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제5공화국>
[민주정의당]
[제5공화국]
[정치풍토쇄신법]
[대미굴욕외교]
[핵무기 포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
[물가안정]
[3저호황]
[전자산업육성]
[문화대통령 ?]
[3S 정책]
[서울올림픽]
[조선일보]
[땡전뉴스]
[폭풍전야]
<라봉봉>
[민주정의당]
그렇게 광주학살을 벌인뒤 전두환은
간접선거인
체육관선거를 통해 만장일치격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1980년 9월 1일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을 확정짓고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민정당) 을 창당한 후
스스로 총재도 겸하게 됩니다
[제5공화국]
곧 전두환은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또다시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를 했는데
단독출마해 100퍼센트 득표를 받은
11대 대선과는 달리
12대 대선에서는 국민들에게 눈가리기 아웅식으로
괴뢰야당을 대충 만들어 대충 90.23% 득표율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12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출범합니다
(은근 헷갈리는 부분인데
전두환은 잠깐 11대 대통령 하고
곧바로 5공헌법개정해서
곧바로 다시 12대 대통령 취임함)
쿠데타 , 광주학살 , 유혈사태로
국민들은 당시 전두환의 폭압정치의 공포에 숨죽여 있었고
괴뢰선거인 체육관 선거를 통해
11 , 12대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선배 박정희의 유신독재의 뒤를 이어
무소불위의 5공독재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전두환의 12대 대통령시기를
'제5공화국'
이라 부르고
전두환으로 시작해 전두환으로 끝난 시기이기에
1980년대는 제5공화국 시기 , 5공시기 라 불리고 있습니다
[정치풍토쇄신법]
또다시 3권분립과 헌법을 깔아뭉게던 유신독재를 부활시킨
전두환은
1980년 11월 3일에는
'정치풍토쇄신법'
을 제정해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고
(박정희의 정치활동정화법과 동일)
이미 1980년 8월 13일에는
김영삼이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정계은퇴를 선언 ,
1980년 9월 13일은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 둘 역시 정치풍토쇄신법의
835명의 정치활동금지대상자에 포함되었습니다
[대미굴욕외교]
전두환은 그렇게 국민이 임명한 대통령이 아닌
총과 칼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었고
이는 5.16 군사정변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직선을 치뤄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이 됬던 박정희보다
더 정통성이 떨어진 것이었기에
당시까지도 국민들은 그를 두려워하기만 할 뿐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두환은 한국사에서
가장 정통성이 떨어지는 대통령이었고
결국 이에 외세의 힘을 빌려야했는데
날라리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미국의 공식승인이 절실했고
결국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2월 전두환을 초청해주는데
전두환은 급하게 미국 워싱턴에 날라갔고
이는 국빈방문도 , 공식방문도 아닌
실무방문이었고
워싱턴에서도 아무런 환영행사도 없고
두 정상은 단 10분간만 대화하는 푸대접이었지만
미국의 인정이 절실했던 전두환은
그런거는 신경쓰지 않았고
미국대통령이 만나주는 것만해도 일단 중요한 것이었기에
이 짧은 만남을 위해 굴욕의 전두환은
미국에 크나 큰 이권 , 선물을 주어야 했습니다
이는 박정희시대대부터 시작된
핵개발 , 핵미사일 포기와 폐기 ,
미국무기와 미국쌀구입이었고
전두환은 이 권익들을 전부 주고나서야
미국대통령의 인정을 받는 외교를 해야 했습니다
[핵무기 포기]
단지
1980년대 미국 역시 반공적 성향이 가장 강한
레이건 대통령의 시대였고
미국에게도 한국의 안정이 절실했고
이전 박정희정부대 한미양국이
안보적 마찰을 겪다가
