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12.12 사태>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전두환 보안사령관]
[김재규 VS 차지철]
[부마항쟁]
[10.26 사건]
[김재규 체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VS 정승화]
[12.12 사태]
[미국의 입장]
[서울의 봄]
<라봉봉>
[중앙정보부]
그렇게 전두환 소장은
1978년에는 북한 땅굴을 발견해
5.16 민족상을 수상했고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비호아래
막힘없이 승진가도를 쭉쭉 달려왔습니다
전통적으로 최고위직이라 함은
역시 총리같은 2인자나 인사를 다루는 인사과겠지만
독재정권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
진짜 최고위직들이 있었는데
바로 사람의 비밀을 다루는 직책으로서
사람의 정보 , 비밀을 다룬다는것은
엄청난 것이기에
비합법적으로 은밀하게 정치가 운영되는
독재정권내에서는 권력이 집중될 수 밖에 없는 곳이고
중앙정보부장 , 보안사령관(보안사령부는 훗날 기무사령부) 이
유신정권내의 실질적인 핵심적 2인자직이었고
중앙정보부는 국정원의 원형인 첩보기관으로서
공무원 , 검찰 , 경찰 등 민간인을 감시하는 기관으로서
기소권까지 실질적으로 행사했기에
군사독재시기는 삼권분립이 무시되는 독재정치답게
검찰 , 사법부의 파워는 그저 장식에 불과해
군사독재정권의 딸랑이일 뿐이었고
실권은 중앙정보부 , 중앙정보부장에게서 나왔습니다
[보안사령부]
그러나 ,
결국 중앙정보부(KCIA) 는 미국첩보기관 CIA 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기에
일단 형식적으로는 민간형 , 대북방첩 부서였고
군내 첩보기관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보안사령부였습니다
육군보안사령부는 육군의 방첩부대로서
창설당시부터 1980년대 군사정권시기까지
군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국방부 직할부대임에도 국방장관도 못건드는 최상위부대였고
오직 대통령과 중앙정보부만이 보안사령부를 견제할 수 있는
육군내 최고실세 권력직이었습니다
보안사령부는 결국 군내의 핵심 비밀정보를 다뤘고
군사독재자들의 군 통제기관으로서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되어
막강한 실권을 부여받았는데
막강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군벌집단으로 활동하며
오늘날까지도
가끔씩 국정원이 담당하는 민간인 분야까지 침범하기도 해 문제가 된 집단입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1970년대 말기 ,
유신독재가 막바지로 치달아가던 시기
마침 보안사령관 자리가 공석이었고
어짜피 박정희는 유신을 선포하며
입법부 , 사법부 , 행정부 모든 기관을 다 허수아비로 만들고
중앙정보부 , 보안사령부같은 비밀정보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결국 핵심직인 중앙정보부장 , 보안사령관은
믿을 수 있을만한 핵심인물만 써야했고
결국 박정희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직에 앉힙니다
당시 유신독재 권력 2인자로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계속 다툼하고 있었기에
군내에 남아 박정희에게 충성하고 있던
전두환은 이 둘을 견제할 보안사령관으로 최적임자였고
원래는 보안사령관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서
군요직중 요직이기에
쓰리스타 , 중장들이 보통 했고
전두환같이
투스타 , 사단장이 임명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점차 말년에 위기감이 커지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박정희 대통령에겐 그런건 중요치 않았고
전두환은 결국
박정희 암살 7개월전인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김재규 VS 차지철]
박정희가 암살직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역사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고
당시까지 막 보안사령관이 된 전두환은
유신정권내 2인자였던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눌려서
조용히 짜져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유신정권내 가장 악행이 높았던 중앙정보부의 수장답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유신정권의 2인자였는데
그는 보안사의 민간활동을 금지했고
보안사까지 감시하고 있었고
또한 ,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는
차지철 경호실장을 거쳐야했기에
차지철 역시 방구꽤나 뀌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야심의 정치군인 전두환 역시
이 둘에게 호락호락 당할 인물이 아니었고
군내에서도 가장 빠른 괴랄한 진급속도를 자랑하며
난놈으로 통했던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보안사 직원들 역시
드디어 보안사도 활성화 될 수 있겠다며 기대했습니다
일단 전두환은 한때 자기보다 밑이었고
육사출신도 아니었던 차지철을 이전부터 은근 깔보고 싫어했는데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차지철을 견제할 수 있는 보안사령관의 권한이 무엇인지 조사하며
