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 노태우>
[논공행상]
[무단정치]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제5공화국]
[2인자 노태우]
[전두환의 시험]
[6.29 선언]
[전두환의 정치공학]
[보통사람]
<라봉봉>
[논공행상]
12.12 쿠데타가 성공한 뒤
전두환은 정권을 잡게 되었고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어
피를 묻히고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 전두환 장군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노태우는 12.12 사태 당시 제9사단장으로서
최전방 지역의 병력을 동원해
12.12 사태를 성공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고
결국 이때부터 노태우는 2인자 지위를 확고히 하고
전두환의 정권장악 , 인수를 돕게 됩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참군인 장태완 장군은
12.12 사태 당시 전두환에 맞서다가 체포된 뒤
제대하게 되었고
수도 서울을 지키는 군 최요직 자리 ,
수경사 자리는 반란에 성공한 노태우가 맡게 되었습니다
또한 12.12 사태 이후 군대는
전두환과 12.12 사태에 참여한 하나회 회원들과
일반 군인 구도로 나뉘어져 있었고
논공행상(공로를 논하여 상과 벼슬을 줌) 격으로 군 요직은
반란에 성공한 하나회 성골들이 독차지하게 됩니다
전두환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이등병으로 강제예편시켰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군선배 이희성을 앉혔는데
이희성은 전두환의 군선배였지만
전두환의 하수인으로서 허수아비 바지사장일 뿐이었고
(역사에서는 무조건 계급만 높다고 더 센게 아니라
결국 실권을 쥔 자가 가장 강했음)
전두환 세상이 오게 되며
전두환의 무단정치가 시작됩니다
[무단정치]
전두환은 이전 군시절부터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권력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었고
꾀와 정세파악 능력이 뛰어났던 전두환은
군선배 박정희가 그러했듯이
호랑이 등에 올라 탄 이상
끝까지 가야함을 알고 있었고
대통령이 될 준비를 시작합니다
<전두환>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타고있던 호랑이 등에서 내리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전두환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대행) 겸
보안사령관을 맡게 되며
민간 , 군정보를 모두 거머쥐었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후
영의정+이조판서까지 겸직한것마냥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게 된 것과 같았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최고부서답게
중앙정보부는 일반적 방첩 정보만을 다루는 민관기관이 아니었고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기구이자
정치 , 외교 , 경제에 관여하는 초법적 만능기구였고
더이상 전두환을 견제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5.17 쿠데타]
그러나 국민들은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직후부터는
민주화가 시작됬다 여기며
그 시기를 '서울의 봄' 이라 불렀고
야권의 대선경쟁도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며 15만 학생 , 시민들이 운집하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 노태우 , 신군부는
이들을 분쇄하기로 결정했고
1980년 5월 17일 정적이었던 김대중 , 김종필 , 김영삼(3김)을
연행 , 연금시키고
수배령을 내려 6백명이 체포되는
5.17 쿠데타(5.17 내란 , 정치쿠데타) 가 일어납니다
1980년 5월 17일 오전
노태우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에서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와 군부의 정치개입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날 자정 전국적 비상계엄확대에 관여했습니다
<노태우>사람의 심리는 새벽 2~3시경 가장 약해진다
이 시각을 기해 서울 주요 대학에
병력을 출동시켰고
예상대로 저항은 거의 없었다
,
서울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치안유지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믿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결국 전두환 , 노태우에 의해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단행되었고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7공수여단이
1980년 5월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 조선대 , 광주교대에 진주하고
