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전두환>
[불가사의한 쌍팔년도]
[공중도덕]
[문화발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조치]
[6.10 항쟁]
[6.29 선언]
[전두환의 정치공학]
[전두환 VS 노태우]
[백담사 유배]
[김영삼 VS 전두환]
[전두환과 김대중]
[퇴임 이후 전두환]
[전두환 회고록]
[전두환의 광주방문]
[오늘날의 전두환]
<라봉봉>
[불가사의한 쌍팔년도]
그렇게 전두환의 제5공화국
1980년대는 쌍팔년도라 불리기도 하며
씹창난 폭압정치와 호황과 자유로운 분위기등이 겹친
기괴한 시대였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재임기간에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경제정책의 3대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한 대통령이었다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1마리의 토끼도 제대로 못잡아 매는 판에
그는 3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이같이 경이로운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만큼 국민들에게 인기없는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1980년대는
공중도덕이라는 개념이 막 생겨나던 시기로서
개발도상국의 야성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시기이자
막 선진사회로 진입해가던 과도기적 시기였습니다
이전 박정희나 자민당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전두환 역시 독재반대 ,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경제발전의 성과로 잠재우려 했고
실제로 1980년대는
경제가 급성장하고 물가가 안정되자
서민들도 살기 좋은 시기가 만들어졌고
경제적 안정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국민들은 처음으로 '여유' , '여가' 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공중도덕]
그전까지는 길에서 오줌과 똥을 싸는 것은 물론
줄서기 에티켓도 없었고
가격도 정가제가 아니라 무조건 흥정 , 호구잡기가 성행했고
도둑도 많고 치안도 불안정해서 양아치와 조폭문화가 많았던 시기였는데
점차 1980년대부터
경제기 빌달하고 국민 수준이 높아지자
공중도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신문과 뉴스에서도 항상 공중도덕을 지키자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문화발전]
특히 1980년대 대한민국의 절정을 장식한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가까워지자
세계귀빈들이 서울로 모이는 것을 대비해
적극적으로 한국인들은 새롭게 탈바꿈해야만 했고
관 , 민이 합심해 청결함과 선진적 질서유지를 위해 매우노력했고
1980년대부터 대한민국은
'문화'
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소수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던
여가와 문화생활등은 일반 서민 , 대중들에게도 빠르게 퍼져갔고
전두환은 그럼에도 시대착오적 강권통치 , 폭압정치를 중단하지 않고
문화를 관제식 문화로 이용하며
독재에 이용하려 했지만
결국 문화는 시민문화 , 민주주의 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식화 운동이 전개됩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다가오는 시기
국제적 시선이 이 번영하는 군부독재국가 대한민국에 집중된 상황이었기에
민주화 인사들 역시 계속해서 군부독재정권에 맞서며 세계에 진실을 알리려 했고
1980년대 민주화세력들은 조금만 빈틈이 보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풍전야의 시기였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 일어났는데
전두환 정부는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내놓았고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하며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시작했고
야당과 재야인사 , 학생들은 군사독재인 제5공화국 헌법을 끝내야 한다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했습니다
[4.13 호헌조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에
궁지에 몰린 전두환은 권력유지에 위험을 느끼고 중대발표를 하게 됩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현재의 제5공화국 헌법을 그대로 유지 , 옹호하겠다는
4.13 호헌조치(4.13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에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기 시작했고
1987년 6월 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결국 국민들은 폭발해 수십만 시민이 매일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화 시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6.10 항쟁]
그렇게
1987년 6.10 항쟁이 일어나는데
이승만 독재를 타도한 4.19 혁명과
신군부의 폭압에 항거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승한
1986년 6.10 항쟁이었고
6.10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19일까지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며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났고
200만명 이상이 참여했습니다
미국 역시 원래같으면 독재정권이던 뭐던
미국 국익에 이익이 되는 정권을 지원했지만