알고보니 보안사령관도 ㅈㄴ 쎈 직챔임을 깨닫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전두환>취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꽤 많군 (흐믓)
결국 전두환은 보안사내에
비리 인사들을 전부 숙청한 후
중단되었던 민간인에 대한 정보수집을 다시 시작했고
군통신을 장악하며
자체 정보채널을 다시 활성화시킵니다
그러나 1979년 ,
그해는 유독 심상치 않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 해였고
박정희 역시
오랜 집권에 대한 피로감으로
심신이 지쳐있던 해였고
김재규와 차지철은
서로 무시하며 옥신각신 싸워대고 있었습니다
[부마항쟁]
1979년 10월에는
유신독재에 피로감을 느낀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결국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시위현장 , 사태파악을 위해 직접 헬리콥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갑니다
<전두환이 본 시위현장>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먹여주고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체제에 대한 반대 , 물가 조세에 대한 저항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었다
아무리 독재국가여도 권력은 결국 국민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계속해서 국민들을 찍어눌렀던 박정희 정부에 대해
드디어 국민들의 폭발이 시작된 것이었고
부마항쟁은 유신독재 , 박정희 정부의 몰락을 가져올 수도 있을만큼의
국가적 중대사건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부마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고
아무리 전두환 역시 유신 독재정권의 최상위 적폐였음에도
부마사태는 뭔가 엄청나게 잘못돌아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었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역시 전두환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두환>내가 이번에 부산에서 느낀 것이 많아
나라가 이래서는 안돼
시국 수습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봐
[10.26 사건]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50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부인 이순자와 함께
연희동 집을 나서서 승용차 트렁크에 사과 두박스를 싣고
보안사 직원들에게 갖다주려 향했는데
오늘따라 전두환 사령관의 표정이 너무 침통해있었고
전두환 차가 육군본부 앞을 지날때
전두환은 갑자기 부관 손삼수 중위에게 불쑥 말했습니다
<전두환>손중위 , 오늘 권총 차고 왔나 ?
이에 손삼수 중위는
<손삼수>네 , 차고 왔습니다
했는데
평소같으면 한번도 권총차고 왔냐 물어본적이 없는
전두환이었기에
손중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고
갑자기 무전기에서
즉시 사령부로 연락해달라는 암구호가 송신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궁정동에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성이 울리며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재규의 총에 맞고 사망했고
박정희의 죽음 ,
10.26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단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는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상황이었고
전두환은 곧바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두환>지금 사복차림인데 괜찮겠습니까 ?
<노재현>옷차림 신경쓰지 말고
바로 육군본부 벙커로 오라
이에 전두환은 저녁 9시쯤 육본벙커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가
노재현 장관 , 군인사들과 함께 앉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하양형광등 불빛 아래
살벌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앉아있었고
<훗날 전두환>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얼굴에서
섬짓한 살기를 느꼈다
당시까지는 고관들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재규 체포]
다시 보안사로 간 전두환에게는
우국일 참모장에 와서 말했습니다
<우국일>코드 원이 서거하셨고
시신은 지금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있다
그러나 당시 궁정동 만찬에 참여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최규하 국무총리와
정승화 총장 ,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박정희 시해범은 김재규라 말했고
자정직전 전두환은
정승화총장에게 불려가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에 전두환은 육군본부 보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전화를 겁니다
<전두환>자네 김재규 얼굴 아나 ?
<오일랑>네
<전두환>김재규는 네 얼굴 아나 ?