정치인과 민주화인사들을 체포 , 국회가 폐쇄되는 대사건이 일어나자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광주학생들은
휴교령이 떨어진 전남대 교문앞으로 모여들었고
교문앞의 무장공수부대원들과 대치합니다
항의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자
장교 하나가 나와 학생 한명을 붙잡아 마구 구타했고
학생들은 이 구타행위를 비난하며
계엄군 물러가라를 외치며 돌을 던지는 등의 시위를 하다가
부상당한 공수부대원들이 분개하여 학생들을 향해 돌진하며 해산을 시도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머리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했고
사태가 커지며 점차 공수부대원들에게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폭행당하자
결국 학생들은 광주시내로 향해
시민들에게 이 사태를 알렸고
점차 사태가 커져 계엄군은 거리의 사람 전원체포를 명했고
이에 금남로와 충정로의 남녀노소 시민들이 모조리 구타 , 연행당하고
광주시민 수십명이 부상 ,
시위진압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청년이 사망하자
분노한 광주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무장하며 계엄군의 폭력에 대항하게 됩니다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진압봉과 대검 , 이어서
발포까지 하며 시민들을 학살했고
시민들 역시 자위책으로 무기고에서 소총들을 들고
무장하며 시민항쟁이 일어났지만
시민군은 끝내 광주를 봉쇄하고 최신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막아낼 수 없었고
광주시내는 계엄군에게 완전히 점령된 후
시위진압 이후 광주는 학살의 현장이 되어있었습니다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공식 피해자는 민간인 144명 ,
군인 22명 , 경찰 4명 등 170명 사망자가 발생했다 발표했고
실제로는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그 발표를 믿는 광주시민들은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노태우는
<노태우>광주사태의 진범은 유언비어 ,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들은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하게 된 것
광주학살의 원죄는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학살자 전두환에게 있지만
노태우 역시 후안무치한 똑같은 행보를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일본 외무성문서 1980년 5월 24일>
군부 내에서는 역시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이 세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세 사람의 사고방식은 너무나도 닮아 있어 ,
말하자면 제1선의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
방해되는 자는 힘으로 닥치는 대로 완전히 때려 부숴버린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이미 군내 저항은 진압했던 신군부였고
광주시민들의 저항시도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라는
초법적 기구를 설치해 행정 ,입법 ,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했고
1980년 5월 31일 노태우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의 비상대책위원에 선발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국보위 상임위원직을 겸직했고
전두환의 정권인수작업에 참여합니다
1980년 8월 6일 전두환은 스스로 대장에 진급했고
버티고 버티던 최규하 대통령도
광주학살을 보고 바지사장으로 전락하자
책임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대통령직에서 하야를 결정했고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8월 21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전두환 대장을 국가 원수로 추대키로 결정합니다
[제5공화국]
전두환 대장은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자
다음날 예편하고 노태우를 자신의 후임 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그해 9월 전두환은 유신헌법에 따라
간선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선 ,
제5공화국 헌법을 준비하고
괴뢰(허수아비) 정당들을 만들며
형식적으로는 민주정을 택하고 있음을 보였고
1981년 제5공화국헌법에 따라
간접선거에서 전두환은 90.1%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에 취임 ,
전두환의 제5공화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전두환이 군인에서 예편하고 대통령이 되자
노태우 역시 수경사 ,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 후 예편한 뒤
1981년 7월 외교와 안보를 담당하는
제2정무장관에 취임하며
