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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전의 봉림대군 효종>

[인조의 뛰어난 두 왕자]

[효심이 깊은 왕자]

[봉림대군의 강화도 방어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소현세자의 죽음]

[세자 봉림대군]

<라봉봉>

 

[인조의 뛰어난 두 왕자]

인조가 사망하자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 이호가 왕위를 이어

조선 17대왕 효종이 됩니다

 

효종 , JTBC 주말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2013)

 

효종의 친형은 바로 총명했지만

청나라와 가까이 지내다 아버지 인조의 미움을 사고

의문의 죽음을 맞은 소현세자였고

소현세자의 죽음은 매우 안타깝다 이야기 되나

다행히 효종은 형 못지않게 똑똑하고 뛰어난 임금이었고

유능한 개혁군주 효종의 집권은

임진왜란 , 병자호란으로 황폐화 된 조선에 큰 복이었습니다

 

(의외로 개같은 아버지에게 두 호랑이 같은 자식이 나온 케이스 , 견부호자)

 

소현세자(오른쪽)와 봉림대군 , MBC 월화 특별기획 : 화정 (2015)

 

[효심이 깊은 왕자]

왕이 되기전 어린시절 효종은

도량과 큰 뜻이 있어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행실이 보통사람들과 달랐고

타고난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채소나 과일같은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먼저 아버지 인조에게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항상 효자라 칭찬하며

사랑과 기대가 특별히 높았습니다

 

 

이후 인조가 인조반정에 성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국왕 되자 

효종은 봉림대군의 봉작을 받아 조선의 왕자가 되었고

 

아직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635년 봉림대군(효종)은

송시열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조선 성리학자 겸 서인수장 겸 효종 스승 송시열

 

송시열은 현재 청나라의 침략(정묘호란)을 당한 조선의 현실이

이전 금나라의 침략을 당한 송나라와 같이 보았는데

송나라 사람들이 숭상하던 주자의 사상 , 성리학이

이 위기를 극복하는 해답이라 여겼습니다

 

송시열은 봉림대군에게 항상 주자를 언급했는데

짜증이 난 봉림대군은

 

<봉림대군>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주자이며 ,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주자이십니까 ?

 

하고 반문했습니다

 

효종의 평생의 스승이었던 송시열

 

[봉림대군의 강화도 방어전]

다음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한산성으로 피난갔고

봉림대군은 왕실 가족들을 거느리고 강화도 피난갑니다

 

남한산성의 인조 역시 곧 강화도로 향하려 했지만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했기에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걷다가

끝내 강화도에 갈 수 없음을 알고

인조는 다시 남한산성에 틀어박혔고

 

강화도의 봉림대군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청나라 3만 수군을 방어했는데

 

조선 봉림대군 VS 청 도르곤의 강화도방어전 , KBS 역사저널 그날

 

조선군은 유목민족인 청나라가 강화 해협을 건너올거라 여기지 않고 방심해있었지만

청수군은 홍이포(서양기술의 최신대포) 를 쏘며 조선군을 위협하다가

태연히 강화도에 상륙했고

 

봉림대군은 기개가 있어서

그럼에도 결사대를 모아 반격을 가했지만 피해만 입고 돌아왔고

그러던 와중 조선 선비가 충의를 지키기 위해

담배불을 화약에 붙여 자폭 , 자결했는데

정작 조선 화약이 모두 불타버려 봉림대군은 싸우고 싶어도 싸우지 못했고

 

(총체적 난국,,)

 

청나라의 도르곤은 조선군이 싸울 수 없음을 알고

강화산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 윽박지르자

결국 봉림대군은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항복합니다

 

 

그렇게 청에게 강화도는 함락됬고

도르곤이 돌아가자 남겨져 고삐가 풀린 청 병사(몽골 용병)들은

강화도를 약탈 , 강간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 병사들에게 강간당하는 조선 백성들

 

남한산성내의 식량도 고갈되가던 와중

조선왕실 최후의 거점 강화도마저 함락되고 왕실 가족이 포로로 잡히자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고 삼전도에 가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박게 되는 '삼전도의 굴욕' 이 있었고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게 되며

조선-청과의 화친이 맺어졌고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삼전도의 굴욕 , JTBC 주말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2013)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왕세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역시 만주의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갔고

두 인조의 왕자는

심양에서 한 집에 지내며 살게 되었고

청나라 고관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청의 북경 천도 전 원래 수도였던 만주의 심양 

 

특히 소현세자는 인질생활동안 축 처져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청나라 고관 , 천주교 선교사 등과 만나며

새로운 지식과 문물에 큰 호기심을 보였고

청나라 고관들과 인맥을 쌓아나가며

 

재물들을 모으거나 

그로 얻은 재물들로 조선인 포로를 구출하는 실리적 모습들을 보였고

 

소현세자

 

반대로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와 달리

인질생활내내 복수심과 청정벌을 다짐합니다

 

인질생활시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차이

 

단 봉림대군 역시 기본 인성과 우애는 좋아서

타국에서 항상 형 소현세자를 지키려 노력했고

 

청나라인들이 금옥과 비단을 소현세자와 인조에게 주었는데

봉림대군은 홀로 받지 않으면서

 