이전 광주학살때 침묵하고 전두환의 손을 잡아주었던 미국이었기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이때부터 최초로 반미감정이 증폭되었기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간판노릇을 하는 미국 역시
더이상 전두환과 가까이 할 수 없었고
미국도 당시 전두환의 폭압정치가 너무 심각한 상황이었다 판단해
서울올림픽도 다가오는 상황에서
시위대를 강경진압하기만 하는 전두환 정권을 점차 좋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미국 역시 이번에는 전두환이 아닌
민주화 세력의 편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에게 보낸 친서>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라
전두환이 믿고있던 군부역시 계엄령 , 시위대 무력진압 등에
올림픽 등 상황과 맞물려 회의적 입장이었고
결국 전두환 측근들 역시
전두환에게 대놓고 직선제를 수용하라 권하게 됩니다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습니다
[6.29 선언]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직선제수용선언 ,
6.29 선언(6.29 민주화 선언) 을 발표했고
제5공화국이 무너지고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의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시작해
오늘날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제6공화국이 이어지오고 있습니다
뜨거웠던 1987년 6월 항쟁은 시민들의 승리로 끝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성공하고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부활하며
30여년간 끌어왔던 대한민국의 군부독재는 무너지게 됩니다
[전두환의 정치공학]
일단 전두환은 결국 국민들 요구 , 미국의 요구 , 올림픽 등 여러 상황때문에
국민들에게 GG 를 치게 되었는데
그렇다해서 전두환도 밑바닥에서 대통령이 된 인물답게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고
전두환은 위기대처에 강하고
특전사 및 군 심리전 교육 이수자답게
이미 시작된 민주화 이후의 다음 방안에 대해서 모색합니다
일단 민주화에 무너진 신군부와 전두환은
그럼에도 계속 생명을 유지해가기 위해
직선제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됬고
신군부 출신의 전두환의 2인자 노태우를 앞세워
첫번째 직선제 대통령은 노태우를 당선시키려 했고
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한 정치공학을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민심과 국제적 시선도 전두환과 신군부에게 매우 좋지 않았고
군부출신인 노태우가 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의 야권 단일후보와
1-1 경합을 벌인다면
막 기세등등했던 민주화 세력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출신답게 다시 ㅈㄴ게 짱구를 굴렸는데
당시 민주화세력 , 야권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거물이 있었기에
전두환은 김대중을 사면복권시켜서 야권을 분열시켜
노태우 VS 김영삼 VS 김대중 3자구도로 가면
민주화 진영의 표가 갈리기 때문에
나름 부패한 독재부하세력들 , 공무원 가족들 , 경상도 표를 긁어 모아모아서
노태우가 아슬아슬하게 이길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전두환>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
과연 전두환의 생각대로
김대중은 이전부터 라이벌관계였던 김영삼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결국 야권의 단일화협상은 깨지고
김대중은 독자출마를 하게되는데
김대중 역시 영남출신인 노태우와 김영삼이
영남표를 나눠먹으면 자시가 호남표와 수도권표를 독식하고
반드시 승리한다는 '4자 필승론' 을 내세우며 단독출마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13대 대선은 전두환 생각대로 흘러가게 됬고
노태우 36.6% ,
김영삼 28% ,
김대중 27%
라는 표로
야권이 55% 표로 압승했던 상황임에도
노태우는 ㅆㅎㅌㅊ 득표율로 민주화 후보들을 따돌리고
제6공화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전두환 VS 노태우]
당시 노태우는 완전히 전두환의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던 인물이었기에
사람들은 노태우를
'노두환'
혹은
'가발쓰고 나온 전두환'
이라 부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지역 및 육사시절부터의 평생친구로서
전두환이 믿을 수 있는 인물중 가장 온건 , 유능한 인물이었고
전두환은 앞으로 자신이 상왕 자리에 오르고
이전에도 그래왔듯이
노태우 대통령이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말을 잘 따라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근데 노태우는 나름 부드러운 성향의 인물이었고
강경했던 전두환과 달리 민주화 세력들에게도
어느정도 융통성이 있던 인물이었고
또 막상 대통령이 되고나자 힘이 ㅈㄴ게 강해진걸 느낀 노태우는
맨날 전두환에게 똘마니 노릇만 하며 불평불만도 표출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전두환이랑 상하관계가 바뀌자
점차 전두환의 말을 듣기가 싫어졌고 (ㅋㅋ)
당시 전두환이 워낙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기에
노태우는 민주화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읽고
함부로 거스를 수도 없었고
점차 전두환과 노태우의 수십년 우정은 이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백담사 유배]
전두환 일가도
점차 압박을 받아가자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순자>우리를 외국으로 쫓는 사람이 딴 사람이 아니고
노 대통령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섭더라고요
...