한국이 순순히 핵무기를 포기해 줬기에
점차 전두환 정부를 승인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났고
한국은 비록 굴욕적 외교로 핵무기를 포기한 것이었지만
핵무기 자체가 국제평화와 복잡미묘한 것들과도 엮여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은 핵무기 포기로 인해
국제사회에 평화적 신용과
경제수출허가 등을 얻게 되었습니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
전두환은 이전 박정희가 그랬듯이
국민들의 독재에 대한 불만을 또다시 경제발전으로 돌려야했고
석유파동 , 물가폭등 등 혼란의 70년대 말기를 타개하고
다시금 경제를 살려야했고
박정희가 경제성장에 올인한 형태였기에
박정희때는 고물가 , 고금리 , 고임금 시대로서
물가가 특히 또라이같이 오르던 시기였는데
전두환은 이미 극빈국을 탈출하고 중진국 수준에 진입한 한국경제였기에
경제성장보다는 물가안정 , 경제안정에 집중해야했습니다
<전두환>대통령이 되고 보니
나라가 얼마나 어렵게 돼 있던지
경제가 이쪽으로 봐도 저쪽으로 봐도 캄캄했습니다
경제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 맡은게
후회막급이었습니다
전두환은 평생 군대안에만 있었고
실제로도 평생 공부와는 담쌓은 인물이었기에
ㄹㅇ 경제를 잘 몰랐는데
비록 불법이었지만
전두환도 괜히 대통령까지 올라간 인물은 아닌것처럼
지식은 없었지만 지혜는 있었던 인물이었고
전두환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복잡한 경제정책들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로 결정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국보위 상임위원장시절부터
미국 스탠퍼드대학 경제학 박사출신의 김재익을
연희동 자택에 불러
매일아침 2시간씩 개인 경제과외를 받게되었고
김재익은 이 독재자와 책상에 마주앉아
하나하나 매우 쉽고 명쾌하게 경제에 대해 전두환에게 설명해 주었고
전두환은 이에 감복해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해
경제정책을 맡기게 됩니다
김재익은 전두환에게
<김재익>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전두환>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당신이 대통령이야 !
결국 김재익은 유능한 경제관료로서
전두환의 신임을 받고
1980년대 위기의 한국경제를 구하는데 성공합니다
[물가안정]
이전부터 학습부진아였던 전두환의 공부스타일은 근성형 공부였고
결국 전두환은 옛날 그랫던것처럼
뒤늦게라도 계속해서 경제공부에 집중해
나름대로의 한국경제의 문제점과 방향성을 정립하게 되었고
전두환이 경제에서 당시 느낀 가장 먼저 시급한 것은
살인적으로 폭등하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인플레이션(물가폭등) 을 막기위해
정부적자 줄이기 , 통화증발 막기 , 임금인상 억제를 시행했고
1980년대는 그렇게 5공경제관료 김재익 주도로 여러 경제개혁이 실시됩니다
전두환은 선거에 앞서
공무원표를 얻기위한 예산증액 , 공무원봉급 인상에
단호하게 반대했고
경제발전 , 안정을 위해
권위주의 독재자였기에 가능한 단순 무식한 방법들이 많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결국 이같은 노력에 의해
다들 잡을 수 없다고 여겼던 인플레이션 , 물가폭등이 1982년부터 빠르게 잡혔고
44% 의 인플레이션은
4.7% 까지 뚝떨어졌고
물가가 안정되자 국민저축률이 높아졌습니다
[3저호황]
또한 1985년대 말기부터
달러가치 하락 ,
원유가격 하락 ,
국제금리 하락
을 뜻하는
3저호황이 들이닥쳤고
한국경제는 이로인해 청신호가 켜져
3저호황의 바람을 타고 수출을 폭발적으로 늘렸고
한국의 대기업들과 한국 자동차는
이 시기부터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전자산업육성]
또 전두환은 공고출신답게
기계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인물로서
과학기술 , 전자산업을 적극 육성시켰고
이에 1980년대부터는
섬유(경공업) , 기계산업(중공업) 보다
고부가 가치 산업이었던
전자산업 수출이 전통적 수출상품이었던
섬유와 기계산업을 앞지르게 되었고
전두환은 '전자산업육성방안' 을 추진하며
반도체 , 컴퓨터 , 전자교환기를 3대 전략산업으로 선정해
꾸준히 육성했고
김대중 시대에 시작되어 IMF 극복을 도와주었던
IT 산업의 기틀을 놓은 것도 전두환이었습니다
[문화대통령 ?]