<오일랑>모릅 겁니다
<전두환>지금 헌병복으로 갈아입고 애들 데리고
국방부에 와서 김재규 체포해
결국 오일랑은 김재규에게
<오일랑>부장님 , 타시죠
하며 차안에 밀어넣었고
김재규가 체념한듯 저항하지 않자
뒷자석 왼쪽에 밀착해 앉아
김재규의 권총을 빼았았고
김재규는 27일 새벽 1시 30분에 전두환에게 체포됩니다
결국 전두환은 국방부 보안부대장실과 육본 보안부대장실을 지휘소로 삼아
긴급상황에 대처하기 시작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우국일 참모장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전두환>정보부 , 검찰 , 치안책임자를 아침에 소집하시오
중앙정보부 국장급 이상 간부들을 전원 연행 조사하시오
그리고 포고령을 통해서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정지시키시오
군내에서만 알려져있고
민간인들에게는 베일에 쌓여있던
전두환 소장은 그렇게
10.26 사태 , 박정희 시해범 김재규를 잡기위해 칼을 뽑게 되었고
전두환의 보안사는
유신독재의 권력유지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장악하기 시작하며
전두환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소장에 불과했지만
이전부터 차지철 등을 견제하기 위한
정보기관의 활성화를 시켜놨는데
이로인해 순식간에 김재규를 체포하고
10.26 사태에서 빠릿빠릿하게 행동하며 위기에 대처하자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김재규 수사를 지시하고
전두환을 계엄사 합동수사 본부장으로 임명했고
결국 별 두개의 장군에 불과했던
전두환은 순식간에
군 , 검 , 경의 모든 정보수사기관을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고
당시 대통령 , 중앙정보부장 , 경호실장은 모두 무력화된 상황이었기에
전두환에게는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고
곧바로 분노한 전두환은
충성의 대상인 박정희가 사망하자
법치적 사법처리가 아닌
보스의 죽음에 대한 부하의 징벌과 보복 성격으로서
권력자들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고
1979년 10월 28일
계험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육군소장은
10.26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죽음을 알립니다
<1979년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 전두환의 결론>
주범 김재규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허욕이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이다
전두환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단호한 목소리 , 웃지않는 얼굴 ,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왔고
군내에있던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전두환 VS 정승화]
분노하고 흥분한 전두환은 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찾겠다는 명분으로
상관들 할 것없이 수사망을 좁혀갔고
권력이 집중된 상태의 전두환이 계속 나대자
전두환의 건방진 태도가 불쾌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이참에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뿌리뽑고
전두환을 동해방위사령관으로 쫒아내려 했습니다
오랫동안 청와대 내에서 근무했던 전두환은
김재규 , 차지철과 어울리며
이미 2인자 , 권력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었고
정승화가 자신을 조지려 한다는 소식은
곧장 전두환의 귀로 흘러들어가게 됬고
권부에서 보고 들은 것이 많았던 전두환은
곧바로 군부의 힘을 결집시키는 자신의 사조직
하나회와 특전사 인맥을 집결시켰고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한판 붙으려 합니다
전두환은 명분을 장악하기 위해
즉시 보안사와 하나회 , 특전사 인맥을 동원해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사건에 연루됬다는 찌라시를
군내부에 퍼트렸고
군내 육사 장교들
역시 전두환은 육사 11기지만
육사 11기들은 원래
4년제 정규육사 1기였기에
그전에 야매로 만들어진 육사 1기~10기에 대한 반발감이 많았고
만약 정규육사 1기이자 육사 11기 아이돌이었던
전두환이 정승화에게 숙청된다면
단기육사 1~10기 출신인 정승화와 정승화의 군맥들이
군을 장악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전두환과 육사 11기들 , 정규 4년제 육사(11기 이후부터) 출신들은
곧바로 예편되거나
10년을 기다려야 별을 달 기회가 오는 압박감이 커지게 됬고
정규육사들은 이에 까마득히 먼 단기육사 1~10기 선배가 아닌
정기육사 1기 , 육사 11기의 대표였던
전두환을 적극 지지하게 됩니다
[12.12 사태]
젊은 육사장교들은
정규육사가 시작된 11기의 대표적 존재이자
난놈이었던 전두환을 지지하기 시작하며 결집하며
노땅장교들을 조지려 행동을 개시했고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은
비상계엄임에도 자신들의 부대에서 벗어나
'생일집 잔치'
라는 암호명에 따라
경복궁 내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했고
수도권 지역 무장병력 6천명을 동원해
육군본부 , 국방부 , 수경사 , 특전사를 점거하며
12.12 사태 (12.12 군사반란 , 쿠데타)
를 일으킵니다
전두환이 보낸 80명의 수사본부병력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덮쳤고
이시각 저녁을 먹고 TV 를 보고 있던 정승화 총장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보안사의 두 대령에게 양팔을 붙들립니다
당시 경호실 요원 복장을 한 자가
갑자기 정승화 가슴에 총구를 갖다대고
가자고 했고
정승화 총장은