6·29 선언을 자기(노 전 대통령)가 했다고 하고,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건 아닌가 해서 ,
우리 부부는 빨리 백담사로 간 겁니다.
정치라는 게 참으로 무서운 거예요.
그 전에는 '노 대통령이 지켜줄 텐데 왜 자꾸 이렇게 몰려가나' 하고 있었는데 ,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백담사로 간 겁니다.
분노했다기보다 무서웠어요.
노태우를 원격조종하며 상왕노릇을 하고싶었던 전두환은
막상 대통령이 된 노태우가 반기를 들어대고
언론들 역시 노태우 편을 들자
점차 배신감이 커지게 되었고
퇴임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온 노태우 대통령 측근에게는
<전두환>그런식으로 하면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하며 분노를 표출했지만
국회에서도 여소야대 상황이 되고
5공청문회가 진행되자
결국 궁지에 몰린 전두환도 이빨빠진 사자가 되어
몰락한 자신에게 민심이 완전히 등돌렸다는 것과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의 손을 잡고 쓸쓸하게
백담사로 떠나 자의반 타의반의 자숙 ,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전두환 대국민 사과>
국정의 과오는 모두가 최종결정권자이며
감독권자인 바로 이 사람에게
그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조용히 반성의 시간을 갖기 위해
국민 여러분의 의혹과 책망의 시선이 모아졌던
이곳 연희동 집을 떠나고자 합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
그날 권력을 잃고 전두환과 함께 백담사가는 승용차에 올라탄
전직 영부인 이순자는
펑펑 울고 있었고
전두환은 그녀를 달래고 있었습니다
백담사는 강원도 설악산 기슭의 사찰로서
한국 위인 ,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인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머문 절로 유명한데
뜬금없이 전직독재자 전두환이 백담사에 피난오자
백담사 입구에서 젊은 스님들과 학생들은
'민족성지 백담사에 민족반역자 웬 말이냐!!'
하는 현수막을 펼치며 시위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착해진다는 말이 있거나
권력을 잃으면 초연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전두환 역시
오랫동안 분노와 피튀기는 삶을 살았고
싸늘하고 냉정한 민심에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하며
여러 생각이 깊어지게 됩니다
<전두환>첫 해 겨울을 지낸 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 얼굴이 맑아지고 빛이 난다고 했다
권력의 칼자루를 잡던 시절에는
종교인 , 스님들을 탄압했던 전두환이었지만
백담사 스님들은 부처님 품에 안기려는 학살자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서울을 떠나 백담사로 유배갈때 전두환 부인 이순자는 펑펑 울고 있었지만
나름 전두환 부부는 이곳에서 개인적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숙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전두환의 노태우에 대한 배신감은 끝나지 않았고
원래 전두환도 김영삼이나 김대중한테 까이는 것은
원래 야당 , 다른편이니 당연하다생각하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원래 통수는 가장 믿던 사람에게 맞아봐야 가장 빡도는 것이고
노태우는 사실상 초급장교시절부터 장군진급 , 대통령까지
전두환이 다 뒤를 봐주어서 된 것이었기에
특히나 배신감이 컸는데
<89년 전두환 아들 전재국>노씨가문과는 영원히 화해가 있을 수 없다
2년간의 백담사 귀양살이를 마치며
산에 내려오는 순간에도 전두환은
<전두환>노태우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며 울분을 삭히며 산에 내려오게 됩니다
[김영삼 VS 전두환]
백담사 유배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전두환은
다시금 부하들을 모아서 정계진출을 하려 했지만
김영삼시대가 시작되자 전두환은 완전히 좆되버렸고
결국 전두환은 구속되고 재판을 통해
7천억 규모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지며
정치생명이 완전히 끝나버렸고
민주화운동가 출신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전격 구속 ,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란수괴 , 하극상 , 내란모의 , 뇌물 등으로
구속됬고
전두환은 고향 합천으로 쨌지만 결국
분노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다음날 새벽 합천 생가에서 검찰에 체포되어
그대로 안양교도소로 압송됩니다
전두환은 안양교도소에서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격렬한 단식투쟁을 15일넘게 벌이다
심한탈진과 영양실조에 건강악화로 병원에 이송됬고
2달동안 입원치료를 받다가
다시 1996년부터 법원에 이동해 재판을 받게 됩니다
재판과정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오랫만에 다시 재회하게 되었고
나름 같은 신분이 되어
서로 언제 죽을지 모르게 된 위기를 맞자
두 전직 대통령은 다시금 화해아닌 화해를 하게 됩니다
<전두환>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 주나 ?