전두환 역시 경제에 올인한 독재대통령이었지만
계속해서 박정희를 따라하면서도
스스로 무언가 박정희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고
이승만의 반공(안보) ,
박정희의 경제
는 이미 유명하게 국민들 뇌리에 인식되있던 상황이었기에
전두환은 경제로 비집고 들어가긴 이미 늦어버렸고
결국 전두환은 문화분야를 적극 공략합니다
경제대통령 박정희 시기를 지나며
극빈국 수준을 탈피해가고
적어도 보릿고개나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은 사라져 갔으며
국민들 생활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라디오 , 티비 보급 등에
국민들은 문화적 수요가 커져만 갔고
유신말기까지도 통제와 억압으로 일관하던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커져만 같는데
박정희 사후 전두환은 민생안정정책을 시행하는 동시에
문화진흥 및 억압되있던 국민들을 풀어주며
국민들의 독재에 대한 반감을 문화로 돌리려 했고
이에
한국프로야구 창설 , 야간통행금지조치 해제 ,
학원두발 복장 자율화 시행 , 해외여행 자유화 ,
컬러텔레비전 보급
등 여러 진보적인 문화정책을 펼쳤습니다
전두환은 이점에서는 박정희와 확실히 달랐고
평소 규격 , 절제적인 성격이었던 박정희와 달리
운동부 , 유머 , 인맥질 성향이 강했던 전두환은
답답한 상황에서 스트레스 해소에
문화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나름 국민들에게 박정희가 걸어두었던 자물쇠를 풀어주었고
1980년대 한국 민중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3S 정책]
그러나 전두환은 독재자답게
국민들의 민주화 의식과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했고
이에 또한 문화를 악용하게 되는데
국민들이 똑똑해지면 전두환은 곧 좆됬기에
이전 로마제국이 로마 시민들에게 빵과 서커스를 제공했듯이
국민들의 지식욕구를 오락으로 돌리고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우민화 정책' 을 사용하게 되었고
전두환은 대표적 우민화 정책으로
3S 정책을 사용하게 됩니다
3S 정책이란
스포츠(Sport)
성(Sex)
영상(Screen)
의 약자로서
일본 역시 자민당 독점시기동안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 불만들을
이런식으로 해냈고
한국 전두환 정부 역시 일본과 공통적으로
국민들의 불만들을 이런 쾌락제공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박정희가 국민들을 공포와 형벌로 통제하는
전체주의 풍자소설 '1984' 같은 스타일이었다면
전두환은 형벌이 아닌 말초적 자극과 쾌락을 제공해서 무한정한 오락추구 ,
쓸데없는 문화에 몰두하게 하며 바보화 되게 해
국민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사용한
전체주의 풍자소설 '멋진 신세계' 같은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런 클래식 소설이야기하며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미인계처럼
역사에서도 의도적으로 쾌락을 제공하며
사람들을 타락시켜 힘을 약하게 하는 방법들이 존재했고
전두환 정부는 의도적으로 무분별한 말초 , 쾌락적 문화들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며
국민들을 자신과 똑같은 놈으로 만들려하며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를 굴복시키려했습니다
[서울올림픽]
또 전두환은 광주학살로 인해 잃어버린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다했고
결국 서울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시키며
1988년 서울올림픽이라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조선일보]
전두환의 5공시대 , 1980년대 당시는 그렇게
폭력과 야성의 시대였지만
국가적으로는 수출이 흑자로 진입하는 대호황시기였고
대중문화가 발달하는 시기로서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일자리 , 볼거리 , 놀거리가 계속해서 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전두환은 독재자였고
꾸준히 야당인사와 민주화요구 , 학생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언론탄압에도 열심이었는데
전두환은 기자들에게 집도 주고 이자없는 돈도 뿌렸고
언론은 그렇게 정부와 결탁해 관언유착현상이 심했습니다
가장 열심히 전두환 똥꼬를 빨아댔던 신문사가