군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노태우>어쩔 수 없는 상황에 휘말려 들어
그렇게 됐다
[2인자 노태우]
노태우는 정무 2장관 당시
1988년 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고
이어서 1986년 아시안게임 주관 등
전두환의 가호를 받고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며 요직을 먹으며 레벨업을 시작합니다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은 군인독재자의 전형다운 모습을 보이며
단순무식하게 폭압통치를 시행했고
야당인사는 감금과 고문 , 가택연금을 했고
자기편 , 자신을 찬양하는 언론에는
집과 돈을 주었습니다
노태우 역시 전두환의 길을 따라가며
2인자테크를 밟기 시작하였고
그럼에도 온건한 성향이 있었던 신군부 노태우는
탄압받던 야당 정치인들과 육사선배 , 구군부 선배들에게
선배로서 깍듯하게 예우했고
고문을 치욕으로 여기던 구 군사정권(박정희 정권) 출신의 선배들은
노태우의 깍뜻한 예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박정희의 2인자였던 구군부 성골출신 김종필은
신군부 세력중 유일하게 깍뜻이 대했던 노태우에게
2인자로서 처세하는 방법 , 처세술을 가르쳐주었고
감정을 드러내지 말것 ,
불쾌감을 드러내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고
이승만과 김구의 이야기 ,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노태우에게 설명해 주면서
여러 2인자 스킬등을 알려주었습니다
[전두환의 시험]
전두환은 자신따라 군복을 벗고 정치에 뛰어든 노태우에게
정무장관-체육장관-내무장관-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민정당 대표
를 시키며 경험치를 쌓게하며
후계자로서 레벨업을 계속 시켜주었는데
그럼에도 뭔가가 좆같았던 전두환이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았던 전두환은
유순하지만 명예욕과 질투심이 강한 2인자 노태우를 두려워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노태우는 12.12 사태 이후
권력 2인자로 급부상 한 뒤
곧 노태우 의리테스트가 시작됬는데
노태우는 술자리에서 상석을 권하자
두말없이 상석에 앉아
상관이자 마누라 친오빠였던 김복동 장군은 하석에 앉게 되었고
분노한 김복동 장군은 상을 뒤엎으며
술자리가 난장판이 된 적도 있고
노태우 역시 기분이 안좋아져서
10.26 사태 책임을 물며 김복동을 전역시키려다
말려서 흐지부지하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노태우가 전두환은 틈틈히 뭔가가 거슬리기도 했고
그렇다고 전두환에겐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장세동이나 쓰리허 등 핵심부하들은
딱히 공이나 짬등이 노태우보다 떨어지는 인물들이어서
차기 대통령 , 후계자감은 아니었고
결국 대안도 없고 의리를 중요시하던 전두환이었기에
노태우를 후계자로 해두긴 했지만
그럼에도 노태우가 뭔가 띠꺼웠던 전두환은
노태우가 티비에 자주나오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노태우에게 일부로 인색하게 대해주며 하대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태우는 계속 자신에게 인색하게 대하는
전두환의 속내를 몰라 전전긍긍했는데
어짜피 결국은 이전부터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였기에
전두환과 노태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지만
나름 전두환이 1인자로서 2인자 노태우를 테스트해본 것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노태우는 김종필에게 배운 처세술 등을 사용하며
반격이나 저항을 하지는 않고
전두환의 ㅈㄹ에 마음졸여가며
인내와 자기발전에 노력합니다
근데도 전두환이 계속해서
노태우를 노골적으로 갈군게 있었고
노태우가 처음 국회에 진출할때는
민정당 대표가 노태우의 고향출마 계획을 좌절 시키질 않나
5공 실세는 지역구 사무실로 찾아간 노태우를
1시간 이상 기다리게 해는 모멸감을 주었고
전두환 심복 장세동 역시 노태우를 안기부 사찰하는데
이렇게 7년동안 전두환의 괴롭힘 , 갈굼 , 시험이 시작된 것이었고
7년 내내 노태우는 서러움을 절대로 내색하지 않고
참고 참게 됩니다
이때 너무 시달려서 노태우가 대통령 되자마자
전두환한테 보복한 것이고
그런 인내의 노태우도 결정적으로 폭발한 사건이 있었는데
전두환은 이전 박정희가 김종필(노태우 격) 에게 2인자자리를 안주고
청렴했던 순수 관료출신 최규하에게 2인자직을 준 것을 따라하며
원래 관료+외교관 출신의 노신영을 후계자로 하려했는데
이때 노태우가 강력반발하며 자신이 크게 기여한 것을 강조했는데
전두환은 어디서 말대꾸를 하냐며 자신이 발탁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전두환도 노태우가 답이긴 했지만
당시 국민들의 군사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상당했기에
같은 군부출신이라 노태우를 2인자로 쓰긴 껄끄러운 것이기도 했고
일단 정치심복 3허는 차례로 나가리되고
장세동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바닥이었고
노신영 역시 인지도가 없었기에
결국 대안이 없어서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으로 간택되게 되었고
결국 노태우가 의외로 잘 버텨내자(?)
