게 하라 했습니다

(ㅈㄴ 착함)

 

현종은 곤궁하고 굶주린 사람을 볼때마다

불쌍히 여기고 반드시 구휼해주었고

어렸을적부터 나타난 그의 효성과 우애 ,

그리고 자애와 밝은 덕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후 인조가 친히 납시어

세자 효종의 아들이자

착하고 총명한 세손 현종을 왕세손으로 정식 책봉했고

 

왕세손 책봉 당시

현종의 자태가 우뚝하고 거동이 조용하고 품위있었으니

신하들이 서로 축하하며 예를 차렸습니다

 

현종은 세손을 공부시키는 세손강서원에서 공부를 했는데

학문에 더욱 부지런했고 학문의 주요 부분까지 정밀하게 잘 외웠기에

강관(가르치는 관리) 가 탄복했습니다

 

공부하는 세손

 

[효종의 세자]

할아버지 인조가 사망하고

아버지 효종이 왕위를 잇자

현종은 세자의 자리에 올랐고

세자 현종의 슬기로운 덕이 나날로 진취했습니다

 

효종은 병자호란때의 치욕을 잊지 않고

청나라에 대해 복수할 것을 생각하며

적극적인 북벌정책을 추진했고

 

군사들을 키우며

자신의 대에 이르러 북진을 계획해 청정벌을 다짐하되

 

깊은 궁중에서 자라

군사일을 잘 알지 못했던

어질고 선한 세자 현종은

자신과 달리 

전쟁이 아닌 백성들을 보호하는 군주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태종-세종과의 관계처럼)

 

하여튼 효종은 아들 현종의 총명함에 마음을 한시름 놓고 있었고

세자 현종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고

일찍이 농부로 하여금 후원(대궐 안에 있는 동산) 에 들어와

밭을 갈게하고는 현종에게 한번 보도록 했습니다

 

밭갈이 , 단원 김홍도

 

세자 현종이 부왕 효종에게 말하기를

 

<현종>소가 사람에게 공이 있습니다 ,

사람이 노력해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게

이와 같은가 봅니다

 

했습니다

 

현종은 기억력도 매우 뛰어나 한번 보고 들은 것마다

잊지 않았고

현종이 맹자를 다 읽고 나자

효종이 시험해 보려고 모두 외우게 했는데

현종은 7편을 다 외우는 동안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효종이 매우 놀라고 기뻐했습니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장성할대까지

독서하는 일이 아니면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고

부모 몸이 편치 않으면 밤낮으로 부축하고 시중을 두었고

물러가 쉬라 명해도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효종의 죽음]

현종의 뛰어난 아버지였던 효종은

과로한 탓에 평소 지병들이 있었고

 

하루는 효종은 머리에 종기가나서

당시 침을 잘놓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던 신가귀를 불렀는데

신가귀는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 했습니다

 

<신가귀>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 고름이 되려고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의관 유후성은

머리는 자칫 목숨이 위험한 혈이라 판단해

왕의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 수 없다했습니다 

 

<유후성>전하 ,

가볍게 침을 맞아서는 위험하옵니다

 

효종은 이전에도 신가귀에게 치료를 받다 효험을 본 경험때문에

결국 효종은 신가귀의 의견을 택해서

머리에 침을 놓았고

효종이 맞은 침구멍에서는 침이 피가 쏟아져 나왔고

이에 효종은

 

<효종>이제 정신이 좀 든다 ,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

 

라 했는데

신가귀는 수전증(손이 떨리는 증상) 이 있어

효종의 혈락을 범해

효종의 머리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져 나왔고

효종의 곤룡포는 새빨같게 물들만큼 피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효종의 죽음

 

이에 효종의 스승이자 신하였던 송시열 등 신하들이 급하게 뛰어왔지만

효종은 과다출혈로 쇼크가 일어나 의료사고로 사망했고

 

(침이 동맥을 뚫어 과다출혈로 사망)

 

어처구니 없는 조선 후기 최초의 명군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어찌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조선 어의(왕의 의사) 들은 왕이 죽을경우

실제로 처벌되는 경우는 없고

형식적으로 잠깐 귀양을 가다 복귀한다거나 했지만

 

신가귀의 경우는 진짜 의료사고로 효종을 죽인 케이스라

현종은 평소 효종이 신가귀를 아낀 점을 이유로

참형(참수형 , 목베기)이 아닌 교수형(목메기)으로 신가귀를 사형시켰습니다

 

유교사회 조선에서 시신보존으로 명예로운 사형이었던 교수형과 불명예 사형이었던 참수형 (서양의 경우는 고통때문에 정반대)

 

[송시열]

효종이 승하하자

현종은 슬퍼하며 곡하는 소리가 애처로우니

뭇 관료들도 차마 쳐다보지 못했고

 

효종의 장례는 효종의 스승이었던

이조판서 송시열 및 좌참찬 송준길이 주관했고

 

조선후기 대학자이자 대정치가였지만 파벌주의자였던 송시열

 

왕위를 이은 현종 역시 송시열 , 송준길 등이

효종대부터 선비라는 이름이 이있어 추앙을 받았고

효종 역시 그 둘을 매우 신임했기에

 

현종 역시 그들을 중시했고

이에 조정의 큰 의논은 대부분 송시열에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성질이 집요하고

당파(파벌) 짓기를 좋아했으며 학식이 없었기에 (조선왕조실록 사관의 송시열 디스)

 

송시열이 현종에게 말한 나라 제도라는 것도

실제로는 국조의례의(조선 예법 서적) 에 나온 제도가 아니었기에

송시열의 논의를 들은 사람은 근심하고 탄식했습니다

 

하여튼 현종은 재위기간 내내동안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며 조선에 간섭하던 시기이자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아픔 , 이후 대기근의 아픔이라는

삼종 난세를 수습해야하는 임무가 부여됩니다

 

<라봉봉>현종 역시 효종과 더불어 명군이었고

의외로 조선은 후기까지도 명군라인이 탄탄하게 이어져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아픔을 극복하고 2차 전성기를 맞게되는데

 

조선은 후기까지도 계속 명군들이 나온것을 보면

조선 멸망은 단순히 무능한 정치인과 임금만이라고도 보기도 어렵고

서양과 교류도 불가한 위치에

조선과 일본 바로 옆에는 청나라라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들어서 있었기에

워낙 폐쇄적인 당대 동아시아 환경속에 기인한 것도 큽니다

 

하여튼 총명한 소현세자의 요절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지만

그의 동생 효종 역시 뛰어난 임금이었고

역시 효종의 요절에도 안타까움이 크지만 

효종의 세자 현종 역시 어릴적부터 올바른 싹이 나온 어질고 총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린시절의 현종에 대한 착한 기록들은

어린이들은 다 착한데

굳이 현종띄우기 기록이라 보기는 어려운게

어린이들도 성향이 뚜렷히 있고

 

양녕대군이나 연산군의 경우 어린시절부터 싹이 좋지 않은 조짐이 보였기에

가히 현종에 대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인조와 효종의 기대도 컸고

현종 역시 세손-세자라는 높은 정통성으로 즉위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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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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