<노태우>안준다
<전두환>우리도 안 줘
전두환은 최후진술에서
<전두환>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라는 말을 남겼고
결국 전두환은
1심에서 반란수괴 , 부패혐의로 거액의 추징금과 함꼐
사형선고를 받았고
2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 ,
3심 대법원에서는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으로
판결을 확정짓게 됩니다
<대법원에 선고된 전두환의 죄>
반란수괴 , 불법진퇴 ,
상관살해 , 초병살해 ,
내란수괴 ,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등
또한 전두환은 경비와 경호를 제외한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모두 박탈당했고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연금 받는 사람은 '없음')
[전두환과 김대중]
이후 국민대화합을 이유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 당선자와 정치권의 요구에 의해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를 사면복권하게 됬고
추징금은 그대로 유지시킵니다
물론 전두환은 현재도 다 안냈고
이후에도 변명과 회피 , 나름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의 악행 대해서 부풀려진 점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전두환의 원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원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잠깐 왜곡 , 부풀려진 이야기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원죄를 회피하는 모습은 치졸한 모습일 뿐입니다
한때 전두환은 김대중을 죽이려하고
정치적 유배를 시키려 했지만
평화와 화해와 포용을 내세운 김대중은
연이은 대선 낙방에 결국
15대 대선당시 보수계와도 적극 손을 잡기로 결심했고
수감되있던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 ,
당선된 후 전두환을 전 대통령으로서 예우해 주었습니다
<2009년 8월 14일 김대중 병문안 간 전두환>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어요
김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하고 오시면
전직 대통령을 꼭 다 초청해서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고
...
(김 전 대통령) 5년 재임기간동안에 청와대에
거의 10번 가까이 초대 받아서
세상 돌아가는 사항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김 전 대통령에게) 참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
어떤 대통령은 그걸 안 해요.
그런 것도 안하고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전통을 잘 세웠는데
그 다음부터는 없어졌어요
[퇴임 이후 전두환]
그러나 출소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연희동 자택에서 철통경호를 받으며
심심하면 골프를 치러놀러다니며 호화생활을 이어가며
눈길을 받게 되었고
2003년 SBS 와의 인터뷰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습니다
<전두환>광주는… 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
2013년 7월 16일 검찰이
전두환 자택과 시공사 등 전두환과 관련된 기업에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벌였고
이후에도 전두환-이순자 부부는
90이 가까운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국가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또 틈틈히 망언도 하며 국민적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전두환 회고록]
2017년 전두환은 박근혜 탄핵정국 당시
정국이 어수선한 시기
자신의 회로록으로
3권짜리 '전두환 회고록' 을 출판했는데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현대사를 서술했고
5.18 민주화운동 왜곡서술로 판매금지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의 광주방문]
2018년 12월 20일 서울시에서
9억 8천만원의 세금체납을 이유로 전두환의 재산을 압류했고
결국 2019년부터 전두환은 재판출석을 결정했고
퇴임이후 23년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법원에 출석 ,
본인에 기소된 모든 혐의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전두환의 30년만의 광주 방문에
일대는 난리가 났고
전두환을 태운 차량이 광주에 도착하자
바로 고성이 터지고 몸싸움이 일어나는 등
난리가 났고
당시 법원 옆 광주 동산초등학교 학생들은
창가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라고 구호를 외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노령의 전두환 역시 법원에서 나온 후 충격을 받고
사저 귀가길에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전두환]