바로 조선일보였는데
'조선일보' 는 보수 대표신문 , 친일신문 , 1등신문 , 민족정론지라는
다양한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 당시까지만 해도 원래 민족정론지 겸 1등신문은
'동아일보' 였는데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1936년 마라톤 경기에서
한국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신문사로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신문사이자
동아일보는 박정희 유신독재시기에도
자유언론의 기치를 성실히 수행하며
탄압을 받는 신문으로서
1970년대까지 1등신문 , 민족정론지 역활을 수행했습니다
당시까지 조선일보는 2등 신문으로서
2등인데도 1등 동아일보와 격차가 컸는데
1978년이 되서야 조선일보는 신문계 1등이 됬고
1980년 8월 23일 조선일보는
'인간 전두환'
이라는 기사를 작성하며
전두환의 성장과정 , 육사시절 , 군시절 등까지 쓰며
그의 인간미와 리더십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기사를 작성했고
1980년대 5~6월 당시 국내 최대 이슈였던
'광주사태(당시 기준 광주민주화운동 용어)'
에 대해서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난동자라 표현하거나 언급하지 않고
조선일보는 전두환이 오로지 국민을 위해 권력기관 개혁을 추진한다 서술합니다
조선일보는 전두환을 청렴한 지도자로 이미지 메이킹하는데 열중했고
전비어천가를 바치며
독재정권의 나팔수 ,
전두환 친위대 역을 톡톡히 한 조선일보는
결국 전두환 정권에 엄청난 수혜와 혜택을 받으며
권언유착을 즐겼고
1980년부터 1987년 사이에
조선일보는
24.1% 라는 성장을 기록하며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를 압살했고
동아와 중앙일보도 전두환빨이에 참여하긴 했지만
조선일보는 특히 노골적으로 전두환을 빨아대며
1980년대부터 한국 1등신문으로 확고히 됬고
신문이름도 뭔가 동아나 중앙보다
'조선'
이라는 매우 한민족 , 근본스러운 이름때문에
자연히 민족정론지 이미지도 생겨났는데
실제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재찬미 , 보수 편향언론의 대표주자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땡전뉴스]
TV 보급도 활발히 되던 시기였기에
티비뉴스도 역시 전두환 정부의 국영방송 , 어용화 됬는데
9시뉴스 시작하는 시간이 되고
9시 뉴스종이
'땡~' 하고 울리면
'전' 두환 대통령은 하며
전두환을 찬미하는 뉴스가 시작됬기에
이시기 뉴스를
'땡전뉴스'
라 했고
당시 지식인들은 당시 유치하고 저열했던 티비나 언론을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거나 티비를 보지 않기도 했습니다
[폭풍전야]
보통 독재국가가 가난한 것과 달리
호황과 독재 ,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던 시기였기에
1980년대는 특히나 더욱 기괴한 시기였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국민과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숨막히는 시기였기에
민중들의 불만은 막아낼 수 없었고
이에 전두환 정부는 끊임없이
북풍몰이(북한의 도발을 정치에 이용하는것 , 공포심 조장) ,
국풍(제5공화국의 예술관제축제)
등 계속해서 인공의 바람을 만들며
국민들을 위협하고 , 달래고 있었고
그럼에도 진실은 숨길 수 없고 , 가릴 수 없기에
1980년대는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다시금 민주화 요구가 폭발할거 같은 상황이 지속됩니다
<라봉봉>일단 똑같은 독재였어도
3대세습으로 일관된 성격이었던 북한보다는
남한의 독재가 더 신선한 모습이 많았고
전두환 역시 박정희를 답습했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은 정치사상은 같았지만
성격과 성향은 완전히 달랐던 인물이기에
1980년대는 1960~70년대와는 기풍적으로도 많이 달랐던 시기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학교다닐때 교복에 신경써야하는게 너무 비효율적이기에
개인적으로 교복자유화는 지금보다 훨씬 진보적 정책이었다 생각하고
80년대는 독재였지만 또 문화적으로는 선정적이고 자유로운 기풍은 강했던 시기입니다
대한민국사에서는
전두환 시대대부터는 문화 , 예술의 영역을
독재에 사용하며 독재가 고도화되던 시기였고
문화도 발달했지만
동시에 저급한 관제예술이 쏟아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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