전두환은
1987년 6월 2일 민정당 간부를 전부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함께하며 노태우를 후계자로 추천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고
참석자 전원이 박수로 동의의 뜻을 표하자
(태우야 7년간 괴롭힌것은 사실 몰래카메라지롱ㅋ)
노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태우>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 끝까지 지도해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6.29 선언]
그러나
1980년대 후기로 갈수록
폭압정치에 숨죽였던 국민들이 다시 일어나고
점차 전두환도 위기에 몰려가고 있었고
1987년 1월 ,
경찰고문에 의해 서울대생 박종철이 사망하자
중산층들이 동요했고
전두환과 노태우 역시 심상치 않음을 생각했고
당시 온 국민들이 전두환을 미워했기에
결국 전두환도 자신이 물러날때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전두환은
그나마 자신에게 크게 반항하지 않고 고분고분했던 노태우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생전에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한
태종(전두환)-세종(노태우) 의 관계마냥
상왕이 되어 계속해서 군림하려는 꾀를 내게 됩니다
4.13 호헌조치(기존 독재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조치) 가 발표되며
기존 독재정권을 계속 유지할거라는 전두환의 발표가 있자
군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올랐고
이런 상황에서 위기에 몰리던 전두환과 민정당은
결국 마지막 발악을하며
1987년 6월 10일 올림픽공원 실내체육관에서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강행하며 노태우를 대통령후보에 지명합니다
노태우가 대통령후보에 지목된 날
그날 ,
1980년 민주화 열기의 최정점인
6.10 항쟁이 일어나게 됬고
그날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일어나며
일반 시민 , 넥타이 부대 등까지 시위에 동참하며
시위는 절정을 이루었고
그날저녁 노태우는
대통령 지명 축하 파티에 참여하려 남산 힐튼호텔을 오가며
온 시내가 최루탄 가스에 뒤덮여 있는 모습을 보고 결심했습니다
<노태우>변화가 있어야겠다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어야겠다
6월 민주항쟁이 겉잡을 수 없게 확대되고
외국인사들도 전두환을 비난하기 시작하자
노태우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아냈고
노태우는
1987년 6월 29일
대통령선거 직선제 개헌 ,
김대중 사면복권 ,
구속자 석방 및 민주화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방안인
'6.29 선언' 을 발표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전두환이 그냥 백기들고 항복한 것이었지만
나름 노태우는 6.29 선언을 자신이 주도하며 민주화에 기여했다 여기고 있습니다
[전두환의 정치공학]
하여튼 ,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결국
노태우를 직선제에서 정정당당하게 당선시켜서
정권을 이어가려 했고
모든 머리를 다 쥐어짜내서 노태우 당선에 총력전을 벌이게 됩니다
전두환 역시 돌머리 이미지와 달리
실제론 꾀가 많은 인물이었고
선거를 이길 수 있는 묘책을 발표하는데
다름아닌 야당 거물 정치인 김대중을 사면복권시켜서
야권을 분열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
당시 군부에 대한 민심은 최악이었기에
야당 후보가 나오면 당선 및
여당(신군부) 심판 및 정권교체는 당연한 일이었고
야당 역시 민주화가 시작되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에 협의했는데
김대중이나 김영삼 역시 이번에 출마하면 당선될 것이라 믿고 있었기에
서로 양보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결국 둘다 자기가 이길 것이라 생각하며
단일화협상은 결렬되고 양김은 따로따로 출마하는데