전두환은 재판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알츠하이머(치매) 투병중임을 주장했지만
2019년 11월 8일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는
전두환이 홍천군 골프장에서 정정하게 골프치는 영상을 공개하며
또다시 화제가 됬고
2019년 12월 12일에는
쿠데타 주역들과 강남구 압구정동의 고급 중식당에서
호화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게되며
12.12 쿠데타 40주년 잔치를 했다는 점에서 큰 논란이 됬습니다
2020년 11월 30일 광주지방법원은
전두환에게
사자명예훼손죄로 징역 8년 ,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재판을 위해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죄를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말조심해 이놈아'
하고 역정을 내며
화제가 되었고
그가 광주로 갈때 탄 차량은 광주시민들에게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맞게 되었습니다
일단 전두환도 현재도 말년이 평안하지 않는데
이전부터도 퇴임후 이런 처우는 자주 당했고
거의 100세에 가까운 초고령인물이라
나름 체념과 분노 혹은 무감각해진 입장으로 보여지나
역사에는 공소시효라는게 존재하지 않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더러운 이야기는 천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이야기 될 뿐입니다
오늘날 역사의 평가로서는
보수계 측에서는
애써 전두환의 치부를 가리며
전두환의 경제안정 등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면이 강하며
그럼에도 전두환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고
한 때는 우리나라를 대표한 사람이었기에
너무나 희화해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면 안되고
그의 공과 과를 평가하고 기본적 예우는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며
진보계에서는
전두환에게 탄압 , 학살당한
민주화 운동가 , 유가족들의 분노와 눈물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전두환 역시 오늘날까지 침묵과 뻔뻔함으로 일관되었기에
전직 국가 원수는 커녕 사람취급을 못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근데 대한민국은 아직도 여야, 진보와 보수계 할 것없이
탐욕스런 모습을 보이고
특정 지역에서만 광적 지지를 받을 뿐이지
전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대국민적으로 사랑을 받는 지도자가 나온 전력이 없으며
민주 , 진보계 정당들 역시
경제기본원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자신들을 전두환보다 지성 , 도덕성에서 앞서있다 오판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고
대놓고 무식하게 부패했던 전두환과 달리
온갖 투기와 편법으로 재산을 증식해서 혀를 내둘렀습니다
양비론이 아니고 팩트만 말해서
보수계정당이나 민주계정당 둘다 반쪽짜리 한계라
누구도 지지하고 싶지도 않기에
그냥 둘다 나라를 반만 살리고
반만 망치고 하는게 반복되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국 현대사 , 특히 대통령들 이야기는 거의다 암울한 결말로 끝나게 되었고
솔직히 전두환 뿐만 아니라 쓰면서도 부끄러운 기록들이 많습니다
범죄자들이 정치인 , 대통령인 나라면
국민들은 법을 지키지 않으려하고
자연히 불행해 질 것입니다
요즘 국민들의 염원은
무슨 잘하는 대통령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퇴임후 감옥 안가는 대통령 바라는 나라가 된 거 같군요
<라봉봉>참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엔 군부독재가 존재했고
현 청년세대들이 태어날 시기나
우리 어머니 , 아버지 세대들이 겪은 것이기에
저 어렸을때까지 야성적 군대식 문화가 많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두환은 현재 생존한 대통령 중 가장 오래된 인물이고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가장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책임지는 입장에 있었던 인물이라
이런 인물들을 보면 참 미묘한 생각들이 많이 들게 되는데
바르고 착하게 살은 존경받는 노인은 아니었기에
생존한 역사의 중요한 증인이다 학살자다 등 여러 생각이 들 뿐입니다
현존 정치인들 이야기가 참 예민한 부분도 많아서
보통은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끝나는 부분도 있는데
그럼에도 박정희 , 전두환 , 김대중 등 정치인들의 관심도는 오늘날에도 엄청나고
저마다 치우친 주장들이 많고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도 많아서
잘못된 주장들에 선동되는 사람들도 많아
괜히 현대사를 회피하기는 어려웠던거 같습니다
현대사는 기계적 중립이 아닌
최대한 중립적이고 인물중심의 서사로 쓰려했고
1980년대는 한국인들에게
참 강렬한 인상을 남긴 시대기도 했으며
그 중심에 있었던 전두환도 참 질기고 억센 인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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