평소 부하들과 군조직을 너무나 믿었던 인물이었기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자신이 10.26 사태에 연루되서 의심당함을 알고
단순히 체포에 응해 끌려갔는데
차마 부하들의 쿠데타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시각 정승화가 보안사 서빙고 지하실로 연행될때
전두환은 20여명의 경호병을 데리고
대통령 최규하를 찾아가
청승화 체포를 승인해 달라 요구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최규하>국방장관의 허가부터 받아오라
하고 버텼지만
이미 정승화는 체포된 뒤였습니다
(선체포 후보고)
[미국의 입장]
이 상황을 지켜본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미국무장관에게 긴급히 전보를 치며
이 사건을 사실상 쿠데타라 지적합니다
<글라이스틴>우리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겪고 있습니다
민간합법정부(최규하 정부)는 명목상 유지되고 있지만
모든 징후는 군의 중추기관들이 일단은
'야심적인 젊은' 장교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장악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12월 14일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나서
자신의 행동은
쿠데타도 , 군사혁명도 아니고
단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수사때문에
정승화를 체포한 것이며
개인적 야망이 있기 때문은 아니라했습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대사는
속으로는 이미 국가의 모든 권력이 전두환 손에 들어갔기에
그건 완전한 쿠데타였다고 더욱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12.12 사태당시
하눅 최정예부대인 제9사단과 다수의 탱크가 동원되어
서울이 점령됬기에
매우 분노했는데
전두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했던때의 명분인
5.16 교본에 따라서
<전두환>부패를 일소한 후
병영에 복귀하겠다
라고 하며
전두환은
양아버지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의 발언의
토씨 한글자도 다르지 않게 그대로 따라하며
계속해서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고 있었고
일단 미국은 처음엔 민간정부와 민주화 원칙을 말했지만
미국은 극강의 실용주의의 나라답게
안전과 돈을 아끼기 위해
실제론 한국정부내 내부싸움을 지켜보며 이긴 자의 손을 들어주려 했고
일단 이전까지 박정희 군사정권이 안정적으로 미국의 우방으로서 활약해주었기에
미국은 전두환 신군사정권 역시
미국에 이익이 되고
미국말을 잘 들을 경우 한국정부로 인정하려 했습니다
[서울의 봄]
그러나 ,
전두환이 간과한 점은
5.16 군사정변 상황 당시와
12.12 사태 당시의 상황은 극강히 달랐는데
5.16 군사정변때는
시민들이 겨우 이승만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당을 집권시켜놨더니
민주당 역시 똑같이 무능과 부패로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에 박정희가 군인들을 선동하며
한번 쓸어버리고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극강의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포장하며
계속 민중들을 타협시키던 상황이었고
12.12사태는
이미 박정희의 군사혁명 약발도 다 끝나가며
국민들이 유신독재 , 군부정권에 극심히 피로해져있던 상황이었고
이미 박정희시대를 거치며 국가 역시 중진국 수준에는 진입해있었기에
더이상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그 어떤 명분도 없던 상황이었고
5.16 을 나름 환영하기도 했던 국민적 분위기와 달리
민주화를 열망하던 당시 국민들에게
12.12 사태는 정말 싸했습니다
일단 전두환은 겨우 12.12사태로 막 권력을 장악하긴 했는데
명분적으로는 그저 박정희 시해범으로 연루된 정승화를 체포한 것이었기에
국민들과 야당 , 학생 , 재야민주화세력들은
별 생각 없이 박정희 군부독재가 드디어 끝났다 여기며
다음 민주정부를 구상하던 상황이었고
박정희때와 상황이 달라짐을 느낀 전두환은
12.12사태 이후 다음 대책을 강구하려
군내에서 계속 짜져있었는데
야당과 재야세력들은
서울의 봄을 주도하며
박정희 사후
겨울(독재)이 끝나고 봄(민주화) 이 온 것으로 여겼습니다
상관을 체포하며 이미 칼춤을 시작한 전두환은
결국 서울의 봄을 끝내고 다시
자신이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야했고
전두환은 허수아비가 된 최규하 대통령을 조종하며
계속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있었습니다
<라봉봉>5.16 군사정변은 나름 그전 민주당 정부 ,
제 2공화국이 너무 무능해서 개똥싸고있었기에
군부의 쿠데타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는데
12.12 사태는 그런거도 없고
그냥 전두환과 육사 11기 , 하나회들이 진급 , 파벌 밀릴까봐
일어난 것이기도 하고
실상을 자세히 보면 당시
박정희가 생존당시 노골적으로 전두환과 하나회를 밀어주며
이미 선후배관계 , 인사체계가 꼬여있었던 상황이라
한번쯤 터질만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것 인해
김재규를 의사라 하며 한국 자유민주주의가 앞당겨졌다고도 하지만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급사한 것이 아니라
4.19 혁명같은 시민혁명을 맞고
하야하던가 하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시민들에게 권력이 이양됬다면
전두환 역시 나서지 못했을까도 싶고
하여튼 유신정권 당시 대한민국은 군국주의 국가였고
이미 군부가 너무 커져있던 상황이라
전두환 같은 정치군인들이 활동하기 너무 좋은 상황이었고
결국 전두환의 등장으로 인해
민주화는 또다시 후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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