결국 선거는 전두환의 꾀대로 흘러가게 됬고
13대 대선선거는
노태우VS김영삼VS김대중VS김종필
이라는 4파전 구도로 흘러가는데
당연히 민주화가 됬으니 자신들이 이길것이라 판단한
야권 3김 인사들이 모두 자신만만해하며 독자출마해버리자
가장 힘이 약했던 노태우는
민주화 , 야권후보들의 표가 거대하게 분열되는 것 때문에
ㅆㅎㅌㅊ 득표율로 13대 대선에 당선되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또다시 신군부 , 전두환 부하가 민주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분개했습니다
[보통사람]
게다가 당시는 전두환-노태우가 선거전략을 잘짰는데
아무리 전두환이 ㅂㅅ독재자지만
그 역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나름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며 보수층들 표를 끌어올 수 있었고
노태우 역시 온건한 모습이 강점을 드러내며
아직 경험치가 적어서
위협적이거나 두루뭉술했던 야권인사들보다 안정적인 모습으로 승부를 냈고
노태우는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
'이제는 안정입니다'
라는 슬로건으로
안정을 원하는 애국보수 국민들에게
한번만 더 믿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게 됩니다
김영삼의 '군정종식' ,
김대중의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
이라는 슬로건에 비해
'이제는 안정입니다 , 보통사람'
이라는 단순하고 편안한 슬로건이 아무래도
국민들에게 오늘날까지 인상적 표어로 남게 되었고
노태우는 대선기간 연설에서 항상 사투리 억양으로
<노태우>나 이사람 보통사람 믿어주세요
하고 말했으며
자신이 진정한 서민들을 위한 보통사람이라며
보통사람 책자를 엄청나게 뿌렸습니다
당시 보통사람 , 믿어주세요는 유행어가 되었고
노태우를 조롱하는 말로도 쓰였지만
김대중 , 김영삼 두 민주화 거물이 둘다 같이 나와버리며
야당 표가 극심하게 분열했기에
결국 노태우는 액윽보수층+부패한 군공무원 가족들 표들을 끌고모으며
36.6% 라는 ㅆㅎㅌㅊ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됬고
2위 김영삼이 28% ,
3위 김대중이 27% 였기에
2 , 3위가 합치면 55% 였지만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의 정치공학 , 설계에
민주화 세력들은 완전히 패배하게 됩니다
노태우는 결국 전두환과 달리
첫번째 민주직선제 선거로 당선됬다는 엄청난 정통성을 확보했지만
그럼에도 노태우는 결국 민심이 만든 대통령이 아닌
철저한 정치적 설계로 만들어진 대통령이었기에
국민들이 실제론 인정하지 않았고
노태우 정부부터 오늘날 현재까지 정부를
제6공화국이라 부르지만
노태우 정부는 엄연히 군부와 민주정부의 과도기적 정부였고
이에 노태우는 제 5.5 공화국으로 불린다거나
물태우 , 노두환 , 가발쓴 전두환 등
여러 멸칭으로 비하됬습니다
하여튼 ,
그럼에도 결국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버렸고
오랫동안 울분을 참아온 찐따 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어 힘을 거머쥐자 곧바로
일진 전두환에 대해 복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ㅋㅋㅋ)
<라봉봉>평범하다거나 보통이라는 의미는
중간적 이미지도 있지만
선을 행한다는 것은
까다롭고 세심한 면도 필요하기에
평범함으로 위장된 위선과 폭력도 존재하며
노태우는 자신이 스스로를 표현한 말같이
가히 '보통사람' 이었다 생각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고 생각한대로 되는 것이고
노태우는
평범함에 묻혀 악행에 동참하기도 하고
또한 이리저리 휘둘리다 선행도 동참하기도 하는
평범한 보통사람이기도 했으며
전두환에 비해서는 온건한 성향때문에
같은 군부독재자임에도 나쁜 이미지가 많이 덜한 편입니다
전두환은 스탠스가 확실해서
민주화운동 기여에 대해서는 당연 가만히 있는 편인데
단지 노태우가 계속 민주화 운동 기여에 숟가락 올리려는 행태는
좀 아니다 싶고 아무리 왔다리 갔다리 했어도
결국은 전두환 친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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