<봉림대군>이런 보물 대신 포로로 잡혀온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신 돌려주기를 바란다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며 허락했습니다

 

일단 둘째 봉림대군은 왕위계승에서 논외였기에

청나라 역시 별다른 간섭은 없었는데

 

첫째 소현세자의 경우는 차기 조선국왕이 확실시되는 세자였기에

청나라는 툭하면 인조에게 

개기거나 ㅈㄹ하면 소현세자를 왕위에 앉힐거라 으름장을 놓았고

 

마치 옛날 임진왜란시기

명나라가 선조에게 

개기거나 ㅈㄹ하면 세자 광해군을 왕위에 앉힐거라 으름장을 놓았던 것처럼

인조 역시 할아버지 선조와 똑같은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소현세자 역시 광해군과 똑같은 처지가 되는데

세자 광해군이 의심하는 아버지 선조 밑에서

온갖 트라우마를 느끼며 조용히 짜져있었던것과 달리 (훗날 정신병으로 발현)

 

소현세자는 청나라 숙소에서

열심히 농장도 만들고 장사도 하며 재물을 모으고

청관료와 교류를 하고 있었고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여야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청문물에 압도된 소현세자

 

인조는 청나라와 조선을 오고가는 조선 상인 , 역관(통역관 , 외교관) 을 통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둘다 어떻게 지내는지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자연히 마음이 청에 우호적인 소현세자가 아닌

청을 극혐하는 봉림대군에게 기울게 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귀국했는데

인조는 9년만에 귀국해 온 아들을

아주 싸늘하고 냉정하게 맞이해주었고

어떠한 위로의 말도 , 축하 잔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귀국한지 몇달도 안되서 소현세자가

4월에 갑자기 34세의 나이로 의문사해버리자

봉림대군 역시 5월에 급하게 조선에 들어왔고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세손 ,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합니다

 

소현세자 역시 3남 3녀를 둔 인물이었는데

인조가 갑자기 적통 세손이 아닌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하자

 

신하들도 놀래 반대했고

이에 인조는 날뛰며 온갖 욕을 퍼붓다가

대신들의 반대도 모두 무시하고

너무 어린 원손이 아닌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나이가 어느정도 있다는 이유로

기어이 세자로 만듭니다

 

[세자 봉림대군]

당시 봉림대군 역시 놀라서

상소를 올리며

자신을 왕세자로 임명하는 것을 거두어달라 요청합니다

 

 

<봉림대군>삼가 생각하건대 ,

신은 어리석고 불초하여 하나 쳐줄 만한 것도 없는 위인이

집에 있으면서 봉록만 먹는지라 ,

항상 과실이 위로 성명(임금의 지혜) 걱정을 끼치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게 천만 뜻밖으로 갑자기

신을 세자의 자리에 올리시는 전교를 내리시니 ,

신은 가슴을 치도록 망극하여 몸둘 곳이 없어서 밤낮을 쉬지 않고 놀라 부르짖어 울다가 ,

이렇게 궁박한 정황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으므로 ,

부득이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말씀을 드립니다

...

 

이에 인조는

 

<인조>상소를 살펴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다.

너는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국량이 좁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특별히

 

'맏형이 죽으면 다음 아우가 계통을 잇는다. (兄亡弟及 형망제급)'

 

예를 썼으니 ,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부모와 형제에 대한 우애)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마치 너의 자식처럼 보살피거라.

 

라고 말하고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에 임명했고

봉림대군에게 소현세자의 자식들을 보살피라 명했지만

인조는 얼마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을 살해하고 손자들을 제주도로 유배보냅니다

 

(인조도 선조와 더불어 괜히 조선 암군이 아닙니다)

 

하여튼 그렇게

1645년 9월 27일 봉림대군은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창덕궁에서 승하하자

세자 봉림대군은 왕위를 이어 조선 17대왕 효종이 됩니다

 

당시 인조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은 직접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였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고 (시호가 괜히 효종이 아님)

 

인조가 승하하자 효종은 맨 땅바닥에서 거처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물이나 장도 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형 소현세자와 달리

그닥 청나라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효종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적극적인 청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고

북벌을 꿈꿨던 조선 후기 개혁군주 효종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군복을 입은 효종 , 북벌을 꿈꾼 효종 , MBC 월화특별기획 화정 (2015) 華政

 

<라봉봉>일단 소현세자 못지않게 봉림대군 효종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실리적 현실주의자 소현세자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청나라에 굴욕적인 기억이 강했던 인조에게 소현세자의 친청행동은 눈밖에 크게 난 것이었고

 

인조는 이후부터 소현세자에게 냉대하고

반대로 청을 미워하는 봉림대군을 이뻐하게 됩니다

 

봉림대군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조선은 강성한 청을 이길 수 없음을

인질생활동안 직접 눈으로 보고 느꼈을 것이지만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시절 자신이 강화도에서의 항복을 한 것때문에

병자호란이 청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조선 백성들이 대거 청나라의 노예가 대고

아버지가 청태종에게 머리를 9번 조아리는 수치를 겪었기에

인질 생활 뿐만 아닌 평생동안의 어떤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감히 형 소현세자처럼

청에 대해 우호적인 표현을 할 수도 없고

하면 안되는 처지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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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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